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의 동행 5:21-24,

강원도 원주에 문막이란 곳이 있습니다. 문막 인터체인지 가까이에 쌍 느티나무가 유명한데 그 나무는 두 나무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한 나무같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 모양이 두 나무가 한 나무같이 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보러온다고 합니다. 특히 이 나무에는 금슬 좋은 부부에 대한 전설이 있어서 갈등하는 부부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나무였지만 두 나무가 천년이나 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서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나무가 한 나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을까요? 처음부터 한 나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무에는 피톤치드라는 물질이 있어서 이 물질을 서로 풍겨 상대 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견제합니다. 한 뼘이나 두 뼘 정도 떨어져서 서로 견제하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가 자라다 보니 아무리 견제해도 서로 맞대게 되고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두 나무는 바람이 불면 서로 부딪쳐 가지가 꺾이고 몸통이 긁혀 상처 나고 껍질이 벗겨지는 시련을 겪으면서 결국 자기 한 편을 포기하고 다른 한 편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나무가 주는 교훈은 나무도 한 편을 포기할 때 하나가 되더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내 뜻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내 뜻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니까 안 됩니다. 3:3에 보면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그랬습니다. 서로 의합하려면 자기 뜻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뜻이 다르면 같이 동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인들도 당을 만들었다가도 뜻이 다르면 갈라집니다. 이건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뜻이 다른데 어떻게 하나 되어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과 동행 하려면 내 뜻 버리고 선하신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삶을 값지게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은 신년 첫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과의 동행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1.내 인생을 가장 값지게 만듭니다.

내 인생에 주님이 개입하시면 그 때부터 내 인생이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화가 시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것에 대해 돌 감람나무인 우리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게 되어 참 감람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비유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보잘 것 없는 내게 보배 이신 예수님을 담게 되었다고 비유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신약 본문에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분입니다. 우리와 사귐을 같고, 우리의 신분을 새롭게 만들고, 우리를 존귀한 하늘 백성 삼아 영원한 하늘 기업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본문 창세기에 나오는 에녹 역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존귀한 인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에녹이란 이름의 뜻은 '시작하는 자', '봉헌된 자', 또는 '바친다.', '가르친다.'라는 의미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며(1:14), 아버지 야렛이 162세에 낳았습니다.(5:18) 그리고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므두셀라는 인간으로서 가장 장수한 사람입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볼 때, 에녹은 65세에 가서야 철저한 중생의 체험과 은혜의 체험을 하고, 그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경계선이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은 내가 언제부터 교회 다녔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언제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났느냐가 중요합니다.(3:5) 그런데 어떤 신자는 예수 믿기 전과, 믿고 난 후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신앙의 경계선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중생의 체험이 없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예배를 드리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삽니다.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교회 나오기 전이나 나올 때나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겉모습만 신자이지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 이 세대를 본받아 살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에녹은 어떤 환경에서도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환경을 지배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에녹의 때에도 홍수심판 직전이기 때문에 시대가 혼란하고 죄악이 관영한 때였습니다. 공업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육의 일에 심취하여 첩을 두는 일과, 살인하는 일과, 만사를 정욕대로 사는 죄악 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에녹은 시대에 속화되지 아니하고 시대의 사조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훌륭한 신앙인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을 하되 1년도 아니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였다 함이요,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다 함이요,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은혜 받고 은혜생활을 지속하기가 힘이 들고 어려울 것인데, 에녹은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했다니 놀라운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는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의 모든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의 임재와 동행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젊은 육상 선수가 올림픽에서 명성을 얻은 뒤 성공을 거둔 소감을 말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나와 함께 달려주셨기 때문에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 해설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이 이기도록 도우셨다는 말은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훈련하는 데 필요한 준비도 못했을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할 필요성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달려 주셨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늘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입니까? 우리는 너무도 자주 매일의 삶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지금껏 살아온 하루하루 삶의 기적,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재능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과 이 세상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이 동행 하실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 되고 그 때 우리는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합니다.

에녹은 300년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하다가(11:5),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최후의 심판을 예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예언자적 시각을 가진 선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1:14-15) 그가 낳은 아들 므드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란 이름의 뜻은 대확장’ ‘창던지는 자’ ‘그가 죽으면 보낸다.’ 등의 뜻입니다. 무엇을 보낸단 말인가? 홍수의 심판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홍수 심판은 므두셀라가 죽자마자 바로 그 해에 일어났습니다. 심판 직전에 그를 이 땅에서 데려가시고 나서 심판하셨습니다. 에녹이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비결은 심판이 있음을 깨닫고 경성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아는 자는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구약 본문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동행하는 에녹을 너무 기뻐하셔서 죽음조차도 면제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함을 얼마나 기뻐하셨으면 그렇게 하셨을까요?

성경에는 하나님과 동행(同行)한 사람이라 할 때 오직 두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분은 노아요, 한 분은 에녹이었습니다. 6:9"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완전한 의인이라고 한 노아와 더불어 에녹은 3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육신이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도 오직 두 사람뿐으로, 엘리야와 에녹이었습니다. 그러나 3백년이라는 긴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는 증거를 받은 자는 오직 에녹뿐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렇듯 의롭게, 경건하게, 온전하게 산사람은 달리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어떻게 그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을까?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그의 행적(行跡)을 밝힌 곳이 별로 없습니다. 유다서 1:14에 잠깐 그가 심판을 예언하였다는 말이 있기는 하나 성경에 그에 대한 기록은 간단합니다.

그의 업적이란 3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오직 자녀를 낳았다는 말뿐입니다. 이로 보건대 3백 년 동안 그의 생활은 지극히 평범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장성하게 되매 장가들어 하나의 평범한 남편이요, 가장(家長)으로서 자녀를 낳아 저들을 기르며 저들을 먹여 살리기에 골몰한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경건한 수도사들처럼 집을 떠나 홀로 수도에만 전념한 그런 사람도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많은 자녀를 거느린 모든 가장들이 당하는 그 수고와 그 시험을 같이 당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밤과 낮으로 복잡한 세상에서 피곤하게 수고로이 일해야 했던 한 가정의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신앙생활이란 특별한 생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의 평범한 생활 중에 믿음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때때로 경건하고도 엄숙한 형식이 필요하지만 그 어떤 의식(儀式)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에녹의 모범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먹을 양식을 나누어 주는 작은 일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결코 자녀들만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용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그것을 받아 나누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임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린 소자(小子)에게도 냉수 한 그릇을 나누어 주는 그 작은 일속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있습니다. 또한 에녹의 생활은 이처럼 평범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미미했음을 봅니다.

창세기4:16절 이하에 보면 가인의 아들인 동명이인인 에녹은 큰 성()을 쌓아서 그것을 에녹성이라 하여 자기 이름을 남겼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기뻐하시지도 안았고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녹에게는 이렇다 할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제단을 쌓아 후세에 남기지도 못했고, 이삭같이 많은 우물을 남기지도 못했고, 야곱처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처럼 대국의 총리가 되고, 흉년의 때에 동족까지 먹여 살리는 공적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에녹의 일생이란 보잘것없는 미미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그는 누구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가장 큰 칭찬과 더불어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큰 업적을 남길 수만 있다면야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큰 업적을 남긴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에녹처럼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더 귀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마치는 깨끗한 생애를 남길 수 있다면 이에서 더 큰 성공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녹은 신앙의 승리자였습니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가 심히 악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세상이 악하다고 그 세상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악한 세상에 살면서 세상 풍조를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그러한 악한 세상에 살면서도 에녹은 언제나 하나님과 친밀하고 완전한 믿음의 교제와 헌신의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에녹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3.나의 가는 길을 가장 안전하고 복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니 누가 우리를 대적하고, 정죄하고, 헤치고, 넘어뜨리고, 두렵게 하겠습니까?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의 이름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고, 복되게 합니다.

요즘은 브랜드 전쟁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브랜드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의 브랜드를 비슷하게 도용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삼성’ ‘현대’ ‘LG’ 이런 기업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노력해 온 것입니까? ‘NIKE’라는 상표 이름 하나의 값어치가 70억 달러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COCA COLA’라는 상표 이름은 ‘NIKE’10배 정도가 되는 700억 달러나 된다고 하니, 이름의 힘은 대단 한 것입니다.

그 이름은 그 사람이나 기업의 자체입니다. 그 만큼 애쓰고 노력한 그 자체인 것입니다. 아무나 잘 되는 기업이나 사람의 이름을 본 딴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 그들의 별명이 붙게 되어 있습니다. 슈바이쩌는 밀림의 성자라고 부릅니다. 에디슨은 발명 왕이라고 부릅니다. 카네기는 강철 왕이라고 부릅니다.

이름 중에 최고의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닉네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둘 다 구원할 자”, “구세주란 의미를 갖고 습니다. 또 다른 이름 중에 하나가 임마누엘입니다. 신약 본문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자기 백성인 우리가 죄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약해지고 사단에게 끌려 다니며 무서워 떨고, 죄의 종노릇하고, 죽음에 메어 있는 것을 그대로 방치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빙점의 주인공 미우라 아야코 간증에 보면 어느 사람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에는 불교와 같은 염불이 없습니까? 뭐 나무아미타불 같은 것 말입니다. 있습니다. 불교의 나무아미타불과는 달라도 우리는 임마누엘! 아멘! 이 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뜻이지요. 나는 이 기도를 통하여 늘 평안을 얻습니다. 내가 병으로 오랜 요양생활 가운데 힘들고 외로울 때면 임마누엘’ ‘아멘을 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고 힘이 솟아납니다. 나는 임마누엘’ ‘아멘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면 나쁜 생각도 사라지고 기쁨이생기고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그 이름에 큰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위대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죄를 이기게 됩니다. 귀신이 물러갑니다. 병마도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런 권세 있는 이름입니다. 1:12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했습니다. 구원 얻는 능력의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행2: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했고,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두려움에서 해방 되어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19856, TWA 847기의 기장 존 테스트레익은 자신이 운행하는 비행기가 테러범에게 피랍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공항에 착륙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가 비행기를 베이루트 공항 쪽으로 접근시키자 테러범은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면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으려고 했습니다. 성실하게 믿음 생활을 하던 그는 한동안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죽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야. 죽은 뒤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평안이 넘쳤습니다. 이후 17일 동안 전 세계가 847기의 피랍 때문에 경악했지만 정작 그는 승객들과 가족의 안전에 대해서만 염려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당시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죽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테러범이 나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수류탄이 터지지 않고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죽도록 허용하셨다면 그것은 곧 나를 위해 마련하신 더할 수 없이 좋은 그분의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몇 차례의 어려움 후에 승객과 승무원은 물론 자신까지 모두 무사히 구조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진실로 하나님은 기내에 함께 임마누엘로 임재하시면서 평강으로 나를 강건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참 평안을 주시고, 마침내는 우리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가장 복된 인생이 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받는 복이요,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런 복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신년 첫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과의 동행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과의 동행은,

 

.내 인생을 가장 값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가장 안전하고 복되게 합니다.아멘.



하나님 나라의 경영자(1:26-28)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시간 하나님 나라의 CEO”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CEO(Chief Executive Officer)란 기업의 최고경영자를 가리키는 영문의 약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신28:13에 나오는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라는 복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 주셨기 때문입니다.

 

꿀벌의 세계를 보면 참 신비한 점이 많습니다. 여왕벌이 탄생하는 과정도 여왕벌과 일벌은 처음부터 다른 알이 아니라 똑 같은 알에서 태어난 유충이지만 일벌은 부화후 초기 3일간만 로얄제리를 먹지만 끝까지 먹은 벌은 여왕벌로 변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벌보다 30배 이상 살고 몸집도 2배 이상 크고 일생동안 200만개 이상의 산란능력을 갖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어떤 양식을 먹고 삽니까? 보통 사람이 먹는 양식을 먹으면 보통 사람이 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되 끝까지 먹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즐길까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은 하나님 나라의 최고경영자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자라면서 유모에게 너는 히브리인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것처럼 늘 이 말씀을 묵상하고 "나는 하나님 나라의 CEO." 하면서 그 진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가 다르다고 경영자의 사고를 갖게 되면 처음은 미약하나 그는 점점 창조적이고 위대한 사고를 갖게 되어 심히 창대하지만, 노무자의 정신을 가지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경영자에게는 몇 가지 기질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절대 믿는 것입니다.

 

6:31-32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가난을 타계할 위대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도 좋지만 더욱 이 공급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귀합니다. 13:5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 말씀을 붙들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보급의 샘이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바다가 솟구쳐도 끝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사람이 됩니다.

 

2. 근면한 기질을 가져야 합니다.

 

6: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했고, 살후3:10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했습니다. 부지런 하라 해서 손발이 다 닿도록 하는 노동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더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삼성경제연구소가 주최하여 ‘CEO 조찬 세미나를 열었는데 강사로 초대된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은 입이 딱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7시 반인데 800여 명의 인파가 강연장을 메우고 있었는데 그들은 한국 재계에서 알아주는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오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경영자는 아침형 인간이어야 합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아침형이었습니다. 일찍 일어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루를 생각합니다. 공중의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지만 가만있지는 않습니다. 부지런히 먹이를 찾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지도하심에 민감합니다.

 

26:12-13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더니 큰 복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그물을 오른 편에 던져라 하실 때 순종했더니 가득히 잡았습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도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할 때 그대로 순종했더니 넘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위대한 질문은 위대한 해답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연구하고 공부할 뿐 아니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늘 질문을 갖고 계시기 바랍니다. 2:1-2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이삭은 말씀하신 대로해서 100배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현재보다 100배나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귀중한 지식들은 항상 숨겨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공부만 많이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공부도 많이 하면서 진짜 중요한 지식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무엇이든 잠재력을 백배로 가정하고 그 비밀을 캐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위대한 것은 지혜를 귀히 여기고 지혜의 스승을 귀히 여기고 머리를 귀하게 여깁니다. 첫째 머리에서부터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한 가지를 배우면 열 가지를 통달하고 한 번 보면 잊지 않는 지력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력을 발달시키는 방법이 많은데 첫째는 머리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래서 잠3:5-6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했습니다.

 

4. 청직이로서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딤전6: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을 재무부장관시켜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격 미달입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십니다.

 

그래서 잠23:4-5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했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는 것은 이 청직이 훈련을 잘하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십일조만 아니라 나머지도 아버지 뜻대로 지혜를 받아서 백배로 배양하고 올바르게 쓰는 청직이 훈련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딤전6:8에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사업을 위해서는 꿈이 커야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라면 소박하시기 바랍니다.

 

부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나누고 베풀며 검소하게 사는 사람들을 (yawn)이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욘족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나 야후의 창업자인 제리 양 같은 사람들인데 그들은 다 지상보다 하늘에 쌓는 것을 더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 멋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심으면 거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11:24-25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선한 일 많이 하라고 자꾸 자꾸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고 했습니다. 이걸 믿어야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그 다음 절 고후8: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이 말씀의 전후 문맥을 보면 연보를 교훈하는 말씀으로 사랑 안에서 평균케 하는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요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 본을 받아 나눔과 복음전도를 위해 소박하게 살라는 것이 이 구절이 말씀하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착한 일을 위해 더욱 채워주신다는 것이 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대한 경영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늘 여왕벌처럼 진리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동역자요 경영자라는 확신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청직이로서의 확신과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채우심을 믿고 근면한 기질을 가지고 주되신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 크고 아름다운 것을 이루는 가장 복된 경영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35:1-5)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이 시간에 벧엘로 올라가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할까요? 그것은 하나님 자녀냐? 아니냐? 복의 사람이냐? 아니냐? 평안할 것인가? 아닌가? 천국에 갈 건가? 아니냐? 를 엿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 예배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가 예배 시간에 한참 설교하고 있는데 교인들 중 몇이 졸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웨슬레 목사님은 한참 쳐다보다가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불이야! !" 교인들은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눈이 둥그레지고, 자던 교인들은 깜짝 놀라 일어나 물었습니다.


"어디에 불이 났습니까?" 교인들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지만 불이 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 웨슬레는 "지옥의 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 도중에 잠을 자는 사람들이나 정신없이 멍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가게 될 지옥불 말입니다." 조금은 무리한 말 같지만 그렇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배에 충실하지 않고 어떻게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또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와 예배는 분리해서 생각하려야 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합니다. 그래서 시50:5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그렇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서 무사히 돌아오면 제단을 쌓겠다고 한 약속을 버리고 세겜에서 양치는 재미에 푹 빠져 살다가 지옥 같은 삶이 찾아왔습니다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들을 복수하겠다고 아들들이 무수한 살인을 저지르고, 그래서 엄청난 보복의 두려움을 당하는 등 견딜 수 없는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때 야곱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이 말씀을 듣고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한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 없거나 부족한 삶이 그렇게 됩니다. 영육 간에 혼란과 환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예배를 위해 극복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세겜을 떠나는 일입니다.


1절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여기 일어나란 세겜에서 일어나 그러니까 머물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야곱이 머물던 세겜은 바로 세상이요,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거기서 떠나서 하나님 앞에 마음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재미있어도, 아무리 연속극이 재미있고, 축구 야구 경기가 좋아도 떠나야 합니다하는 일이 바쁘고 힘들어도 하나님 섬길 시간이 계획되어 있지 않다면 실패입니다예배만 제대로 되면 은혜 받지 않을 수 없고 복 받지 못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부인이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 상태로 생명이 위독할 때 목사가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시켜 목숨을 건졌습니다. 부인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며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두어 달 교회에 나오더니 예배에 불참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왜 빠지십니까?” 그러자 너무 바빠서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조금 한가해 지거든 열심히 믿어 드릴께요.”


이처럼 믿어 주시기 위해서 나온 분이 계시다면 그 일 그만하셔도 좋으니 이제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성을 향해 가려면 장차 망할 장망성을 떠나야 합니다성도들의 직업 선택도 하나님 섬기기에 지장이 없어야 합니다하나님 섬기는 일이 잘되야 다른 모든 것도 복이 됩니다.


2. 이방 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2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우상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야곱의 가족들은 아직 밧단 아람의 이방의 냄새가 나는 삶이었습니다. 드라빔이라는 우상도 있었고 신상이나 주문을 새긴 부적 같은 귀걸이도 있었습니다.


자기 식솔들이 갖고 있는 드라빔과 귀걸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의 거대한 유산과 바꿀 수 있는 보물이었습니다. 얼마나 귀한 것이었으면 라반이 그것을 잃고 군사를 이끌고 야곱을 추격해 왔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자는 살지 못한다고 했으나 라헬이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목숨 걸고 감추었습니다.


그런데 세겜에서 수치를 당할 대로 당하고 고통을 당할 대로 당한 후에야 '이게 뭐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하면서 그것을 다 상수리나무 아래다 묻었습니다. 이처럼 세상 죄악 붙들면 붙들수록 손해입니다. 그래서 골3:5-6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했습니다.


마치 천둥 번개 치는 날 쇠붙이 금붙이 붙들고 있는 거나 같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 다 십자가 아래 다 매장하고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신6:4-5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도 하나님, 바알도 하나님 둘 다 섬겼습니다. 그랬기에 36개월 동안 우로가 그쳤습니다. 비가 오지 않고 이슬도 없습니다. 이처럼 예배를 드려도 하늘의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하나님의 은혜는 새벽빛보다 더 정확해서 문제가 있으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옷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2절 하 반절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그들은 우상을 버릴 뿐 아니라 의복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이방의 유행하는 자유롭고 요란한 세속 패션이 아니라 성도의 거룩한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더 큰 영광을 돌리려면 우리가 더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2:1-2"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변화되면 드리는 예배가 더욱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김익두 목사가 처음 예수 믿을 때 부흥회에 참석하려고 재를 넘다가 더워서 웃옷을 벗고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술 취한 사람이 오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온 거야?" 하면서 다짜고짜 김익두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익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 매를 맞았습니다.


다 맞은 후에 그 사람에게 "형님, 다 때렸습니까?" 라고 묻자 "그래 다  때렸다. 어쩔래?" 그러자 김 목사는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형님이 받으셨군요. 내가 바로 익두요."  그러자 깜짝 놀라 살려달라고 빌더랍니다. 이처럼 이제는 때리면 맞아야 합니다. 거짓말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용서하고 축복하고 사랑해야 합니다불편한 것 같지만 죄짓고 사는 것보다는 천 배나 낫습니다.


4. 믿고 전진하는 일입니다.


5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야곱의 가장 큰 두려움은 주변 족속들의 보복이었습니다. 아들들이 세겜 족속을 죽였으니 동족들이 가만 두겠습니까?


세겜 사람들은 히위족속입니다. 히위족속은 전 가나안에 퍼져서 큰 세력을 이루며 살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히위족속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러므로 벧엘로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셔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 하려고 하면 두려운 것이 많습니다아들들의 잘못 때문에 추격자들이 두려웠듯이 율법과 양심이 나를 쫓아옵니다. “너 죄인이잖아? 오늘도 죄 많이 지었다. 그렇지 않다 해도 하나님을 망각하며 살았다.” 하면서 우리 심령을 쫓아와 찌르고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인 줄 다 아시고 십자가 보혈로 이 모습 이 대로 받으신다는 믿음 가지고 담대한 마음 가지고 나가면 아무도 우리를 추격할 자가 없습니다. 죄도 허물도 부족한 것도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예배 직전만 되면 속상할 일이 터집니다. 교회 갈 마음을 망쳐놓습니다. 봉사하려고 해도 봉사하지 못할 상황이 생깁니다. 다 사탄의 역사들입니다.


그러나 다 무시하고 흥하든 망하든 살든 죽든 하나님께 맡기고 전진해야 합니다. 주일 지키다 손해 본다면 손해 보리라. 하며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십일조 드리다 손해를 봐도 손해 보리라 하며 전진하세요. 양심 지키다 손해를 본다 해도 전진하세요. 잠시 손해 같아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전진해야 합니다. 그 사람만이 예배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처럼 시련과 낭패와 실망 가운데 계십니까? 속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예배로서 하나님과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마음 두지 말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두며, 사탄이 우리의 예배를 아무리 방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귀를 막고 예배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배의 제단 열심히 쌓아 모든 방황과 고통은 끝나고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예배의 성공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창13:10-18, 11:1-6

 

영어 단어에 보면 보다는 단어에 ‘see’ ‘look’이 있습니다. 둘 다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see’는 눈에 들어오는 것을 그냥 보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look’은 목적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의미를 생각하며 보는 것입니다. 통찰력을 가지고 뜻을 찾으면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눈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냥 보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를 생각하고 뜻을 찾으며, 통찰력을 가지고 보는 사람입니다.

 

신약 본문 1절에서 믿음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8:5-10의 내용을 보면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이 중풍 병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 삽 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백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바로 이 백부장의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즉 백부장은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대상이요, 실상은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본 사람이요, 주님을 통해 고침 받은 하인을 본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은 찾아보기가 쉽지 안 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님 안에서 그분이 약속하신 구원과 천국을 믿는 믿음으로 바라보며 삽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믿음의 눈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사람이 아닌 주님을 바라봅니다.

 

구약 본문 창13:18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기를 힘썼습니다. 주님께 제단을 쌓는 일에 힘쓰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힘쓸 때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복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람을 볼 때가 있었습니다. 애급에 내려갔다가 애급 왕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까봐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속이다가 아내를 빼앗길 번했습니다. (12:10-20) 베드로도 물결을 바라보다 물에 빠지게 되었고, 사람이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부끄러운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신약 본문 히11: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했습니다. 에녹은 세상에 사는 동안 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게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대상인 성부 하나님,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히 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분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분입니다. 그분 안에 구원이 있고, 그분 안에 영생이 있고, 그분 안에 천국이 있고, 그분 안에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면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면 믿음도 흔들리고, 시험에 들게 되어 믿음이 파선되어 믿음의 실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호주에서 사역하던 선교사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2000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일주일동안 편지 50여 통을 쓰고 국제전화도 하고 온갖 궁리를 다해서 계산해 보았지만 삼백만원 정도 밖에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어서 그 계획을 취소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초조감과 좌절감 패배의식 같은 것으로 영적 슬럼프에 빠진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그의 부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시나요?” 선교사가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도 확신하시는지요?” 이 물음에 너는 정말 나를 믿느냐?’라고 번개처럼 스치는 주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사실 하나님 보다 그 많은 후원자들을 믿었던 자신을 회개하고 다시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선교사처럼 잘못된 대상을 향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의 차이는 믿음의 대상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대상은 어떤 사람이 아니요, 성부 하나님이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눈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며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믿음의 사람은 욕망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바라봅니다.

 

구약 본문 창13:9-10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했습니다. 불어나는 짐승들로 인해 더 이상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할 수 없어서 아브라함은 먼저 조카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 때 롯은 주저하지 않고 눈에 보기에 좋은 물이 넉넉하고, 하나님의 동산 같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갔습니다.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인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그와 그 가족들이 그 곳에서 어떤 영향을 받게 되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앞세워 눈에 보기에 좋은 그곳을 선택하여 간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주님이 주시는 비전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머문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롯이 택한 곳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주님의 뜻이 있는 곳이요, 주님이 주시는 비전이 있는 곳입니다. 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대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가 원하는 것을 바라보면 마귀가 원하는 것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롯처럼 세상적인 욕망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마치 선악과를 바라본 하와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것은 선악과입니다. 그 결과는 세상을 본받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파멸입니다.

 

프랑스에는 유명한 삶은 개구리 요리가 있습니다. 이 요리는 손님이 앉아 있는 식탁 위에 버너와 냄비를 가져다 놓고 직접 보는 앞에서 개구리를 산 채로 냄비에 넣고 조리하는 것입니다. 이때 물이 너무 뜨거우면 개구리가 펄쩍 튀어나오기 때문에 맨 처음 냄비 속에는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의 물을 부어 둡니다. 그러면 개구리는 따뜻한 물이 아주 기분 좋은 듯이 가만히 엎드려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매우 약한 불로 물을 데우기 시작합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서서히 가열하기 때문에 개구리는 자기가 삶아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기분 좋게 잠을 자면서 죽어 가게 됩니다.

 

롯이 소돔 고모라에 살면서 개구리처럼 삶아지듯 서서히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롯의 처는 멸망을 당한 소돔 고모라와 함께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이나 통일신라가 멸망한 것은 외부의 침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부에 있는 죄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전이 사라짐으로써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목적과 목표의식이 없어져 그냥 내부에서 저절로 무너진 것입니다. 헬렌켈러에게 어떤 사람이 듣지 못하는 농인과 보지 못하는 맹인 중 누가 더 불쌍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육안을 가지고도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에요토마스 아퀴나스는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축복은 내가 목적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욕심으로 만들어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롯처럼 사람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뜻과 비전을 바라보며 삽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 같은 믿음으로 주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는 성도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바라봅니다.

 

내가 살면서 어디에 비중을 두고 사느냐를 보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인가 아니면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세상을 위하여 세상 것에만 마음을 쓰다 천국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고, 천국을 발견하고 천국을 위하여 가진 것을 투자하고, 때로는 세상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 3:8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했습니다. 바울은 세상적인 지위와 명예가 높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의 지위와 명예를 배설물로 여긴 것은 그가 더 좋은 본향 천국을 바라봤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천국의 상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는 천국의 영광과 비교하면 마치 배설물과 같았습니다. 바울의 목표는 하늘의 상이었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을 믿음장이라 부릅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열거하면서 이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고, 세상에서는 외국인이나 나그네로 여기면서 더 나은 본향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며 살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27-28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성도들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성결한 삶을 살기를 힘쓰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죄의 낙을 따라 살다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고 수치와 심판을 피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미군 부대에서 사무를 보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결혼하였습니다. 귀한 가문에 독자와 결혼하여 임신을 하였습니다.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을 때 온 가족들과 친척들이 모였습니다. 너무나 자손이 귀한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만하는 순간에 그 여자는 병원이 떠나갈 듯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밖에서 궁금하게 여기던 가족들이 문틈으로 물었습니다. “아들인가요?” “아니요.” “딸인가요?” “아니요.” “아니, 그러면 무엇인가요?” 간호사가 말했습니다. “말할 수 없으니 들어와서 보세요.” 들어가서 아이를 보는 순간 온 식구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몸집이 큰 흑인 아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내가 천국에 갈 것인가 지옥에 갈 것인가도 그때 다 밝혀집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소망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바른 믿음의 행실을 가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 썩어지고 없어질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살다가 다시 오실 주님 맞는 성도들이 됩시다. 정리^^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믿음의 눈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사람이 아닌 주님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사람은 욕망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바라봅니다.

 



다스려야 할 죄 창4:1-15, 5:16-24

 

한 학자가 분노(忿怒)에 대한 연구 발표를 했습니다.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얼굴표정, 이른바 안색이 변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호르몬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사람에게 분노가 일어나면, 질 하 액과 아드레날린이 혈액 속에서 분비되고, 동시에 동맥의 혈압이 오른다고 했습니다.

 

혈압이 오를 정도의 심한 충격의 힘은 소화기관에 몰려있던 피들이 간()으로 몰려가서 간에서 당분을 가지고 모든 운동근육으로 가서 공급함으로 육체를 즉시 공격할 수 있는 공격 태세를 갖춘다고 합니다. 그래서 혈액이 몰려가는 동안에는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가, 목에 정맥이 부풀어 오르고 동맥의 피가 얼굴로 올라가면서 얼굴이 벌겋게 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또 눈동자 동공이 확대가 되면서 문자 그대로 안색(顔色)이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도 화가 나면 목에 핏대가 서고, 얼굴의 안색이 변화됩니다. 그럴 때 자기를 컨트롤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건강에도 치명적인 타격이 될 뿐만 아니라 가인처럼 자신도 모르게 무서운 행동을 저지르는 불행한 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다스려야 할 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죄에는 형벌과 저주가 따릅니다.

 

구약 본문 창4: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배를 거절하신 것에 대해서 크게 분노했습니다. 가인의 태도를 보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인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든 말든 별 관심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예배가 거절당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하고 실망했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인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차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달라는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자 분노한 것입니다. 신앙인 가운데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예배 보다 어떤 욕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중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보다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를 위해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는 욕망, 자녀가 명문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욕망 등을 가지고 기도했는데, 자기 욕망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하면서 화를 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믿는 자들을 비난하고, 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둘째는 자신은 거절당했는데 동생 아벨은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동생이 잘 된 데 대해서 마음이 상했습니다. 시기와 질투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가인이 바른 믿음의 자세를 가졌다면 내 기도는 안 들어주셨지만 동생의 기도라도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을 겁니다. 가인은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꼬인 마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은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같이 마음 아파하고,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면서 축하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의 마음입니다.

 

가인은 옛사람의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죄의 종이 되어 죄에 메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신약 본문 갈 5장에 육체의 소욕이란 말이 나오고 갈5:19-21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문자적으로 육체의 욕망을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인 죄의 성품을 말합니다. 흔히 죄 성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죄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죄의 성품은 육체가 좋아하는 육체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그 죄의 성품으로 나타나는 행위는 19-21절에 열거 된 내용입니다. 이런 죄의 열매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과 저주가 따르게 됩니다.

 

범죄 한 가인에게 땅이 저주를 받아 땀 흘린 만큼 소출을 거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쉴 곳이 없고 마음에 평안을 주지 못하는 떠돌이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당장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에 절망과 허탈과 비애를 안겨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육체의 열매를 맺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여기 '유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상속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상속자는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성품을 따라 살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평안, 기쁨, 감사, 사랑, 영적 생명, 행복, 소망, 영생 등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축복 대신 저주와 진노의 영원한 형벌이 다르게 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저주와 진노의 형벌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죄에서 해방 받아 영생에 이르는 복을 받길 소망합니다.

 

 

2.하나님은 죄에 대한 해결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거나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문에 반항하는 대답을 하며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말을 계속 늘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실 때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불순종하여 범죄 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던 때와 같습니다.

 

아담이 이 질문에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감추고 변명하였었는데 가인 역시 하나님의 질문에 회개하기는커녕, 자기의 죄를 숨기면서 오만 방자하게도 반항적이고 하나님께 따지고 대드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회개할 기회를 잡느냐 놓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잘못이나 가롯 유다의 잘못은 모두 큰 실수요, 허물이요, 죄였습니다. 주님을 배반하여 판 것도 큰 죄악이자만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한 것도 큰 죄악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큰 사도가 되었고 가롯 유다는 멸망의 길로 갔습니까? 그것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회개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닭소리만 듣고도 통곡하면서 회개하였지만 가롯 유다는 주님께서 직접 세 번이나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회개하지 않고 멸망의 길을 간 것입니다. 악한 길에 들어섰을 때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거짓으로 감추고 반항하면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죄에서 해방 받는 길,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는 길을 만세 전부터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 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통해 속죄의 길,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보혈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죄 사함을 받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교제를 나눕니다. 사람이 주님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이며 저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범죄 한 후 그의 죄를 회개하면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51: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뵈옵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은 하나님의 낯을 뵈옵는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서운 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내어 쫓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을 사탄에게 내어 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벌이 무엇인가 하면 다른 기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을 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모스의 이 예언 후에 70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된다면 이것은 큰 불행입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가 임할 때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버리게 되고 하나님과 교제가 긴밀해 지는 삶을 살다가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 가지고는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를 소망합니다.

 

3.죄를 다스리기 위해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육적이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 육적인 욕구를 인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힘으로도, 지혜로, 노력으로, 수양으로, 고행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신약 본문 갈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을 쫓아 행할 때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도의 믿음 생활의 배후에는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창조의 사역에서와 같이 늘 함께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게 역사하십니다. 그 외에도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사역 몇 가지를 살펴보면,

 

먼저 거듭나게 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요3:5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거듭남이란 헬라어로 아노덴인데 이 뜻은 다시, 두 번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 해서 성경도 많이 알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으며, 교회 생활에 익숙한 자라도 거듭나지 못한 신자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종교인이요, 육에 속한자일 뿐입니다.

 

다음에 육체의 소욕을 이기게 하는 사역입니다.

본문 갈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육적 소욕으로 인한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 끓임 없이 일어나는 육체의 소욕 앞에 소리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7:24) 하고 탄식한 것입니다. 내 스스로 육체의 소욕을 떨쳐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육체의 소욕을 더욱 강해집니다. 마치 몸에 붙은 거머리를 떨쳐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강하게 달라붙듯이 쉽게 떠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므로 다른 힘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육체의 소욕 말고 또 다른 법이 임해야만이 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롬8:2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육체의 소욕보다 더 강한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임해야 합니다.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고 죄와 사망의 길로 데려가는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 받아서 성령의 법 안에 거할 때 육체의 소욕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하고 다스리는 사역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육체의 소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미혹이 더 강하게 역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갈5: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성도가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살거나 사단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마음에 기쁨도, 평안도, 담대함도, 구원의 확신도 다 사라지게 되고 대신 불안 근심,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탄이 짐승에게 즉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13:7) 이 어둠의 세력들은 권세를 받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스리려고 할 것입니다.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는 자는 이악한 영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후 겁 많던 예수님 제자들이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자 그들이 담대히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와 예수를 전했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은 그들의 사역은 오직 예수 한 분을 전하다가 예수를 외치고 순교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 역시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자 그들이 강력한 로마의 권세 앞에서도 비굴하지 아니했고 굶주림으로 으르렁 거리는 사자의 입을 보고도 예수를 찬양하며 예수 이름 부르고 죽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많은 신자들이 타락의 길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령의 다스리심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목사부터 성도들까지 모두 타락의 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18:4)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쳐 보았습니까? 우리 곁에 와 계신 예수의 영을 얼마나 사모하며 간절히 원해 보셨습니까?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육체의 소욕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만 자랑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마지막 때에 주님의 도구로 온전히 사용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다스리심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창4:1-15, 5:16-24 두 본문을 중심으로 다스려야 할 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죄에는 형벌과 저주가 따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해결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아멘.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창19:23-33, 17:26-37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자와 당나귀, 여우 셋이서 힘을 합해 사냥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나누는데, 사자가 당나귀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똑같이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자는 공평하지 못하다 하면서 당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여우한테 나누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대부분을 사자 몫으로 돌리고 자기는 쥐꼬리만큼 가졌습니다. 그때서야 사자는 흡족해 하면서 이제야 공평하게 되었다고 여우를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사자가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이런 지혜를 생각해 냈느냐?" 그러자 여우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떻게는 뭘, 당나귀 죽는 것보고 생각해 냈지롱!".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내게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보고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병에 걸리면 내게도 병들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시험에 든 것을 보고 나도 그런 시험에 들까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중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의 때, 곧 심판의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를 잘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했지만 노아의 가족 외에는 예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는 소돔 고모라의 심판의 때 롯의 가족이 겨우 심판을 피해 그 곳에서 나올 때 그나마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롯의 처가 뒤 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신약 본문에는 종말의 때를 예고하면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우리 성도는 심판의 날을 잊지 말고 항상 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세 번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1.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힘써야 합니다.

 

구약 본문 창19:26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믿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말하는 천사의 말도 믿지를 못하고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녀는 철저하게 자기 외에는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천사가 이 성이 멸망할 것인즉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소금 기둥이 되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천사들로부터 소돔 성을 멸망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롯은 자기들의 사위 될 자들에게 안타까워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농담으로 여겼더라."(19:1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농담처럼 여기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들었던 사위 될 자들도 소돔 성이 멸망할 때에 함께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면, 롯은 하나님을 신뢰 하는 면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 중심 신앙이 아닌 자기중심 신앙, 물질 중심 신앙, 세상 중심 신앙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본문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30절에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했습니다. 롯이 왜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였을까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돔의 멸망을 보았던 롯이 그 악몽 같은 불안을 떨치지 못해 굴속으로 숨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소알 사람들도 소돔 사람들과 꼭 같이 악해서 롯이 그들 속에 있기가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주장은 롯만이 아니라 소알 성에 살던 사람들 전부가 두려워 산으로 올라가 굴속으로 숨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주장이 사실이든 롯이 소알 성에 거하기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소알 성까지 다 멸하실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이 소알 성으로 피하게 해 달라는 간청을 듣고 소알을 롯의 피난처로 허락하셨습니다. "그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2123) 했습니다.

 

롯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신뢰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롯을 소돔 성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소알 성에서 멸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소돔에서 그를 내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소돔의 처참한 멸망을 보았던 롯에게 불안도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그곳에서 구원을 얻은 체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근성이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불신의 근성이 그를 두려움 가운데 소알을 떠나 굴속으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이 불신은 곧 소돔의 근성이요, 세상의 근성이요, 사단 마귀의 근성입니다. 이 나쁜 근성이 우리를 죄로 이끌고, 불순종 하게 하고, 불신의 자리에 붙들어 놓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자리에 떨어뜨려 놓은 것입니다. 불신은 사탄이 이 땅의 인간들에게 던져준 최고의 흥미로운 미끼입니다. 이 미혹에 빠지게 되면 결국 말씀을 믿지 못하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처와 같이 되고 맙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세상 것보다 주님께 마음을 기울이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믿음도 도적맞게 되고, 롯의 처같이 구원도 잃게 됩니다. 롯에 대한 성경을 읽을 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롯이 구원 받은 사람일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원받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구원받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답을 베드로후서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7을 보면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하는 말씀으로 보아 롯이 불 가운데에서 겨우 구원받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은 다른 믿음의 선진들처럼 뛰어나고 성숙한 하나님의 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구원을 받기는 하였지만 성공한 의인은 아니고 겨우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실패한 의인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롯이 왜 실패한 의인의 모습인지 그에 대한 말씀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은 항상 하나님 보다 물질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애착심이 강해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선택해야 할 때는 언제나 물질적인 것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똑똑한 사람이고 계산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애굽에 내려갔다 온 이후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양을 키우는 규모가 커지게 되자 아브라함과 롯의 종들이 우물로 인하여 서로 다투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물로 인해 싸울 관계가 아닙니다. 이때에 롯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정도 되기까지는 삼촌 덕입니다. 삼촌의 도움으로 이렇게 잘살게 되었습니다. 우물 문제로 종들이 다투는데 제가 우물을 양보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도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지게 될 때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할 것이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할 것이니 선택하라”(13:9)고 하였습니다. 이때에도 롯은 삼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윗분인 삼촌이 먼저 정하시면 제가 다른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롯이 보니 동쪽 요단 뜰이 비옥하고 풍요롭고 목축업도 잘 될 것 같고 하나님의 동산 같습니다. 다른 쪽은 산지입니다. 롯은 주저 없이 요단 뜰을 선택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롯은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택한 소돔성은 호색, 남색의 도시였기에 천사들이 롯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에 그들을 내어달라고 난리입니다. 남색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롯은 대뜸 우리 집에 방문한 손님 대신에 두 딸을 내어 줄 터이니 이분들에게는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롯은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딸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었어도 딸들을 서슴없이 내놓았다는 것은 도덕성이 마비되어 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소돔은 향락과 방탕의 도시였습니다. 향락과 방탕에 찌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우습게 여깁니다.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소돔 사람들과 롯의 사위 될 자들은 향락과 방탕에 찌들어 있었기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도시에 살면서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니 롯의 도덕성이 마비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롯의 두 딸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근친상간을 행합니다. 롯의 두 딸들이 근친상간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딸들이 소돔문화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술을 취하게 하여 눕고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롯의 두 딸이 소돔 성을 탈출하면서 독주를 가지고 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 성을 탈출할 때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무엇을 들고 나갈 경황이 없습니다. 그래도 가져가려면 값나가는 금은 패물을 가지고 나와야 할 터인데 그들은 술병을 들고 나왔습니다. 술에 중독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술도 좋은 술이 아니라 독주였을 것입니다. 좋은 술이라면 아버지가 그렇게 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롯의 두 딸은 당시의 소돔성의 타락한 문화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근친상간이 죄라는 의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롯의 딸들은 오직 자식을 낳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버지와 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롯은 구원받은 사람이었지만 세속에 찌들고 물들어 경건성과 도덕성을 모두 상실해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육에 속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현상을 신약 본문 눅17:27-28에서 노아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롯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일에 사람들이 몰두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심고, 연락하며, 집을 짓는 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심을 전혀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보다 세속적인 쾌락과 만족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알코올중독, 도박중독, 일중독, 마약 중독, 색스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경건한 삶이 생활화 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멀리하는 삶이 어떤 결과를 보여주는지 두 본문은 분명히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실패한 의인 롯의 모습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성공한 의인이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믿음 안에서 의인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죄악과 심판에 대해 알려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면서 의인의 수를 다섯 번이나 변경 하면서 소돔의 심판을 철회해 주실 것을 위해 간곡하게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소돔에 의인 열 명이 없어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본문 창19:29에서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롯이 받은 부끄러운 구원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 기도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인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웁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감화로 롯이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롯이 세상 중심으로 살면서 연합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을 동원하여 위험을 무릎 쓰고 추격하여 롯의 가족과 소돔 성민들을 구해 냈습니다. 의인의 역할, 의인의 기도가 멸망에 빠질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영혼을 구원하는 의인의 삶, 중보기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삶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를 드려도 속한 응답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을 더 멀리하고 세상을 더욱 사랑하며 복음의 말씀을 외면하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심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그만큼 귀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도 누군가의 전도와 기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멸망 받는 것은 물론 복음의 은총을 알고도 전하고 기도하지 않는 자신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할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중에서도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하다 돌아가신 선교사와 평신도들의 묘가 167기나 있습니다. 그중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묘가 하나 있는데, 1907년 미국 텍사스 해외 선교부 파송으로 조선 땅에 와 황해도 개성에서 사역하다 맹장염으로 쓰러져 25세의 처녀로 사망한 루비 캔드릭선교사의 묘입니다.

 

그녀가 부모께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조선은 박해가 점점 심하고 생활환경은 너무나 열악합니다. 3일 전에도 관가에 끌려가 내가 아는 교인이 순교 당했습니다. 이 땅은 토머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목 잘려 순교당하고, 제임스 선교사가 순교한 땅입니다. 지금 박해가 너무 심해 철수하라는 선교부의 지시가 있으나 대부분 선교사는 순교할 각오로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 편지로 인해 새로운 20여명의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에 지원했습니다.

 

내 목숨 1000개가 있다면 조선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그녀의 비문에 쓰여 진 내용입니다. 이 작은 한반도에 지난 126년 동안 3000여명의 선교사, 비공인 1220여명이 왔습니다. 이들의 생명 바친 헌신으로 인해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은 우리 또한 중보 기도와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선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에 잠시 잠간 후면 다시 오실 주님을 믿음 안에서 의인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잘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세 번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힘써야 합니다.

 

.세상 것보다 주님께 마음을 기울이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의인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5대 증거 (5:21-24)

 

이 시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5대 증거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1: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니까 300년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365년을 살았는데 365라는 수효도 그냥 나온 수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도 빠짐 없이 매일 300년 동안 동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증거가 무엇일까요?

 

1. 첫째 증거는 그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이 "에녹"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이란 그 인격과 동일 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에녹이란 뜻은 설립된, 봉헌된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치 교회를 설립하여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설립하고 봉헌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설립하여 봉헌하면 교회는 누구의 것입니까?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몸과 마음을 구별하여 온전히 산 제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립되다.'는 낱말이 '시작하다.'로 번역된 사전도 있습니다. 즉 시작하고 있는 모든 계획과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오직 나의 주님 삼고 살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경의 교훈과도 부합합니다.

 

그래서 롬12:1-2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법은 마음을 다해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목숨을 다해 섬기라 하셨으므로 몸과 마음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인 줄 알면 잘못 아는 것입니다. 엄연히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냥 차지하신 주인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멸망으로 던져질 자를 합법적으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고전7: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하셨고, 1:6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세상 중간에 서서 살아가지 말고 에녹의 이름과 같이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사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 증거는 300년간 동행함에서 봅니다.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여기 동행하며의 원뜻은 '산책하다'는 뜻입니다. 산책은 대화를 주고 받을 만큼 여유 있는 발걸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주장을 내려놓고 항상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았습니다.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노아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죄악이 관영한 가운데에서도 거기 빠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산 위에 배를 짓는다고 핍박했겠지만 노아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3:3"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이 말씀이 동행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동행하는 삶이란 먼저 내 뜻을 철저히 내려놓는 삶이 전제 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와도 동행할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기 어려운 것이 여행입니다. 특히 개성이 강한 사람들 끼리 여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음식 하나만 해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식성이 다른데 남을 배려하지 않으면 함께 다니기 어렵습니다. 단체행동하는데 개인 플레이하면 기다리고 찾느라 여행 못합니다. 그래서 부부 간에도 여행하다가 다투고, 어떤 연예인 부부는 그토록 러브 스토리로 세간에 떠들썩했지만 신혼여행 다녀와서는 갈라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내 개성 내 뜻을 내려놓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에녹은 겸손했습니다.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맞추어서 불편할 것 어디 있고 손해 볼 것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11:28-30) 하셨습니다. 이것이 동행의 복입니다.

 

진정한 동행은 상대방을 배려함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욕망보다 하나님의 기쁘신 소원에만 전념했습니다. 이런 친밀한 삶을 무려 300년 동안 유지했습니다. 누구든 어떤 일에 10년이면 몸에 뱁니다. 그런데 그것의 10배인 100년이라면 이건 아주 고정화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완전수 3을 곱했으니 이젠 달리 살라해도 달리 살 수 없고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산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는 민주국가가 되었어도 아직도 노예로 자청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조상 대대로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고 있으니 몸에 배서 그것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지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배울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 이렇게 편하시기 바랍니다.

 

설경욱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성시가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이란 시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이런 마음이기 바랍니다.

 

3. 셋째 증거는 자녀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22"자녀를 낳았으며" 자녀 출산, 귀한 일이지만 특별한 일도 아닌데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나 당시 자녀 출산은 메시아를 대망하는 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3:15에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신 대로 여인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 5장에 고대 경건한 셋 계열의 족장들의 족보에 각각 수백 년씩 살면서 자녀 낳는 일만 기록했는데 '뭐 이런 웃기는 기록이 다 있어' 하고 넘어가는데 단순히 해석할 족보가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창3:15에 의지하여 자손을 낳음으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대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임신하기 전에도 태아일 때도 출산한 후에도 그 아이가 하나남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이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에 대한 정성과 기도와 기대가 얼마나 컸고 또 자신들도 메시아의 육신적인 부모가 되기 위해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을지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느 가정에 나실지 모르는데 얼마나 긴장되고 스릴 있는 일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날마다 주님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사랑보다 주님 자신을 갈망하십시요. 그렇게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으로 임하셔서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시고 인격에 예수의 형상을 나타내시고 우리들을 통하여 많은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도록 큰 능력으로 임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령을 대망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는 개인이나 교회나 교단를 기뻐하시고 놀라운 변화와 부흥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에녹처럼 영적으로 낳는 일에 열심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로서 낳고 낳기를 반복하고, 우리 자신들도 나는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만 나의 인격에 나타나길 갈망하며 더욱 온전히 거듭나기를 갈망하면 한 가정이 아니라 이건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4. 넷째 증거는 므두셀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그가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 하나님과 동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에녹은 무드셀라를 낳을 때 장차 올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습니다. 장차 홍수로 쓸어버리는 심판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임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가 그 아이가 죽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의 므두셀라로 짓고 그 때부터 두렵고 떨림으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창을 던지는 자란 옛날 고대 부족끼리 서로 싸울 때면 그 마을에서 창던지는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행해 창을 던져 물리쳤다 합니다. 그래서 창을 던지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면 그 마을은 곧 함락되고 말았기에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의미가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 그대로 무드셀라가 969세로 죽던 해에 노아의 홍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에녹은 두려운 심정으로 죄를 멀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1:14-15"아담의 칠 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이렇게 죄를 두려워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니까 함부로 행합니다. 군중심리에 휘말리면 더 두려운 줄 모릅니다. 그래서 약1: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했습니다.

 

5. 마지막 증거는 육체까지도 데려가셨습니다.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죽음을 보지 않게 육체까지도 데려감을 받은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의 예표와 아울러 그의 육체 역시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삶이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기뻐하셨으면 승천의 영광을 주셨을까요?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셨습니다. 여기 몸의 보전이란 하나님께 헌신된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몸을 드려서도 섬기시기 바랍니다. 고요한 가운데 말씀과 기도도 영혼 깊이 은혜가 되지만 육신의 힘을 다해 열심을 내면 은사가 임합니다. 이 은사는 다양한 하나님의 손길로서 우리의 삶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구속의 은총과 같은 큰 사랑도 필요하지만 이런 돌보아 주시는 잔잔한 사랑도 필요합니다. 이걸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 사는 동안 무수한 환난을 면제시켜 주십니다(121:7).

 

본명이 니콜라 에르망인 수도사 로렌스(Brother Lawrence, 1611~1691)라는 수도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접시나 닦고 허드렛일을 하는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접시를 닦고 있을 때 갑자기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여기에도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삶을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낮은 자리에서 섬기면서 날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찬양하며 밝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는 크게 변화되고 정화되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당대의 위대하고 경건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또 우리 성도들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에녹을 기뻐하셨으면 죽음조차도 면제시켜 하늘로 올리셨을까요?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몸은 이 땅을 살아도 우리 영혼은 하늘의 은혜를 누리고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 몸과 마음을 봉헌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내 주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고 사소함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고, 죄를 두려워하며 회개와 경건의 복음을 전파하며, 육신에도 특별한 하나님의 은사가 임하는 주님의 사랑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자녀 창21:1-12, 4:21-31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어느 날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너 왜왔느냐?" "상담하러 왔어요." “, 무슨 일이 생겼니?”

 

"죽고 싶어서요." "왜 죽고 싶으냐?"

 

"아빠, 엄마가 나를 귀찮게 여겨요. 내가 우리 집에 세 번째 아이거든요. 그런데 늘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까, 가족계획 실패해서 내가 태어났대요." 부모로부터 태어나지 말아야 될 자녀라고 취급 받는 자녀, 아주 귀찮게 여겨지는 자녀,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녀는 불행의 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즉 계집종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자유 하는 여인에게서 난 이삭의 경우를 대조시켜 비유적으로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약속의 자녀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하나님의 약속(언약)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구약신약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고, “언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성경은 약속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중심 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핵심에 이를 수 있고,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약속 중 최고의 약속은 인류 구원을 위해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지 않는 분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데도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신실하지도 않고, 그가 하신 약속대로 이루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약속을 붙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아브라함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 21:1-2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과거 어느 시점에 말씀하신 대로 때가 되어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제 약속하셨습니까? 처음으로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때는 그의 나이 75세 때, 당시 세계의 문명의 중심지였던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붙들고 그의 고향과 친척을 다 버리고 그의 소유로 된 땅 한 평도 없이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믿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25년이라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그 때는 아내의 경수도 다 끝난 후, 즉 인간적인 가능성이 다 사라진 후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소망이 다 끊어진 때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 어간에 아내 사라의 요청에 따라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는 자녀였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자녀는 이삭이지 이스마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구약성경이고 그 약속대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시겠다는 그 약속을 기록한 책이 신약성경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사는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인내의 믿음으로 약속하신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언약)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단순히 아들에 대한 약속뿐 아닙니다. 약속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첫 번째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셔서 그 아들을 통하여 큰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것과, 두 번째로는 그 후손들이 약속된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복에 대한 약속인데, 이 복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민족이 받게 될 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단순히 아브라함 한 개인만을 위한 약속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약속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게 해주는 본문이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3:7-9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누구나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 되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이 복음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정하신 구약 시대에 이미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소식인 복음의 기뿐 소식을 약속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우리 믿는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고,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약속을 믿는 우리를 위한 축복의 약속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약속은 아브라함 개인이나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제한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주신 약속의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갈 4:28-29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핍박한 것처럼 약속의 자녀인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로 믿음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 15:19에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3:13-14에서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했습니다.

 

약속의 자녀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요, 하늘에 시민권을 둔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알고 믿음으로 살면서 박해 당하는 것을 마땅히 여기며 두려움 없이 담대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약속의 자녀는 참 자유와 하늘 기업의 상속자가 됩니다.

 

오늘 읽은 신약 본문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갈 4: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특성은 잘 지키는 사람에게 상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율법 중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가 됩니다. 또 잘 지키다가도 어쩌다 한 번 지키지 못하면 율법을 어긴 자가 됩니다. 그러기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갈 3: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하였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결코 자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확인시켜 줄 뿐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함을 가르쳐 주는 초등 학문 교사와 같습니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십자가에서 속죄의 길을 열어 놓으셨기에 믿고 회개한 자에게 죄 책에서 벗어나 참 자유가 주어집니다. 의의 예복을 입게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들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이런 자들을 아무도 정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죄를 미워하고, 죄를 버리게 됩니다. 날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삽니다. 이처럼 복음을 믿고 주님 안에 거하여 사는 약속의 자녀에게 참 자유 함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하늘 기업의 후사가 됩니다. 여종을 통해 난 이스마엘은 기업의 후손이 될 수 없었습니다. 사라가 이스마엘이 아들, 이삭을 박해하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쫒으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요청을 받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1:11-12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한 육의 자녀에게는 하늘 기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오직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 것만 탐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들에게는 하늘 기업은커녕 진노와 심판과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8:5에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언약)을 믿는 자들은 하늘 기업의 상속자들이 됩니다. 바울은 갈 3:29에서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약속의 자녀인 약속을 믿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산 소망입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을 가지고 살다 하늘 기업의 영원한 후사되시길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언약)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언약)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약속의 자녀는 참 자유와 하늘 기업의 상속자가 됩니다. 아멘.

 



신 년 주 일

2017년에 드릴 서원 기도  창2810 - 22

찬 양 : 552, 338, 368, 384, 539, 550.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은혜를 사모하여 나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우리들은 2017년의 한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지난해에는 참으로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는 일들이 많았던 한해였습니다. 2017년의 새해가 밝았지만 뭐 그리 시원하게 느껴질 만한 소식은 없고 오히려 우리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전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새해에도 경제가 회복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정치는 날이 갈수록 더욱 혼탁해 지고 있습니다.

기상학자들에 의하면 금년은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한 해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대기권 오염으로 인한 엘니뇨현상으로 인하여 금년에는 더 많은 기상 이변과 재난이 겹칠 것이라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기상 이변으로 인하여 남극과 북극의 빙산들이 녹아서 남태평양의 나라들은 바닷물의 해수면이 올라가 해마다 수만 명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목숨을 잃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울한 소식들에도 불구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재기의 몸부림을 치면서 새롭게 출발을 하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역력히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한 국가경제와 날마다 올라가기만 하는 온갖 물가고, 그리고 농사는 점점 어려워져만 가는 농촌 문제들이 웬지 모르게 우리들의 신앙과 믿음까지도 위축이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때일수록 우리들은 더욱 신앙과 믿음으로 무장을 하여서 어떤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굳건한 반석 위에 설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멘!>

오늘 본문 말씀은 야곱이 부친 이삭을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후 형 에서의 진노를 피하여 하란 땅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도중 루스 광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에 따라서 에서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눈이 어두운 부친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늦게 이 사실을 안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리브가는 재빨리 야곱을 불러서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을 시킵니다. 그러나 외삼촌이 사는 하란 땅은 야곱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고 또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도 모르는 길입니다. 게다가 하란 땅은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길을 가던 야곱은 루스 광야에서 하룻밤을 노숙(露宿)을 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의 밤은 참으로 춥고 외롭고 두려운 밤입니다. 돌을 베고 누워서 하늘을 보니 캄캄한 밤하늘에는 마치 은구슬을 뿌려 놓은 듯 별빛만이 반짝이고 사방은 고요한데 이따금씩 먹이를 찾는 야행성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적막을 깨뜨리고 들려옵니다. 추위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잠을 청해 보지만 쉽사리 잠이 오질 않습니다.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납니다. 이 시간 쯤 모든 가족들은 따뜻한 잠자리에서 잠을 잘 텐데 왜 자신만이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지 후회도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형편이 이 야곱의 형편과 같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평안과 안식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데 자신만이 아무도 없는 쓸쓸한 광야에서 추위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2017년을, 아니 우리의 일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갈 길이 보이지 않고 막막하기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들이여!

루스 광야의 야곱을 찾아와 만나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찾아와 만나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추위에 떨던 몸이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할렐루야!!

자신이 누운 바로 앞에서 하늘 보좌까지 사닥다리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다리에는 수를 셀 수 없는 천군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꼭대기 하늘 보좌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서서 말씀을 하시는 모습도 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에게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본문 13-14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본문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즉시 일어나 베고 누웠던 돌을 세워 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전 이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야곱이 루스 광야에서 돌단을 쌓고 하나님께 드린 서원 기도를 통하여 2017년의 한 해를 살아가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서 금년 한해를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날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승리의 날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 먼저 야곱의 형편을 살펴보면서 오늘의 나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야곱은 지금까지 속이고 빼앗는 간교한 생활을 하여왔습니다.

야곱이 아비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의 나이가 77세였습니다. 야곱은 그 나이가 되도록 항상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여 왔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나서 불과 1분 차이 때문에 장자가 되지 못하고 장자의 기업을 얻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하여 항상 불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기진맥진하여 돌아오는 형 에서를 속이고 팥죽 한 그릇에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부친 이삭이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형 에서를 불러서 맛있는 요리를 부탁하고 그 요리를 먹은 후에 축복하리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 리브가와 결탁을 하여 부친을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것입니다. 참으로 간교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2) 야곱은 지금 쫓기고 있고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형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아비의 마지막 축복까지 빼앗긴 것을 알고 그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지금 어쩔 수 없이 쫓기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항상 쫓기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야곱이 잠들려고 누워있는 루스 광야는 참으로 험한 광야입니다. 육식성 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울부짖고 있으며 땅에는 전갈과 같은 독충들이 있습니다. 죽은 시체를 찾아 맴도는 독수리들도 있습니다.

야곱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외로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루스 광야에서 돌을 베고 누워서 떨고 있는 야곱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여러 가지의 걱정과 근심에 떨고 있습니다. 금년 한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날로 어려워 가는 농촌 사정과 천정부지로 치솟기만 하는 물가고와 애써 농사를 지어도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만년 적자 농사를 지어야 하는 실정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을 때에 진정한 우리의 위로가 되시고 소망이 되어 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피폐하고 병들어 버리고 외국 농산물들이 물밀 듯 들어와 경쟁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다른 물가는 매년 계속해서 오르고 있는데 쌀값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농가도 워크아웃 제도를 도입하여 경쟁력 있고 소망이 있는 농가만 지원을 해 주고 그렇지 못한 농가는 지원도 해 주지 않고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농촌의 인구는 지금보다 반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146: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을 때에 진정으로 우리의 위로가 되시며 소망이 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인줄로 믿습니다. 예수 안에 참 평화가 있고, 예수 안에 소망이 있고, 예수 안에 평안이 있고, 예수 안에 참 기쁨이 있습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2. 이와 같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야곱을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내게 가장 가까이 찾아오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멘>

 

6:50절 말씀에는 제자들이 배를 저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에 갑자기 풍랑이 일어서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실 때에 제자들이 이를 보고 유령이라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고 하시고 바람과 풍랑을 꾸짖어 잠잠케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와 40년의 세월 끝에 요단강 건너편까지 왔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가시고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두려웠습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5-6)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또 이사야 41:10절 말씀에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후에 3일 만에 부활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골방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홀연히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신,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오르지 하나님만이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의 참된 평안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이 예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찬송가 4121>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 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3.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야곱은 즉시 하나님께 돌단을 쌓고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야곱은 즉시 일어나 베고 누웠던 돌을 세워 단을 쌓고 기름 한 병을 부어 드리고 기도를 드립니다. 야곱의 드린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1) 야곱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 16-17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자기만이 홀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낙심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외로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광야에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야곱은 새 힘이 솟았습니다.

야곱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졸지도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21:3-6)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야곱은 너무나 감사하여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고 누웠던 돌을 세우고 그 돌에 기름을 붓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28:16-19)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다 같이 찬송가 3384절을 부르겠습니다.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2) 야곱은 서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야곱이 드린 서원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가는 길에서 지켜 주시기를 간구 하였습니다.

본문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를 간구 하였습니다.

본문 21절 말씀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하나님의 전을 세울 것을 서원 하였습니다.

본문 21-22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것을 약속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 22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와 같은 야곱의 기도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도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야곱 때에는 하나님의 성전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던 때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그 누구도 십일조를 드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조부 되는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돌아와 노획한 물건 중에서 십일조를 구분하여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드렸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때에 십일조 드릴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2017년이 시작되었습니다. 152주일 중에 오늘이 첫 주일입니다. 첫 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은 야곱과 같이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믿음과 신앙의 잠재력이 있는 야곱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 있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믿음을 통하여 역사를 일으키시며,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축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4. 그러면 오늘의 우리들은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인생은 마치 야곱과 같이 사람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고 배신하고 불순종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쫓김을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광야와도 같이 거칠고 황량한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하여 주시고 우리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2) 광야와 같은 험한 이 세상에서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인생, 그리고 지나간 2016년은 루스 광야에 영원히 묻어버리고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믿음이 바로 벧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이 벧엘이 되어야 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아 멘>

 

(3) 그리고 야곱과 같이 돌단을 쌓아야 합니다.

 

돌단을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그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제단에 불을 내리셨고 제물 위에 불로 응답을 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하나님께 제단 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며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되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7년도에는 우리 모두 다 같이 제단 쌓는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악한 습관에 유혹되지 말고(10:25) 항상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12:11)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4) 야곱과 같이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무슨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우리가 감사를 드리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을 하기로 말하면 모든 만사가 불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은혜 안에서 지켜주신 것 모두가 감사의 조건들입니다.

무슨 서원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옵소서하는 기도입니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2012년에는 우리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 되도록 힘쓰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못된 생각과 악한 습관 때문에 더럽혀진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서 늘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도록 서원의 기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야곱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것을 하나님께 서원하여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또 누가 하라고 하지도 않았어도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도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목사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서원하고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되 반드시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3:11-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야곱은 이와 같이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서원 기도를 마치고 다시 길을 갑니다. 야곱은 이제는 자신이 생깁니다. 담대해 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이 예배를 드린 후에는 담대하십시오. 그리고 소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으십시오.

야곱은 그 후 하란 땅의 외삼촌 라반을 찾아서 그의 집에서 20년의 세월을 사는 동안 하나님은 항상 야곱과 동행하여 주셨고,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20년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큰 무리를 이끌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32:10)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2017년의 첫 날, 첫 주일을 맞이하여 이 시간 우리가 앞으로 1년 동안을 어떻게 살아갈 것과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것을 하나님께 서원하고 약속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심과 같이 여러분을 축복하실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아 멘>

모든 사람들이 금년에는 더욱 살기가 어려운 해가 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왕상 18장에 보면 이스라엘 나라에 3년 반 동안 가뭄과 기근이 들었어도 물 두멍에 물이 마르지 않고, 밀가루 항아리에 밀가루가 가득히 차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를 공궤 하여 축복을 받은 사르밧의 과부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하다면 무엇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환경과 여건이 좋은 때에 신앙생활 잘하는 것보다 모든 환경과 여건이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의 믿음이 더욱 값진 것입니다.

이제 2017년도를 맞이하여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야곱의 길을 형통케 하신 하나님이 분명코 여러분의 앞날을 형통케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 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 창126-31, 딤전611-19

 

13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탐험가였던 마르코 폴로는 그 당시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으로 건너와서 17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 뒤 조국으로 돌아가서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가 임종하게 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찾아와서는 이렇게 다그쳤습니다"자네는 그 책에서 도무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잔뜩 기록해놓지 않았나?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주면 좋겠네. 그 책의 모든 내용이 상상에 의해서 꾸며졌다는 사실을 말일세."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아닐세. 내가 책에 쓴 것은 모두 진실일세. 사실 나는 내가 보고 겪었던 것의 절반도 채 기록하지 못했다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상상으로 꾸며진 곳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듭 천국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단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불신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을 이해할 수 없을 뿐 입니다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천국 백성으로서 주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은

 

1.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1)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구약 본문 창1:26-27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했습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은 유독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기 형상(形狀)이란 쎄렘인데 꼭 닮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시나 모든 것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인격적인 분으로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헌신 등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도 할 수 있는 영적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탄이 사람을 죄를 짓게 하므로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게 하고, 진노 가운데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2)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신약 본문 딤전6:11-12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했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 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이 됩니다. 참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참된 생명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14:6; 요일1: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된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3:16).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참된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요일5:12).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참된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6:54).

 

3)하나님의 사람은 분명한 소속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한 자의 모습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 온 초기 강화에 홍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는 기독교를 토착화하고 성경말씀을 삶으로 체질화하며 선교사의 도움 없이 교인들의 힘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양반, 쌍놈이라는 반상을 뛰어넘어 한 가족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여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될까?’ 생각하다 자신들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부모들이 지어주신 이름도 귀하여 간직해야 하지만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예수 믿는 것이기에 어떤 이름이 좋을까를 의논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이름, 네 가지를 찾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으니 신(), 둘째는 하나님을 늘 바라보자는 의미에서 경(), 셋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순(), 마지막으로 성령을 받으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되니 능()자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 날 한 시에 믿었으니 한 형제요, 믿음의 첫 열매이니 일 ()자를 붙여 신일(信一), 경일(敬一), 순일(順一), 능일(能一)이라고 이름을 지어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강화지역 초대교회 전도인의 이름을 보면 박능일(朴能一), 김경일(金敬一), 권신일(權信一) 등이 나옵니다. 이들이 바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이름답게 살 것인가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면 이들처럼 하나님의 사람답게 세상과 구별 된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1)성도는 잘 분별하여 피할 것을 피해야 합니다. 신약 본문 딤전6:11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것들은 딤전6:4-10절에 나오는 것으로 교만, 변론, 투기, 분쟁, 비방, 악한 생각, 마음이 부패하여 진리를 잃어버린 경건, 욕심, 돈을 사랑함을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것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에는 이런 것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신음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행복은 이러한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먼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의 함을 받은 자녀들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 은혜와 선물을 받은 성도들은 교회를 무너뜨리게 하고 분쟁의 불씨가 되는 죄악 된 옛 사람의 부패한 마음을 벗고, 피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취할 것을 적극적으로 취해야 합니다. 딤전6:11-12절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로 올바름과 정직을 말합니다. ‘경건은 하나님과 함께함을 의미하며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을 말하고,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조건 없이 사랑하신 그 사랑을 말합니다. ‘인내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어떤 위협과 위기에도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로 자신과 이웃에게 평안함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있어야 복음에 합당한 자요, 복음 전하는 일에 막힘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이와 같은 것들을 따르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따르고, 싸우며, 취하는 것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한 자들입니다.

 

3)선한 일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딤전6:18-19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웃에 대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재물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 말은 그리스도인인 부자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물질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까지 없는 자들과 함께 나누고 서로 교제해야 함을 의도하는 것입니다(2:42-44, 4:34-37). 그리고 주는 자가 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20:35).

 

19절에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마 6:19-21에서 하신 말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의 것으로 심고 영의 것으로 거두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기록하기를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하였습니다(37:27-29).

 

3.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1)하나님은 경작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온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창조하신 땅을 경작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2: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경작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잘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동원하여 노력하면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게 되고, 땅의 지질에 대하여 연구하고, 농사법에 대한 지혜를 짜내고, 또 인내하며 다른 작물을 심어보고, 땀을 흘리며 수고하여 변화를 주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경작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가보면 팔레스타인은 대부분 사막입니다. 사막의 황무한 땅에 갈릴리 바다의 물을 끌어다가 파이프를 묻고 스프링클러 시설을 하여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들었습니다. 이집트의 사막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땅에는 푸른 풀들과 채소들이 자라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영국 사람으로 아프리카에 선교를 했던 윌리암 케리는 벌거숭이산을 보면서 산림을 계획하고 나무를 연구하고 심어 삼림을 관리하며 세미나를 열고 책을 출간하여 그가 선교하던 지역마다 유럽과 같은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경작입니다. 경작은 환경에 순응하라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변화를 주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 중에도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은 주님의 나라를 세상에 세우기 위해 그 일이 크든 적든 성실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2)하나님은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본문 창1: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했습니다. 사람은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살라고 분부했습니다. “다스리라는 말은 권위를 가지고 다스림으로 복종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스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는 방식으로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즉 보살피며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가지고 자연을 파괴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정복하라는 말 의 뜻 중에는 피조물에 굴복하거나 매이거나 붙잡히거나 노예가 되지 말고 정복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알신은 황소로 상징 되고, 황소로 숭배되기도 합니다. 태양과 달과 그 밖에 많은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돈과 물질과 자연의 노예가 되지 말고 정복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가지고 당당히 마귀의 종이 되거나 피조물의 지배를 받거나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여 사는 것을 거부하고, 내게 주신 것을 잘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3)번성하여 복의 근원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1: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육, 번성, 충만하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또 피조 계를 다스리는 주권을 부여하셨고, 조화롭게 통치하도록 지혜를 주셨고 또 풍성한 낙원의 삶을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저주를 받아 오히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저주를 벗기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다시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23)(3:21)(4:6)

 

이 복을 누리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을 이웃에게 나누므로 복의 근원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가 이 일에 앞장서서 복의 근원으로 살 때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다시 그 기쁨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시키고(15:10), 섬기는 삶을 살며(14:18),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11:5-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정리 -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은,

 

1.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1)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2)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3)하나님의 사람은 분명한 소속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2.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1)성도는 잘 분별하여 피할 것을 피해야 합니다. 2)취할 것을 적극적으로 취해야 합니다. 3)선한 일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3.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1)하나님은 경작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2)하나님은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3)번성하여 복의 근원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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