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믿음의 다섯 우물을 파라 (창세기 26장 12-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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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창세기의 두 번째 족장인 이삭입니다. 제가 이삭의 삶을 기억할 때 어뜻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하나는, 일부일처제로 오직 리브가만을 일편단심 사랑하며 살았다는 것과, 또 하나는 창세기 족장 중에서 가장 많은 180세(아브라함 175세, 야곱 147세, 요셉 110세, 사라 127세, 이스마엘 137세)까지 장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일생을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우물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다섯 번의 우물을 파면서 믿음의 여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길, 인생의 길을 이삭의 다섯 우물과 비교해 보시시 바랍니다.
첫 번째 우물은 블레셋 지방에서 판”우물 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26장 12-16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우물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 이미 파 놓았던 우물로 이삭이 쓸 수 있도록 다시 복원 한 것입니다.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더니 백배의 결실을 맺었고, 창대하고 왕성하게 되어서 거부가 되었고, 양과 소떼가 심히 많고 종이 심히 많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삭 토스트’라고 아시죠. 그 브랜드 이름이 창세기 26장 13-14절을 인용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매장에 가보시면 성경 구절이 영어로 쓰여진 것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는 ‘평안’과 같은 무형의 복을 주시기도 하고, 실제적인 재물의 복도 함께 겸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거부가 된 기쁨도, 마음의 평안도 잠깐 뿐이었고, 이때부터 이삭에게 시험이 찾아옵니다. 첫 번째 우물은 믿음이 시작 되면 곧바로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이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로역정에서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십자가 앞에서 죄의 짐을 벗었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훨씬 험난한 길이 있을 것이다”라는 천사의 대사가 나옵니다. 믿기 시작하면 시험과 고난이 필수적으로 찾아옵니다. 믿음 생활 시작하시는 분은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이삭이 블레셋 땅에서 큰 부자가 되자, 본토 주민들이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무리를 이끌고 와서 이삭 가족들이 사용하고 있는 우물을 메꾸어 버렸습니다. 물이 없으니 사람과 가축이 견디지 못하고 다른 우물을 찾아 거주하던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인이 첫 번째 직면하는 고난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의·식·주의 문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광야 첫 시험도 먹는 문제였고, 광야에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도 마실 물 때문에, 먹을 음식 때문에 불평이 시작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 그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 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첫 번째 훈련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목회학 교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목회자가 되면 돈이 있어도 없는 척, 돈이 없어도 있는 척, 못 먹어서 배가 고파도 배부른 척, 배부르게 많이 먹었어도 안 먹은 척 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배고픈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합니다. 배고픔은 언제나 목회자와 함께 함을 기억하십시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돈 때문에, 먹을 것 때문에 염려하는 마음이 찾아오면, “아하! 첫 번째 우물이구나” 라고 생각하십시오. 주신 것에 늘 감사하시고, 있는 것을 아껴 쓰시고, 구별하여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시고, 또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여유를 갖추셔서, 첫 번째 생활이 주는 고난의 우물을 거뜬히 넘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판 우물의 이름은 “에섹”이라는 우물 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26장 17-20절에 나와 있습니다. 블레셋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한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들어가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이 우물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이었는데, 다시 파서 우물을 복원시켰습니다. 그랬더니 블레셋의 목자들이 또 다시 찾아와 이삭이 거느린 목자들과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다투다’라는 뜻을 가진 ‘에섹’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창 26:20)
‘다투다’라고 하니 양쪽 편이 서로 대등하게 말싸움과 몸싸움으로 다툰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에섹’의 의미는 억압받고, 무례하게 취급당하고, 불공정한 억압으로 강탈당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오는 고난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다툼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를 시험하는 고난입니다. 이삭이 내린 결정은 아무 말 없이 다시 그 곳을 떠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은 자기 것을 빼앗기고도 항변하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다투다’라는 에섹의 이름 뜻이 무색할 정도로 도망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다툼 속에 있으면서도 휘말리지 않는 이삭은 정말로 신앙의 고수 중의 고수 였습니다.
진짜 약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다투려고 하고, 진짜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과 다투어 이겨낸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도 자신을 공격하는 무리들을 손 한번 움직이시는 동작으로 다 쓸어버리실 권세를 가지셨지만, 그 분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분노를 역 이용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참아내실 수 있는 인내로 승화 시키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혼자 계실 때, 혹은 가족 끼리 있을 때 막 누구를 험담하고, 저주하고, 그 사람을 다듬이 돌에 올려놓고 두들기듯이 험한 말을 쏟아 부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남을 욕하고 판단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은, 그 외면의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표출되는 언어와 행동이 곧 자신의 내면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세상은 항상 나의 인생에 대해서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태클을 걸어옵니다. 분노하게 만들고 다툼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이 때 참아내고, 다툼의 자리를 떠나고, 평화와 인내를 추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평화의 도구로 사용된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굴욕을 강요하는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저항했습니다. 이삭은 사람과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의 내면과 치열한 싸움을 했습니다. 결국 그가 가족과 목자들과 가축을 데리고 자리를 떠난 것은, 외견상으로는 큰 손해를 입고, 비굴하게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승리의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툼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소한 다툼이 계속 되는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버거워 집니다. 여러분에게도 ‘다툼’을 걸어와 분노를 유발하는 상황이 올 때에, 이삭의 ‘에섹’우물을 기억 하십시오. 진정한 승리는 십자가를 참아내신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 앞에서 순종하여 차지하는 승리입니다. 그것은 곧 평화요 인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속한 가정, 사회, 교회 공동체, 어디서나 이삭과 같은 결정과 판단이 이루어져 믿음으로 승리하는 참 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판 우물의 이름은 “싯나”라는 우물 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21절에 한 절로 짧게 설명 되어 있습니다. ‘싯나’라는 이름은 본문에서 다투는 뜻으로 표현을 했는데, 실제로는 ‘에섹’ 이라는 이름 보다 훨씬 더 강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싯나(히-시트나)의 어근 사탄(히-싸탄)의 어근과 같습니다. 사탄의 이름의 뜻 중에는 ‘대적자’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삭이 판 이 우물의 이름 싯나의 뜻도 ‘대적하다’라는 뜻입니다. 사탄이 겁도 없이 무모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듯이, 블레셋의 백성들은 이삭의 무리들을 마치 철천지원수를 대하듯이, 살의와 적의를 가득 품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는 뜻입니다. 무서운 상황입니다.
견고한 공동체나 크고 강대한 나라일수록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분열에 의해 붕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적자 사탄이 쓰는 전략이 바로 이것 입니다.사탄이 원하는 것은 거짓과 분열의 씨앗을 뿌려 모여 있는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뭉쳐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공격하여 넘어트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다투게 하고, 마음을 갈라놓고, 분쟁하게 만드는 것은 다 사탄이 분열과 거짓의 씨앗을 뿌려놓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든, 직장에서 상, 하간에 다툼이 있든, 친구 간에 오해와 언쟁이 있든, 모든 불화의 배후에 사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휘말려서 싸우는 것에 열을 낸다면 그 시간이, 그 장소가 생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올 한해 이 세 번째 ‘싯나’의 우물이 찾아 올수가 있습니다. 가족이든, 직장이든, 사회 집단이든, 교회 공동체 이든, 어떤 단체 안에서 사람들을 갈라놓는 시기와 질투와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거짓과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은 대놓고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대적자중의 최고의 대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맞서서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삭의 가족 공동체는 대적자 사탄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복되는 이동으로 심신이 지치고 내부적으로 동요가 일어나서 공동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데 무척 힘이 들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삭을 중심으로 단단히 뭉쳤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사랑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무너트리려는 사탄의 간교한 계략을 물리치고 다음 장소로 꿋꿋하게 나아갔습니다. 결국, 끓어오르는 불평, 불만을 잠재우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삭의 탁월한 지도력 뿐 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가 대적자를 상대로 일구어낸 값진 승리입니다. 참으로 신실한 믿음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공동체를 무너트리려는 그 어떤 시도와 공격을 결코 묵과 하지 않으시고,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대적자들을 향하여 진노의 경고를 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에 대적자 사탄을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분열시키려고 거짓의 씨앗을 뿌려대는 대적자 사탄의 흉계를 거뜬하게 물리치고, 계속하여 진리와 소망의 길로 나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네 번째 판 우물의 이름은 “르호봇”이라는 우물 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쫓아오던 블레셋 백성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2절에,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라고 했습니다. ‘르호봇’은 여유가 있는 넓은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원숙한 성장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의 삶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네 번째 우물에 이르러서야 이삭은 드디어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에 외웠던 암송 구절 중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지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참 평안, 참 안식, 참 은혜 안에서 ‘르호봇’에 이르기까지는 피 눈물 나는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한 믿음으로 세워 주셔서 마침내 ‘르호봇’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이 곳에서는 고난이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풍파에 요동하지 않고, 어떤 유혹도 즉시 분별하여 물리칠 수 있는 영적 용사로 성장했기 때문에 아무 걱정이 없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견디고 이기는 자가 ‘르호봇’에 이르러 대적자들이 얼씬 거리지 못하는 은혜 아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00교회와 모든 성도가 르호봇의 넒은 지경에 이를 때까지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이 모든 일에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할 수 있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 우물을 판 곳은 브엘세바”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23-25절에 나와 있습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21:33)고 했습니다. 이삭도 아버지처럼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또한 이삭의 종들은 거기서 다섯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영광으로 임하였습니다.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아멘. 이 복 주심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도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브엘세바에서 이 마지막 우물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르호봇’에서 평안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소통의 관계를 유지해 오던 중(이것은 예배자, 기고자의 삶을 말함), 드디어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여 주시는 복중의 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만남이 신앙이라면 누구라도 꿈꾸며 기대하는 만남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경험한 이삭의 심령에는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브엘세바’까지 나아가야 하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브엘세바’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종착지입니다.
야곱은 우물을 따라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야곱의 다섯 우물과 같은 인생의 길, 신앙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① 먹고 사는 문제, 돈 문제 때문에 염려하는 것을 이겨내는 첫 번째 우물,
② 다른 사람을 이기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을 이기려 노력하는 두 번째 우물,
③ 분열과 거짓을 이겨 내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무는 세 번째 우물,
④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서 참 평안, 참 안식에 거하는 네 번째 우물,
⑤깊은 영적 교제 속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다섯 번째 우물,
여러분의 믿음의 길, 인생의 길은 어느 우물을 파고계십니까? 여러분이 이삭이 되셔서, 반드시 모든 우물을 넉넉히 통과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올해 목표인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잊지 마시고, 오직 성령을 구하고, 하나님과 화목함을 구하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우물길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시는 00교회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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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우물길을 알려 주시고, 그 길을 따라 쉬지 않고 걸어가서 마지막 우물 까지 취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소망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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