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창세기 11:1-9

• 제목: 니므롯의 반역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 주일마다 한 가족된 성도들과 함께 삼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영광스럽고 복된 현장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 깊은 영적 교제를 누립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즐겁게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됩시다.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잘 경청해야 합니다. 또한 잘 듣는데서 멈추지 마시고, 잘 깨닫는 성도들이 됩시다. 듣고 깨달을 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으면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선언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사 6:9). 얼마나 가슴 아픈 말씀입니까! 선지자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알지 못한다니. 우리 성도들은 이런 비참 가운데 있으면 안 됩니다.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듣고 깨닫는 백성들이 됩시다.

또한 예배 중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뿐만 아니라 행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서에서 가르칩니다(약 2:17,26). 그러니 예배 중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행함으로,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신령한 예배자들이 됩시다.

동시에 이 영광스럽고 복된 예배가 공격 받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특히 참 예배가 아닌 거짓 예배로 주님의 백성들을 교묘하게 속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거짓 예배를 만들고 속이는 자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말씀의 주제와 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주제: 하나님은 거짓 예배자들을 징계하심으로 죄를 억제하셨습니다.

1. 성과 탑을 건설한 사람들

2. 성과 탑이 건설된 목적

3. 하나님의 심판과 억제된 죄

 

본론

1. 성과 탑을 건설한 사람들

본문 2-4절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려줍니다. 2절에서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고 했습니다(4절).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본문은 구체적으로 이들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이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0장과 연결해서 읽으면, 이들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들이 머문 장소가 ‘시날 평지’입니다. 창세기 10:8-10절을 보면, 시날 평지에서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줍니다. 함의 자손에서 태어난 니므롯입니다(창 10:8).

창세기 10장 10절에서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0장 10절 말씀에서 두 가지 중요한 용어를 발견합니다. “그의 나라”라는 말과 “시날 땅의 바벨”입니다. 곧 함의 후손 니므롯이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에 속한 땅 중에 한 곳이 바로 시날의 “바벨”입니다. 니므롯은 작은 동네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고, 그 나라에 속한 땅 중 하나가 시날의 바벨입니다.

이제 명확해졌습니다. 성읍과 탑을 만든 이들은 바로 노아의 아들 중, 함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니므롯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숨을 고르면서 한 번 더 본문을 살펴야 합니다. 본문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우리는 지금까지 시날 평지에 바벨을 건축한 사람이 니므롯이라고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본문 2절을 통해, 함의 후손 중 니므롯이 이끄는 일단의 무리들이 동방으로 옮겨와서 그곳에 정착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 2절의 동방으로 옮긴 “그들”이 누구인지를 앞 문맥과 연결하여 생각해 봅시다. 참고로 성경의 장, 절 구분은 원래 성경이 기록될 때는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몇 장 몇 절이라 부르는 것은 후대(주후 13-15세기)에 성경을 읽는 이들이 분류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10장 마지막과 11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본문 2절을 다시 읽으면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창세기 10장 21절 이하는 셈의 후손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셈의 후손들 중 일부가 동방으로 옮기다가 니므롯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시날 평지에 이르렀고, 셈의 후손과 니므롯이 힘을 합쳐 바벨 성과 탑을 건설했다는 이해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문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근거도 있습니다. 창세기 10:25절입니다. 셈의 후손 중 에벨이 벨렉과 욕단은 낳는데,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라고 합니다.

바벨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인간들을 보신 삼위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강림하셔서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그 흩으심이 언제인가에 대한 정보가 창세기 10장 25절에 나옵니다. 곧 에벨이 벨렉을 낳을 때입니다. 성경이 매우 의도적으로 세상이 나뉜, 다르게 말해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여 인류를 흩으신 일을 셈의 족보 중에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이 일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세 아들들에 대해 말한 내용을 근거로 생각할 때, 함의 아들인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셈은 축복을 받았습니다(창 9:22-27). 저주 받은 함의 자손들 중에서 니므롯이 나왔고, 그 니므롯이 성읍과 탑을 건축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노아의 아들 중 셈의 후손들 가운데 일부가 불신앙의 모습으로 변절하는 것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는 누가 바벨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에 탑을 만들었는가를 살피는 중입니다.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함의 후손 니므롯이 이 일을 주도했습니다. 다른 해석을 참고하면, 셈의 후손 중 일부도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니므롯이냐 셈의 후손이냐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대체 이들이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이들은 모두 언약 백성입니다.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홍수 심판 이후에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노아뿐만 아니라 노아의 아들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과 모든 생물들입니다(창 9:8-11). 이 점이 제일 중요합니다. 니므롯도, 셈의 후손들도, 모두 언약 백성들입니다. 오늘날로 말씀드리면 이들은 모두 교회입니다. 성도들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모두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이 바벨 운동의 핵심입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 모였다고 해서 모두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라는 신분을 가지고 모였으니 모두 교회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겉으로 볼 때, 바벨 운동을 일으킨 이들은 모두 성도요 교회로 모였습니다. 겉과 속이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교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사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성도라고 자부심을 갖는 일은 좋습니다. 그러나 삶의 실제가 탑을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 자기 이름을 내려는 욕망으로 똘똘 뭉쳐있다면, 우리는 바벨을 건설한 이들과 동일한 거짓 교회가 될 가능성이 짙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살피는, 특별히 우리의 예배를 살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성과 탑이 건설된 목적

우리는 첫 번째 대지에서 함의 후손인 니므롯과 셈의 후손 중 일부가 연합하였음을 살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겉으로 보기에 불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들임을 살폈습니다. 곧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우리는 자주 함의 후손 니므롯은 세상사람, 믿지 않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형식적으로 교회입니다. 바로 그 교회가 성읍을 건설하고 탑을 쌓았습니다.

이들이 건설한 성읍과 탑은 작은 시골 마을이 아닙니다. 이들은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이 도시는 거대한 제국을 목표로 하는 첫 출발과도 같습니다. 창세기 10:10-12절은 이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니므롯은 시날의 바벨을 시작으로 니느웨도 건설합니다. 후일 니느웨는 대 제국의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니므롯 당대에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는 바로 레센입니다. 창세기 10장 12절을 봅시다.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니므롯은 한 지역에서 한 도시를 건설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지역에, 여러 성읍을 건축했습니다. 그는 대 제국을 건설할 원대한 꿈을 가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니므롯은 그의 조상 노아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단히 충실한 모습을 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맺으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번성하라고 했습니다(창 9:1,7). 니므롯은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고 번성하는 사명을 열정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온 세상에 건설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도시 건설의 목적이 본문 4절에서 명백하게 밝혀집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도시를 건설하는데 그 도시에 탑도 건설합니다. 여기 탑은 신전을 의미합니다.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말 속에는 도시 건설의 목적이 그대로 잘 드러납니다. 탑을 건축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이유는 니므롯, 그리고 그와 협력한 이들이 도시를 건설하는 목적을 정확하게 밝혀줍니다.

첫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는 것. 둘째, 우리 이름을 내는 것. 셋째,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는 것입니다. 여기 탑을 쌓는 언약 백성들의 더러운 욕망이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겠다는 열망은 마치 가인이 에덴의 동편에 성을 만들고 호시탐탐 에덴의 동산을 정복하고 말겠다는 욕망을 보는 듯합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고 말하는 부분에서도 동일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진실하게 믿는 신자는 결코 자기 이름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영광과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주기도문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벨 운동을 일으킨 이들은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합니다. 뱀의 유혹으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할 때,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금단의 열매를 먹은 것처럼. 이들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흩어짐을 면하자는 슬로건은 정말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흩어져 하나님 나라의 도성을 세우는 일은 많은 수고가 뒤 따릅니다. 그러나 한 번 수고하여 이룬 업적을 누리는 것은 달콤하고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한 곳 개척하여 어느 정도 성장시킨 후에 그곳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처럼, 다른 곳에 다시 교회를 개척해야 된다고 하면 부담을 느끼는 것과 흡사합니다. 흩어짐을 면하자는 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력적인 호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라 하셨고, 땅을 정복하라고도 하셨습니다.

바벨 운동의 핵심은 탑을 건축하는 모습에서 그 본질이 잘 드러납니다. 탑은 일종의 신전입니다.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은 신에게 경배하는 예배의 현장입니다. 그 탑을 하늘 꼭대기까지, 자신들의 이름을 위해,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시를 건설한 니므롯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속으로는 인간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욕망을 가졌으면서 겉으로는 마치 하나님의 왕국인양 멋지게 포장했습니다.

니므롯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장엄하며 은혜가 넘치는 핵심 가치인 예배를 교묘히 변질시켰습니다. 가짜 예배를 만들면서 마치 하늘의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행했습니다. 이것이 예배전쟁의 전형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구속역사의 결정적인 순간 마다, 그리고 교회역사의 큰 전환기마다 이 예배전쟁은 지속되었습니다. 거짓 교회는 예배 아닌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예배라고 말하고 선전하며 광고하여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책망하는 말씀과 흡사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성도 여러분!

참 예배는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예배가 사람의 공적을 축하하는 자리로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배라는 영광스러운 용어 앞에 무슨 수식어를 너무 많이 붙이는 시대에 살아갑니다. 諰기념 예배”, 諰감사 예배”등등. 사람을 높이는 수식어가 예배 앞에 붙지 않도록 합시다.

예배는 삼위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언약이 재현되는 교제의 현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백성들은 그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 기쁨과 즐거움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현장이 예배입니다. 이러한 교제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예배 시간이 지루하고 하품 나는 시간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를 회복합시다. 사단이 이 예배를 공격합니다. 예배를 공격하는 사단의 계략을 능히 물리치는 예배 파수자들이 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심판과 억제된 죄

바벨 성과 탑을 건설한 이들이 그토록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다름 아니라 하나의 언어였습니다(1절). 우리는 경험적으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지를 모두 압니다. 외국 여행을 가거나, 외국인을 만나 단 5분만 대화를 해도, 말이 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짚고 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언어가 하나라는 뜻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1절을 다시 번역하면, “온 땅에 언어가 하나요 생각이 같았다”입니다. 그러니까 말이 하나이기도 하지만 사상이 같았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말은 인간의 사상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후손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그 언약에 신실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언약에 신실할 때 생각이 같고, 언어도 하나여서 의사소통이 원활하다면, 사명을 이루는데 얼마나 큰 진보가 있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곧 같은 생각, 같은 언어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신 큰 복입니다. 그러나 니므롯과 그를 따른 무리들은 그 복을 악하게 사용했습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한 백성들의 모습을 보신 여호와께서는 그들 가운데 내려 오셨습니다. 5절에서 “사람들이 건설하는”이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들이 건설하는”입니다. 이 표현은 아주 의도적입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이들의 본질이 범죄한 아담(사람)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도성을 건설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 같지만 그 본질은 거짓 예배를 확산하려는 이들의 속셈이 ‘사람의 아들들’이라는 표현 속에 잘 드러납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5절에서 “내려 오셨더라”는 말씀도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입니다. 이는 창세기 3:8절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여호와의 강림은 늘 두 가지 행동을 포함합니다. 자기 백성은 구원하시고 대적은 진멸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내려 가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겠다고 말씀합니다(7절). 여기에서도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 사용됩니다. 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하셨습니다. “자”라는 말씀은 수사적 표현인데, “오라”는 뜻입니다. ‘오십시오! 여러분, 우리 같이 성읍과 탑을 건설합시다!’라는 열정적이고 힘찬 동원의 구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누가 먼저 사용하느냐 하면, 바벨 성읍과 탑을 건설한 사람들입니다(3-4절). 삼위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들의 열정으로 그 분 자신도 그렇게 똑 같이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모조 하나님 왕국과 거짓 예배를 만드는 구나’

‘그래, 나도 너희의 열정에 버금가게 거짓 예배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너희를 심판하겠다’

결국 삼위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결국 도시 건설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바벨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히브리어로 혼잡하다는 말은 “바랄”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라 인간 도성을 만들고, 참 예배가 아니라 위조 예배를 만들려던 거짓 교회의 도전은 박살났습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거짓 백성들이 아무리 보기에도 좋고 듣기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만들고 예배를 드려도, 결국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니므롯 시대에 모든 것을 아시고 심판하신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참 예배자들의 예배를 받으시며, 거짓 예배자들의 예배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모조 예배를 만드는 이들을 심판하셔서 죄를 억제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비록 우리가 힘없고 연약하여 겨우 겨우 예배를 이어가고 있지만, 그런 우리의 예배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고대합시다. 연약하지만 참 예배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자기 백성들과 교제하기를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을 높이는 성도들이 됩시다.

 

결론

바벨 운동, 곧 위조 하나님 나라 건설과 거짓 예배의 주도권은 함의 후손 니므롯이 가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예배의 상징물인 탑을 건설하려 했습니다. 니므롯은 언약의 외인이 아닙니다. 그는 겉으로 볼 때 언약 백성입니다. 그러니 교회입니다. 교회가 니므롯의 길을 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동시에 교회가 거짓 예배 운동을 펼칠 때 기꺼이 심판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참 예배를 보존하며, 즐기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예배전쟁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리는 복된 교회, 건강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 설교 이해를 위한 질문

 

1. 창세기 10장 10-12절을 참고하여, 시날 평지에서 바벨의 성읍과 탑을 건설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2. 본문 2절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라는 말씀과 창세기 10:21-32절을 연결하여 생각할 때, 니므롯의 바벨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3. 노아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서 언약 당사자는 노아뿐만 아니라 노아의 후손들도 포함됩니다. 이것이 바벨 운동을 일으킨 이들의 신분을 어떻게 이해하게 만듭니까?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4. 바벨 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탑을 건설합니다. 그들이 탑을 건설한 목적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5. 니므롯이 성읍과 탑을 건설한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며, 특히 이것이 오늘날 예배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는 경고는 무엇입니까?

 

6. 본문 1절은 언어가 하나라는 정도의 말씀은 아닙니다. 생각도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왕국 건설과 바른 예배를 위해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들로 그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하는지 점검해 보고, 혹 우리의 욕망이나 우리 이름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7. 하나님께서는 니므롯의 반역을 제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위해 일하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제거하기를 바라는 잘못된 예배 관행은 무엇입니까?

찾아 주시는 은총 창3:8-15, 2:14-18

 

하나님께서 여러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 주시고 만나 주십니다. 직접 찾아와 주시기도 하시며, 천사를 통해, 양심을 통해, 꿈을 통해, 사람을 보내시어, 자연 만물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기도 하십니다.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우주항공국의 연구원이며 메릴랜드대학교의 천문학교수인 김모 박사가 한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가 그 가정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셨습니까'김 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에서 천문학을 전공하고 미국에 유학을 와서 계속 같은 분야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하늘의 별들을 자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제 마음속에 이처럼 정교한 우주가 절대로 우연히 생길 수가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위대한 수학자요, 물리학자요, 생물학자요, 화학자요, 광물학자요, 엔지니어가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가 생겨날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성경을 접할 기회가 생겼는데 성경을 펴자마자 첫줄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순간 ,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면 그렇지제가 혼자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과 창세기 첫 문장이 맞아떨어진다는 대답을 얻었습니다. 다음주일에 저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이후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학문을 편견 없이 정직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사실상 과학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작은 한 부분을 연구하는 활동입니다. 생물을 연구하면 생물학자요, 곤충을 연구하면 곤충학자입니다. 하나님과 학문은 절대로 상반되는 분야가 아닙니다. 의사들 중에 많은 분들이 예수 믿는데, 그들이 신비한 인간의 육체와 생명을 자세히 연구해서 알면 알수록 창조의 신비를 더 쉽게, 더 확고하게 받아들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강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찾아 주시는 은총"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주심은,

 

1.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죄인을 찾아주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주기도 합니다. 일 때문에 찾아가 만나기도 하고, 교제를 나누기 위해 만나기도 하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등 등 찾아 만나게 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와 만나 주시기도 하시고, 사단도 목적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합니다. 에덴동산에도 사단이 방문하였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잘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을 싫어하고 방해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파괴시키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훼방을 합니다. 사단은 미혹하기 쉬운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게 하고, 하와를 통해 아담까지 시험에 들게 하여 하나님께 범죄 하게 만들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3장 사이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신 영광스러운 창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창조와 함께 사단과 사단의 미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늘날 사단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할 만큼 큰 영향력으로 인간을 미혹하고, 위협하며, 죄 가운데로 이끕니다.

 

본문에서 사단의 미혹을 받아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의 특징은 숨어 다니려고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사람을 피하고, 경찰을 피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두려움을 가지고 동산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숨어있는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자를 찾아오심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실패한 자를 찾아오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실패하면 낙오자가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대했던 사람이 실패하면 등을 돌립니다. 비난하고, 멀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자들에게 가까이 찾아오셔서 다시 일어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범죄 한 죄인을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면서도 죄가 들어나 정죄를 받게 되면 모두 싫어합니다. 감옥에 갔다 왔다면 사람들이 전과자로 낙인을 찍어 그 사람을 상종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고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들이기 때문에 가까이하셨습니다. 죄인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신약 본문 히2: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도'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셨으며,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지만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죄인과 병든 자들을 위해 오셨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택하여 부르시고 가르치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며 가르침과 훈련을 받고, 수많은 이적을 보았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며,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고, 주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낙심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 와 만나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실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실패한 자들을 찾아와 만나 주심으로 다시금 새 힘을 얻어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죄인을 찾아 구원하려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때보다 마음에 새겨야할 절기가 바로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우리 모두 죄인을 찾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감사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려 찾아주시는 은총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찾아오심은 우리의 죄를 없이 하려고 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미혹을 받아 범죄 함으로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원죄라는 것을 안고 태어납니다. 이 죄가 모든 불행의 뿌리입니다. 사망의 뿌리, 저주의 뿌리가 되어 질병을 유발하기도 하고, 마음을 파괴 하고, 가정을 파괴 하고, 환경을 파괴 시키고, 결국 심판과 멸망으로 이끌어 갑니다.

 

죄인인 우리는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모도, 어떤 의인도, 돈이나 공로로 죄를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1:21"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1:29)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2:24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서 죄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3: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고 하였습니다. 저주의 나무에 달리시고, 저주의 가시체로 태형을 받으시고, 저주의 가시관을 쓰시고, 저주의 대못과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죄 사함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하나님과 화목의 길을 터 놓으셨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고, 에덴의 축복과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 이방인에게도 열리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피 흘림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죄 사함 받을 길도,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길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담당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만이 이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물로도, 불로도, 아무리 좋은 세제로도, 수양과 고행으로도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울어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됩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의 피로만 됩니다. 피가 생명이기 때문에 보상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 할 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은 죄에서 해방 되어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미혹으로 죄에 빠진 인간은 실패의 존재입니다.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셨던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과 존귀와 지배권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을 당하고,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지위를 잃어버렸습니다. 범죄 한 인간은 사단의 노예, 죄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권세,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의 세력을 멸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주님 안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과 사단의 종이 아니라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 되고, 하늘 기업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아무도 정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 안에서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죄에서 해방 된 자답게 자유 함을 누리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늘 백성으로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3.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찾아주시는 은총입니다.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부끄러워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3:21) 그의 부끄러움을 가리워 주신 것입니다.

 

신약 본문 히2:16오직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18절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은 세상에서 고난을 친히 경험하신 분이시므로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도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고후 1:3~5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전능하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방면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거처할 방 한 칸 정하지 못해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집 없는 사람들의 서러움을 아십니다. 헤롯의 칼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피난민의 심정을 아십니다.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성장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가난한 노동자의 심정을 아십니다. 40일을 금식 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기에 시험 당하는 자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가는 곳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핍박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핍박 받는 자들의 심정을 아십니다. 친히 가르친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배신당한 사람들의 쓰라린 심정을 아십니다. 유대인들의 고함소리에 못 이겨 빌라도가 내린 억울한 재판으로 흠과 티가 없는 주님이 흉악한 죄수가 되어 십자가의 극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심정과 그 고통을 아십니다. 이러하신 예수님은 어떤 형편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처지를 아시고 위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위로는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나,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사람이라야 나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신 분이기에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도 다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비천하고 가난한 자라도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고,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도우시면 아무리 비천한 자라도 존귀하게 되고,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의인이 되고, 아무리 절망에 빠진 자라도 소망이 넘치는 자가 되고, 아무리 흉악한 귀신에 사로잡혀 형편없는 자라도 온전케 되며, 죽을병에 걸린 자라도 치유되는 은혜를 받게 되고, 지옥 자식이 변하여 하늘 백성이 됩니다.

 

진화론을 주창한 찰스 다윈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833년의 일이었습니다. 영국의 다윈은 자기의 이론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상태를 찾아 나섰습니다. 남양군도에 간 다윈은 아주 미개한 식인종의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거의 짐승에 가까울 정도로 원시적이었습니다. 다윈은 이러한 인종은 결코 개화되거나 발전될 수 없는 부류의 인종이라고 확신하며, 이들이야말로 자기의 진화론의 이론을 뒷받침 할 수 있다고 믿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 34년이 지난 후, 다윈은 다시 예전의 그 남양군도의 섬을 방문했습니다. 이번에는 다윈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리둥절한 다윈의 눈에, 섬 여기저기에 교회들이 서 있고, 학교가 있고, 짐승 같았던 야만의 식인종들이 이제는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30여 년 전의 식인종들이 이제는 옷을 입고 다니며 모여서 함께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윈에게는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이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패톤이라는 선교사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그 섬에서 일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큰 감명을 받은 다윈은 패톤 선교사를 보낸 영국의 런던 선교회에 거액의 헌금을 보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곳에는 반드시 새 생명, 새 인생, 새 날과 새 행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가리켜 복음(福音)이라고 합니다.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이 소망하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친히 찾아 오셔서 우리 도우시러 오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며 가까이 하는 대강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대강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찾아 주시는 은총"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주심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죄인을 찾아주시는 은총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죄에서 자유하게 하려고 찾아주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찾아주시는 은총입니다. 아멘.

 

거룩함의 자리로 돌아가요     창세기35;1-15

 

믿음이란 거룩함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야곱은 숙곳에 정착하여 장막을 치고 짐승들의 우릿간을 만든다.

 

그런가 하면 제단을 쌓아서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중심으로, 예배 중심으로, 믿음과 은혜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신앙인처럼 사는 것처럼 인정할 수도 있고, 믿을 수도 있고, 확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지 못한다면 절대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7:21-23에서 어떤 이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신앙인인 척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계신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야곱에게 어떻게 살기를 원하고 계실까?

하나님은 야곱을 어떻게 인도하시면서 믿음의 사람, 믿음의 족장으로 세워가고 있는가?

 

1. 위기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야곱이 숙곳에 정착하여 거류한 지 10여 년에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들이 누이동생이 당한 수치를 되갚아 준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서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할례제도를 활용하여 살인죄와 노략질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야곱은 커다란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야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이제 가나안 사람들이 큰 연합군을 형성하여 자신들을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야곱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해 올 것을 생각하면 이젠 우린 쫄딱 망했구나. 잘난 자식들 땜에 이젠 우린 쫄딱 망해서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구나.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하면서 탄식하고 있다.

 

아무런 방법도 찾아내지 못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이 큰 곤경에 처할 때마다 찾아오셔서 가장 필요한 말씀을 주신다.

형의 노여움을 받고 아버지 집에서 외삼촌댁으로 도망갈 때도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이젠 더 이상 외삼촌댁에서 살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밧단아람에서 모든 식솔들을 이끌고 돌아올 때는 천군 천사들이 찾아오시고, 얍복강 나루턱에서도 찾아오신다.

이제 숙곳에서 10여 년 살다가 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면서 야곱에게 새로운 길을 향하여 떠나도록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신앙인들이 정말 견디기 어려워할 때, 정말 힘들어할 때, 정말 죽기보다 더 힘들어할 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인들을 굳건하게 붙들어주신다.

 

요즘 코로나와 경제적인 난국 땜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요즘은 예배조차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형극이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다.

 

2. 정결한 신앙인으로 탈바꿈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위기 속에서 찾아오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최초로 자신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단한다.

야곱은 모든 가족들, 식솔들을 한군데로 불러 모은다.

야곱은 모든 가족들과 식솔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라고 말하면서 가족들을 독려한다.

 

야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가족들과 식솔들에게 모든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정결하게 탈바꿈하고 벧엘로 올라가자고 말한다.

너무나 단호한 야곱의 모습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너무나 단호하게 야곱이 독려하자 모든 가족들, 식솔들은 어느 누구도 반항하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4절에서 모든 가족들은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때 라헬은 아버지 집에서 나올 때에 훔쳐서 가져온 드라빔도 함께 버렸을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귀고리까지도 다 내어놓는다. 그러면 왜 귀고리까지 내어놓았을까?

 

오늘날의 귀고리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악세사리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에는 우상과 같은 것들이다.

지금도 메스컴을 통해서 아프리카 원주민 여인들을 보면 귀고리뿐만 아니라 온몸에 치렁치렁 무언가를 달고 살아간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드리는 예식과 같은 것들이다.

 

야곱의 가족들과 식솔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넘어온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들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여전히 밧단 아람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히 온몸에 치렁치렁 밧단 아람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 우상을 섬기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지금까지 살아오던 옛 풍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내어놓고 이제야 말로 하나님의 언약백성답게 변모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온전하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삶은 지금까지 살던 옛 모습, 옛 관습, 옛 풍습, 옛 마음, 옛 생각을 과감하게 버리고,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믿음으로 바뀌고 변화하여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인들이 온전하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삶을 사는 것은 옛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옛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품고 살게 되면 신앙인인 척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신앙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3. 신앙인을 지켜주시기 위하여 불신자에게 두려움을 넣어주시는 하나님.

 

야곱이 일행들을 이끌고 10여 년 동안 정착하여 살던 숙곳을 떠나서 벧엘로 올라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주변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두려움을 넣어준다.

 

5절에서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라고 말씀하신다.

아들들이 살인자가 되고, 노략질함으로서 야곱은 가나안의 주변 사람들이 연합하여 자신을 해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했었는데, 이제는 도리어 주변 가나안 사람들이 더 이상 야곱일행을 해치면 안 된다,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는 큰 재앙을 당한다.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주민들에게 도저히 야곱 일행을 추격할 수 없도록 두려움, 무서움, 악몽을 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이든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은 불신자들이든지 모든 인류들의 마음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 조종해 나가실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신앙인들을 굳건하게 지켜주시기 위하여 신앙인들을 위협하는 불신자들에게 커다란 두려워하는 마음, 무서워하는 마음을 주시면서 지켜주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나, 그 어떤 자들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른 엄연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넣어주시면서 굳건하게 지켜주신다.

우리가 설령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중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은 굳건하게 불신자들의 압제에서, 핍박에서 건져주시고 지켜주시고 막아주신다.

 

4. 예배드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야곱에게 옛날에 아버지 집을 떠나서 밧단 아람으로 갈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와서 만나주었던 그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신다.

 

야곱도 모든 가족들, 식솔들 앞에서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라고 당당하게 선포하였다.

 

숙곳을 떠난 야곱의 일행들은 이제 바로 그 벧엘에 올라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나 주셨던 그 벧엘에 도착한 야곱은 돌을 모아서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제단을 쌓는다.

돌로 번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신앙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가장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올려드린 후에 다른 것들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어떤 위기와 위험과 역경과 시련 앞에서도 가장 먼저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신다.

코로나 위험 속에서도 신앙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올려드리는 일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만나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감동을 주시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승리케 하시는 은혜와 믿음과 능력을 주신다.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

 

야곱이 벧엘로 올라와서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쌓고 희생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야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복을 주시면서 10-12절에서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제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면서 다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축복해 주신다.

 

본래 이 축복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숙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벧엘로 돌아왔더라면 곧바로 주실 축복이다.

그런데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숙곳으로 가서 10여 년 동안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그만큼 늦게 축복을 받은 것이다.

좀 더 일찍 받을 수도 있었던 축복을 야곱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늦어지고, 당하지 않아도 될 딸이 성폭행을 당하는 수치와 아들들이 살인자가 되고, 그러므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아야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순종하면 곧바로 주시지만, 불순종하게 되면 그 만큼 늦어지는 것이다.

불순종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축복은 늦어지기는 하지만 그대로 주신다.

하나님은 온전하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야곱에게 12아들을 채워주신다.

물론 막내아들 베냐민을 낳으면서 라헬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돌아가는 아픔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했던 12번째 아들을 낳음으로서 이스라엘의 12지파의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해 나가게 된다.

하나님은 좀 더 일찍 축복을 주시고 싶어하셨다.

그런데 야곱이 불순종함으로 축복이 그만큼 늦어진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바로 순종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예비해 놓으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야곱은 아버지 집에서 밧단아람으로 가던 길에 돌로 베개를 삼아서 잠을 자던 그 자리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다리를 통해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셨던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서 자신이 서원했던 대로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붓고 기름을 부으면서 제단을 쌓고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던 복을 받게 된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우리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거룩함이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라고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거룩함이란 아주 단순하다.

 

거룩함이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을 창조주의 자리로 올려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인 성경은 본래 정경의 자리로 돌려드리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그 위치에 피조물이 마치 자기가 창조주나 되는 것처럼 창조주의 자리를 빼앗아버리고,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이 온갖 경배와 숭배의 대상이 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 자체가 교만이요 죄악이요 거룩함을 파괴하는 행위요 바벨탑이다.

 

거룩함을 회복하는 길은 삼위 하나님을 삼위 하나님의 위치로 되돌려드리면 된다.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로 되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인간들이 창조주의 자리를 빼앗고 창조주가 계셔야 할 그 자리에 인간이 앉으려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인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주의 자리로 올려놓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해마다 신년이 되면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 달려가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것은 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우상숭배의 모습이다.

떠오르는 태양은 신년이 되는 그날에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그 시간이 되면 동일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신년이 되어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소원을 비는 행위가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행위이다.

정월대보름이나 보름날에는 환하게 떠오른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것이 바로 달을 숭배의 대상으로 사는 것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소원을 빈다.

소위 어떤 분야에 뛰어난 인물들을 스타(Star)라고 부른다. 분명히 똑같은 사람인데 누군가를 향하여 스타라고 부르는 것은 별을 숭배하는 행위이다.

 

무언가에 탁월하게 뛰어나거나 예쁜 여인을 여신(女神)이라고 부르면서 치켜세운다. 인간의 마음속에 여신을 숭배하는 마음을 넣어서 그들은 뭔가 나와 다른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면서 그 여인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곧 니므롯을 태양신으로, 세미라미스를 달신으로, 담무스를 별신으로 섬기는 전통적인 바벨론전통종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짐승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민족에게 아주 익숙한 짐승의 이름으로 12지간의 띠를 만들어서 자신은 00띠라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짐승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토템이즘(Totemism)에 의해서 만들어진 무속신앙에 불과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주신 양성(兩性)제도를 거부하면서 제3의 성, 젠더(Gender)라고 하면서 족보에도 없는 이상한 성을 만들어서 성평등을 요구하는 행위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어떤 정신 이상한 목사라는 사람들이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성적인 본능이라고 주장한다.

 

불신앙인들이 동물의 띠나 해와 달과 별들에게 소원을 빌거나 특정한 짐승을 반려동물이라고 하는 것이나 동성애를 주장하거나 젠더를 주장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소위 신앙인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그것도 성직자요 목회자라고 하는 이들이 이런 것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믿는 삼위 하나님이나 성경은 내가 믿는 삼위 하나님과 성경이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헷갈리게 한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삼위 하나님이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들과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가 믿는 삼위 하나님이나 성경에서는 이런 것들을 정당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런 것들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죄악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동성애자나 수간자들은 반드시 죽여서 죄를 없애고 거룩함을 회복하라고 명령하신다.

 

오늘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라. 벧엘로 돌아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족들과 식솔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라고 단호하게 선포하면서 일행들에게 변화된 삶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일행들은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고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리고 벧엘로 돌아간다.

 

우리들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코로나 19바이러스를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송순단이라는 진도출신 무당과 정영만이라는 남해무당이 서울 역삼동에 있는 LG아트센터에서 지난 628일에 씻김굿을 한국문화재단과 외교부와 문화재청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조선말에 명성왕후라는 민씨가 주관하여 경복궁에 무당들을 불러서 온갖 굿을 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하게 하더니 이제는 행정부가 주관하여 굿을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코로나 19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굿을 했으면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급속도로 더 퍼져나가게 되었다.

계속 확진자가 나오면서 교회에 그 책임을 전가시키고 예배를 전면적으로 금지시키면서 교회를 탄압하고 있다.

지금 정부에서 비대면예배를 드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배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드려져야 할 예배조차 금지시키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정부가 교회를 탄압하고 신앙인을 중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분명히 개인적으로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는 장로, 권사. 집사들이 상당히 많은 이들이 국회의원이라는 뱃지를 달고 있는데도, 코로나바이러스의 책임을 교회에 전가 시키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적극적으로 차별금지법, 인권법, 이슬람법, 동성애법, 학생인권조례법을 제정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다른 것들은 그런다 치더라도 신앙인의 기본마저 망각한 이들이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활개치면서 소위 유명인사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런 것들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엄중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국회의원이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선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목사이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이 먼저다.

각종 직분자요 사명자이기 전에 삼위 하나님 앞에서나 성경 앞에서 떳떳한 신앙인의 기본, 거룩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역대하7:13-14에서는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라고 말씀하신다.

 

학개서1;57에서는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신앙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과연 나는 성도라고 부르기에 합당한가?”라고 자문자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신앙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거룩함이란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벗어날 때, 거룩함은 파괴되는 것이고, 깨지는 것이고, 죄가 되고, 험악한 세계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거룩함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믿음이란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지 말아야 한다.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위치를 침범해놓고서는 자신은 거룩한 성도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삼위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우리 신앙인들은 삼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십자가 복음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세워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주일설교. 믿음의 다섯 우물을 파라 (창세기 2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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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창세기의 두 번째 족장인 이삭입니다. 제가 이삭의 삶을 기억할 때 어뜻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하나는, 일부일처제로 오직 리브가만을 일편단심 사랑하며 살았다는 것과, 또 하나는 창세기 족장 중에서 가장 많은 180(아브라함 175, 야곱 147, 요셉 110, 사라 127, 이스마엘 137)까지 장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일생을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우물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다섯 번의 우물을 파면서 믿음의 여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길, 인생의 길을 이삭의 다섯 우물과 비교해 보시시 바랍니다.

 

첫 번째 우물은 블레셋 지방에서 판우물 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2612-16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우물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 이미 파 놓았던 우물로 이삭이 쓸 수 있도록 다시 복원 한 것입니다.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더니 백배의 결실을 맺었고, 창대하고 왕성하게 되어서 거부가 되었고, 양과 소떼가 심히 많고 종이 심히 많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삭 토스트라고 아시죠. 그 브랜드 이름이 창세기 2613-14절을 인용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매장에 가보시면 성경 구절이 영어로 쓰여진 것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는 평안과 같은 무형의 복을 주시기도 하고, 실제적인 재물의 복도 함께 겸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거부가 된 기쁨도, 마음의 평안도 잠깐 뿐이었고, 이때부터 이삭에게 시험이 찾아옵니다. 첫 번째 우물은 믿음이 시작 되면 곧바로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이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로역정에서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십자가 앞에서 죄의 짐을 벗었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훨씬 험난한 길이 있을 것이다라는 천사의 대사가 나옵니다. 믿기 시작하면 시험과 고난이 필수적으로 찾아옵니다. 믿음 생활 시작하시는 분은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이삭이 블레셋 땅에서 큰 부자가 되자, 본토 주민들이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무리를 이끌고 와서 이삭 가족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물을 메꾸어 버렸습니다. 물이 없으니 사람과 가축이 견디지 못하고 다른 우물을 찾아 거주하던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인이 첫 번째 직면하는 고난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주의 문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광야 첫 시험도 먹는 문제였고, 광야에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도 마실 물 때문에, 먹을 음식 때문에 불평이 시작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 그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 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첫 번째 훈련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목회학 교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목회자가 되면 돈이 있어도 없는 척, 돈이 없어도 있는 척, 못 먹어서 배가 고파도 배부른 척, 배부르게 많이 먹었어도 안 먹은 척 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배고픈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합니다. 배고픔은 언제나 목회자와 함께 함을 기억하십시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6:31)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돈 때문에, 먹을 것 때문에 염려하는 마음이 찾아오면, “아하! 첫 번째 우물이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주신 것에 늘 감사하시고, 있는 것을 아껴 쓰시고, 구별하여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시고, 또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여유를 갖추셔서, 첫 번째 생활이 주는 고난의 우물을 거뜬히 넘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판 우물의 이름은 에섹이라는 우물 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2617-20절에 나와 있습니다. 블레셋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한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들어가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이 우물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이었는데, 다시 파서 우물을 복원시켰습니다. 그랬더니 블레셋의 목자들이 또 다시 찾아와 이삭이 거느린 목자들과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다투다라는 뜻을 가진 에섹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26:20)

 

다투다라고 하니 양쪽 편이 서로 대등하게 말싸움과 몸싸움으로 다툰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에섹의 의미는 억압받고, 무례하게 취급당하고, 불공정한 억압으로 강탈당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오는 고난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다툼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를 시험하는 고난입니다. 이삭이 내린 결정은 아무 말 없이 다시 그 곳을 떠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은 자기 것을 빼앗기고도 항변하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다투다라는 에섹의 이름 뜻이 무색할 정도로 도망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다툼 속에 있으면서도 휘말리지 않는 이삭은 정말로 신앙의 고수 중의 고수 였습니다.

 

진짜 약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다투려고 하고, 진짜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과 다투어 이겨낸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도 자신을 공격하는 무리들을 손 한번 움직이시는 동작으로 다 쓸어버리실 권세를 가지셨지만, 그 분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분노를 역 이용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참아내실 수 있는 인내로 승화 시키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혼자 계실 때, 혹은 가족 끼리 있을 때 막 누구를 험담하고, 저주하고, 그 사람을 다듬이 돌에 올려놓고 두들기듯이 험한 말을 쏟아 부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남을 욕하고 판단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은, 그 외면의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표출되는 언어와 행동이 곧 자신의 내면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상은 항상 나의 인생에 대해서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태클을 걸어옵니다. 분노하게 만들고 다툼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이 때 참아내고, 다툼의 자리를 떠나고, 평화와 인내를 추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평화의 도구로 사용된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굴욕을 강요하는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저항했습니다. 이삭은 사람과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의 내면과 치열한 싸움을 했습니다. 결국 그가 가족과 목자들과 가축을 데리고 자리를 떠난 것은, 외견상으로는 큰 손해를 입고, 비굴하게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승리의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툼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소한 다툼이 계속 되는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버거워 집니다. 여러분에게도 다툼을 걸어와 분노를 유발하는 상황이 올 때에, 이삭의 에섹우물을 기억 하십시오. 진정한 승리는 십자가를 참아내신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 앞에서 순종하여 차지하는 승리입니다. 그것은 곧 평화요 인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속한 가정, 사회, 교회 공동체, 어디서나 이삭과 같은 결정과 판단이 이루어져 믿음으로 승리하는 참 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판 우물의 이름은 싯나라는 우물 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21절에 한 절로 짧게 설명 되어 있습니다. ‘싯나라는 이름은 본문에서 다투는 뜻으로 표현을 했는데, 실제로는 에섹이라는 이름 보다 훨씬 더 강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싯나(-시트나)의 어근 사탄(-싸탄)의 어근과 같습니다. 사탄의 이름의 뜻 중에는 대적자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삭이 판 이 우물의 이름 싯나의 뜻도 대적하다라는 뜻입니다. 사탄이 겁도 없이 무모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듯이, 블레셋의 백성들은 이삭의 무리들을 마치 철천지원수를 대하듯이, 살의와 적의를 가득 품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는 뜻입니다. 무서운 상황입니다.

 

견고한 공동체나 크고 강대한 나라일수록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분열에 의해 붕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적자 사탄이 쓰는 전략이 바로 이것 입니다.사탄이 원하는 것은 거짓과 분열의 씨앗을 뿌려 모여 있는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뭉쳐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공격하여 넘어트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다투게 하고, 마음을 갈라놓고, 분쟁하게 만드는 것은 다 사탄이 분열과 거짓의 씨앗을 뿌려놓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든, 직장에서 상, 하간에 다툼이 있든, 친구 간에 오해와 언쟁이 있든, 모든 불화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휘말려서 싸우는 것에 열을 낸다면 그 시간이, 그 장소가 생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올 한해 이 세 번째 싯나의 우물이 찾아 올수가 있습니다. 가족이든, 직장이든, 사회 집단이든, 교회 공동체 이든, 어떤 단체 안에서 사람들을 갈라놓는 시기와 질투와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거짓과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은 대놓고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대적자중의 최고의 대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맞서서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삭의 가족 공동체는 대적자 사탄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복되는 이동으로 심신이 지치고 내부적으로 동요가 일어나서 공동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데 무척 힘이 들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삭을 중심으로 단단히 뭉쳤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사랑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무너트리려는 사탄의 간교한 계략을 물리치고 다음 장소로 꿋꿋하게 나아갔습니다. 결국, 끓어오르는 불평, 불만을 잠재우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삭의 탁월한 지도력 뿐 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가 대적자를 상대로 일구어낸 값진 승리입니다. 참으로 신실한 믿음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공동체를 무너트리려는 그 어떤 시도와 공격을 결코 묵과 하지 않으시고,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대적자들을 향하여 진노의 경고를 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대적자 사탄을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분열시키려고 거짓의 씨앗을 뿌려대는 대적자 사탄의 흉계를 거뜬하게 물리치고, 계속하여 진리와 소망의 길로 나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네 번째 판 우물의 이름은 르호봇이라는 우물 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쫓아오던 블레셋 백성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2절에,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라고 했습니다. ‘르호봇은 여유가 있는 넓은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원숙한 성장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의 삶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네 번째 우물에 이르러서야 이삭은 드디어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에 외웠던 암송 구절 중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지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9)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참 평안, 참 안식, 참 은혜 안에서 르호봇에 이르기까지는 피 눈물 나는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한 믿음으로 세워 주셔서 마침내 르호봇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이 곳에서는 고난이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풍파에 요동하지 않고, 어떤 유혹도 즉시 분별하여 물리칠 수 있는 영적 용사로 성장했기 때문에 아무 걱정이 없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견디고 이기는 자가 르호봇에 이르러 대적자들이 얼씬 거리지 못하는 은혜 아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00교회와 모든 성도가 르호봇의 넒은 지경에 이를 때까지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이 모든 일에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할 수 있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 우물을 판 곳은 브엘세바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23-25절에 나와 있습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21:33)고 했습니다. 이삭도 아버지처럼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또한 이삭의 종들은 거기서 다섯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영광으로 임하였습니다.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아멘. 이 복 주심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도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브엘세바에서 이 마지막 우물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르호봇에서 평안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소통의 관계를 유지해 오던 중(이것은 예배자, 기고자의 삶을 말함), 드디어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여 주시는 복중의 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만남이 신앙이라면 누구라도 꿈꾸며 기대하는 만남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경험한 이삭의 심령에는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브엘세바까지 나아가야 하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브엘세바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종착지입니다.

 

야곱은 우물을 따라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야곱의 다섯 우물과 같은 인생의 길, 신앙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돈 문제 때문에 염려하는 것을 이겨내는 첫 번째 우물,

다른 사람을 이기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을 이기려 노력하는 두 번째 우물,

분열과 거짓을 이겨 내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무는 세 번째 우물,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서 참 평안, 참 안식에 거하는 네 번째 우물,

깊은 영적 교제 속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다섯 번째 우물,

 

여러분의 믿음의 길, 인생의 길은 어느 우물을 파고계십니까? 여러분이 이삭이 되셔서, 반드시 모든 우물을 넉넉히 통과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올해 목표인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잊지 마시고, 오직 성령을 구하고, 하나님과 화목함을 구하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우물길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시는 00교회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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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우물길을 알려 주시고, 그 길을 따라 쉬지 않고 걸어가서 마지막 우물 까지 취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소망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축복 받는 믿음 창세기 121-9

찬 양 : 60, 293, 300, 428, 429.

 

오늘의 말씀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이 축복 받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성경 상에서 축복 받은 사람을 꼽는다면 제일 먼저 아브라함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 받은 사람의 모범이요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축복의 모델이 될 수가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2-3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 중에 이란 말이 다섯 번이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복을 내리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복을 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이 축복을 받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누구나 바라는 소원이며 또한 성도들이 축복 받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서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되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 축복을 어떻게 하여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우리 조상들은 이 축복의 방법을 알지 못하여 돌멩이나 나무나 바위나 자연을 섬기고 우상을 섬김으로 오히려 범죄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축복은커녕 오히려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는 우리가 바라고 추구하는 축복의 비결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축복을 받는 방법과 축복의 하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16:19)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듣고, 그 축복의 비결을 깨닫고, 축복의 보고를 열 수 있는, 열쇠를 받아서 우리 모두가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과

신상의 건강의 축복과

자손 천대까지 누리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어떤 축복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1)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우상숭배의 자손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그의 부친 데라가 우상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하란을 거쳐 가나안까지 와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의 우상의 도시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셔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죄악에서, 마귀의 자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서 구원받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로 받은 선물입니다.

(43:1)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이것이 바로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입니다.

(2) 아브라함은 건강과 장수의 축복을 받아서 175세까지 살았습니다.(25:7)

(3) 아브라함은 인류 최초의 십일조를 드린 사람으로서 물질의 축복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았습니다.(13;2, 26:4-5)

(4) 아브라함은 범사에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만 가지 축복을 받아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24;1)

(5) 아브라함은 열조에게로 돌아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25:8)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로 간다는 것입니다. 즉 영원한 영생의 나라로 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이 세상에 살다가 영원한 영생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2. 아브라함이 이와 같은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었을까요?

(1) 아브라함이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가장 큰 원인은 항상 그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었으며 모험적이고 전진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신앙은 항상 현재의 자리에서 안주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노력하여 전진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전진하지 못하는 믿음은 퇴보하는 믿음이요 영적이지 못한 믿음은 마귀 적인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 자신을 개혁해 나가는 개혁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과 모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 초등학교를 다니던 학생이 졸업을 하면 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중학교에 가면 공부가 어려울 것이라고 언제까지나 초등학교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가 좋사오니, 이대로가 좋사오니,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죽어서, 지옥 가겠나이다하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이 바로 믿음의 대 전환을 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저 안일하게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게, 교인인지 불신자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그저 그렇게 신앙생활이랍시고 해 왔다면 빨리 이 시간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태와 게으름에 빠져 미지근하던 믿음이 뜨겁게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지금까지 나만을 생각하고 주님을 멀리하던 믿음들이 이제는 주님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 우선주의로, 생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하나님이 크게 쓰는 믿음의 사람은 항상 도전과 모험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믿음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정든 것을 떠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정붙였던 나쁜 습관과 악한 것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 역정이란 책이 있습니다. 기독도가 장차 망할 수밖에 없는 장망성을 떠나서 천국을 향하여 가는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날마다 전진해 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아브라함은 성별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별이란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을 말합니다.

(고후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구별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생활입니다.

세상에서 대통령의 아들딸만 되어도 다른 집 아이들과 똑같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다른 아이들과 달리 품위를 지키려고 하고 달리 행동을 합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찌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임을 명심하고 항상 거룩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의 신앙은 항상 순종과 복종하는 신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순종이란 너무나 잘 아는 말입니다. 순종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순종을 하였습니까?

아브라함은 떠나라면 떠나고, 장막을 치라면 치고, 이름을 갈라고 하면 갈고, 100세에 낳은 아들까지 제물로 드리라고 하면 드리고, 행하라고 하면 행하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5:22절 말씀에는 이스라엘 나라의 초대 왕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다가 책망을 받고 그의 왕위를 다윗에게 빼앗기게 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종은 기적을 일으키며 기적은 순종에서 옵니다.

11:38절 말씀에는 베다니 마을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마르다가 말하기를 주여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고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하였지만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무덤의 돌을 옮겨 놓았을 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 난 줄로 믿습니다.<아 멘!>

지금도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기적을 일으키며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4)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네 번째 원인은 아브라함의 신앙이 제일 귀한 것을 바치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친 사람입니다. 그때는 성경도 율법도 없었을 때이며 또 하나님이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신 일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을 이어 받은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고 십일조를 바칠 것을 서원 하였던 것입니다.

(28:21-22)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라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신앙은 내리 신앙입니다. 부모가 신앙이 좋으면 자식도 좋고 부모가 신앙이 좋지 못하면 자식도 좋은 신앙가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식들에게 얼마나 좋은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이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에 아무 말 하지 않고 가서 바쳤습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는 신앙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신앙입니다.

7:37-39절 말씀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리므로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예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4:8-9)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경험이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습니다. 제물을 가져오면 제사장들이 검사를 해서 나쁘거나 흠이 있으면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22:20-21)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서원한 것을 갚으려 하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라.”

(삼상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5)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이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신앙이었습니다.

 

(22:12)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어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믿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나를 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하나님은 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인정하여 주었습니다.

(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나님이 다윗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믿어주고 인정해 주는 믿음을 소유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도 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초대교회에서는 교회의 집사를 세울 때에 여러 가지 조건들 중에 외인들에게도 인정받은 사람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딤전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6) 아브라함의 신앙은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의 가족을 사랑으로 이끌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청하여 극진히 대접을 하였더니 그 나그네가 바로 하나님과 천사들이었습니다.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소돔 성을 멸하신다고 하시니까 그 소돔 성을 어떻게든지 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하나님께 간구를 하였습니다. 죄악의 도성이요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까지 사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신앙이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축복은 거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요행수로 얻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18: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믿음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9:29) “너희 믿음대로 되라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3.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축복과 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신앙이나 믿음은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항상 충만해야 합니다. 어느 때는 있는 것 같고, 또 어느 때는 없는 것 같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래 오래 간직하여야 합니다.

또 지난날 한때 받았던 체험이나 은혜로서 만족을 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현재가 중요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큰 은혜를 받고 바울과 같이 삼층 천을 보는 체험을 하였다고 하여도 지금 내게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후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하나님은 현재를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에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지금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반면에 과거에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 해도 지금 진정으로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은 미쁘고 의로우사 모든 죄를 도말 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좋은 예로써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 중에서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그의 지난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한 편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23:42) 라고 회개한 강도에게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고 용서해 주신 것을 보면 저들이 아무 것도 잘한 것이 없어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에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받은 은혜와,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을, 끝까지 잘 간직하여야 합니다.

축복이나 은혜는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래 오래 간직하고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받은 은혜와 축복이 소멸되고 모두 새나가면 안됩니다.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3: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들 주변에는 너무나 불신앙 적인 요소가 많이 있고 또 우리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궤계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항상 어디를 가든지 먼저 하나님께 제단 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겜에 가서도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12:7)

벧엘 동편으로 이사를 한 뒤에도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12:8)

헤브론에서도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13:18)

모리아산에서는 아들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제단을 쌓았습니다(22:9)

제단 쌓는 일은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을 때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축복 받는 성도는 하나님께 제단 쌓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제단 쌓고 기도하는 곳에 응답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제단 쌓는 가정이 행복하며 그와 같은 가정을 하나님은 복주시고 지켜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그리고 하나님은 제단 쌓는 사람의 사업을 축복해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 288절 이하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3:11-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축복 받은 비결은 결국 하나님께 제단 쌓고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들도 주일성수 제단과, 저녁예배 제단과, 속회 제단과, 매일 매일 새벽기도 제단 쌓는데, 게을리 하지 말고 충성과 헌신을 다하여서 이 마지막 말세를 당한 이 때에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펌

 



세 번의 만남- (창세기 351-15)

                                

한 해를 지나면서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 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 다사다난이란 말에 적합한 인물이 야곱일 겁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건너가 바로왕 앞에 섰을 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년인데,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라고 자신의 일생을 표현했습니다. 말 그대로 야곱의 일생은 험악했습니다. 파란만장(波瀾萬丈-물결이 만 길 높이로 인다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거나 인생을 살아가는 데 기복과 변화가 몹시 심함을 이르는 말) 하다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정말 굴곡진 인생을 살아간 인물이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장자인 에서의 뒤를 이어 차자의 설움을 안고 장막에서 어머니랑 지낸 기간이 무려 7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팥죽과 장자 축복 사건으로 인해 형을 피해 밧단아람 자방의 하란에서 20년 동안이나 힘든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하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세겜에서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참혹한 봉변을 당합니다. 100세가 넘어 사랑하는 라헬이 막내아들 베냐민을 출생하던 중에 그만 베들레헴 길가에서 죽었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들에서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됩니다. 130세에 머나먼 애굽 땅으로 이민을 가야 했습니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기구한 인생입니다. 어떤 인생이든 쉬운 인생길은 없겠지만, 야곱처럼 험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험악했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의 중요한 시점마다 나타나셔서 그를 인도해 가셨습니다. 하나님과 야곱에게는 중요한 세 번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상황과 방법은 다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적어도 세 번은 크게 개입 하십니다. , 야곱의 인생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을 만나주신 하나님을 보시면서, 내 인생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첫 번째 만남은, 야곱이 고향을 떠나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가던 중 들판에서 (나중에 이 곳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이름 지어 부름)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28) 상상해 보세요.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형을 피해 옷가지, 먹거리도 변변히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들판으로 도망쳐 나온 야곱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엄마와 함께 평안한 장막에서 무려 70년이나 지냈으니, 세상에 홀로 나간다는 것이 엄청난 두려움을 떠나서 충격과 공포의 수준 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소위 멘붕(속어, 멘탈붕괴 mental collapsing)과 패닉(공황을 초래하다 panic)상태였습니다. 형에게 죽임 당할 것 같은 두려움, 먼 길을 홀로 가야 하는 두려움,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 낮선 땅에서 생활하게 될 두려움, 야곱은 온통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방향조차 잡지 못하는 들판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와 같이 눈물 콧물 흘리며 대성통곡 했을 것입니다. 70세가 이렇게 울고 있으면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저 심정이면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과 같은 절망과 공포의 상황, 그리고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 세상에 홀로 던져진 사람들에게 나타나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두려움에 빠진 인생 가운데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네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시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아멘(28:18)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실존 한다는 것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상속의 허황된 가공의 존재도 아니요, 잡다한 여러 잡신들 중에 하나도 아니요, 불러도 대답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살아계시고, 나타나시고, 말씀 하시고, 인도하시는 유일하고 강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야곱에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와 항상 함께하여 주신다는 것을 드러내려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 하셨듯이 우리 인생 가운데 선포 하십니다. “너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여 주겠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너와 함께 하여, 네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 이니라아멘.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신가요? 야곱처럼 들판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두려우십니까? 가족도 한 명 없는 것처럼 외로우십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하십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계십니까? 미움과 증오 때문에 치가 떨리십니까? 이런 불안 가운데 계신 분이라면, 딱 야곱이 들판으로 나간 것 같은 상황을 겪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은 중요한 만남이 계획된 신앙의 벧엘에 머물러 계신 것입니다.

 

이 때가 기회입니다. “보여 주세요, 나타나 주세요”, 하나님의 존재를 구하십시오. “붙들어 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요청을 외면하시지 않는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평안의 마음으로 찾아 오실 줄을 믿습니다. 벧엘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올 한해 두려움, 외로움, 상처들을 벗어 내고 믿음의 길을 소망과 기쁨으로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 두 번째 만남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지내다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 하다가,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받았다는 스토리는 다 아실 것입니다. 이 때 야곱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2:30)라고 말하였습니다.

 

야곱이 이름지은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 만남이 존재를 확신시켜 주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만남이라면, 두 번째 만남은, 야곱의 자아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의 시간을 우리는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표현 합니다. 야곱이 이 만남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생명이 보전 되었습니다. 살려 주시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인생 최대의 문제는 형 에서의 분노로 인해 죽임 당할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이것만 해결된다면 야곱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 최대의 문제는 과거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결해야할 과거는 어떤 창피함과 수치감을 불러오는 나만의 흑 역사도 아니고, 은행에 빚지고 있는 채무도 아니고, 꼬여있는 인간관계도 아닙니다. 우리는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야곱을 죽음의 공포에 몰아넣었던 에서와 같이, 우리들에게는 죄와 사망과 심판의 공포가 뒤 덮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 받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생명을 보전 받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브니엘의 사건이 내게도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브니엘의 사건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죄를 죄로 심각하게 깨닫는 사람입니다. 죄 의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죄가 자기 목숨을 빼앗고, 가족 목숨을 빼앗고, 집안의 종들의 목숨을 빼앗고, 가축의 목숨까지도 빼앗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죄가 있음에도 죄를 죄라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구제불능입니다. 죄가 있음을 알고도 덮고, 숨기고,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브니엘의 하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돌이켰다고 고백 했으면서도, 여전히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죄가 이전 보다 훨씬 더 심해지고 있음에도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기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거짓 회개에 결코 속지 않는 분이십니다.

 

신앙의 터닝포인트는, 브니엘 사건을 경험 했느냐, 못했느냐가 분기점입니다. 이 분기점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고, 살아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일생일대의 중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최대의 적은 입니다. 죄의 문제는 적당히 놔두고 차일피일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에서의 군대 400명이 쳐 들어와 우리의 목숨을 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살고 싶으시면 지금 당장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브니엘의 야곱처럼, 우리 인생 최대의 문제를 해결 받는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 하시고,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생명을 보전 받는 구원과 영생의 기쁨 가운데 살아가시는 2020년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세 번째 만남은,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으로, 벧엘에 돌아와 신앙의 회복을 온전히 이루는 야곱과 그의 가족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 째, 둘 째 만남도 중요하지만 세 번째 이 만남이 가장 중요하며,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곧 이어서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야곱은 지체하지 말고 아버지 이삭이 있는 헤브론으로 이동해야 했음에도 에서가 물러간 것에 너무 안심한 나머지 세겜이라는 곳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머무는 동안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이에 분노한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성의 사람들을 마구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 생명을 보전 받은 사람은, 신앙의 목표를 향해 계속 나아가야지, 가다가 곁길로 세는 경우에는 큰 낭패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명령 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이방 신상들을 버려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1,2) 온통 명령하시는 내용이 가득합니다. 그러자 야곱과 그의 가족은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들을 떼어 상수리나무 밑에 묻고, 즉시 세겜을 떠나 벧엘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을 엘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3~7) 이렇게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자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나셔서 복을 주셨습니다.

 

9절을 한 번 보십시오. 다시 복을 주신 이유가 보이십니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장소, 곧 벧엘로 돌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시는 가운데 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단순한 원리이자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 있으라고 한 자리,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 떠났어도 즉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 함께 하시는 은혜를 주시고, 하늘의 복을 충만하게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반대로, 자꾸 자리를 떠나고,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몸에, 마음에, 입술에, 우상들과 귀고리들, 쓸데없는 세상의 장신구들이 덕지덕지,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의복들과 우상들과 귀고리들은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생각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은 하나님과 너무 멀리,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습니다. 몸에 배인 습관, 사고, 행동이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매우 부적절 했습니다. 의복을 바꾸어 입고, 신상들과 장신구를 떼어내서 땅에 묻은 것은, 세상의 부요함을 버리고, 다시 말씀 앞에, 다시 복음 앞에 섰다는 의미입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장소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코람데오(coram deo), 매 순간 하나님에 서는 것, 엔크리스토( ἐν Χριστῷ(In Christ), 예수님 안에 거하며 항상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 홀리 스피릿(Holy Spirit), 내 육체가 성령이 거하는 전임을 알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 일행은 벧엘, 바로 하나님이 처음으로 야곱을 만나 주셨던 그 장소, 그 은혜의 시간으로 돌아왔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기쁘게 맞아 주시고, 복을 내려 주셨던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지 감이 오시죠. 이 세 번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실천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해 동안 세상 즐길 거리와 적당히 거리를 두시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는데 힘을 다하십시오.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둘러보시고, 말씀 하시는 그 장소에 머무십시오. 그리고 올 해 00교회와 우리 모두에게 내려 주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의복을 바꾸어 입고, 신상들과 장신구를 다 떼어내서 땅에 묻어 버리고, 오직 은혜의 장소, 임재의 장소, 복을 주시는 장소인, 우리만의 벧엘로 올라가셔서 온전한 믿음의 신앙으로 굳게 서시는 2020년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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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2020년 한 해 동안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고 장신구를 떼어 내고 거룩한 새 옷으로 갈아입게 하셔서, 믿음을 굳게 지키고, 소망을 이루며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회개하며 돌이키는 자를 정결하게 씻어 주시는, 우리 주 예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은혜를 앞세워 살라 (창세기 381-30)

 

<유다의 타락이 주는 교훈 >

 

창세기 37-50장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 중 유일하게 삽입된 이야기가 38장에 나오는 유다의 타락 이야기다. 유다의 타락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1. 성경의 진실성

 

성경은 믿음의 영웅들 이야기를 미화한 책이 아니다. 사람이 꾸민 책이라면 미화하고 포장해서 더 신비감을 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책이기에 필요하면 영적인 영웅의 치부와 허물도 그대로 노출시킨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흉년 때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장면도 기록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존재로 여겨졌던 다윗의 간음 사건도 기록했다.

 

심지어 본문에서는 유다 지파의 선조인 유다가 며느리와 관계하는 장면까지 기록했다. 야곱의 12아들을 통해 형성된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가장 복된 지파가 유다 후손들로 형성된 유다 지파였다. 비록 창세기 37-50장은 대부분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의 이야기로 구성되었지만 메시야의 계보가 요셉 후손이 아닌 유다 후손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지파였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을 유대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다. 또한 유다 지파는 출애굽 때 광야에서 선봉에 섰고 갈렙의 리더십 하에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도 선봉에 섰다. 다윗도 유다 지파였고 예수님도 유다 지파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메시야 지파의 조상인 유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출만도 한데 성경은 그 치부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그 점만 봐도 성경의 진실성을 확신하게 된다.

 

사람에게 가장 위대한 복의 원천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실물은 성경이다. 원본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에 오래된 성경 사본일수록 가치가 크지만 성경이 진짜 가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것은 왕이나 대통령이나 위대한 부자나 권력자를 인맥으로 가지는 것보다 더욱 큰 복이다. 성경을 가까이해서 성경 말씀을 내 영혼의 양식으로 삼으면 이생과 내생에서 가장 복된 존재가 될 것이다.

 

성도란 세상 욕심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내는 사람이다. 참된 복도 세상 욕심을 말씀으로 이겨내고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왜 성도는 성공한 사람을 보아도 시기가 없는가? 말씀이 가까이하며 산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에 꼭 붙어서 살면 존재 의미를 잃을 염려도 없고 인생의 보람과 행복도 커진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를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두라. 그 목적을 이루려면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이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는 통로 역할을 하라. 선교의 최대 목표도 다른 어떤 것보다 말씀을 나눠주는 것에 있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고 그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손길을 생생하게 체험할 것이다.

 

2. 은혜의 탁월성

 

본문에 나오는 유다의 모습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을만한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본문 2절을 보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이 구절에서 보고라는 말은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면 타락할 줄 알면서도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의 외모를 보고 결혼했다는 암시다. 요새 외모를 보고 결혼한 후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누구 책임인가? 결국 자기 책임이다. 대개 끼리끼리 어울린다. 내가 누구와 어울리느냐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를 나타낸다.

 

내가 선택한 배우자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의 인격과 성향과 사람됨이 상당히 드러난다. 어울리고 사귀는 친구를 봐도 대략 사람됨을 알지만 배우자를 보면 더욱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배우자를 탓하는 마음이 들면 그 전에 자신부터 성찰하라. 배우자의 행동과 모습은 나의 행동과 모습을 비춰주는 부분적인 거울이다. 그 사실은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내가 변하면 배우자도 변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유다가 외모만 보고 결혼해서 가정적인 불행의 씨를 낳은 것에는 자기 책임도 상당히 컸다.

 

유다는 자식 농사도 제대로 못했다. 얼마나 엘이 악했으면 본문 7절에서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해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는 말까지 나오는가? 둘째 아들 오난도 그 이상으로 악했다. 유다 자녀들이 악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정도라면 그렇게 기른 유다에게도 허물이 매우 많았다는 암시다. 특히 유다는 육적인 절제력이 약했다. 며느리를 창녀로 여길 정도로 술에 취한 것도 문제지만 창녀를 찾는 것 자체도 그가 얼마나 성적인 절제를 못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고 화대를 흥정하는 본문의 묘사도 그의 무절제한 성적인 성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유다는 길거리 창녀에게 화대의 담보물로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주었다. 도장처럼 중요한 물건을 화대의 담보물로 준 것은 아주 무책임한 모습이다. 게다가 가치관도 이중적이었다. 며느리의 임신 소식을 듣자 자기 음행은 외면한 채 며느리를 불살라 죽이라는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런 자기중심적인 정의감은 사회를 더 시끄럽게 만든다. 남의 잘못이 눈에 보이면 돌로 칠 생각부터 하지 말고 내게는 그런 잘못이 없는지부터 먼저 살피라.

 

그렇게 허물이 많았지만 유다는 메시야 가문의 한 조상이 되었다. 여기서 사람의 허물을 덮고도 남는 하나님의 은혜의 탁월성을 느낀다. 아무리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도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찬란한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다. 허물 많은 유다에게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주셨듯이 나와 내 자녀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다. 돈이나 성공이나 합격보다 중요한 것이 은혜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얼마든지 인생 반전의 역사를 이뤄낼 수 있다.

 

3. 회개의 중요성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가?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회개다. 며느리의 임신 소식을 듣고 유다가 가문의 위신을 찾겠다고 무서운 화형 명령을 내렸을 때 다말은 사람을 보내어 유다에게 이 물건 임자로 인해 임신했습니다.”라고 말했다(25). 그때 유다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본문 26절을 보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가장 의로운 사람처럼 행세하다가 가장 수치스러운 존재로 전락한 상황에서 유다는 위대한 모습을 보였다. 즉 자기 잘못에 대해 발뺌하기보다 즉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며느리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이해하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그 장면을 보면 유다가 왜 그렇게 허물이 많았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에게 있었던 위대한 한 가지 장점은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회개하는 태도였다. 회개는 막힌 은혜를 뚫어주는 최대의 소통 도구다.

 

사람 앞에서도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은혜를 입는 핵심 포인트인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하나님은 회개할 줄 아는 사람에게 생각 이상의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신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보다 회개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명도 주신다. 회개를 잘하는 장점 한 가지가 열 가지 단점을 커버한다. 심지어는 잘못이 없어도 잘못했다고 하면 은혜를 더블로 받는다. 회개에서는 1등 성도가 되라.

 

회개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당신이 옳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실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제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회개다. 사람의 삶은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다 단점과 장점이 있어서 사람의 차이는 오십 보 백 보다.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버리고 내 뜻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 깨달음과 돌이킴이 사람을 복되게 만든다.

 

둘째, 사람 앞에서도 당신이 옳아요.”라고 용기 있게 말할 줄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잘못했다고 해도 사람 앞에서는 명백한 잘못을 하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이 옳다고 우긴다. 어떤 때는 서로가 다 분명히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원리에 분명히 어긋난 주장이 아니면 상대를 인정해주고 그가 옳을 수도 있다.”라고 여기면서 내 고집을 잘 꺾는 것도 회개하는 마음의 일종이다.

 

셋째, 말이 아닌 행동으로 돌이킨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다는 다말에게 네가 나보다 옳다.”라고 말한 후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다말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깐깐한 삶을 버렸다는 암시다. 그는 회개가 말로만의 회개가 되지 않도록 행동으로 실천했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받아 쌍둥이를 낳게 하셔서 메시야 가문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허물이 많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참된 회개로 하나님의 은혜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은혜를 앞세워 살라 >

 

유다의 수치스런 얘기가 성경에 기록될 정도라면 당시 그 얘기는 가나안 땅에 파다하게 퍼졌을 것이다. 그래도 유다는 참된 회개를 통해 수치를 극복하고 위대한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내게 수치스런 과거가 있었고 혹은 앞으로 있어도 참된 회개를 통해 놀라운 반전의 역사를 만들어내라. 현재의 모습이 아무리 부족해도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은혜를 앞세워 나아가면 지금부터라도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천국에 입성할 수 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가 다시 행복을 찾는 과정이 나온다. 그때 탕자는 비참한 처지에 빠졌을 때 회개하며 말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5:17).” 때로 내게 비참하고 수치스런 모습이 주어진 것은 오히려 축복의 토양이다. 그때 하나님께 돌아서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 된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는 곳은 대개 문제가 있는 곳이나 실패한 곳이다. 하나님은 길이 없어 보일 때 오히려 나를 더 찾아오신다. 또한 고난 중에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할 때 나를 만나주신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은 하나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엘리야도 죽고 싶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기도제목과 어려운 현실은 우연이 아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초대가 있다.

 

사람은 한치 앞도 보지 못하기에 때로 힘든 일을 당하면 어둠 속에서 울지만 그때 믿음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으면 그 어려운 자리는 나의 불행이 죽고 나의 행복이 새롭게 탄생하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이다. 그때부터 잿빛 현실 세계는 점차 무지개와 같은 찬란한 은총의 세계로 변할 것이다. 늘 회개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하나님께 철저히 돌아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는 복된 심령이 되라.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창6:5-14, 3:14-21

 

시골 노인이 대도시 큰 빌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출입구라고 쓰여 있는 글씨를 간신히 읽고 그 문에 가까이 가보니 대형 유리가 가로막혀 있고 아무리 찾아도 문의 손잡이가 없는 것입니다. 난감하였지만 출입구라고 했으니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자 -’하며 자동으로 된 유리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그 말씀을 믿고 나아가 천국 문 앞에 서는 자에게 스르르 열리는 자동문과 같습니다. 인간의 공로가 없어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불가능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 앞에 서기만 하면, 그 문은 반드시 열리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에는 노아가 죄로 인한 홍수 심판의 예고를 듣고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그와 그 가족이 구원을 받았지만 경고를 무시하고 돌이키지 아니한 자들은 다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한 내용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신약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죄로 인한 심판에서 구원 받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희생 시키시면서 까지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반드시 경고로, 권고하심으로, 징계하심으로, 오래 참고 인내하심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만 끝내 거부하고 돌이키지 않을 때 진노하심으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1.은혜로 예비해야 합니다.

 

구약 본문 창6:5-8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했습니다. 죄가 세상에 넘쳐나는 상황에서 죄에 휩싸여 물들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앙으로 사는 비결은 내 결심도, 의지도, 수양도, 많은 학문도, 고행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주께서 붙드시고 이끌어 주시는 은혜, 성령께서 도우시고 힘주시는 은혜로 가능합니다. 성도가 은혜 충만하면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박해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두려움을 이깁니다.

 

신약 본문에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핵심 요절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나를 대신하여 저주와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과 거듭나 새사람이 되는 것,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됨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은혜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한 때 아무리 은혜 충만했던 성도라도 머리 깎인 삼손처럼 은혜가 떨어지면 죄와 세상을 이길 힘을 잃고 맙니다. 다시 시험에 들고, 세상 죄악에 휩쓸려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믿음이 파선 되어 믿음의 실패자가 된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은혜를 헛되이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깨어 기도에 힘쓰고, 예배에 힘쓰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힘쓰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할 이유는 은혜를 소멸하지 않고 불 일 듯 일으켜 은혜 충만하여 믿음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또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은혜의 삶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주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요즘 하루 품삯이 5만원이라고 계산할 경우에 3조원입니다. 이 돈은 탕감해 주지 않으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가치의 액수입니다. 이 많은 빚을 하나님의 은혜로 빚이 없는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안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죄가 관영한 곳이라도 은혜를 넘치게 주십니다. 미국의 라스베가스는 흔히 도박의 도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헐리웃은 영화의 도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호화롭고 죄악이 많은 곳이라고 하지만 이 곳에는 훌륭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교회들이 이 곳에 있습니다. 죄악이 많은 곳에 하나님은 은혜가 많은 교회들을 두신 것입니다.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많으니 은혜도 많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곳에서 악을 이기려면 은혜도 그 만큼 많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악의 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은 남은 자를 두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모두를 타락케 하고, 모두를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신과 앗세라신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에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 다 사라지고 자신만 홀로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명을 남겨 두었다고 하십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에서 남겨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 모두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악한 시대에 주님 은혜를 사모하여 은혜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믿음으로 예비해야 합니다.

 

구약 본문에 나오는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그와 가족들이 방주 안에서 홍수 심판을 면했습니다. 비가 그친 후 40일이 지나서 방주 밖의 상황을 살피고자 창문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수차례에 걸친 실험 끝에 드디어 밖으로 날려 보낸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과 새는 암수 일곱씩을 배 안에 들어오게 함으로 제사에 사용할 제물들을 충분히 예비하였던 것과 더불어 창8:10-12에 거듭해서 기록 된 또 칠 일을 기다려...”라는 표현에서, 그리고 창8:20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라는 말씀을 보면 노아의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삶이었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삶이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을 통해 노아는 의롭고 온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신앙의 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 본문에서 믿는 자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오고 있음을 봅니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과 영생의 길을 예비해 놓으셨어도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불신앙의 죄가 가장 크고 심판에 이르게 되는 두려운 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믿음이 뒷받침 될 때 평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과학의 근거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주선에 사람을 태워서 달나라로 쏘아 올립니다. 그때 우주선에 태워져 달나라로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별로 긴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선이 다시 지구로 무사히 돌아 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조차도 믿음에 기초한다고 말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높이 올라가서도 평안히 잠을 잡니다. 왜냐하면 이 비행기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이 기차를 타고 그 좁은 레일 위를 마구 달리면서도 단잠을 잡니다. 그것도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영접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고(1:12), ‘믿음 안에서 참 평안을 주시고’,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는다.’ 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소중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이 믿음을 생명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지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늘 기업을 주십니다.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을 주십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모브상은 1827년부터 지금까지 세계 재벌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는 세계 최고의 보석상입니다. 그런데 그 보석상이 세계 최고의 보석상이 된 데는 이런 스토리가 있습니다. 보석에 관심이 많은 루이라는 청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보석상의 심부름꾼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성실하고 착실한 그는 곧 보석공 조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파리의 한 백만장자가 아들 결혼을 위해서라며 아주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문했습니다. 밤새도록 반지를 만든 그는 그것을 금고에 넣고 잠을 청하는데 강도들이 들어왔습니다. 철문을 열고 들어온 강도들이 진열장의 보석을 자기들이 가져온 자루에 다 쏟아 넣은 다음 루이에게 칼을 들이대고 금고의 열쇠를 달라고 했습니다. 값진 보석은 금고에 들어 있는데 금고 열쇠를 강도에게 주면 그 보석상은 망하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잔소리 말고 빨리 내 놓아!”, “가져가려면 나를 죽이고 가져가세요. 내 것이라면 줄 수 있지만 나는 이 집의 종업원이라 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너 이놈!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면 네 손가락을 자르겠다. 1분에 손가락을 하나씩 자를 것이니 고집 부리지 말고 빨리 내놓아!” 강도들이 루이의 손을 진열장 위에 얹어 놓고 시계를 보았습니다. 1분이 되었습니다. 한 강도가 소리쳤습니다. “빨리 잘라!”, “그래도 열쇠는 내놓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내놓을 수 없습니다.” 그때 두목이 말했습니다. “자르지 마라. 우리가 졌다. 이렇게 책임감이 있는 네게 우리가 졌다. 이제 우리는 그만 가자.” 강도들이 떠나갔습니다. 그 보석상에 강도들이 들어왔다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백만장자는 자기가 맡긴 반지도 없어진 줄 알고 놀라서 보석상으로 달려왔다가 루이의 이야기를 듣고 고마워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루이는 유명해졌고 보석상 주인은 목숨을 걸고 가게를 지켜준 루이에게 나중에는 사장자리까지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석상도 지금까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한 가게의 주인도 최선을 다하는 종업원을 알아주는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인 독생자를 주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주셨음을 알고 그 어떤 손해와 위험을 무릅쓰고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믿음으로 구원 방주를 예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순종함으로 예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22절에 보니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고 말합니다. 방주는 배를 젓는 노도 없고, 운전시설이 없습니다. 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키가 없습니다. 방주의 조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서 가장 어른이었지만 노아의 마음대로 방주의 방향을 조정할 수 없었습니다. 방주 안에 8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방주의 방향을 다수결로 정하지 못했습니다. 방주의 조정자는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신앙생활의 조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조정자 역시 오직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방주는 잣나무로 지어라하시니 그대로 했고, ‘간을 막아라.’ 하시니 그대로 했고, ‘역청을 바르라하시니 그대로 했으며, ‘정한 크기대로 지어라하시니 오차 없이 순종했고, ‘위에 창문을 달아라.’하시매 그대로 준행하고, ‘옆에 문을 내어라하시매 그대로 순종했고, ‘3층으로 지어라하시매 그대로 했으며, ‘들어가라하시매 들어갔으며, ‘짝으로 들어가게 명하시매그대로 순종했으며, ‘식물을 준비하라하시매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순종한 것입니다.

 

신약 본문 요3:19-21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회개 하고 순종하여 따르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계속 악을 행하면서 주님을 미워하고 순종하여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엄청난 사랑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예비하신 구원의 길이지만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참 성도는 절대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고 순종하여 따르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말을 잘 탔는데 한 번은 고삐를 놓쳐 떨어질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병사가 쏜살같이 달려가 말고삐를 잡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위기를 모면한 나폴레옹은 그 병사가 너무 고마워 그 병사에게 말했습니다. “고맙소, 대위.” 그 말을 들은 그는 즉시 장교 막사로 가서 장교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를 본 장교들이 말했습니다. “아니, 병사가 감히 여기에 들어오다니!”, “안 될 이유가 뭐 있소? 나는 대위인데.”, “뭐라고? 네가 대위라고? 어떻게 네가 대위냐?”, “나폴레옹 장군께서 나를 대위라고 불렀소. 그러니 나는 대위요.”, “이 미친놈을 보았나!”, “장군께 알아보시오.” 그래서 나폴레옹을 찾아가서 그 이야기를 하니 나폴레옹이 그 병사에게 대위 계급장을 달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한 말을 믿고 그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가 나폴레옹의 말을 듣고도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병사로 군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는 그 즉시 아멘!” 하고 순종할 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자녀도 되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도 되고, 죄 사함 받은 의의 사람도 되고, 구원 받아 영생의 후사도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생활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그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신앙생활의 모범 중에 하나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법보다 주먹이 강한 시대이기 때문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종했습니다. 더 놀라운 순종은 독자 이삭을 드린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니 100세에 얻은 아들까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순종을 보시고 이삭을 살리신 것만 아니라 하늘의 별처럼 낳을 후손을 주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으며,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셨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순종으로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은혜로 예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예비해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예비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만드신 행복한 가정 (창 2:18-25)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많은 창조물가운데 가장 귀한 작품을 말한다면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입니다. 하나님 역시 인간을 만드신 후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아담만 만들었습니다. 모든 짐승은 다 암수가 있어 짝을 이루는데 유독 사람만이 하나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만물을 관리하면서 많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혼자라서인지 하나님이 보실 때 외로워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여자를 돕는 배필로 아담에게 소개했습니다. 여자를 본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에던동산에서 한 가정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가정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스승의 날이 있습니다. 5월은 춥지도 덥지도 않는 가장 이상적인 계절로 행복한 계절입니다. 가정이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5월과도 같은 가장 이상적인 행복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가정은 지구촌 어디를 가도 있습니다. 나라는 없을지라도 가정은 필수적으로 존재합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는 나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민족이 쿠르드족입니다. 이들은 이라크와 터키 등 주변의 나라로부터 얼마나 많은 핍박과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나라도 한 가정 한 가정이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한 나라의 존재와 평안도 무너지고 맙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가정을 만드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가정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가정의 본질이 무엇이며 진정 가정의 행복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1.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축복하는 통로입니다.

 

일 더하기 일은 수학적으로 말하면 이입니다. 이는 일의 두 배를 말합니다. 그러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면 두 배의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십 배의 효과를 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축복을 내리십니다. 인간은 가정을 통해 인격이 성숙하고 건전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의 핵심은 가정교육이라고 합니다. 가정교육이 실패하면 인생도 실패한다고 합니다. 탈선하는 청소년들의 대부분은 가정교육의 실패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가정이 파괴되면 가장 큰 상처를 입는 것은 인격이 덜 성숙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마치 백지와도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가정을 통해 이들에게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사람으로 성장하지만, 미움과 분노와 절망을 심으면 이들의 마음속에 세상을 향해 미움과 분노를 그리고 절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사회문제의 요소가 됩니다.

 

가정은 우리에게 풀러스의 요인입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배필이 되기 때문입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것은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집니다. 부모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녀도 가족의 일원으로 가정 행복의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좋은 집이나 많은 재물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하는데서 행복이 시작됩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시달림을 당해도 가정이란 안식처를 통해 그것들을 정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가정은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온갖 쓰레기와 불순물이 바다에 들어와도 바다는 그것들을 정화시킵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세상의 온갖 상처를 가지고 들어오는 가족원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꿈을 가지게 하는 복된 안식처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교회는 가정을 회복하는 대안입니다.

 

행복했던 아담과 하와의 가정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깨어진 아담의 가정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미움, 시기, 질투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멸망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약속을 어겼지만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깨어진 아담 가정으로 말미암아 멸망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마셔야할 저주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아담의 깨어진 가정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남긴 것은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교회를 통해 멸망 받아야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아담의 깨어진 가정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참된 가정의 모델은 범죄하기 전의 아담, 하와의 가정입니다. 서로간의 사랑이 있고 건전한 노동이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치는 가정이 우리가 추구하는 참된 가정입니다. 시 128편에 참된 가정의 모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세상 사람들은 가정의 행복을 물질로 채우려고 합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만든 허황된 논리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도를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행복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하늘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복이란 어제의 행복이 오늘은 불행하게 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행복이 내일에는 어떻게 될 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이 행복이 여러분과 가정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우리 교회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전달되는 통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곳에 들어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이 땅의 천국의 모델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아직 우리는 천국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은 성경에서 말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천국의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과 교회가 천국같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의 경험할 수 있는 모델입니다. 이 땅의 가정과 교회는 마치 신축하려는 아파트의 모델 하우스와 같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아파트가 완공되어 입주하게 되면 모델 하우스는 해체되듯이 주님이 재림하실 때 가정과 교회는 해체입니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작은 천국인 가정과 교회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합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가정이 해체되고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까? 가정이 해체되고 교회가 제 기능을 못해 무너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정과 교회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늘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통로가 됩니다. 기도 없이는 능력이 나타나지가 않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내려와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쳤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온전한 가정, 온전한 교회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가정의 행복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녀들의 안전을 지키겠습니까?  우리가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파괴하는 악의 요소를 제거해 주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시험에 들거나 흔들리게 되면 성도들의 삶도 흔들리기 됩니다. 반대로 교회가 능력 있고 부흥하면 성도들의 삶도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정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여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말씀 실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수고의 헌신을 말합니다. 우리의 수고의 헌신은 곧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섬김입니다. 낮아지고 섬기는 삶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천국으로 만드는 요소가 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자녀들은 부모를 위해 주님의 사랑으로 섬길 때 그곳이 곧 천국입니다.

 

섬김에는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잠언 17:1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섬김이 있는 가정과 교회가 이 땅에서의 천국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아담 가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가정이 참된 행복이 있고 기쁨이 넘치며 구원의 은혜가 있는 복된 가정, 복된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이 맞이한 새해 (17:1-5)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이 시간에 아브라함이 맞이한 새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복을 주신 것처럼 새해 첫주를 맞이한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온전히 함께 하시는 복된 은혜가 함께 하시기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함께 하시지 않으며 너희 할대로 해봐라 하시며 두고 보시는 하나님의 노로 가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고 그것을 구원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그것은 절망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했는데 창17:1에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셨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함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을 암시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루도 아니고, 1달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니고 13년간,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같이 살면서 13년간 말하지 않고 살았다면 사건도 보통사건이 아닐 것입니다.


13년의 세월 참으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지옥 같이 불행하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살아도 도무지 사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집에 들어와도 마음이 복잡하기만 합니다. 여러 가지 일로 중압은 더욱 심해져만 갑니다. 조금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지옥 같은 삶이었습니다잘못을 깊이 깨달으며 99세 되던 해 그에게 여호와께서 나타나 말씀하시고 복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새해를 위해서 우리의 잘못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침묵하신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1.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16: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아브라함은 사람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 사라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여종 하갈로 첩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내 사라가 속히 자식을 낳지 못하자 급한 나머지 사람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삼상15:23"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사람도 말을 존중해 주지 않으면 침묵하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큰 사랑과 큰 복을 받은 자가 세상 말을 더 믿으면 기뻐하시겠습니까? 말씀 존중이 하나님 존중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28:1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2.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애착했습니다.


13년간의 아브라함의 잘못은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의 재롱을 낙 삼은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도 아니고 메시야 계대도 아닌데도 아브라함을 그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습니다. 아이 사랑과 치다꺼리로 13년을 보내며 날마다 약속하신 아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애착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멀리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곤경에 처하고 힘이 빠집니다. 물질 명예 권세 쾌락 자식 형통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인류에 이바지할 분야라 할지라도 나의 사명이 아니거나 하나님과 함께 일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요일2:15-17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했습니다.


10:37-38에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붙들면 하나님도 얻고 세상의 행복도 얻지만 하나님을 멀리 하면 하나님도 잃고 세상의 행복도 떠납니다. 바울처럼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을 가장 귀한 일로 여겨야합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18:1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하셨는데 13년 만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일종의 야단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왜 인간의 생각으로 행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은 이젠 딴마음 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맹세하고 한다는데 왜 너는 나를 믿고 기다리지 못했느냐는 질책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며 생명을 거시고 약속하셨건만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슨 빚졌다고 생명을 거시고 그런 맹약을 하셨을까요? 그건 순전히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여기 쪼갠 짐승은 장차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 약속하셨습니다. 4: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혹시 그걸 모르거나 다른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율법으로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구원 받고 새롭게 되고 영광스럽게 된 하나님의 자녀로 믿어야 합니다.


이 복음을 날마다 들어도 자신에게 믿음으로 적용하는 진리를 모르기에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도 거룩해지고 신령해지려고 다른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미 거룩해졌다는 진리에 설 때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은혜를 경험해 가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4. 믿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3-5절에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름을 사전에 주시지 않았을지라도 그런 약속을 수없이 주셨으니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신다고 하시니 근심 걱정 다 버리고 날마다 찬송하며 능히 이루실 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13년의 생애 속에서는 그것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이제까지 이스마엘의 아버지로 살았지 열국의 아버지로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아브람고귀한 아버지,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불과 1년 만에 약속하신 이삭을 기적적으로 낳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마엘에게만 고귀한 한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나라 수많은 민족의 열방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 속에 복음이 다 들었습니다. 복음의 진수를 교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냥 하나님이 주신 이름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 믿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새 창조물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다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긴 자다.


아브라함은 개명해 주신 이름대로 불과 짧은 기간이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아브라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실패는 보지 않으시고 성공만 보고 이렇게 기록합니다. 4:18-22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처럼 교리 적용을 잘 모르겠다면 그 결과인 이름만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녀, 성도,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 왕 같은 제사장, 의인, 상속자 등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새 이름을 가지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미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진정 복음을 이해하고 그 실재를 누리는 삶입니다. 그걸 믿지 못하고 방황할 때 우리의 고난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13년의 침묵을 깨시고 드디어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나간 그동안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침묵의 시간이었다면 새해 첫 주를 맞는 이 시간 우리 모두 하나님과 화목을 이끌어내신 예수 앞에 나아와 말씀을 존중하고 그 복음을 믿고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찬양하고 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 보시고 모든 관계가 회복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육 간의 큰 은혜 가운데 사시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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