미문에서 성전으로 (행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이 시간에는 “미문에서 성전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은 예수 이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세 사람이 서로 바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책에서 읽어본 바다에 관해 설명하면서 바다란 정말 좋은 곳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옆 사람은 피서차 다녀온 바다를 떠올리며 찰삭대는 파도와 시원한 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지막 사람은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들은 진정 바다를 아는 사람들이 아니군요. 책에서 본 바다도, 물놀이를 하던 얕은 바닷가도 바다를 말하기엔 불충분합니다. 저는 얼마 전 해저를 탐험할 기회가 있었는데 해저에 가보니 정말 저 바다 깊은 곳의 물고기와 수초, 생명이 꿈틀거리는 곳, 끝이 없는,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차마 입으로 설명 할 수 없는 곳이 바다였어요."
우리 믿음도 주님을 알아도 과연 얼마나 깊이 아는지, 주님의 이름과 그 주님에 대해서만 아는지, 아니면 그 주님의 선하심을 체험해 보고 아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은혜의 깊은데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절름발이로 태어난 일생 거지가 베드로가 외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서 미문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평생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성전 문밖에 앉아 구걸만 하고 살던 거지가 일순간에 예수 이름을 만나 그의 인생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세상 말로 기차게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은혜 안에 들어가 기뻐 뛰며 찬송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 이름의 기적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1.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과 가까우시기 바랍니다.
1-2절을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했다고 했습니다.
이 거지가 다른 곳도 아닌 성전에까지 나왔다면 아무리 장애자라도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고전12:22-23에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장애인들도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상상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을 받고 큰일을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스티븐 호킹 박사라고 루게릭병을 앓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장애인들도 최소한의 도움 말고는 물리치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이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더욱 아니었지만 왜 놀라운 도움을 받은 걸까요? 중요한 것은 그가 무얼 했든 하나님과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은 제삼시(오전 9시), 제육시(정오), 제구시(오후3시) 등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 역시 때를 맞춰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순간 그는 항상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성전은 성령 충만한 사도들과 성도들이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에 나타난 부흥의 역사도 꼭 동기가 거룩했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김일성의 남침 위협이 어느 때보다 커서 모두들 긴장하며 날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 때문에, 어떤 사람은 결혼 진학 승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철야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받아주시고 은혜를 주셨고 아름다운 믿음의 결실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거룩한 동기를 가졌어도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것보다 동기는 대단하진 않아도 하나님 앞에 나아온 사람이 더 귀합니다.
그래서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울어도 하나님 앞에서 울면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기뻐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면 그것이 효자입니다. 심지어 나쁜 동기로 왔다가 은혜 받고 참 믿음의 사람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동기로든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가까우면 시험들 일 말고 뭐가 있습니까? 나쁜 친구 가까이 하면 물들 일 말고 무엇이 있나요. 복 있는 사람은 죄를 멀리하고 성경을 주야로 읽는다 했습니다. 아무리 박학박식해도 하나님을 멀리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올해는 무엇보다 죄나 세상 가까이 하지 마시고 주일성수 잘하시고 예배 참여 잘하시고 늘 말씀보시고 찬송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저주의 미문에서 은혜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비밀입니다.
2. 어떤 식으로든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4-8절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앉은뱅이는 때 아닌 밤에 홍두께 식으로 갑자기 된 일이라 걷고 뛰고 찬송하지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예상도 계획도 의도한 바도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 할 때 그는 누군가 도움을 주려나 보다 돈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가 걷기를 구한 것도 아니요, 걸을 만한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즉 그가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100% 타의에 의해서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소리 지르며 잡아 일으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한 얼떨결에 움직인 것이지 엄밀히 말하면 순종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겨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의든 타의든 무엇에 떠밀려서 하든지 예수 복음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법도 신앙도 없는 이방 땅에서 얼마나 두렵게 살았습니까? 얼마나 두려웠으면 사라 때문에 죽을까 봐서 사라를 아내라 하지 않고 이복누이라고 했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데리고 온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과 동맹한 연합군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책임감을 느낀 아브라함은 계산도 해보지 않고 얼떨결에 자기 수하의 종들을 이끌고 4개국 대 연합군과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큰 승리를 거둡니다. 싸우니까 싸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나약한 자였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싸워보니 승리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의든 타의든 자원하든 억지로든 무슨 이유로든 예수 이름, 예수 복음에 서서 나가보시라는 말씀입니다.
행4:22을 보면 이 사람의 나이가 40여 세였다고 했습니다. 인생 나이 40여 세란 해볼 만큼 다 해보고 인생이 뭔지 아는 나이입니다. 그만 방황하고 정신 차려 살아야 할 불혹의 나이입니다. 불혹(不惑)이란 이젠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40년간 무엇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40여 년간 스스로 움직여 보지 못한 사람인지라 나는 못한다, 나는 걸을 수 없다, 나는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영원히 거지일 수밖에 없다는 바위덩이보다 더 강한 고정관념이 그를 지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런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소리치며 강하게 잡아 다니니 얼떨결에 거부할 수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1,500년 동안 실패와 실패의 연속 속에서 나는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믿고 그렇게 하다가 은혜 받았다고 하니까 얼떨결에라도 나도 그렇게 믿고 나아와 보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공로 없을지라도 예수 안에서 나를 구원하신 것을 믿고 날마다 감사 찬송하면 그 놀라운 은혜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로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남이 은혜 받은 것에서 도전을 받았든지, 아니면 징계 가운데 살 길을 찾는다든지, 무슨 이유로든 예수 복음을 시인하며 찬송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8-10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그는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자였습니다. 레21:17-21에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거지의 믿음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에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망이라면 나도 저 건강한 사람들처럼 성전 안에 들어갈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신세 한탄은 충분히 자연스런 추측입니다. 그 증거로 그가 낫자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사도들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가며 하나님을 찬송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다면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앉았던 성전 미문에 대해서 역사가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이 문은 고린도식 건축 양식으로 은으로 도금해 입히고 금을 박은 아름다운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울 미(美), 미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미문에 앉은뱅이 거지가 앉았으니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는 성전을 관리하는 레위인들이나 출입하는 자들에게 달갑지 않는 눈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건강해진다면 어서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나음을 받자 성전으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앞서간 많은 성도들처럼 나도 하나님 나라의 은혜 속에서 살 수 없을까? 하는 강렬한 소망을 가진 자만이 은혜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생활로 이끌어주는 강력한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기쁨 가운데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부러워서 견딜 수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주시려고 해도 사모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후6:2에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고, 시107:9에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 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했습니다.
얼떨결의 순종도 좋지만 사모의 한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항구적인 은혜생활의 기초입니다. 구원을 사모하고 진리를 갈망하던 영혼이 예수 복음을 만날 때 그는 위대한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예수 안에서 이렇게 베풀어 놓으시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은 그의 공로도 사도들의 공로도 아니었습니다. 행3:12-13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오직 예수 공로에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구주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영적 변두리에서 방황하며 거지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 시간 진실로 예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 안에서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신 그 은혜를 감격하며 영원히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미문의 거지에서 성전 안의 영광스런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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