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대한 오해 막8:27-38, 5:24-26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2,500명을 상대로 "당신은 왜 실패했습니까?"라고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실패의 원인으로 꼽힌 가장 지배적인 대답으로 "결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단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며, 그러한 훈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할 수 있고,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처음부터가 결단이었습니다. '세상의 안일함과 영화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배고프지만 진리를 따라 살 것인가?', '넓은 길을 갈 것인가? 좁은 길을 갈 것인가?', ‘세상의 영광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하는 것이 바로 광야의 40일 금식 기간에 받은 마귀의 시험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역시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고난의 잔을 마실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십자가를 질 것인가 피할 것인가를 결단하는 기도가 겟세마네의 피땀 흘리는 기도였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내리신 결단은 죄로 인하여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버리시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결단이 예수님 한 분만의 결단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과 똑같은 결단을 내리고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십자가에 대한 오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십자가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오해하는 자들의 부류를 크게 둘로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는 십자가에 죽게 됨으로 실패한 자라고 말하는 부류입니다. 특히 이단들이 그러한 주장을 합니다. 교묘히 교리를 만들어 예수님 자리에 교주가 그 자리에 들어가 자기가 구세주라고 속여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신천지 이만희입니다.

 

수도 없이 자기들 입맛대로 교리를 바꾸는 신천지의 교리대로라면 이만희 총회장은 떠나가지 않고 영원히 신천지 인들과 함께 할 다른 보혜사요, 성부, 성자, 성령이 거할 성전 된 유일한 육체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좌정할 육계의 보좌요, 이 역사를 그의 손으로 끝낼 스룹바벨과 같은 자요, 요한계시록 2~3장과 12장에서 보좌에 앉아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이며, 성령이신 예수님의 유일한 신부요, 영생할 수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나눠줘 영생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이긴 자라고 사기를 칩니다. 머지않아 곧 죽게 될 그가 죽기 전에 또 어떻게 교리를 바꾸어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속이게 될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이런 이단자들은 처음부터 속이는 자들이요, 도적이요, 강도들이요, 살인자들이요, 사단의 하수인입니다.

 

성도들이 십자가를 바로 알면 예수님만 높이고, 사랑하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자들이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3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3년간의 노력 끝에 초본을 완성하였습니다.

 

초본을 완성한 후 그림이 어떤지 가까운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그림이 어떤가?" 친구가 그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보더니 "참 좋은 그림이다고 하면서 특히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린 잔을 가리키며 이 잔이 너무 인상적이다. 어떻게 이렇게 사실적일 수가 있느냐"고 감탄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다빈치는 안색이 변하여 붓 통에서 붓을 꺼내더니 그 잔을 싹 지워버렸습니다. 놀란 친구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다빈치가 대답하기를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다른 것이 더 드러나서는 안 되네. 이 그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하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를 담당 하시고,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만이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증 하셨기에 영생의 소망 가운데 주님만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고백하며 주님만 높이며 사는 자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모든 것을 담당하시고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 은총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사람들이 되기 쉽습니다.

 

이기적인 신앙인이 되어 자기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희생이나 섬김을 외면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옛사람이 죽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또 자기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자들은 신앙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외면하거나, 신앙을 버리고 도망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좁은 길로 가는 자가 아니라,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속한 자라기보다 세상에 속하여 살기 쉽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처럼 십자가를 오해하는 자들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2.그리스도인은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복음서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27) 그 때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28)’ 그 때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 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선생님이 그런 일을 당하셔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32) 그 때 예수님은 무어라 하셨습니까? 그래 고맙구나! 역시 너희들은 내 제자답구나. 너희들 밖에 없다고 하셨나요. 주님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훌륭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복 되다 하시고 칭찬 하셨지만,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 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

 

왜 꾸짖었을까요? 십자가가 사람의 입장에서는 싫고 부담 되는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서만 죄를 씻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데 그것을 생각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중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서신서 본문 갈5: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욕심으로 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죽음에 대한 연합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그를 믿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세례 역시 옛사람의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6:3-4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2: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했습니다. 우리는 갈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죄의 종노릇하며 살지 아니하고 단호히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자가 되어 성결한 삶을 살기를 힘씁니다.

 

다음에, 주님과 연합하여 삽니다. 사도 바울은 갈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했습니다. 주님이 비유로 말씀 하신 것처럼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자라고 고백하며 늘 주님 안에서 사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연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삶에만 연합된 것이 아니라 부활에도 함께 연합되었습니다. 부활에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는데,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사람으로 살리심을 받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다가 영광스런 부활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은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며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늘 주님과 연합하여 살다가 성령 안에서 영광스런 부활의 소망 중에 참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그리스도인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복음서 본문 막8:34-35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십자가 은총을 받은 자답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주님 앞에 존귀한 자가 되고, 상급과 면류관 받는 영광스런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대제사장이 보낸 자들에 의해 붙잡혀 가실 때 제자들은 두려운 나머지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베드로가 멀찍이 뒤따라 가다가 추위 때문에 모닥불 곁에 왔다가 엉겁결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부끄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다가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을 때 박해를 당하고, 옥에 갇히며, 죽음을 당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며 주님처럼 담대히 십자가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다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가능합니다. 내 힘과 내 의지로는 되지 않습니다. 아일랜드 북방에 가면 봄철에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치고 새끼를 키우며 산다고 합니다. 그러다 늦가을이 오면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데 어미들은 새끼들이 다칠 새라 둥지가 날아가지 못하게, 바람에 날아오는 흙덩이에 맞지 않게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런데 이때 끝까지 버티는 새가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내와 새끼들을 움켜쥐고 양 날개를 크게 벌리며 바람에 몸을 맡겨버리는 새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바람이 부는 대로 바람에 몸을 맡기며 날아갑니다. 얼마를 날아가다 떨어지게 되고, 정신 차려 깨어보면 포근한 잔디 위에 누워있게 됩니다. 아내와 새끼들도 함께 바람을 타고 살기 좋은 안전한 곳으로 온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산등성이에서 바람을 거스르며 버티던 새들은 자기 힘과 꾀를 써서 싸워보지만, 닥쳐온 겨울의 추위 속에 그만 얼어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며 내 힘과 내 지혜로 신앙생활 하는 자는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르지 못하고,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새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를 받는 자는 기쁨으로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다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는 자가 됩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신앙으로 무장하여 내 몫의 십자가 지고 주님 십자가 발자취 따르다가 주와 함께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십자가에 대한 오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십자가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아멘.

 

인자가 온 것은 막19;45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인간의 이성과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조차 없는 이 난해한 가르침을 기독교가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육신이 아니면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야 한다면, 그래서 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우리가 찾아 올라가야 한다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날 기대와 소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다는 성육신의 진리를 믿는다면 비로소 하나님과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열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성육신의 가르침은 오는 것과 가는 것의 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오라고 요청하시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인간을 찾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성육신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에서 행사는 여러 전도와 선교 역시 오는 것과 가는 것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전도와 선교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오라고 요청합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 집회를 준비하고, 우리 교회가 전도 행사를 준비하고, 우리 교회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프로그램을 준비하였으니 많이 오셔서 많이 참석하시라고 요청합니다. 이 모든 활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때로는 마케팅의 원리를 사용하기도 하고 기업이 상품을 홍보하듯 전단지나 홍보물을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이 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에 있어 더욱 중요한 원리는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한 마디로,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 가는 것입니다.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갑니다. “오라고 요청하기에 앞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눕니다.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를 따르는 전도와 선교의 방식입니다. 코로나 시대,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이 제약을 받는다고 아쉬워합니다. 코로나 이전에 성도들이 따닥따닥 붙어 앉아 예배했던 모습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믿는 성육신의 가르침에 따라면 우리가 더욱 안타까워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이 있습니다. ,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분들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섬김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45절은 마가복음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마가복음의 핵심 문장입니다. 이 구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인자가 온 것은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곧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곧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목적, 그 첫번째는 무엇입니까? 섬김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크게 두 구분으로 구분하는 여러 기준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지역입니다. 마가복음의 앞부분, 구체적으로 마가복음 1장부터 8장까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지역은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리입니다. 이른바 소외계층, 빈곤층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이유로 등장하는 섬김은 마가복음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해줍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변방인 갈릴리 지역에서 몸이 병든 환우들을 섬기셨고,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이들을 섬기셨고,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시며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섬기신 수많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한 대목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 첫번째 청중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군중이었어요. 당시는 마이크 시설도 없고 음향시설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목소리를 높여서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해주셨지만,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곤 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군중을 피해 제자들과 있을 때에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그 비유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군중을 상대로 말씀을 전하시고, 또한 제자들과 만나 그 말씀을 보다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신 바로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하루의 일과를 마감해야 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셨던 예수님도 피곤하셨겠지만, 예수님을 곁에서 수행하였던 제자들도 이제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했겠지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에 배를 띄워라. 지금 바로 갈릴리 바다 반대편으로 가야 되겠다.” 제자들은 그 밤에 왜 갈릴리의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배를 타고 반대편으로 항해를 합니다. 갈릴리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그 길에서 제자들은 큰 광풍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아둥바둥하고 있는데, 여러분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지요? , 그렇습니다. 그 시간은 취침해야 하는 한 밤중이었어요. 큰 광풍에 배 안이 온통 바닷물로 가득한 순간에도 깊이 주무셔야 했던 밤시간이었다고요. 제자들이 다급히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와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도착했던 곳은 다름 아닌 거라사인의 땅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한 명 있었거든요.

 

이른바 거라사의 광인으로 알려진 그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은 그 밤에 배를 타고 풍랑이 치는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셔야 했던 사람도 많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셔야 했던 사람도 많았으며, 예수님께서 봉사하며 섬겨야 할 사람이 언제나 예수님의 주변에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만큼은 풍랑을 헤치면서까지 거라사인의 땅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러운 귀신 들린 그 한 사람을 섬기시기 위해, 그 한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 한 사람을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구해주시기 위해 찾아가셨어요.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지역에서 갈릴리 바다 맞은 편에 위치한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향해 치유를 선포하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그 밤에 굳이 풍랑을 맞으면서까지 갈릴리를 건널 필요가 없잖아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말씀 한 마디로 그 모든 귀신을 쫓아내실 수 있으시잖아요. 굳이 바다를 건너가시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을 보내어 그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알려주실 수도 있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성육신의 원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 것이면, 굳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지요. 저 하늘 보좌 우편에서도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우리의 모든 약함을 치유하실 수 있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믿고 우리가 사랑하여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은 저 멀리 하늘 보좌 우편에서 능력으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요, 그 밤에 갈릴리를 건너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을 찾아가신 분이요,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사랑으로 섬기며 봉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대속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45절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신 성육신의 이유와 목적을 말씀해주시지요. 그 두번째 목적은 대속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마가복음을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마가복음의 앞부분, 곧 마가복음 1장부터 8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사역은 오늘 본문 1045절에 등장하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데, 바로 섬김이지요. , 이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변방이었던 갈릴리를 떠나 이스라엘의 중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마가복음의 후반부, 보다 구체적으로 마가복음 8장 이후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그곳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오늘 본문 1045절에 등장하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대속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는 그곳에서 영광을 받으려 함도 아니요,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기 위함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기 위해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연이어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 1045절은 예수님의 죽음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 대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저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랑과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보라고,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내가 뭐 그리 큰 잘못을 지었느냐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간에 대한 공정한 판단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은 너무도 크고 너무도 무겁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때 대속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기에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들을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3장을 보면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 곧 구원자는 대속의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4)

 

사람들은 메시아의 고난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오해일 뿐, 인류의 구원자가 고난을 받는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속의 고난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5-6)

 

구약성경의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10:45)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봉사요,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너희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요. 섬김과 대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시기 위하여 오셨지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대속과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비그리스도인들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언급하기도 하시거든요.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10:42)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먼저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섬김에 대해 모릅니다. 그들은 주님의 대속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의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10:43a) 예수님의 이 말씀을 조금 더 분명한 표현으로 바꾸어 볼까요? “너희는 그들과 다르다.” “너희는 그들과 달라야 한다.” “너희는 그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재물의 힘과 권세의 힘과 사회적 지위의 힘을 총동원하여 다른 사람을 임의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권세를 부리려 하고, 서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가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나는,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았잖아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받았잖아요.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과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았잖아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듣고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하는 삶의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 전혀 달라야 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10:43-44)

 

 

출처: https://hanjin0207.tistory.com/886 [목회 아카이브]

주 예수께서 하시는 일    막1:29-31,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출생 하신 후 부모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공생애를 갈릴리 호수 서북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보여 주시고, 하신 일이 많은데, 본문에 기록 된 말씀을 중심으로 주께서 하셨던 일이 무엇인지, 또 지금도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주 예수께서 하신 일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사람을 치유하여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1:25-26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 은 악령이라고도 불리는데, 귀신 들렸다는 것은 거기에 붙들려 자기가 자기의 의지대로 행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많이 나오는데, 한 가 지 공통점은 귀신에게 붙들리게 되면 그 정신 상태가 분열이 되어서 바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령 군대 귀신 들린 청년을 보면 비록 젊은 나이지만 자기 몸을 자기가 상해하는 일을 합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현대인 가운데 정신 상태가 온전한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 상대를 구할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가문, 학벌, 재산, 외모 보다 그 사람의 정신 상태라고 말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신 목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영을 쫒아내심으로 악한 영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을 거스르는 인간의 악한 생각과 의지를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사는 선한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려 사람 구실을 못하고,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던 여인이었지만 예수님 만나 성녀가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나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은총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또 막1:30-31에 보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곳에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병을 치료하시는 의사이십니다.

 

병원에 가보면 여러 가지 병이 있습니다. 우리 지체 가운데 병이 나지 않는 지체가 별로 없습니다. 사지백체, 오장육부가 다 병이 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한 가지 병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위병만 하더라도 위 무력증, 위확장 증, 위하수, 위궤양, 위산 과다, 위산 부족, 헬리코박터 감염, 위암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열병도 그러합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실망의 열병에 걸리면 주를 위해 충성하던 사람도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실망하게 되어 무기력해집니다. 그래서 갈6: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계속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속의 열병에 걸리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영광 보다 세상 영광을 더 좋아하고 세상 연락과 돈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5:44에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하셨습니다.

*불평, 원망의 열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성도가 열심히 충성 하다가도 불평, 원망의 열병에 걸리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흑인으로서는 미국 최초의 국무장관이 된 콜린 파월(Colin Powell)은 뉴욕의 흑인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이지만 언제나 긍정적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 그는 공장에서 도랑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동료 인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삽에 몸을 기댄 채 회사가 임금을 충분히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서 또 한 사람은 묵묵히 성실하게 도랑을 파고 있었습니다.

몇 해가 지난 후 파월이 다시 그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을 때 여전히 한 사람은 뭐가 못마땅한지 계속 불평만 하고 있었지만 묵묵히 일하던 사람은 이제 승진하여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또 여러 해가 흘러 그 공장에 다시 갔을 때 불평만 하던 사람은 원인불명의 병으로 장애인이 되어 회사에서 해고됐지만 열심히 일하던 그 사람은 그 회사 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이 파월에게 굉장한 교훈이 되었다고 합니다. 파월은 어느 곳에 가더라도 환경을 탓하지 말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마음먹었습니다. 파월이 흑인으로서 출세하기에는 악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고 감사하는 태도로 일관했을 때 4성장군인 합참의장을 거쳐 국무장관까지 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 치유 자가 되시는 예수님 앞에 영, 육간에 병든 것을 치유 받고, 새로워지는 복을 받는 성도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일을 하십니다.

 

16:25-34 마게도니아의 한 도시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제2차 전도여행 시에 복음을 전하다 잡혀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구원받은 사실과 이로 인하여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미 하는데, 갑자기 지진이 나서 감옥 문과 착고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놀란 간수가 죄수들이 탈옥한 줄로 알고 칼을 빼 자결 하려는 순간 바울이 만류할 때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물을 때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고 말했습니다.

 

불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만 믿으라고 하는가? 석가도 있고, 마호메트도 있고, 공자도 있고 맹자도 있는데, 모든 종교는 다 똑 같은데 왜 하필이면 예수만 구원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는 다른 종교의 창시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고집스럽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그러합니다.

 

첫째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형벌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를 해결한 종교 창시자가 예수님 외에는 없다는 점입니다. 석가도 마호메트도, 공자도 다 죄인이고, 죄 때문에 신음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믿는 경전 어디에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보내신 아들이시며,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독생 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만이 죄를 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5-6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주 예수를 믿으라 한 것입니다.

둘째는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 창시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자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유일하게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증명 하셨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자 이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초대 교회 복음 증거자들이 전한 메시지의 대 주제인 동시에 이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한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는 그 순간, 구원은 그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을 들은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씻겨주고, 그와 그의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음식을 대접하며, 예수를 믿게 된 것을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습니다(3234). 참으로 간수의 심령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을 영접하여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을 최고의 복으로 알고 구원 받은 백성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3.복음의 일꾼들을 세우시고 보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복음을 전하시고, 복음 전할 일꾼을 세우신 일이었고, 그들을 훈련시켜 복음 전도자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꾼 세우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2 제자를 훈련시켜 전도 파송을 보내셨고, 70인을 둘씩 짝을 지어 전도 하도록 보내셨습니다. 고기 잡는 베드로를 부르실 때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핑계대지 아니하고 즉각 순종하여 따랐습니다.

주님은 학식이 많은 자, 똑똑한 자, 재산이 많은 자, 권세를 가진 자를 쓰신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들어 쓰셨습니다.

 

어느 책에 실린 재미있는 내용의 글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열 두 제자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받기 위해서 경영 컨설팅 전문회사에 의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 대한 평가를 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귀하, 귀하가 의뢰한 열두 명의 인적 사항을 검토하고 심리 테스트 및 적성검사를 한 결과 다음과 같습니다. 한 명만을 제외하고는 다들 학력이 너무 낮고 경험도 부족합니다. 그들은 귀하가 새롭게 기획하는 공동체의 간부로서는 자격 미달입니다. 그들은 단체 관념도 없고 협력정신이 부족해서 경영관리자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성정이 너무 과격합니다. 안드레는 한마디로 무능력자입니다. 남을 지도할 사람이 못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은 공동체의 이익을 제쳐놓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도마는 부정적이고 질문뿐이며 추진력이 별로 없습니다. 마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할는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및 가난안인 시몬은 사회혁명을 노리는 과격한 불온사상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귀하가 추천한 열두 명 중 그래도 긍정할만한 사람이 있다면 가룟 유다 한 사람뿐입니다. 그는 비교적 유능한 편입니다. 사회 지식도 풍부합니다. 실업인 다운 예민한 감각과 판단력도 가졌습니다. 사교성도 있어 권력 상층부와도 잘 접촉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강한 동기가 있고 의욕도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본 경영 컨설팅 전문회사는 가룟 유다 한 사람만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게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준은 세상과 달리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들어 쓰십니다.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키면 항상 나중에 할게요.”하고 습관적으로 일을 미루던 아들이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런데 휴가를 나왔을 때, 완전히 달라졌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군대에서 무엇을 배운 게냐?“ ”, 지금 당장 순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 중요한 말, 잊을 수 없는 말, 마치 성경에 나오는 듣 한 말을 하더랍니다. ”순종을 미루는 것이 불순종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전도자들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로 돕는 자들, 물질로 돕는 자들, 그들 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도움을 주고, 위로 하고, 격려함으로 도움을 주는 자들 모두 주님의 사역에 동참 하는 자들입니다.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치유 받고 즉각 주님을 수종 든 것처럼, 서신서에 나오는 빌립보 감옥 간수가 즉각 바울과 실라를 집에 모시고 상처를 치료해 주고, 음식을 대접하고 수종들며 가족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한 모습이 주님 사역에 동참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어떤 모습으로든지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주 예수께서 하신 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사람을 치유하여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일을 하십니다.

.복음의 일꾼들을 세우시고 보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아멘.

 

 

 

환난의 때를 준비하는 신앙    13:14-27

미국에서 날씨를 예측하여 거부(巨富)가 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크리크라는 사람입니다. 1930년 캘리포니아 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했지만 불황이 혹심하여 취직을 못했는데 앞으로 항공(航空)이 성해질 것을 예측하고 기상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1933년 어느 날 야간비행을 떠나는 비행사에게 대서양 연안에 맹렬한 폭풍우가 일 것이라고 예보를 했는데 적중했고, 3년 후인 1936년 가을에 내년 1월에 대한파가 닥쳐 과수원은 전멸할 것이라는 예고도 들어맞아 명 예보자로 이름을 떨친 후 그의 단골손님은 런던의 선박보험재벌 로이드를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연결이 되어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 미래 학자들, 심렬술사들이 미래에 대하여 여러 가지 예측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지 못합니다. 미래학자들의 단체인 세계미래학회에서는 최근 그들이 과거에 내렸던 예측의 정확도에 대한 조사 결과를 1967년 세계미래학회의 잡지 퓨처리스트’ 1호에서 행한 60여 가지 예측 가운데 68%의 정확도라고 발표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예언에 대해 연구한 바톤 페인(J. B. Payne)의 성경예언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성경에 기록된 예언은 총 1817개로, 구약성경엔 1239, 신약성경엔 578개의 예언이 있다고 합니다. 그 예언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된 것을 보면 성경은 인간의 책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42:9).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친히, 예수님을 통해, 또 선지자들을 통해, 은혜를 입은 자들을 통해 예언하시고, 친히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환난의 때를 준비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은 대 환난의 때에 대해 예고 하셨습니다.

 

본문 막13:19‘’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했습니다. 종말 때에 있을 대 환난은 참으로 유일무이한 큰 환난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세상에는 많은 환난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더 큰 환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통계에도 지진의 빈도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에서 오는 홍수, 한파, 해일 등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쟁, 기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범죄가 점점 더 흉폭 해 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처럼 전염병으로 일상적인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발생합니다. 적그리스도들이 많이 일어나 미혹하는 일이 더 많아지고, 박해자들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도 그렇습니다. 현 정권은 교회가 코로나 19 확산의 주범인 것처럼 방송과 여러 매체를 통해 여론을 몰고 갑니다. 행정 명령을 내려 교회 집회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사단은 모든 방법을 동원 하여 성도들을 불신자들로 만들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 거짓 신자들이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들어와서 광신자로 만들거나, 잘 못된 신앙으로 미혹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하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빛이 꺼지게 만듭니다. 지금 사탄은 교회를 엄청 공격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큰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예배의 불을 끄고, 기도의 불을 끄고, 찬양의 불을 끄고, 교제의 불을 끄고, 봉사의 불을 꺼서 거룩한 불길을 시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잘못한 것들을 회개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다른 어느 종교나 봉사 단체 보다 월등히 많은 분야에서 봉사를 하고, 선한 일들을 감당해 왔고, 지금도 감당해 나가고 있습니다. 애국의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눈물로 간구하는 성도들이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긍지를 가지고 박해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비대면 시기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더 가까이 대면하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주님과 가까이 하지 못한 것을 회개 하고, 더 깊은 기도의 골짜기로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가정 예배를 드리고, 기도의 골방을 찾고,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 주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가지게 되면 더 큰 은혜를 받게 되고, 내면의 성숙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러한 환난의 때를 만나게 될 때 믿음 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면 믿음이 약한 자들이 믿음에서 떨어지게 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도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이런 어려움을 통해서 불신앙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연단이 되어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환난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기도하다가 허다한 흰옷을 입은 무리들을 보았는데, 장로 중 하나가 이 무리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승리자들은 다 환난을 잘 통과한 자들입니다. 마지막 대환난의 때를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의지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환난의 때에 성도가 힘써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일생동안 수없이 많은 환난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5:7)고 했습니다. 그 원인이 물질일수도, 재난일수도, 질병일수도, 사업의 실패일수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일수도, 신앙으로 인한 박해일수도, 전쟁일수도, 사회적 혹은 국가적인 환난일수도 있습니다. 그 때 성도들이 더 힘써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진실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50: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배를 제사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환난을 이기려면 예배를 통해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다면 회개하고,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모습이 예배의 회복입니다. 그 때 하나님과의 형식적인 관계가 구체적인 관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드리나 마나 한 예배요,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예배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시50:22-23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회개하여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회복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배 회복이 이루어진 자에게 환난은 도리어 큰 복이 됩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당신을 섬기라고 나에게 건강을 주셨건만 나는 세상을 위해 전부 낭비했습니다. 이제 나를 일깨워 주시려고 나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예배회복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마음의 서원을 갚아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했습니다. 서원이란 하나님께 한 약속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하나의 섭리하시는 방편입니다. 대개는 막다른 골목에서 서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시면’,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을 이기도록 도와주시면’ ‘앞으로는 말씀에 순종하며 신앙생활 잘 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죄를 범치 않겠습니다.’, ‘내 생명 바치고 물질 드려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겠습니다.’, ‘선교에 앞장서고, 교회를 세우겠습니다.’ 등 등 서원하게 됩니다.

 

한나처럼 서원을 잘 이행하는 성도들도 있지만, 어려움이 풀리고 형편이 좋아지면 자기가 한 서원을 잊고 살기도 합니다. 야곱도 광야에서 형을 피해 도망하면서 너무나 외롭고 두려울 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보고 벧엘에서 서원을 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시고 고향으로 돌아와 형, 에서를 만난 후 곧바로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다가 딸 디나 사건을 만나고 큰 환난을 당하고 나서야 자신이 한 서원을 기억하고 벧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서원을 이행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환난이 올 때 혹시 잊고 있는 서원은 없는지 돌이켜 보고 서원을 이행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했습니다. 환난을 이기는 길은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난을 당해도 부를 이름이 없지만 우리는 환난 중에도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46:1)했습니다. 작은 도움이 아닙니다. 큰 도움이십니다. 그러므로 결사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성도는 남편이 간경화가 너무 심해 병원에서도 입원시켜 주지 않아 집으로 퇴원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 된 그 자매는 하룻밤도 집에서 자지 않고 교회에 나와 철야기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하는 동안에 남편의 병이 반드시 낫는다는 확신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게 복수가 찼습니다. 숨쉬기도 어렵고 얼굴은 검게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만 감으면 마음에 남편이 낫는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간절히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뚜렷이 들려왔습니다. “네 남편의 병을 예수 이름으로 명하여 쫓아내라그래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사흘 지나자 소변이 배설되더니 일주일 후에 간경화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내의 손잡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길을 내시든지 내어주십니다. 사람은 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고 사람은 땅에서 부르짖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환난의 때에 진실한 예배를 회복하고, 마음에 서원을 갚으며,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환난 중에도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5:3-4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마지막 큰 환난의 때에 살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도가 깨어 기도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돌보시는 역사가 날마다 더해집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이 채워주시게 됩니다. 피할 길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지혜와 지식과 명철과 총명을 더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전능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서양 사람들이 즐겨 쓰는 속담에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성 단테는 애인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이 파탄된 것을 신곡으로 승화시켰고, 음악의 거성 모차르트는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을 때 불멸의 작품 진혼곡을 작곡하였습니다. 명상가 호레이스 브쉬넬은 만일 이 세상이 좋은 일과 즐거운 생활뿐이라면 이곳은 하나님의 전원은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왕국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환난과 고독과 고통과 번민 중에도 희망은 있고, 더욱 큰 은혜가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 중에도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 본문 시50: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했습니다. 살전5:16-18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 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했습니다. 성도의 감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감사하는 자를 환난 날에 건지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도의 감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행위입니다. *성도가 드리는 감사는 축복의 씨앗을 심는 행위와 같아서 더 많은 감사의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올 때, 마음이 답답하고 컬컬할 때 낙심하지 말고, 누구도 찾아가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성도가 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주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게 될 것입니다. (4:6-7)

 

우리 모두 환난 중에도 감사를 잊지 않는 성도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환난의 때를 준비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은 대 환난의 때에 대해 예고 하셨습니다.

 

.환난의 때에 성도가 힘써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진실한 예배를 회복하고, 마음에 서원을 갚으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일입니다.

 

.환난 중에도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아멘.

 

백 배의 보너스 (막 10:28-31)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시간에 “백 배의 보너스”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주를 위해 살면 내세의 영생 외에도 현세에서도 백 배나 받는다고 했습니다. 백 배의 보너스, 얼마나 설레이는 말씀입니까?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직장인이 가장 기다리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월급날입니다. 월급을 받을 때 보너스까지 두둑하게 받는다면 부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보너스(bonus)란 월급 외에 그 업적이나 공헌도에 따라 얹어주는 상여금(賞與金)을 가리킵니다. 여기 상은 (賞)상줄 상이니까 상(賞)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보너스를 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잘하면 상으로 건강을 보너스로 주기도 하시고, 물질이나 명예나 형통이나 기타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보너스로 주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보너스를 주실까요?


1. 천국 백성 모습으로 살아갈 때 주십니다.


마6:33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그의 나라는 천국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는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면 보너스를 주십니다. 천국도 누리고 보너스도 받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는 물론 육신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로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었다면 천국 백성답게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구원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해 주셨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고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로 알기 때문에 세상종교와 구분이 없어지고 종교다원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아직도 구원을 찾고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미 구원을 찾았고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되었습니다. 구원 얻게 하셨으니 찬양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으니 찬양합니다. 예수 안에서 의로움과 새사람과 영화로움을 입었으니 찬양합니다. 이걸 믿고 시인하고 찬양함으로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아직도 추구하고만 있다면 아직 복음의 초보조차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그 은혜가 성령 안에서 풍성하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의 세력이 너무나 강하여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롬14:17-18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경외하고 천국 백성답게 사는데 하나님께서 어찌 버려두시겠습니까?


어느 나라에 왕이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들을 왕궁으로 초청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싶은 것 한 가지씩만 말해라! 오늘은 무엇을 말하든지 그것을 주겠다.” 그러자 아이들 모두 한 가지씩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아이들의 소원대로 선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은 소원을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너는 왜 가만히 있니? 소원이 없니?” 그때야 비로소 아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도 소원이 있어요?” “무엇이니?” “저도 왕이 되고 싶어요!” 아 이녀석 봐요 저도 왕이 되고 싶다네요. 그런데 당시 왕은 왕위를 게승할 왕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커서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왕을 구했다는 것은 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세요. 그러면 왕보다 더 아름다운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2. 겸손히 하나님을 섬길 때 보너스를 주십니다.


잠22:4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시되 겸손히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재물도 주시고 영광도 주시고 생명도 주십니다. 사람이 바라는 것은 다 들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도 겸손하지 않으면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18:22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했고, 또 잠언 29:23에는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높이고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면 주께서도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은 이 땅의 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노아도 부자였습니다. 부자 아니면 어떻게 그 큰 방주를 지었을까요? 아브라함도 부자였습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일군도 많았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욥도 다윗도 솔로몬도 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리 복을 막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지혜 내려놓고 하나님을 시인하기까지 더 겸손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잠3:5-6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했습니다. 날마다 교회 나와 여쭙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 수만 가르쳐주셔도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3. 충성하는 사람에게 보너스를 주십니다.


막10:29-30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여기 제자란 복음의 일군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좋을 대로 나가려고 하지 예수님이 남기신 십자가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길이 영육 간에 복 받는 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 위해 충성하면 하늘의 영생은 물론 현세의 복도 넘치게 주십니다. 주를 위해 충성하는 목회자든 성도든 복 받지 못한 사람 못 봤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충성하는 자에게 그냥 두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저녁이 되어 배는 고프고 돌아갈 힘도 없었을 때 한 아이가 예수님께 가져온 것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 그것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여자와 아이 외에도 오천이나 먹였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버리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셨는데 누구에겐가 주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남은 떡을 누구에게 돌아갔을까요? 기록에는 없지만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오병이어를 바친 아이에게 돌아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보너스를 열두 광주리나 안겨 주셨습니다.


모세도 미디안에서 장인의 양을 치고 있을 때, 그의 주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자나깨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80이라 더 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충성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40년의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시고 건강을 주셨습니다. 40년을 보너스로 주셨습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꿈에 백성을 위해 지혜를 구하다가 구하지 않은 수 부 귀 영광까지 받았습니다. 사명을 위해 구할 때 하나님께서 보너스로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일하겠다. 너는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전도자에게도 보너스를 주십니다.


대상4:10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보너스가 야베스의 기도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배경을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보너스였습니다. 역대상 1장부터 9장까지 무려 500명이 넘게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번성하는 모습 가운데 중간인 4장에서 야베스가 복 받은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는 자들에게 이처럼 입만 벌려도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며 보너스를 주신다는 메시지입니다.


[나는 이렇게 전도했다]라는 책의 저자 윤성호목사가 책을 쓰면서 전국에 소위 전도왕이라 불리는 사람 50명을 찾아가서 간증을 들어보았더니 그들에게 공통점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모두가 가난했는데 전도하다가 경제적인 복을 받았고, 둘째는 전도하다가 모두 병 고침을 받았고, 셋째는 전도하다가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는데 유능한 자가 되었고, 넷째는 전도하다가 자신이 엄청난 변화를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너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보너스를 받으려면 주업과 부업이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이 주업입니다. 세상 직업은 아무리 바빠도 주업이 아니라 부업입니다. 세상 사는 동안 먹고 살기 위한 부업입니다. 주업을 위해 힘쓰면 육신의 부업에도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 잘 경외하고 겸손하고 충성하고 전도하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늘과 땅의 온갖 아름다운 보너스로 가득한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20

찬 송 : 500, 502, 505, 516, 520, 523.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1703. 6. 17일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 목사인 사무엘 웨슬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1735년 그의 나이 32세에 미국의 조지아 주로 선교사로 출발을 하였다가 2년 만인 1737. 12. 22일 귀국을 하였습니다. 그는 조지아 주의 선교에 실패를 하였다는 자책감에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1738. 5. 24일 저녁 845분 올더스케ㅤㅇㅣㅌ 거리에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교회에 참석을 하였는데 이 때 예배를 집례 하는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을 때에 그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이때에 비로소 완전한 구원의 체험을 하였고 주님이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이 내주 하시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791. 3. 288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 53년 동안 영국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빈민 선교와 감옥 선교 등을 중점적으로 하여 많은 호응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나중에 그가 운영하던 신성 클럽과 모든 속회 활동을 통하여 감리교를 창설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으로 인하여 웨슬리 자신은 물론 영국 사회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웨슬리가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예수님과 뜨거운 만남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말로만의 전도가 아니고, 사상과 관념적으로 만의 전도가 아니고, 실제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전도하여 영혼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전도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간간이 나타나셔서 그때그때 필요한 말씀을 주시다가 마지막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이며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한 마디로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 전파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명령은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안 할 수도 없고 연기할 수도 없고 거역할 수는 더 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과에 구애받지 말고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전도가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분부하신 말씀은 곧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까지는 구원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전하여졌으나 이제부터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14:21) 고 하셨고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14:2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온 세계를 전도의 대상으로 삼고 복음을 만민에게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며 오늘의 우리교회가 감당하여야 할 사명입니다. 복음전도와 영혼 구원은 성도가 행하여야 할 마땅한 의무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9:16절 말씀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3: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

그래서 성도들이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목사는 이를 책망도 하고 권면도 하고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詳考해 보겠습니다.

 

1. 믿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절 말씀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과 실라가 마게도냐 지방에 가서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밤중에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도 밤에 찬송을 부르며 기도할 때 지진이 일어나고 채웠던 착고가 모두 풀리고 옥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신라는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자결을 하려고 하는 간수를 제지하였습니다. 간수는 이 사람이야말로 보통 사람이 아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하는 하나님과 그의 전하는 예수가 참된 신앙인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신라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간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헛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사회의 부패와, 정치적 부패 등등 모든 것에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 말은 모든 인생들의 질문이며 당면한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울과 신라는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합니다.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독교의 구원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영생에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한가지의 길이 아닌 오직 한길 유일(唯一)한 길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구원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고 예수만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 교계에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2.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반면에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은 반드시 죄 값을 받아야 합니다. 그 죄의 대가는 바로 멸망이요 지옥입니다. 지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몇 백배 몇 천배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상상하기조차 끔찍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지옥에는 누가 가게 되는 것입니까?

 

(1) 성경 말씀에는 마귀와 그의 사자들이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2)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이 들어갑니다.

(살후1:8-9)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3)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 곧 사탄의 표를 받은 자가 들어갑니다.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 우리라

 

(4)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가 들어갑니다.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5) 불신자, 살인자, 행음자, 술객들, 외식하는 자, 거짓말 하는 자들이 들어갑니다.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지옥에 절대로 들어가서도 안 됩니다.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 문제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독생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어 영생에 들어가는 가장 쉽고도 합리적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다 같이 찬양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316. 아 멘.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16:9절 이하의 말씀에는 날마다 호화로이 먹고 마시며 즐기던 부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다가 지옥에 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뿐입니다.

비록 나사로처럼 되는 한이 있어도, 욥과 같은 환난을 당해도, 바울과 같은 시험을 당해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3.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권능입니다.

본문 17절 말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의심치 않고 믿고, 마음에 완악함이 없이 겸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무슨 능력을 주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어느 종교에서 이와 같은 능력을 얻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만이 받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능력을 세부적으로 상고하면

 

(1)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예수님께서는 항상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귀신들려 고통을 당하는 자가 있으면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고 또 제자들에게도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이름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귀신과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G. S> 예수이름으로

예수이름으로 예수이름으로 마귀는 쫓긴다

예수이름으로 예수이름으로 마귀는 쫓긴다

예수이름으로 나아갈 때 누가 나를 괴롭히리요

예수이름으로 나아갈 때 마귀는 쫓겼다. <아 멘!>

 

(2) “새 방언을 말하며

방언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그 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하였고 고전12:10절 말씀을 보면 성령의 9가지 은사 중에 방언의 은사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3) “뱀을 집으며

28: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바울 일행을 태운 배가 로마를 향해 가다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14일 동안 바다에서 먹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다가 배는 파선하고 가까스로 멜리데 섬에 상륙을 하였을 때 그 마을의 원주민들이 불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 주었는데 이때 바울이 나무를 불에다가 더 넣으려고 할 때 나무속에 있던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원주민들은 그 뱀에 물리면 금방 온 몸이 붓고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데 바울은 아무런 이상이 없자 신()이라고 바울에게 경배를 하려고 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성경 상에서 뱀은 사탄 마귀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권능 받고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을 잡으며, 쫓아 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4)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이 말씀은 영적으로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독약을 먹거나 농약을 마시면 해를 받습니다. 죽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아무리 핍박을 당해도 심지어 독살을 당한다 할지라도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절대로 해를 입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이단 사이비 종교의 교주 중에 수면제를 잔뜩 먹고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하다가 그대로 죽은 일도 있고, 어떤 미련한 사람은 이 말씀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쥐약을 먹었다가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5)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예수이름으로 안수할 때 나타나는 권능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말씀으로 고치시고 때로는 안수하여 고치시기도 하였습니다.

28:8절 말씀에 바울 일행이 멜리데 섬에서 머물 때에 그 섬의 추장의 아버지의 병을 바울이 안수하여 고쳐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표적과 기사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주시는 성도의 권능입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열 한 명의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나와 우리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일이 없는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권고의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권고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축복은 무엇인가?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의 우리들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할렐루야!!!

 



제 목 : 십자가와 역전

본 문 : 마가복음 15:16-47

 

오늘 읽어 드린 마가복음 15장 말씀에 보면, 몇 가지 재미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이지만 그 수난 자체보다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달아 놓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마가는 십자가의 수난이 단순한 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놀라운 변화와 진리를 동반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언한 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마가가 로마의 교회에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교회들에게 거기에는 반드시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으며, 그 고난은 곧 능력으로 역전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롱 속에 담긴 진리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들의 조롱의 말 속에 진리가 있다는 역설을 마가는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6절 이하에 보면,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하며, 갈대로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이 구절을 빼고 기록하여도 아무 지장이 없는데도, 굳이 이 이야기를 써넣은 까닭이 무엇일까요?거기에는 분명 마가의 특별한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이 모욕적인 언사를 빼 버리고 기록했을 텐데, 어째서 마가는 이것을 그대로 기록하였을까요? 그것은 29절 이하에 나오는 자들과 대제사장들의 조롱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그 부분을 빼 버려도 하등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빼 버리면 더 자연스러운 문장이 될 수 있습니다. 27절의 말씀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에 이어 32절 하반절 말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가 이어진다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문장이 됩니다. 그런데 마가는 굳이 그 사이에 조롱자들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가 이렇게 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마가는 조롱의 말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혹은 희화적으로 그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롱자들은 여기서 그들의 배역을 잘 수행하고 있으며, 그들은 무의식 중에 예수님의 참된 정체를 증언하는 고백자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색옷을 입힌 것은 자색이 바로 왕의 색깔이기 때문입니다. 동서 고금을 통해서 자색옷은 왕이나 고귀한 자가 입는 옷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가시로 만들기는 했지만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웠다는 것도 결국 왕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조롱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장난을 했지만, 사실상 그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진리를 증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진리란 예수님은 홀로 면류관을 쓰시고 모든 사람에게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진실로 왕이십니다.

빌립보서 29절 이하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에베소서 121절 이하에서도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조롱하는 놀이로 행한 이 의식이 바로 핵심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마가는 보여 주려 했던

것입니다.

 

1529절에서 십자가 형장을 지나가던 행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라고 모욕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심문을 당하실 때 거짓 증인들이 그에게 퍼붓던 말입니다. 그 말을 이제 지나가는 자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번 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이 우스꽝스러운 아니 정신 이상자의 말처럼 생각되어 조롱의 말로 사용하였겠지만, 그 말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흘만에 부활로 연결될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에 근거한 낡은 성전은 헐어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지는 새로운 예배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을 저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아니 마가는 저들의 입을 빌려 오늘 고난 당하는 교회야말로 새로운 성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초로 한 생명의 공동체임을 확신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1531절에서 대제사장들은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진리는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실제로 "남을 구원하는 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고 온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그의 이적적 능력에 의해 수없이 많이 "남을 구원하였습니다."32절에서 다시금 예수님을 향해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라고 조롱하였습니다. 마가는 여기서 다시금 제사장이 예수를 심문하였을 때 물었던 질문, "네게 그리스도냐?" 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조롱자들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참된 정체를 인정하는 고발자들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 진리에 대하여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를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모든 인간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깨달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와 그 역사 방법에 머리 숙여 찬양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을 통하여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시며, 십자가란 잔인한 형틀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과의 화해의 상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빈틈없는 역사 앞에 우리는 그저 감사와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조롱자들의 말이 사실로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역사가 바로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 움직이도록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난다 해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으로 가는 길이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리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기대를 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는 길이 되었다는 사실에 사탄은 낙망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악이 성하여도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귀결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간교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깨트리려고 해도 그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나가는 모든 인간의 역사를 역전시켜 그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틀림없는 섭리를 우리가 두려움으로 바라보며 그에게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박해자의 신앙고백

 

그러나 가룟 유다와 같은 불행한 진리의 증언자들과는 달리 처음에는 박해자였으나 십자가를 보고서 변화되어 참된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책임자인 로마 백부장과 아리마대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빌라도 총독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로마 행정부의 대표자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그가 단순한 죄인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은 초대 기독교 신앙고백 가운데 중심적인 고백입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명칭이 마가복음의 제목과도 같은 첫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예수님의 세례(1:11)와 변화산(9:7) 변모에서 이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제 수난의 이야기의 정점에서 바로 예수님의 처형을 담당했던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의 입을 통해서 이 가장 중요한 명칭을 다시 한번 더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전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처형하고 그에 대해 무관심하였던 로마 백부장이 변화되어 바로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가는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로마가 기독교회를 박해하고 잡아죽이지마는 마침내 그 로마는 변화되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게 될 것을 마가는 내다본 것이 아닐까요? 아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온 인류를 변화시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250년 동안 혹독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가 마침내는 그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는데 까지 나가지 않았습니까? 이 역전극은 참으로 통쾌하고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전극은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 왔습니다. 오늘도 이런 역전극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신론을 바탕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들에게서도 이런 역전극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련이 변화되고, 동구권이 바뀌었고 중국도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역전극은 저 북한 땅에서도 마침내 일어날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이렇게 변화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존경받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15:43). 그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의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는 말입니다. 마가는 산헤드린 의회의 '모든' 의원들이 예수님을 정죄하였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455절에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죄는 분명히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가결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그렇다면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의 정죄에 찬표를 던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리마대 요셉이 처음에는 예수를 반대하여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예수님의 편에서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게끔 정죄하였던 자가 이제는 반대로 예수님의 장례를 지내 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15:43)가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이전의 요셉과 이후의 요셉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마가는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기독교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이스라엘의 전통 종교인 유대교도 마침내는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이미 그런 변화를 통해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진 것을 보면서 그것을 전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회피하는 까닭은 어쩌면 기독교회의 잘못 때문이라고 봅니다. 중세 시대에 기독교가 흥왕하던 때, 그들은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라고 하여 그들을 박해하였고, 히틀러는 그들을 6백만 명이나 죽였던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도 정교회가 흥왕하면서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이스라엘인들이 기독교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지 이것이 사라질 때 저들도 마침내 변화되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완악한 모든 인간을 뒤바꾸어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 거기에 모든 죄에 대한 대가가 담겼고, 그로 인하여 죄의 권능이 소멸되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던 죄의 권세가 깨어지고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래서 위대한 능력이며, 놀라운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이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실하게 증명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이룩해 가시는 구원의 역사는 신비하고 오묘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저질러진 모든 역사까지 합하여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배반의 역사를 역전시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이런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수난의 자취를 보여주는 복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의 역전극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서 마가는 놀라운 역전을 보여 주며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극심한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고난을 승리의 과정으로 볼 수 있는 신앙을 우리에게 심어 주는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는 모든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에로 집중된다는 신앙과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서며, 승리의 부활을 기다리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광스런 변화 9:2-13 34:29-35,

괴테라는 위대한 문호가 쓴 작품 중에 하나가 파우스트라는 작품입니다. 이 파우스트라는 작품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주인공인 파우스트 박사가 사탄과 흥정을 합니다. 흥정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탄은 앞으로 24년 동안 파우스트에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고, 24년이 지난 이후에는 사탄은 파우스트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이게 계약의 내용입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이 작품에서 24년 동안 온갖 명예와 부와 권력과 존경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그렇게 짧을 수가 없었습니다. 24년이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24년이 되던 밤 12시에서 1시 사이에 사탄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약속대로 파우스트의 생명을 가져오라! 사탄이 파송한 부하가 있습니다. 그 이름이 메피스토펠레스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와서 파우스트 박사에게 말합니다. 12시에서 1시 사이에 나는 그대 생명을 거두어 가겠다. 이 작품의 대부분은 12시에서 1시 사이의 긴장과 갈등과 회한에 관한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파우스트 박사 집에서 뭔가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 인생이 결판나는 순간입니다. 그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 동네사람들이 들어보니 마치 세상에 있는 모든 뱀들이 몽땅 모여서 또아리를 틀면서 서로 얽히고 부딪히고 울부짖는 소리 같습니다. 지금 파우스트 박사를 데리고 가는 그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참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데 이 소리가 1시가 가까워오면서 거의 절정에 이르다가 1시가 다 되자 소리가 점점 약해지면서 그 속에서 파우스트 박사의 비명이 울립니다. "사람 살려 주시오." 괴테는 인간의 기막힌 고뇌를 이 작품 속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사단과의 사귐을 가지고 사단의 종노릇 하며 죄와 세상과 짝하여 사는 삶은 제약도 구속도 없는 넓은 문, 넓은 길로 행하는 자유롭고, 달콤하고, 행복하고, 성공적이고, 멋있어 보이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인 죽음 앞에 섰을 때 절망하고, 후회스럽고, 고통 속에 절규할 수밖에 없는 무서운 심판이 따르는 참혹하고 암담한 형벌 앞에 서게 된다는 교훈이 담긴 작품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사귐을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르는 삶에는 고난의 길인 것 같지만 영광이 따르게 되고, 어리석은 길 같지만 생명의 길이고,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하나님 나라 영광에 들어가는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은 산상 변모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영광스런 변화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과 사귐을 가질수록 용모가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구약 본문 출34:29-30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했습니다.

모세가 애급 바로왕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는 혈기방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이끌고 나와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 시내산에 올라가 40일을 하나님과 대면하고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을 가지고 내려올 때 얼굴에 광체가 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신약 본문 막9:2-3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했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신 것을 제자들이 목격한 내용입니다.

 

사람의 신체 중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특히 얼굴은 바로 그 사람의 내면의 마음 상태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요긴한 오감의 작용이 바로 얼굴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시각과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모두 얼굴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바로 얼굴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참으로 정교하고, 다양하고, 풍부한 인격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수많은 생물 중에 하등 동물에는 얼굴이 없습니다. 여러 짐승에게 얼굴이 있다고 하지만, 생존을 위한 기능 외에 다른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름답고 균형미가 있고, 성숙한 모습의 얼굴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얼굴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음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창문이 된다는 점에서 얼굴은 그 사람의 전부요, 그 사람 자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된 우리 인간이 가진 인격과 성품은 반드시 그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찍어내듯 해서 똑같이 만드시지 않고 모두가 다른 성품과 인격으로 창조하시고 얼굴의 모양도 모두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얼굴은 우리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얼굴 속에 나타나는 인상, 얼굴 속에 비치는 인격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격이 성숙해지면 인상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흐리게 되면 얼굴이 흐리게 되고 마음이 즐거우면 표정도 밝아질 수가 있습니다.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얼굴에 성실한 향기가 풍겨납니다. 그러나 추한 생각과 더러운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얼굴에서는 자연히 비열한 인상이 풍겨지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성도들이 주님과 깊은 사귐의 관계를 가지게 되면

*빛나고 밝은 얼굴이 됩니다.

사람이 죄악에 사로잡히고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 그 얼굴은 어두워지고 부끄러운 얼굴이 됩니다. 성도가 죄를 회개하고 버려 성결한 삶을 살 때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격과 감사와 평안이 넘쳐 밝은 얼굴로 변화됩니다.

 

*소망이 넘치는 얼굴이 됩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고 하늘 기업의 소망을 가지게 하십니다. 말씀 중심으로 살면서 우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요셉처럼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욥처럼 불 시험을 당해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고 수많은 시련 중에서도 하늘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영광스런 얼굴이 됩니다.

성도가 영광스런 주님과 교제 하다 보면 은혜의 영광이 몸에 배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주는 얼굴이 됩니다. 마음에 온유 겸손이 배이게 되고, 마음에 긍휼과 사랑이 묻어나게 됩니다. 그 모습이 얼굴에 나타나게 됩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의 돌 세례를 받고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나는 얼굴, 영광스런 얼굴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 속에 천사 같은 마음,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을 가졌기 때문에 천사의 얼굴처럼 빛이 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가지고 빛나고 밝은 얼굴, 소망이 넘치는 얼굴, 영광스런 얼굴을 만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과 사귐이 깊어질수록 마음과 삶이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신약 본문 막9:2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12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는 주님을 더 가까이 하며 따랐습니다. 그래서 남다른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고, 주님으로부터 남다른 관심과 배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변화산의 체험 외에도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릴 때에도 그 방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부모 외에 들어오심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8:51)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 기도하실 때에도 다른 제자들은 입구에 않자 있게 하고 세 제자를 데리고 깊이 들어가시면서 고민을 말씀하시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할 것을 당부를 하셨습니다.(26:36-46) 남다른 은혜를 체험한 그들은 한 때 주님이 잡혀가실 때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기도 하고,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리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바른 신앙고백으로 주님의 칭찬을 듣기도 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그들은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기둥처럼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충성하면서 온갖 박해를 견디며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을 통해 신앙의 위대한 족적을 남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모세 옆에는 제사장 아론이 있었으며, 아말렉과 전쟁할 때 함께 산에 올라가 아론과 함께 그의 손을 붙잡아 준 훌도 있었고, 미리암 선지자도 있었고, 시내산에 올라갈 때 모세를 수종 들었 던 여호수아도 있었지만 산 정상에서 하나님과 교통한 사람은 모세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세 얼굴에 나는 광체를 보고 사람들이 그의 곁에 오는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 모세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고, 그 죽은 후에도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떤 환경이나 어떤 계기가 되든 그로인해 주님과의 사귐이 깊어진다면 그로인해 삶이 더욱 아름다워지고, 성결해지며, 복이 되고, 영광이 됩니다.

 

어느 장로님이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입원하여 종합검사를 받게 되었답니다. 검사 결과 암으로 판명이 되었고 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가족들은 이것을 본인에게 알리나 마나 하다가 결국은 본인에게 알렸습니다. 장로님은 믿음이 아주 좋은 분이었기에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드렸습니다. 장로님은 그 때부터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직분을 맡아서 헌신한다고는 했는데, 그래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마지막으로 충성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기도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동안 헌금을 한다고는 했는데, 십일조 빼먹은 것, 감사할 때 감사하지 않은 것,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밀린 헌금을 한꺼번에 하였습니다.

이웃과의 문제도 정리를 하였습니다. 마음 상하게 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이나 서운하게 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내가 그 때는 잘못했었다. 미안하다."하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재산도 정리하였습니다. 재산의 얼마는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었고, 얼마는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먹고 사는 일로 바쁘고 분주해서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남은 기간 동안 가족을 위하여 봉사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가족들에게 예수 잘 믿으라고 유언까지 써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6개월이 지나갔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몸에 큰 이상이 없더라는 겁니다. 의사의 말대로 라면 이제 하나님께 가야 하는데, 6개월이 지나갔는데 아무런 이상증세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 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을 받았는데, 오진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이 아니라, 의사가 실수를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교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야단이 났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오진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이게 큰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소식을 듣고 장로님을 위로하려고 심방을 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이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장로님, 오진으로 인해서 평생 모아 놓은 재산을 다 써 버렸으니 어떻게 하지요?" 그랬더니 장로님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난 6개월처럼 보람되게 살았던 적은 없습니다. 이전에도 평안한 삶을 살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았는데, 이번처럼 평안하고 기쁘고 성령 충만한 적은 없었습니다. 6개월간의 생활은 정말로 천국의 삶이었습니다. 이제 죽어도 좋습니다. 재산이 없어도 좋습니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오진으로 6개 월 시한부의 삶을 살면서 더욱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 앞에 충성된 모습으로 사는 동안 더욱 큰 은혜를 체험하면서 그의 마음도, 삶도 더욱 거룩하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세상과 짝하여 주님과 멀어지는 것은 사망으로 달려가는 미련한 길이지만 세상에서 돌이켜 주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복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을 믿고 남은 생은 더욱 주님을 가까이하며 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주님과 사귐의 결과는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로 이어집니다.

서두에서 괴테의 파우스트에 관해 말씀드린 것처럼 사단과 짝하여 사귐을 가지고 죄의 종노릇 하며, 세상 풍조를 따라 살면 세상 사는데 거칠 것이 없이 자유분방하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꾀하고 죄를 행하면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와 명성을 가지고 살수도 있겠지만 죽음 앞에서는 끝없는 절망과 영원한 심판의 형벌을 피할 길도, 피할 장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사귐의 길을 가는 자들은 세상 풍조를 버리고, 죄를 회개하고 버리며 말씀에 순종하여 의의 길을 가는 자들이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지만 그 가운데 기쁨과 감사와 하늘 소망이 넘칩니다.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은혜로 보듬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격려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위로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 낙이 없는 어리석은 자들의 길 같지만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소망이 있고, 감사가 넘치는 은총의 길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진 모세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때로는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속이 터질 때도 있었고, 백성들의 원망을 많이 사기도 했고, 반역하는 자들로부터 생명의 위기를 만난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의 간섭과 도우시는 은혜로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 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남다른 은혜를 체험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후에 성령 충만을 받아 주님의 분부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수많은 박해를 받고, 위협을 받고, 고난을 당했지만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사명 감당하다가 영광스런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거룩한 삶을 살다가 부름 받은 산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외면하고 산 자들은 다 세상에 속한자요, 사단에게 속한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사귐을 갖게 되면 믿음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아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하늘 기업의 후사가 되는 복을 받습니다.

 

일본에 석정섭태랑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어떤 부부가 경영하는 큰 상점의 점원으로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그 상점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그 상점 주인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미망인이 계속하여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청년이 과부가 자는 방에 들어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살 것을 요구하였더니 미망인이 거부하자 청년은 그만 여자를 겁탈하고 발설될까봐 두려워 여자를 죽이고 옆집에서 석유 한 초롱을 사다 상점에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 청년은 하루 밤에 강간, 살인, 방화의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도주하여 피신해 전전하던 중 경찰 수사에 걸려 진범으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재판을 받아 사형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형편에 있는 청년을 한 목사님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목사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한 번, 두 번, 상대하고 여러 번 찾아가 대화를 하게 되니 청년 마음속에 성령의 감동으로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어 그의 마음은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흉악범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되니 감옥에서는 사형수로 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모범수로 변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형수가 감형되어 무기징역으로 되고, 그의 옥중 생활은 감사와 속죄의 생활로 가장 어렵고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여 10년을 복역하니 특사로 석방 령을 내렸으나 그는 출옥하지 않고 20년을 더 봉사하다가 마침내 성자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하고 옥중에서 죽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변화를 받고 주님과의 사귐은 이처럼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영광스런 하늘 후사가 됩니다. 정리

오늘은 산상 변모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영광스런 변화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과 사귐을 가질수록 용모가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주님과 사귐이 깊어질수록 마음과 삶이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주님과 사귐의 결과는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로 이어집니다. 아멘.



에바다의 은혜 7:31-37, 3:7-13

국민일보에 난 기사 내용입니다. 한 마리의 개가 3년 째 주일 성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일인데 이 개는 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집을 나선다는 것입니다. 교회까지 가는 거리가 26km (65)나 되는 먼 거리인데, 이 개는 새벽 5시에 집을 나서서 730분에 교회에 도착해서 교회 강단 앞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사람들과 똑같이 순서에 맞춰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앉을 때 앉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면 다시 자기 집을 향해 간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개를 구경하러 왔다가 교회에 등록하고 있는데 이 개는 전도의 역할도 충실히 이행하고 있어 주님의 은혜의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영적인 안목이 열리지 못하면 미물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에바다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에바다의 은혜는 육적인 면 보다 영적인 면에서 더 소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 땅에서 귀신이 들렸던 한 여인의 딸을 고쳐주시고 갈릴리로 돌아오시자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 사람은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하지 못하는 어눌한 자였습니다. 많은 경우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다쳐진 공간 안에서 홀로 살아갑니다. 그들 나름대로 불행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 쉽습니다.

이 사람을 예수님이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에바다"하셨습니다. 이 에바다란 말은 헬라어 원어로 "에파타"열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귀가 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향하여 에파타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귀가 열리고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말 못하고 듣지 못하고 살았던 그 인생의 무거운 짐, 울타리가 벗겨졌습니다.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자유,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 극적인 장면에 대해 본문 35절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했습니다. 그는 분명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듣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이 사람에게 열린 것입니다.

육체적인 장애보다도 훨씬 더 불행한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 장애, 영적인 장애입니다. 이런 사람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얼마 많습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꽉 차있는데도 그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폐쇄된 인생 속에 살아가는 답답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지식이나 철학이 최고라고, 자기들의 경험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이 보고 들어야 할 음성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요, 신령한 은혜의 빛이요, 하나님의 영광인데 그것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 이사야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이사야가 말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야할 백성들의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내가 소원하는 것은 네가 가서 이것을 선포할 때 일어나게 되는 기대는 이것이다. 나는 저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고침 받기를 원하노라" (6:9-10)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어두워 진 세상 속에 오셔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치유하고자 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했던 동일한 말씀의 권능으로 이 귀가 멀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와 영적으로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에파타"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을 듣는 이마다 귀가 열릴 것입니다. 가슴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이 열릴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한 소망이 열릴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삶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청주에서 목회 하셨던 김상호 목사의 은혜 체험입니다. 6.25 때 시골에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군의 눈을 피하여 낮에는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집에 와서 쉬며 틈틈이 교인들 가정을 심방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웃 동네 남정들이 34명이 공산군에게 몰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동네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정신을 잃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 틈에서도 용케 죽음을 면한 이장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친구인 김 목사에게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도움을 구하여 왔습니다.

친구인 이장의 말을 들은 김 목사는 쾌히 그 마을에서 부흥회를 갖겠다고 했습니다. 공산치하에서 부흥회를 갖는다는 것은 목숨을 건 것입니다. 밤이 되자 이장 설득에 못 이겨 동네 사람들이 이장네 마당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김 목사님이 달빛 아래서 한창 설교하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한사람 두 사람 모두 슬그머니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장도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주위를 살펴보니 공산군 일개분대가 이장 집을 완전히 포위하고 말았습니다. 이젠 틀림없이 죽었구나 생각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공산군을 향하여 설교했습니다. 도망가던 이장이 동네 사람들 때문에 김 목사가 죽는구나 하고 몸을 숨기고 바라보았더니 총부리를 겨누고 점점 목사에게 접근하던 공산군들이 걸음을 멈추고 넋을 잃은 듯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때 사력을 다해서 마지막 설교로 알고 하셨습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그들 중 분대장으로 보이는 병사가 "가자"하고 인솔하여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공산군이 사라지자 담 너머에 숨어 있던 이장과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목사님을 붙들고 울면서 "나는 오늘 하나님을 보았네. 그리고 이어서 나는 오늘 목사님이 꼭 죽는 줄 알았네. 내가 도망을 하다가 자네가 죽는 것을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담 너머로 바라보는데 공산군들이 자네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을 비추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자네 주위를 둘러서는데 그 수가 공산군보다 더 많더니 그네들이 자네 주위를 서성거리자 자네에게 접근하지 못하더군. 그런데 공산군들이 물러가자 흰 옷 입은 사람들은 사라지고 하늘에 빛도 없어졌네. 이제 나는 자네가 믿는 하나님을 믿겠네.“

은혜의 세계를 보는 눈이 열리면 복음을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화 됩니다. 우리 모두 에바다의 은혜로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입이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2.에바다의 은혜를 통해 받는 복이 무엇인가를 상고해 봅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생의 진로가 막히고, 자금 줄이 막히고, 직장이나 사업의 앞 길이 막히고, 결혼의 문이 막히고, 인간관계가 막히고, 건강 문제가 막혀 있으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때 에바다의 은혜가 임하면 문제가 해결함을 받게 됩니다. 마가복음 본문에 귀 먹고 말이 어눌한 자가 주님의 은혜로 치유 받고 밝히 듣고 잘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질병의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막힌 것들이 풀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로 하늘을 향한 문이 열려져야 합니다. 서신서 본문 계3:7-8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했습니다.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물질의 문, 연락의 문, 세상 영화의 문, 건강의 문은 잘 열려 있는데, 하늘의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하늘의 문이 닫혀 있으니 하나님을 경외 할 줄도, 기도할 줄도, 감사할 줄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불쌍한 사람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과는 잘 어울렸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병이 들어 있는 거지 나사로는 외면했습니다. 그가 세상에 살 동안은 하늘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결과를 맞게 될 것인가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야 비참한 고통 가운데 떨어지고 난 다음에야 뒤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에바다의 은혜를 받게 되면 하늘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런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됩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를 압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여 천국 열쇠를 받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압니다. 하늘 문이 열려 복음의 가치를 알고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 섬에 유배되어 모든 길이 막혀있고, 답답하게 갇혀 있는 요한을 향하여 주님은 하늘을 문을 열어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는 열린 하늘 문으로 구원 받은 자들의 허다한 무리가 흰 옷을 입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황홀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잘 단장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장래에 일어날 일도 보았습니다.

빌라데비아 교회는 규모도 적고 가지고 있는 능력도 작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기죽지 않고 사단의 세력을 이겼습니다. 그들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에바다의 은혜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에바다의 은혜가 임하면 마음이 열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입이 열리고, 전도하는 입이 열리고, 기도하는 입이 열립니다. 그 동안 외면했던 불상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열립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명심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삽니다. 그러다 보면 내 안에 불필요한 것들이 떠나게 되고, 치유의 역사도 일어나게 됩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 사모가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사모는 입을 굳게 다물고 미음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 것은 개척 교회 시절의 극심했던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사모에게 들었습니다. 남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히 남편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싹터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감리교 신학대학의 윤성범 학장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 얼굴이 어둡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목사님은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학장님이 제안을 했습니다. 노트를 한 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고 해보세요. 목사님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들고 아내에게 갔습니다. 이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사모가 한두 줄씩이나마 노트에 감사할 일을 써내려 간 것은 목사님이 방을 나서고 난 후에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부터 적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사모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자고 생각했고, 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모는 매일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다리에는 웬일인지 힘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암세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으로든지 에바다의 은혜가 임하면 내 속에 있는 불신앙, 미움, 두려움, 원망, 꼬인 문제, 불평, 질병, 근심과 같은 찌꺼기들이 떠나가게 되고, 대신 믿음, 감사, 사랑, 소망, 평안, 기쁨, 형통, 치유, 담대함 등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에바다의 은혜를 통해 주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에바다의 은혜를 받기위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 상고합시다.

복음서 본문에 나와 고침 받은 자에게 임한 은혜를 보면

먼저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고침 받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데려 온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이 귀중함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으려고 간절히 사모하며 안타까워합니다. 그가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산 것도,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서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어 야곱은 장자가 받을 수 있는 그 축복을 아버지를 통해 받았습니다.

다음에 기도하는 자에게 열려진다는 것입니다. 7:32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주님은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리리라" (7: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의 속박에서 해방 시키고,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 갈 때 수많은 대적과 장애물과 어려운 문제들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해방의 문이 열리고, 홍해가 열리고, 하늘이 열려 만나가 내려오고, 바위가 열려 생수가 나오고, 앞길을 가로 막는 대적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을 모아 놓고 제단에 불이 떨어지게 하는 신이 참 신인 것을 온 백성에 증거 해 보이도록 하자하고 먼저 그들이 믿는 바알과 앗세라 신에게 기도하게 했지만 불이 내려오지 않자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재단을 살랐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척결했습니다. 또 그가 기도함으로 굳게 닫힌 하늘의 문이 열려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대지를 다시 흡족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님을 만난 자에게 열립니다. 세상에서 좋은 부모를 만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귀인을 만나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큰 복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시는 분이요, 만유를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분을 만났어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요, 아무리 세상에서 사람들을 잘 만나지 못하여 실패한 사람도 생명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능력이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소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나인성에 사는 한 과부는 외아들을 잃고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로 향하여 가는데 나인성문에서 상여에 매달려 슬퍼하며 몸부림쳐 통곡합니다. 이때 이곳을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상여를 멈추게 하시고 관을 꺼내놓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실 때 관 뚜껑이 열렸습니다. 죽은 청년이 살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12년이나 혈루병으로 고생했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병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오라버니를 잃은 슬픔 가운데 있었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평소 가까이 지냈던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나사로를 부르실 때 돌무덤 문이 열렸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 만나면 사망의 문, 어둠의 문이 열리고 질병이 떠나가고 건강의 문이 열리며 새 소망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3:20)고 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이니"(2:5)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 하여 생명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님을 사랑하고 교제를 나누다가 주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에바다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에바다의 은혜는 육적인 면 보다 영적인 면에서 더 소중합니다.

.에바다의 은혜를 통해 받는 복이 무엇인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에바다의 은혜를 받기위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 상고해 보았습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기도하는 자에게 *주님은 만나 주시고 에바다의 은혜를 주십니다. 아멘.



달리다굼 신앙 막5:33-43, 살전1:2-10

 

얼마 전 체첸 반군에 의한 테러 사상자 중 대부분이 어린이들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했습니다. 이런 슬픔은 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아픔의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래 전 개구리 소년들이 이유도 없이 사라졌다가 몇 해 전 유골로 발견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범인들에 의해 유괴 되어 죽거나,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 가족은 물론,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는 어린 딸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예수를 찾아갔습니다(5:41) 예수님은 아이로의 부탁을 받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 그 아이가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하시니 아이가 살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달리다소녀’ ‘일어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달리다 굼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활동하는 건강한 소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도 병든 소녀와 같이 시들시들한 모습을 가지거나 죽은 소녀처럼 죽은 신앙의 모습을 지닐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사람들에게 기쁨 대신 염려의 마음을 줍니다. 소녀가 주님 은혜로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오늘 우리도 건강한 신앙을 되찾아 믿음의 승리자가 되기를 원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달리다굼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달리다굼 신앙은,

 

1.불신앙에서 일어나 강하고 담대한 큰 신앙입니다.

 

5:39-40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했습니다. 여기 예수님을 비웃은 사람들은 헌화하며 울고 떠드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장례의 슬픔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소녀를 위하여 어떤 책임이나 필요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장례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비웃는 냉소적인 사람들입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은 언제나 신앙에 대해서 냉소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일에 무지하기 때문이지만 문제는 신앙인이라고 하는 자들 중에서도 불신앙의 모습으로 사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급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또 수많은 기적을 보았음에도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들이 불신앙으로 불평하고 원망할 때 하나님은 노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이런 불신적인 삶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어떤 죄 보다도 불신앙의 죄를 크게 보시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불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큰 믿음의 사람을 만나면 더욱 기뻐하십니다. 복음서 본문에 12년 동안을 혈루병으로 고생한 여인이 예수님 소문을 듣고 주님의 옷자락만 잡아도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연약한 몸으로 무리들을 헤치고 주님의 옷자락 잡는 순간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을 드러내시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어린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내 딸을 좀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절망적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연약한 믿음으로 불신앙에 빠지면 작은 일에도 두려워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큰 관심사중 하나는 건강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들의 생활 여건이 자유롭고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좀 아파도 혹시 노종양이 아닌가? 소화가 잘 안되어도 혹 위암에 걸린 것이 아닌가? 또 조금 피로한 기색이 나타나도 간염이나 당뇨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밤에 잠이 오지 않아도 노이로제는 아닌가? 기침이 조금 심해져도 혹 폐결핵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두려움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마음은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마음이요, 환경을 초월한 평강의 마음입니다. 딤후1: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살전1:6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편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많은 환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가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면 모든 두려움과 염려에서 자유 하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환란은 물론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는 자와 사별 앞에서도 평안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로 알려진 죠지 뮬러는 어느 날 40년 동안 동고동락해오던 아내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죠지 뮬러는 아내를 잃은지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세일렘 교회의 저녁집회에서 밝은 얼굴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은혜로 제 아내를 오랫동안 참고 견디어 온 고뇌로부터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평안히 이르게 하셨습니다. 지금쯤 제 아내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으로 감격에 차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정말 기쁩니다.”

믿음 없는 불신앙의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불신앙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 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 없이 믿는 성도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불신앙에서 일어나 강하고 담대한 큰 신앙으로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2.영적침체 상태에서 일어난 장성한 신앙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 하다 시련을 만나면 엘리야가 롬뎀 나무 밑에서 죽기를 간구한 것처럼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았던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범죄 하고 한동안 영적 침체에 빠져 괴로워 한 것처럼 형통의 때에 깨어 기도하지 않다가 시험에 들어 영적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야이로는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불신의 소리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소유했던 믿음을 계속 소유할 수 있기를 원하셔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에 따라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장성한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확신 가운데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서신서 본문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방인 성도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는 많은 환난 중에서도 사도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만한 훌륭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살전1:4-5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말로만 믿는다고 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가진 견고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장성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성도의 은혜 체험은 장성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복음서 본문에 낙심하는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소녀가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집에는 훤화하는 소리와 울며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울음 바다였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 절망하며 슬퍼했습니다. 이는 믿음도 부활의 소망도 없는 현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무리들 다 배제시키고 세 제자만 데리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성도가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내 안에 불신앙의 요소, 부정적인 요소, 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밭에 있는 돌을 골라내듯 골라서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의 눈으로 위를 보고 전능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은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 안에서 장성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한 여성이 하루는 눈이 아파 안과에 갔습니다. 의사는 "눈이 너무 지쳐있군요. 당분간 휴식을 취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업무가 바빠서 한시도 쉴 수 없었던 그 여성은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만약 일하는 곳에서 산을 볼 수 있다면 눈이 피로할 때마다 그곳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피로가 풀릴 것입니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면 우리의 영적인 눈과 마음은 곧 피곤함에 지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안과의사의 처방대로 산을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121:1-2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했습니다. 우리의 심신이 지치고 피곤할 때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주의 도우심을 구할 때 새 힘을 얻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견고한 믿음, 장성한 믿음, 활력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 침체에서 일어나 장성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형식적인 믿음에서 일어나 순종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사도가 2차 전도 여행 때 동료들과 함께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그 성도들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렸는데, 그 감사의 이유를 3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자는 입술로는 신앙을 말하면서 실천에 옮기는 행위가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은 소녀가 죽은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런 신앙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신앙을 가진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습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11:46)” 순종과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 희생과 수고가 없는 사랑, 인내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소망은 빛 좋은 개살구처럼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합니다. 순종과 행위가 따라오는 믿음이라야 살아 있는 믿음이고, 희생과 수고가 따르는 사랑이라야 참 사랑이며,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는 소망이라야 진정한 소망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 믿고서 삶의 형편이 좋아지거나 편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짐으로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복음을 받았으며, 복음 전파자들과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6).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9)” 더 나아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그들로부터 퍼져나갔고, “하나님을 향하는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두루 퍼졌습니다(7-8). 그들의 믿음은 입술로만 말하는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순종의 행위가 따르는 산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내게 손해가 와도 과감히 버리고, 주님의 뜻이라면 내가 싫어도 순종하는 신앙이 산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런 신앙의 사람을 보시고 사랑하시며,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이런 신앙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무디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 교인 가운데 양조장을 크게 짓고 개업 예배를 드리게 된 이가 있었습니다. 개업 예배를 마치고 이제 마지막 순서인 축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앞으로 나갔습니다. 목사님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 하나님! 이 양조장이 오늘 예배드리고 내일 문을 열게 됩니다. 이 양조장 문이 열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문이 열리면 엄청난 술이 생산될 것입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이 술을 마시고 타락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먹고 취하여 제 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 하나님이시여! 제발 오늘 밤 이 양조장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주셔서 이 양조장 문이 내일 열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내용의 축복기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예배 후 축하 파티를 하려다가 모두 당황하여 돌아가 버렸습니다. 양조장 주인은 밤새 고민했습니다. 한숨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에 그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양조장 문을 열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건물이 후에 무디 신학교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살면서 죄와 멀리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죄와 가까워지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자는 주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의 소욕을 따라 살지만, 산 신앙인은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죄와 싸우게 되고, 죄를 미워하고 버리게 됩니다. 이 신앙이 산 신앙이요, 달리다굼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정리합니다. 달리다굼 신앙은,

 

1.불신앙에서 일어나 강하고 담대한 큰 신앙입니다.

 

2.영적침체 상태에서 일어난 장성한 신앙입니다.

 

3.형식적인 믿음에서 일어나 순종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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