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6:19-34/ 깊은 밤에 기도와 찬송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바울과 실라의 빌립보 전도의 일화가 사도행전 十六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점을 친다고 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고쳐 준 일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감사히 생각하는 것보다도 그 여자를 통해서 자기에게 들어오던 수입이 없어지는 것이 분해서 바울과 실라를 관원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이 사람들은 온 성을 요란케 하는 사람들이고 우리 로마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풍속을 전하는 사람들이라』고 송사 했습니다.
그 때에 관원들은 사정을 잘 알아보지도 아니하고 그냥 많은 매를 때리라고 명령하고 매를 친 후에 깊은 감옥에 가두고 발을 착고(着固)에 채워 두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바울과 실라가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바울과 실라는 그 날 밤중쯤 되어서 성경에 있는 대로 기도를 드리고 또 하나님을 찬미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 혼란 가운데서 간수는 결국 회개하고 온 가정이 주를 믿게 되었고 바울과 실라도 석방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이 일화를 생각하면서『깊은 밤에 기도와 찬송』이라는 말씀을 잠깐 묵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바울과 실라가 찬송과 기도를 드린 때는 매우 깊은 밤이었습니다. 또 그들이 처한 환경도 말하자면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고, 착고에 발이 채워져 있고, 억울한 매를 많이 맞았으니 마음도 답답할 것이고 몸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기도와 찬송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루에는 낮도 있고 밤도 있습니다. 인간 생활에도 낮같은 때가 있고 밤 같은 어두운 때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도 때가 있습니다. 무사할 때가 있습니다. 봄 동산과 같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옛 글귀와 같이,『천하는 태평춘(天下太平春)이요 사방은 무일사(四方蕪一事)라.』이런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밤과 같은 때가 또 있습니다. 어두운 때가 옵니다. 위기, 역경, 비상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갈 수밖에 없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환난의 밤, 질병의 밤, 실패의 밤, 슬픔의 밤, 사망의 밤도 올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깊은 밤에 바울과 실라와 같이 기도와 찬송으로 깊고 어두운 밤을 변화시켜 승리의 새 아침이 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신앙의 위대한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는 이런 때에 흔히 낙심합니다. 실망합니다. 타락합니다. 자학하고 자멸하는 이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러한 깊은 밤이 올 대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기 바울과 실라와 같이 우선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도 야고보서 五장 十三절 이하에『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의 밤이 올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병든 자가 있느냐 교회의 장로를 청하여 기도할 것이니라』했습니다.
환난의 밤이 올 때에 특별히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시편 一一六편에서 몇 절을 읽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부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했습니다.
환난의 밤이 올 대에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五十편 十五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환난의 밤에 그를 부르면 건져 주시겠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깊은 밤, 십자가를 내일 아침에 둔 가장 캄캄한 깊은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로 승리하시고 새로운 힘으로 십자가를 대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에 처자와 우 양을 많이 데리고 가나안을 향해서 돌아옵니다. 거의 요단강 가에까지 왔는데 자기 형 에서가 四00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마중 온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이 왔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한 일이 있으니까 겁이 났습니다. 말하자면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경우입니다. 그래서 그날 밤 자기는 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얍복강 여울 옆에서 밤새도록 어떤 분을 만나서 씨름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기도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야곱이 깊은 밤에 기도를 통해서 마지막에는 승리를 하였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변해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승리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깊은 환난의 밤에 기도로써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요나도 적은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가라고 하는 니스웨로는 가지 아니하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 길이 평안할 리가 있습니까? 큰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바다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물고기 배속가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범죄와 실패의 깊은 밤에 요나가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결과는 그런 사람이 변해서 위대한 선지자 요나, 모든 니느웨 사람을 회개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자가 된 것입니다.
유혹과 시험의 밤은 기도만이 승리합니다. 다니엘, 느헤미야 같은 애국자들이 깊은 민족적 밤에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하는 얘기를 우리가 구약 가운데서 읽어봅니다.
국가적 위기를 당할 때에도 먼저 힘쓸 것은 기도입니다. 역경의 밤, 고통의 밤, 슬픔의 밤을 당하는 이가 있습니까?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때야말로 특별히 기도를 힘쓸 때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를 힘쓰면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고 할지라도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는 멀리 있는 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때에는 기도가 변해서 찬송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둘째로 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찬송이었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에도 기도하는 이는 마지막에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기도는 찬송으로 마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되면 자연히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밤이 아무리 캄캄해도 어둡고 괴로워도 찬송은 부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로마서 五장 三절 이하에『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그래서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서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슬픔의 캄캄한 밤에도 기도하는 이는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과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불꽃 가운데서도 타지 아니할 것이요, 강을 건널 때에도 침몰치 않을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이들은 캄캄한 밤에도 주의 음성을 듣고 오히려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미국에서 마치고 폐가 약해져서 미국 서 남방 뉴멕시코주의 알바버치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 있는 장로교 요양원에 가서 한 二년 동안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동안에 한 번은 거기에 와서 오래 치료하던 환자 한 분이 세상을 떠나서 저녁에 추도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저도 참석했는데, 그 추도 예배의 다른 순서는 다 잊어버렸지마는 그 예배 도중에 고인의 젊은 부인이 조가를 직접 부르던 모습을 지금까지도 잊혀지지를 않습니다. 찬송가를 독창하였는데 그 독창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때에 세상 떠난 이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폐가 약해져서 그 요양원에 치료하러 오게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사귀어 그 장래에 가정을 이루기로 서로 약속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이처럼 병으로 공부를 못하게 되니 대학을 졸업한 그 여자는 멀리 버지니아주에서 그 곳까지 와서 병원 원장의 서기 일을 보면서 그 환자의 치료비를 도와주면서 사랑하는 이를 간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불행히도 그 남자의 병이 중해져서 의사는 얼마 살지 못하겠다고 최후의 선언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자는 목사에게 찾아가서, 자기는 일생을 이 남자와 같이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의 병이 악화되어 며칠밖에 살 수 없다고 하니 이 남자의 성이라도 인계 받을 수 있도록 결혼식을 좀 해 달라고 청구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풍속에 의하면 남녀가 결혼하는 경우에는 남자의 성을 여자가 받아서 아무개 부인이라 불리 우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처음에 좀 주저했지마는 부탁이 간절하고 또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므로 결국 허락을 했습니다. 마침내 남자는 침대에 누워 있고 여자는 신부로 단장을 잘 하고 병실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그 여자는 병원에서 계속 일하면서 이 남자를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그 정성에 의해선 지 결혼식을 한 후에 그 남자는 거의 八년을 더 살았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八년을 더 산 것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여자는『내가 지금까지는 한 남성을 위해서 내 온 몸과 마음을 바치며 봉사해 왔지마는 이제는 이 병원에 들어오는 모든 환자를 위해서 내 일생을 바치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또 사실 그대로 했습니다. 그 후에 이 분이 병원을 위해서 어떻게 열심이었던지 그 병원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일을 봅니다. 온 병원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이 부인을 특별히 방문하기 위해서 알바버그에 내렸던 일이 있습니다. 또 제가 지난 三월에도 미국 남방을 여행할 때에 전화로 이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거의 八十이 됐는데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그 부인의 일생을 보면 문자 그대로 깊은 밤에 기도와 찬송과 봉사의 생활을 계속해온 분인 것입니다.
여러분, 밤의 노래 소리는 특별히 아름답게 들리지 않습니까? 가을밤의 기러기 소리가 얼마나 더 아름답게 들립니까? 여름밤의 두견새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립니까? 장량(張良)의 옥통소의 소리는 강동자제(江東子弟) 八천명의 간담을 녹였다고 합니다.
옛날 우리 동양의 사화는 너무나 유명한 얘기지요. 캄캄한 밤에 부르는 찬송은 다른 이들에게 큰 감화를 줍니다. 큰 환난의 밤에도 믿음으로 위로를 받아서 늘 화평과 즐거움과 신앙과 봉사의 생활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큰 감화를 주고 무언의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사실 그런 이들이 많은 줄 압니다. 六․二五 때에 혹은 다른 때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렸습니다. 혹은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신앙으로써 찬송과 기도를 계속하면서 꾸준히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고 여러 가지로 봉사를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밤에 기도와 찬송의 생활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에게 축복이 될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밤에 찬송은 특별히 아름답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깊은 밤중에 억울한 가운데서 기도와 찬송을 불렀더니 그 결과로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긴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마는 이 결과로 간수가 회개하고 온 가족이 회개하였습니다. 아마 다른 죄수들도 회개한 죄수가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때에 부르는 기도와 찬송은 하늘에까지 미칩니다.
깊은 밤중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리는 기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찬송은 하늘에까지 미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헛되지 아니합니다. 사람의 지각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가의 일 절과 같이 훗날이 춥고 어둡고 찬송을 끊지 마세요. 아무리 날이 춥고 어둡다고 하지마는 찬송을 끊어서는 아니 됩니다. 계속해서 감사와 찬송의 생활을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문자 그대로 환난과 고통의 밤을 지나가는 이들도 적지 않은 줄 생각합니다. 기억하십시다. 이럴 때일 수록 기도와 찬송을 끊지 마셔야 합니다. 더 열심히 불러야 합니다. 밤은 늘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내일의 아침이 옵니다. 그렇게 캄캄하던 욥의 밤도 결국은 지나갔습니다.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밤이 왔다고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새벽 전이 제일 어둡다고 합니다. 나의 당하는 밤이 매우 캄캄하면 캄캄할수록 벌서 그 밤이 거의 지나가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도와 찬송으로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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