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의 자리로 돌아가요 창세기35;1-15
믿음이란 거룩함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야곱은 숙곳에 정착하여 장막을 치고 짐승들의 우릿간을 만든다.
그런가 하면 제단을 쌓아서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중심으로, 예배 중심으로, 믿음과 은혜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신앙인처럼 사는 것처럼 인정할 수도 있고, 믿을 수도 있고, 확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지 못한다면 절대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7:21-23에서 어떤 이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신앙인인 척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계신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야곱에게 어떻게 살기를 원하고 계실까?
하나님은 야곱을 어떻게 인도하시면서 믿음의 사람, 믿음의 족장으로 세워가고 있는가?
1. 위기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야곱이 숙곳에 정착하여 거류한 지 10여 년에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들이 누이동생이 당한 수치를 되갚아 준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서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할례제도를 활용하여 살인죄와 노략질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야곱은 커다란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야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이제 가나안 사람들이 큰 연합군을 형성하여 자신들을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야곱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해 올 것을 생각하면 “이젠 우린 쫄딱 망했구나. 잘난 자식들 땜에 이젠 우린 쫄딱 망해서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구나.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하면서 탄식하고 있다.
아무런 방법도 찾아내지 못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이 큰 곤경에 처할 때마다 찾아오셔서 가장 필요한 말씀을 주신다.
형의 노여움을 받고 아버지 집에서 외삼촌댁으로 도망갈 때도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이젠 더 이상 외삼촌댁에서 살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밧단아람에서 모든 식솔들을 이끌고 돌아올 때는 천군 천사들이 찾아오시고, 얍복강 나루턱에서도 찾아오신다.
이제 숙곳에서 10여 년 살다가 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면서 야곱에게 새로운 길을 향하여 떠나도록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신앙인들이 정말 견디기 어려워할 때, 정말 힘들어할 때, 정말 죽기보다 더 힘들어할 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인들을 굳건하게 붙들어주신다.
요즘 코로나와 경제적인 난국 땜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요즘은 예배조차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형극이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다.
2. 정결한 신앙인으로 탈바꿈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위기 속에서 찾아오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최초로 자신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벧엘로 올라가기로 결단한다.
야곱은 모든 가족들, 식솔들을 한군데로 불러 모은다.
야곱은 모든 가족들과 식솔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라고 말하면서 가족들을 독려한다.
야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가족들과 식솔들에게 모든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정결하게 탈바꿈하고 벧엘로 올라가자고 말한다.
너무나 단호한 야곱의 모습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너무나 단호하게 야곱이 독려하자 모든 가족들, 식솔들은 어느 누구도 반항하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4절에서 “모든 가족들은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때 라헬은 아버지 집에서 나올 때에 훔쳐서 가져온 드라빔도 함께 버렸을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귀고리까지도 다 내어놓는다. 그러면 왜 귀고리까지 내어놓았을까?
오늘날의 귀고리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악세사리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에는 우상과 같은 것들이다.
지금도 메스컴을 통해서 아프리카 원주민 여인들을 보면 귀고리뿐만 아니라 온몸에 치렁치렁 무언가를 달고 살아간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드리는 예식과 같은 것들이다.
야곱의 가족들과 식솔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넘어온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들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여전히 밧단 아람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히 온몸에 치렁치렁 밧단 아람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 우상을 섬기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지금까지 살아오던 옛 풍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내어놓고 이제야 말로 하나님의 언약백성답게 변모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온전하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삶은 지금까지 살던 옛 모습, 옛 관습, 옛 풍습, 옛 마음, 옛 생각을 과감하게 버리고,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믿음으로 바뀌고 변화하여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인들이 온전하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삶을 사는 것은 옛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옛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품고 살게 되면 신앙인인 척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신앙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3. 신앙인을 지켜주시기 위하여 불신자에게 두려움을 넣어주시는 하나님.
야곱이 일행들을 이끌고 10여 년 동안 정착하여 살던 숙곳을 떠나서 벧엘로 올라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주변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두려움을 넣어준다.
5절에서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라고 말씀하신다.
아들들이 살인자가 되고, 노략질함으로서 야곱은 가나안의 주변 사람들이 연합하여 자신을 해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했었는데, 이제는 도리어 주변 가나안 사람들이 더 이상 야곱일행을 해치면 안 된다,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는 큰 재앙을 당한다.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주민들에게 도저히 야곱 일행을 추격할 수 없도록 두려움, 무서움, 악몽을 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이든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은 불신자들이든지 모든 인류들의 마음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 조종해 나가실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신앙인들을 굳건하게 지켜주시기 위하여 신앙인들을 위협하는 불신자들에게 커다란 두려워하는 마음, 무서워하는 마음을 주시면서 지켜주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나, 그 어떤 자들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른 엄연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넣어주시면서 굳건하게 지켜주신다.
우리가 설령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중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은 굳건하게 불신자들의 압제에서, 핍박에서 건져주시고 지켜주시고 막아주신다.
4. 예배드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야곱에게 옛날에 아버지 집을 떠나서 밧단 아람으로 갈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와서 만나주었던 그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신다.
야곱도 모든 가족들, 식솔들 앞에서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라고 당당하게 선포하였다.
숙곳을 떠난 야곱의 일행들은 이제 바로 그 벧엘에 올라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나 주셨던 그 벧엘에 도착한 야곱은 돌을 모아서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제단을 쌓는다.
돌로 번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신앙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가장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올려드린 후에 다른 것들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예배드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어떤 위기와 위험과 역경과 시련 앞에서도 가장 먼저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신다.
코로나 위험 속에서도 신앙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올려드리는 일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만나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감동을 주시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승리케 하시는 은혜와 믿음과 능력을 주신다.
⑤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
야곱이 벧엘로 올라와서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쌓고 희생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야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복을 주시면서 10-12절에서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제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면서 다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축복해 주신다.
본래 이 축복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숙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벧엘로 돌아왔더라면 곧바로 주실 축복이다.
그런데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숙곳으로 가서 10여 년 동안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그만큼 늦게 축복을 받은 것이다.
좀 더 일찍 받을 수도 있었던 축복을 야곱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늦어지고, 당하지 않아도 될 딸이 성폭행을 당하는 수치와 아들들이 살인자가 되고, 그러므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아야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순종하면 곧바로 주시지만, 불순종하게 되면 그 만큼 늦어지는 것이다.
불순종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축복은 늦어지기는 하지만 그대로 주신다.
하나님은 온전하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야곱에게 12아들을 채워주신다.
물론 막내아들 베냐민을 낳으면서 라헬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돌아가는 아픔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했던 12번째 아들을 낳음으로서 이스라엘의 12지파의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해 나가게 된다.
하나님은 좀 더 일찍 축복을 주시고 싶어하셨다.
그런데 야곱이 불순종함으로 축복이 그만큼 늦어진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바로 순종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예비해 놓으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야곱은 아버지 집에서 밧단아람으로 가던 길에 돌로 베개를 삼아서 잠을 자던 그 자리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다리를 통해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셨던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서 자신이 서원했던 대로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붓고 기름을 부으면서 제단을 쌓고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던 복을 받게 된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우리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거룩함이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라고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거룩함이란 아주 단순하다.
거룩함이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을 창조주의 자리로 올려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인 성경은 본래 정경의 자리로 돌려드리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그 위치에 피조물이 마치 자기가 창조주나 되는 것처럼 창조주의 자리를 빼앗아버리고,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이 온갖 경배와 숭배의 대상이 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 자체가 교만이요 죄악이요 거룩함을 파괴하는 행위요 바벨탑이다.
거룩함을 회복하는 길은 삼위 하나님을 삼위 하나님의 위치로 되돌려드리면 된다.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로 되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인간들이 창조주의 자리를 빼앗고 창조주가 계셔야 할 그 자리에 인간이 앉으려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인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주의 자리로 올려놓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해마다 신년이 되면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 달려가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것은 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우상숭배의 모습이다.
떠오르는 태양은 신년이 되는 그날에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그 시간이 되면 동일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신년이 되어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소원을 비는 행위가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행위이다.
정월대보름이나 보름날에는 환하게 떠오른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것이 바로 달을 숭배의 대상으로 사는 것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소원을 빈다.
소위 어떤 분야에 뛰어난 인물들을 스타(Star)라고 부른다. 분명히 똑같은 사람인데 누군가를 향하여 스타라고 부르는 것은 별을 숭배하는 행위이다.
무언가에 탁월하게 뛰어나거나 예쁜 여인을 여신(女神)이라고 부르면서 치켜세운다. 인간의 마음속에 여신을 숭배하는 마음을 넣어서 그들은 뭔가 나와 다른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면서 그 여인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곧 니므롯을 태양신으로, 세미라미스를 달신으로, 담무스를 별신으로 섬기는 전통적인 바벨론전통종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짐승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민족에게 아주 익숙한 짐승의 이름으로 12지간의 띠를 만들어서 자신은 00띠라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짐승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토템이즘(Totemism)에 의해서 만들어진 무속신앙에 불과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주신 양성(兩性)제도를 거부하면서 제3의 성, 젠더(Gender)라고 하면서 족보에도 없는 이상한 성을 만들어서 성평등을 요구하는 행위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어떤 정신 이상한 목사라는 사람들이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성적인 본능이라고 주장한다.
불신앙인들이 동물의 띠나 해와 달과 별들에게 소원을 빌거나 특정한 짐승을 반려동물이라고 하는 것이나 동성애를 주장하거나 젠더를 주장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소위 신앙인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그것도 성직자요 목회자라고 하는 이들이 이런 것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믿는 삼위 하나님이나 성경은 내가 믿는 삼위 하나님과 성경이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헷갈리게 한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삼위 하나님이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들과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가 믿는 삼위 하나님이나 성경에서는 이런 것들을 정당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런 것들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죄악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동성애자나 수간자들은 반드시 죽여서 죄를 없애고 거룩함을 회복하라고 명령하신다.
오늘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라. 벧엘로 돌아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족들과 식솔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라고 단호하게 선포하면서 일행들에게 변화된 삶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일행들은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고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리고 벧엘로 돌아간다.
우리들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코로나 19바이러스를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송순단이라는 진도출신 무당과 정영만이라는 남해무당이 서울 역삼동에 있는 LG아트센터에서 지난 6월28일에 씻김굿을 한국문화재단과 외교부와 문화재청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조선말에 명성왕후라는 민씨가 주관하여 경복궁에 무당들을 불러서 온갖 굿을 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하게 하더니 이제는 행정부가 주관하여 굿을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코로나 19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굿을 했으면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급속도로 더 퍼져나가게 되었다.
계속 확진자가 나오면서 교회에 그 책임을 전가시키고 예배를 전면적으로 금지시키면서 교회를 탄압하고 있다.
지금 정부에서 비대면예배를 드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배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드려져야 할 예배조차 금지시키고 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정부가 교회를 탄압하고 신앙인을 중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분명히 개인적으로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는 장로, 권사. 집사들이 상당히 많은 이들이 국회의원이라는 뱃지를 달고 있는데도, 코로나바이러스의 책임을 교회에 전가 시키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적극적으로 차별금지법, 인권법, 이슬람법, 동성애법, 학생인권조례법을 제정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다른 것들은 그런다 치더라도 신앙인의 기본마저 망각한 이들이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활개치면서 소위 유명인사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런 것들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엄중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국회의원이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선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목사이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이 먼저다.
각종 직분자요 사명자이기 전에 삼위 하나님 앞에서나 성경 앞에서 떳떳한 신앙인의 기본, 거룩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역대하7:13-14에서는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라고 말씀하신다.
학개서1;5–7에서는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신앙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과연 나는 성도라고 부르기에 합당한가?”라고 자문자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신앙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거룩함이란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벗어날 때, 거룩함은 파괴되는 것이고, 깨지는 것이고, 죄가 되고, 험악한 세계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거룩함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믿음이란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지 말아야 한다.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위치를 침범해놓고서는 자신은 거룩한 성도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삼위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우리 신앙인들은 삼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십자가 복음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세워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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