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대적들 ( 20:7-10)

<성경 본문>
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마귀는 권세를 빼앗겼으나 여전히 땅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세력을 휘두를 것이 허락되었다. 천년왕국 기간에 태어난 아이들이 진실로 구세주를 믿지 않고 사탄이 놓여나면 미혹될 것이다. 모든 세상 나라들이 오는 전쟁으로 천년기의 끝에 관한 것이다. 사탄이 감금되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셔도 사람은 여전히 본성이 회복되지 못한다. 사탄의 의도나 인간의 완악함은 시간이 지난다 해도 변화되지 않는다. 천년왕국 기간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계속하여 자녀를 낳을 것이다. 곡과 마곡은 수리아의 왕을 암시하지만 여기서는 러시아를 말한다. 곡과 마곡은 적그리스도의 국가로 기독교 국가를 정복하려 할 것이다. 곡과 마곡은 러시아가 분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까지 교회에 대한 전 세계의 핍박과 압박을 상징한다. 러시아와 그 위성국들이 최후의 전쟁을 위해 그들의 백성들을 모을 것이다. 곡과 마곡은 성민에게 궁극적인 환난을 가져오는 민족이다. 곡과 마곡은 인류 역사 최후로 나타날 적그리스도 나라의 대표다. 곡과 마곡은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사단과 그의 세력이다. 곡과 마곡은 신약시대에 교회를 공격하고 핍박하는 적그리스도 세력의 최종적 공격의 상징이다. 곡과 마곡은 천년왕국 백성의 상징적 표현으로 불택자로서 미혹을 받을 백성들을 말한다.’ 등이 있습니다. ☞ 복음으로 보면 ‘인생의 경륜의 마지막에 있을 시험’을 말합니다.

<해석의 힌트>
1 - 경륜이 끝나는 지점 - 3절 “천 년이 차도록”
2 - 성경적으로 접근 - 7절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3 - 인생의 날을 시사 - 3절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4 – 문맥을 볼 때 - 앞에는 천년왕국, 뒤에는 흰 보좌의 심판
5 - 사탄의 공격 목표는 마음 - 8-9절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인생 경륜의 마지막에 있을 최후의 전쟁>
1. 마지막 날에 - "천년이 차매"
2. 사탄이 활개 치는 - 7절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3. 사방이 포위되는 - 7-8절 “땅의 사방 백성"
4. 사면이 지켜지고 있음 - 9절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
5. 육신의 문제가 많음 -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최후 승리를 위하여>
1. 견고한 믿음 - 9절 “성도들의 진과”
2. 거룩한 믿음 - "사랑하시는 성”
3. 성령의 능력 - 9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4. 끝까지 인내 - 10절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해석의 힌트>

힌트 1 - 경륜이 끝나는 지점에 시험이 있다.

3 천 년이 차도록 시간적 개념으로 보면 풀리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찬다는 표현은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에서 보듯 경륜의 때를 가리키는 낱말입니다(1:15, 4:4). 마귀가 예수님께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가(4:13),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13:1) 되자, 마귀가 악인들을 움직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 위하여 돌아왔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요9:4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하셨듯, 이 경륜은 개인의 종말에도 적용됩니다. 주 안에 살아가는 성도도 아버지께로 갈 경륜의 때(14:1-3)가 있는데, 12:1-3에 나타나듯 이때의 육신적 형편은 노약한 상태이므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때입니다.

 

힌트 2 - 성경적으로 접근하라.

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여기 그 옥 3절의 무저갱을 말합니다. 그런데 유1:6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기에, 성경 어디에도 큰 날의 심판 전에 사탄이 놓이는 근거가 없습니다. 무천년설에서 사탄의 결박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속박된 상태라고 보는 것과 같이, 이것은 다름이 아닌 성도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기거나, 시험 들기 좋은 상황과 같은 개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임종이 가까운 노년기에 육신의 고난과 아울러 몸을 드려 주님을 섬기기 어렵다는 점에서 영적 시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힌트 3 - “반드시 잠깐은 인생의 날을 시사한다.

3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성경에서 반드시 될 일이 여럿이지만, 그중에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했듯이 임종과도 깊은 낱말입니다. 그리고 잠시’ ‘잠깐’ ‘얼마 동안’ ‘하루 등의 표현이 인생의 날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수차 사용되었다는 점에서(20:3, 4:13, 고후4:17-18, 21:13, 4:14, 벧전1:24), 혹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씀처럼 하룻길은 인생의 날을 시사한다는 점 등 인생의 경륜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힌트 4  순서적으로 앞뒤의 사건과 어울려야 한다.

앞의 계20:1-6에는 천년왕국에 대한 말씀이고, 뒤의 계20:11-15은 흰 보좌의 심판입니다. 이처럼 히9:21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였듯 본문은 인생의 경륜과 순서적으로도 어울리고, 해석적인 문맥의 흐름이나 내용과도 어울립니다.

 

힌트 5 - 사탄의 공격 목표는 마음이다.

8-9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이처럼 사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인간의 감성을 곧잘 이용하듯, 사탄이 노년기의 절실한 약점을 부각하며 육신의 생각으로 도전합니다. 그 목표는 성도들의 진 즉 성도의 믿음과(고후10:4-5, 6:10-11, 4:7, 벧전5:9), “사랑하시는 성 즉 새 예루살렘과 같은 흠 없는 마음인데(10:25, 6:4-5), 그 믿음이 인생의 경륜 마지막 순간에 가장 큰 도전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이상의 힌트를 종합할 때 인생의 경륜이 끝나는 지점에 있을 시험을 말합니다.

 

인생의 경륜의 마지막에 있을 최후의 전쟁은 어떤 것입니까?

 

1. 마지막 날에 있을 일입니다.

 

"천년이 차매"는 천년왕국의 끝으로 아직 왕국 안에 살고 있을 때입니다. 인생에 적용하면 예수 믿어 은혜 가운데 살다가 중병이나 임종이 가까운 노년기를 가리킵니다(9:4, 11:8). “차매는 경륜을 시사하는 말로 영원한 곳으로 옮기기 전입니다. 3절에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이라 했듯 시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9:27). 그러므로 앞날을 위해서 기도하고 늘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2. 사탄이 활개 치는 때입니다.

 

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그 옥이란 3절의 무저갱입니다. 여기서 그 옥이란 감금의 개념입니다. 지옥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지옥은 출입이 가능한 곳이 아닙니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여기 무저갱은 사탄이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속박된 상태를 말하는데, 옥에서 놓였으니 사탄이 활개 치는 때입니다. 이처럼 노년기에 육체와 정신이 쇠약해지면 망각과 두려움까지 겹쳐 믿음도 쇠약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 출석도 기도 생활도 어려워지는데 사탄이 좋은 때가 왔다고 쾌재를 부르는 때입니다. 이때는 몸의 느낌으로 살지 말고 말씀의 지식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임종 전에 힘을 다해 요셉을 축복한 것처럼(48:2), 예수님이 운명 직전에 큰 소리로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신 것처럼(23:46), 그리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크게 부르짖어 기도했듯(7:59-60) 힘을 다하여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3. 사방이 포위되는 때입니다.

 

7-8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38장과 39장의 말씀이 연상됩니다. “은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국의 왕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마곡은 곡이 다스리는 땅이나 백성입니다. 땅은 육신의 상징이요, 바다의 모래와 같이 모인 마곡 땅의 백성들은, 나약한 육신적인 생각들입니다(12:17). 즉 땅과 바다의 모래와 같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있듯이 육신을 따라 육신이 편한 대로 나가면 사탄에게 먹힙니다. 임종을 맞이한 야곱이 힘을 다해 축복한 것 같이 믿음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27장을 보면 바울을 태운 죄수선이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지 않고 편해 보려고(27:12) 그레데의 뵈닉스로 가다가 유라굴라를 만나 무려 14일이나 어둠 속에서 고통당했습니까? 이처럼 인생의 겨울을 맞아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려고 하면 그 노년기는 방황 두려움 고통 시험 등으로 한순간도 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듯한 육신의 생각들에게 포위되지 않도록 굳세시기를 바랍니다. 이때 믿음의 분위기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매일 눕혀놓거나 불신자가 운영하는 양로시설은 피하시기를 바랍니다.

 

4. 사면이 지켜지고 있는 때입니다.

 

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여기서 성도들의 진은 주님을 향한 견고한 마음을(고후10:4), “사랑하시는 성은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한 말씀을, “두르매는 시125: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그러므로 사면이 포위된 것만 보지 말고 튼튼하게 지켜지고 있음도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의 진 즉 믿음의 견고함은 성령의 인침이요, “사랑하시는 성 역시 함께하심과 성령으로 사랑의 부으심이 있습니다(5:5).

 

이처럼 성도의 견고한 진이 되려면 말씀 묵상에 힘쓰고, 사랑의 부음을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드려 기도하고 이웃을 섬김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했던 그 믿음으로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육체가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져도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함께하신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8:37-39).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 많이 말씀과 기도로 살아 하나님의 붙드시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10:25, 37:24).

 

 23장에 바울을 죽이려던 40인의 유대인 결사대가 그의 생명을 노렸을 때 행23:23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해서 호위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로마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는 약 100km, 그 중간 지점인 안디바드리에서 보병과 창병은 돌아가고, 기병 70명이 가이사랴까지 안전하게 호송합니다. 비유적으로 안디바르리는 임종하는 순간까지를 뜻하는데, 거기까지 호송한 보병과 창병은 일생 말씀과 기도로 돕는 교회를 가리키고, 가이샤랴까지 호송한 70명의 기병은 천국시민의 특권을 가진 우리를 처음부터 천국에 이르도록 호위하는 천군천사들입니다.

 

교의신학자 박형룡 박사는 그의 종말론에서 죽음은 형벌이 아니며 훈련과 징계의 정점으로 영적진보와 천국의 최선한 이익에 도움을 준다. 이는 각 사람의 생의 완성이며, 다른 영역에로의 이전이며, 진정하고 완전한 생의 시작이며, 영원한 처소로의 고정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즉 성도의 죽음 자체도 복되거니와, 죽음을 앞에 둔 시점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영적으로 변화될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5. 육신의 문제가 많을 때입니다.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바다의 모래는 나약한 육신적인 마음입니다. 용이 바다 모래 위에서 성도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듯이(12:17) 사탄이 육체와 정신의 약점을 부각시키며 성도의 믿음을 공격합니다. 성경에 바다의 모래로 비유된 대적이 아말렉과 미디안인데(7:12), 이 둘도 우리의 믿음이 약할 때 다가오는 온갖 시험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에서 폭풍을 만나 모래톱에 걸리지 않게 배를 가볍게 하는 등 최선을 다했듯이 육신의 문제가 신앙에 지장이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노년기를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노년기는 최고의 영적인 절정기입니다. 사도들이 성경을 젊었을 때가 아닌 최고의 영적 절정기인 노년에 썼습니다.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노하우들이 있어 질병이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들이 있으므로 스스로 퇴물화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찾거나 발전시키시기 바랍니다. 경제적인 의무에서도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울 때이므로 경건한 노인들을 모아 기도의 사람으로 동력화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1. 견고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성도들의 진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군사적인 진을 쳤던 것처럼 불신앙과 악을 대항하는 믿음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고후10:4-5, 6:10-11, 4:7, 벧전5:9). 2:14-16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 -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했듯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믿음의 자손을 의미하며 죽음의 두려움이 있다면 아직 믿음의 충만함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어 죄의 직업까지 가지는 등 자포자기의 인생을 살았던 키가 작은 삭개오가 예수를 발견하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영접하고 섬김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정을 받았던 것처럼 온전히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19:9, 4:19-22, 살전5:16-18).

 

고후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했듯이 영의 생각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벧전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그랬듯 우리가 노년기에 당하는 일반적인 고통까지도 주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하늘의 큰 상이 됩니다.

 

2. 거룩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성은 신부인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세상이 침투하지 않도록 오직 주님만을 위해 벽을 쌓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입니다. 이처럼 신랑이신 주님만 생각하며 세상을 가까이하려는 육의 생각은 절대 거절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하늘 군대가 백마를 타고 흰 세마포를 입었던 것처럼(19:14) 영적 전쟁의 기초는 거룩입니다.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의 비밀입니다.

 

3.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9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예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19:24-25, 왕상18:38, 왕하1:10,12). 그런데 위로부터 임하는 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불이 임하자 두려움과 악과 나약과 불신앙과 슬픔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과 야곱과 스데반 등 마지막 순간에도 힘을 내었던 것처럼 그리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혔으나 기도하고 찬송했던 바울과 실라처럼, 그저 편안하기를 갈망하는 몸의 요구에 굴복하지 말고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다 데려가시기도 하십니다(14:3). 천국 가기를 준비하며 기도 많이 하시고 신앙적인 유언도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4. 끝까지 인내로서 믿음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좁은 의미에서 짐승과 거짓선지자는 우리 안의 짐승 닮은 육신적 마음과 거짓된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미혹하던 마귀까지도 유황불에 던져졌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재림과 대 심판의 결과를 의미하지만(18:8-9, 9:48-49), 좁게는 이젠 유혹할 수도 없게 하시는 죽음이 가져다준 성화의 은총을 시사합니다.

 

우리의 임종으로 천국으로 옮기는 순간 사탄과 세상과 육체의 연약과 부족함 등과 영원히 결별합니다. 이때 완전한 성화가 주어지는데 성도가 육체를 벗는 순간 죄와 슬픔은 사라지고 따스한 아버지의 사랑과 평안과 거룩함, 그리고 놀라운 것은 주님을 영원히 사랑하는 마음이 타오르고, 사탄과 악을 향하여는 용납할 수 없는 마음으로 불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세대를 암시하는 세세토록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한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계시록의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 은혜의 잔치에 참여시키려는 지상 성도를 위한 교훈입니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셨듯, 이처럼 철저히 주의 은혜로 씻어 거룩해지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46:3-4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인생의 경륜이 다하는 날까지 예수 잘 믿고 천년왕국 하나님 나라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 맡기신 사명 잘 감당하면서 이기고 또 이겨서 기쁨으로 주님을 뵈옵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5-11)


로마서8장은 구원 받은 성도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부어주신 성령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성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또는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성령과 함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1.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 세상에는 각기 다른 두 가지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을 좇아서 살고 어떤 이들은 영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마침내 사망입니다. 반대로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영의 일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같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육신을 좇는 자들이 어떤 불행을 겪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 순종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배후에 마귀가 역사하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에 있다는 것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사람 즉 영을 좇아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영혼 자체가 여전히 죽어 있고 타락해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육신을 좇아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번 나는 과연 육신을 좇는 사람인가 영을 좇는 사람인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기준을 주고 있습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 기준이란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하신다면 우리는 육신에 있는 사람 즉 육신을 좇는 사람이 아니고, 영에 있는 사람 즉 영을 좇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단어 2개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다른 단어로 하면 성령입니다. 성령을 표현할 때 이렇게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번갈아 가며 표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 인격을 갖고 계시지만 그 본성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똑 같이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누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까? 자기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으로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거듭난 내 영혼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성령을 좇아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육체는 여전히 죄의 법을 즐거워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패한 내 육체를 제어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만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육체의 정욕을 이기고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전히 때때로 육신대로 살 때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내 영혼은 성령을 좇아 살기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확신에 거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우리의 현재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우리의 육체는 아담의 죄로 인해서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영혼은 의를 인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을 받았고 변화를 받아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패한 내 육체를 영영 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 즉 성령이 우리의 육체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의 부활, 생명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 육체가 여전히 죄의 욕심을 갖고 있지만 부활의 때가 되면 죄의 욕심이 전혀 없는 예수님의 몸과 같은 거룩한 육체로, 영원히 살 수 있는 육체로 변화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부활의 역사는 성령을 통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십니까?


2. 영은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롬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께 사랑의 빛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만일 우리가 믿기 전처럼 육신에게 계속 끌려 다니면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고 반드시 죽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영으로써 즉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 의지로 육체의 정욕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노력은 얼마가지 않아서 실패하고 맙니다.

구원 받은 성도일지라도 어떤 이는 육으로 살고 어떤 이는 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2장에서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이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구분합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완전히 육신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혼은 분명히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그는 실생활에서 자주자주 육신에 지고 맙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회개하고 용서받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살아도 물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구원, 불 가운데 받는 것과 같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더 이상 매번 육신에게 지지 말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가 있을까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길을 14절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3.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범사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기 원하십니까? 영의 생각을 따라 생명과 평안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한 가지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15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게 종노릇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종의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양자의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녀답게 성장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때 성령은 내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내 몸의 행실을 제어하십니다.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자에게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 성령은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당신 마음대로 우리를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입니다.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아바 아버지라고 반복해서 표현한 것은 감격스러운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오 나의 아버지시여”입니다.

예수님도 하마터면 육신에게 질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 “내 마음이 심히 죽을 지경이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였습니까? 막14:36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외치면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예수님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몸의 행실을 죽이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그러므로 우리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아바 아버지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은 내 몸의 행실을 죽이고 나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좇아 생명과 평안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여”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국에서 고아 2천명을 오직 기도로 응답받아 먹이고 돌보았던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기도할 때 화려한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시간이면 기도실 바깥으로 “아버지여”라는 간절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새벽에 나오시는 성도님 가운데 기도할 때 유독 애절한 목소리로 “아버지여”라고 반복해서 부르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기도 소리는 오직 “아버지여”입니다. 기도가 너무 특이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분은 롬8:15의 말씀을 체험하는 성도입니다. 이 분이 지나치게 아버지를 부르고 있다면 반대로 다른 성도님들은 너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이제 이후로 어떤 사람보다 많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어 이 땅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여 부르짖을 때 성령은 내게 더 큰 능력으로 역사하시어 범사에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부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을 근심케 말라  에베소서 4:30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범죄심리학자들의 공통된 주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대다수의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범죄의 심각성에 관계없이 ‘죄의식’이 정상인들에 비해 매우 약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지적으로 자신이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은 하지만, 그것 자체도 ‘자신이 안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니까!’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재수가 없어서…’ 등등의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죄 (=잘못)을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우리 인간은 만약 내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스스로의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매우 본질적인 변화와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기를 통해서든지 나 자신의 실상에 대해 눈뜨게 될 때 스스로를 속이고 합리화하며 진실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영적 늪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 크리스챤에게도 조금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비록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속의 죄성을 밝히 깨닫게 되는 은혜를 거부함으로 여전히 속사람이 강건해 나가지 못할 때 여러분과 저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가 우리 성도를 향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말라” (v.30a)고 도전한 것도 그러한 이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임을 이해합니까? 여러분 안에 누가 거하시는 지 이해합니까? 만약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거하심을 인격적으로 깨닫아 나간다면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성도가 행할 본분이 결코 아닙니다!!” 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4장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본문말씀은 마치 갑자기 돌출된 발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난 2주를 통해 우리가 살펴 본대로 사도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22~24절>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촉구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이해해 나갔던 것입니다. 4장의 흐름에서 볼 때, 사도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선언하고 나서, <25~29절> 곧 오늘 본문 바로 앞절까지 구체적으로 옛사람을 벗는 것이 무엇이고, 옛사람을 입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음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를 행하고, 더러운 말을 버리고 선한 말로 서로 은혜를 끼치게 하라” (v.25~29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도가 ‘성령을 근심치 말라’고 선언하는 것은 이 말이 앞의 본문의 결론임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앞으로 <에베소서 6장>까지 이어지는 남은 모든 말씀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후로 이어지는 모든 말씀에서 성도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도는 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성령님이 인격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과 같이 <지.정.의>를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성령은 인격적 존재일 뿐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성삼위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성삼위 하나님의 제3위격에 해당합니다. 일부 크리스챤들이 생각하는데로, 성령은 단순히 ‘힘’ 혹은 ‘에너지’와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성령이 그런 비인격적 존재라면 사도는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격적 존재이시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과 성도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무슨 관계일까요? 그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님의 다양한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사역과 성도를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 그리고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며 보혜사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령님이 우리 성도를 도우시는 특별한 한가지 사역에 대해서 매우 감동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 자신도 어떻게 기도할지를 알지 못하고 심히 연약함과 영적 방황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에도,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깊은 탄식 가운데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고. 이것은 한마디로 성령의 어떠한 모습을 밝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향한 성령님의 사랑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기서 ‘탄식하다’ (with groan)는 표현은 아무 대상에나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관계나 알더라도 별로 가깝지 않은 관계에 쓰는 표현이 결코 아닙니다. 이 탄식함은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구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안타까운 일로 인해 그 상대방이 건강이나 그가 처한 상황이 심각한 어려움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해 우리가 그를 아끼고 사랑함으로 깊은 절망감 가운데 함께 심한 고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런 탄식은 결코 사랑의 관계가 아니면 생길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성령께서 ‘우리 각자를 깊이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니, 이제 된 것입니까? 나는 문제를 만들고, 성령이 기도로 해결해 주시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15)고 거듭 거듭 선언합니다. 이것이 오늘 사도가 우리 성도를 향해 강하게 도전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사도가 ‘성령을 근심케 말라’는 표현을 통해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이실 뿐 아니라 우리 성도와 깊은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했는데, 사도는 한걸음 더 깊이 우리가 그분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이유를 오늘 이어지는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v.30b)고 사도는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사도가 에베소서 말씀을 시작하면서 우리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아들과 딸로 확증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성령의 사역임을 놀랍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의 인치심 (being sealed with the Holy Spirit)입니까? 우리는 지난번 1장 말씀에서 ‘성령의 인치심’이란 성령께서 도장을 찍듯이, 그리고 편지의 풀을 붙여서 단단히 봉투를 닫듯이 우리 성도의 구원을 그렇게 확실하게 책임져 주신다고 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보증’ (guarantee)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결코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약속의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도장 찍어 주시고, 두루마리에 싸서 마지막 구원의 날까지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이라고 사도는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이 성령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이유라고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문제제기를 했듯이, 우리 거듭난 크리스챤들 조차도 스스로 착각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실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매우 염려스럽고 위태로운 인생을 살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정확히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한번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사도는 이것을 <25-29절>에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성령을 근심시키고자 원한다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 보십시요!’ (v.26-27). 누가 당신에게 섭섭하게 했거나 잘못을 했는데, 그것을 용서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도록 마음에 담아 둬 보세요.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은 이제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마귀가 어떻게 여러분을 장악하고 죄악된 마음을 품게 하고, 미움과 원망과 쓴 뿌리를 그 마음에 심어 놓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보세요! 하루가 지나도록 그 분함을 풀지 말고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고, 죄가 우리의 심령을 장악하는 상태요, 이것이 성령을 근심케하는 성도의 안타까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요?” (How do we avoid grieving the Holy Spirit?) 이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성령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성령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being conscious the Spirit): 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첫 시작은 성령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기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은 ‘솔직히 우리는 성령님과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성령님은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고 누누히 강조 드렸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솔직히 우리 각자가 성령에 대한 생각과 관계는 어떠냐는 것입니다. 좀 쉽게 말해서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성령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성령을 실제적으로 나와는 무관한 존재처럼 여긴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죄악된 행위를 했을 때 이런 나로 인해 내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얼마나 아파하시고 깊이 탄식하실 지를 전혀 고민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성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사도가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도전하는 그 근본적 이유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지금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분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함으로 그분을 실망시키거나 근심시키지 않고자 힘쓰고 있습니까?’라고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를 위해 탄식함으로 간구하는 성령님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마치 투명인간 취급하듯이 성령님을 모독하고 그분을 근심케 하는 태도가 또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가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성령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내주하심을 망각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늘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을 좇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walking in the Spirit): 사도가 갈라디아 성도에게 분명히 밝혔듯이 성령과 우리 육신의 소욕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원수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7)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사도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중요한 영적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그분을 근심케 하지 않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입니다 (갈. 5:22,23). 성령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여 좇아갈 수 있을까요?’

 

셋째,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meditating & obeying the law of Lord):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오늘날 성령을 믿고 성령의 충만으로 살고자 하는 크리스챤들 가운데는 상당히 우려스러운 모습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분들 중에는 어떤 ‘성령집회’라는 모임에 참석해서 누군가에게 성령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위 ‘안수 받는다’는 식으로 성령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 받는 것을 마음이 뜨거워지고, 뭔가 감정적인 강력한 변화를 경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성령체험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시작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행한 것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 10:44)라고.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어떤 용하다는 사람 찾아가서 받고자 할 때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많음을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반면에 성경을 더 깊이 묵상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고자 할 때, 성령님은 비둘기 같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더 충만하게 임하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시편 1편 기자가 ‘왜 여호와의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가 축복된 자인지?’ (시. 1:2)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영혼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셔서 그를 지키시고 육체와 세상과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생명과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말씀에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성령님은 우리의 신앙 양심으로 말씀하시고, 기도 가운데 우리를 강력하게 인도하시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숙된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추구하는 만큼 성령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감옥에 쇠사슬에 갇힌 죄수가 되었기에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고 에베소 성도들과 우리 각자를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합당한 부르심의 삶은 성령으로 하나 됨이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언제나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아니면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어리석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거두며 죄와 싸워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천년왕국 ( 20:1-6)

<성경 본문>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문자적인 천년왕국이다. 여자적(如字的) 천년왕국은 아닐지라도 문자적 천년이다. 상당히 긴 기간을 말한다. 하늘에 있을 상징적 천년 기간이다. 천상에서 상징적 신약시대의 전체 기간을 말한다. 상징적으로 일정한 기간을 의미한다. 교회의 지복보다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 당할 각종 환난을 시사한다. 천년이라는 기간이라기보다 때의 특색을 강조한 것으로 사탄의 파멸을 설명한 것이다. 천년은 완전수 10의 세제곱으로 사탄이 완전한 기간 결박당함을 말한다. 현 복음시대에 마귀의 영향력이 약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지상에 천년왕국을 건설하실 때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만국을 다스릴 것이다.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과 성도들이 죽은 후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하늘나라에서 주와 함께 왕노릇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 복음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관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천년설>
전천년설 - 천년기 전 재림론
후천년설 - 천년기 후 재림론
무천년설 - 초림과 재림 사이 예수 믿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림

<하나님 나라의 임함>
1. 예수의 복음으로 - 1절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2. 성령으로 - “큰 쇠사슬을"
3. 즉 예수 믿고 성령 받는 일이 그 핵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1. 사단의 활동이 제압됨 - 2절 “용을 잡으니”
2. 죄악된 일이 사라짐 -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3. 평안 - 3절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4. 참 신앙 안에서 삶 -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5. 끝까지 승리하라 - 3절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자>
1.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 - 4절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2.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 - 4-5절 “이는 첫째 부활이라”
3. 그리스도를 주로 삼은 자 -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4. 회개하면서 씻는 사람 -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5.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 - 5절 “그 천 년이 차기까지”
6. 경배와 거룩의 삶 - 6절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설 요약>

천년왕국은 계20:1-5에 근거를 두고 예수님과 함께 성도들이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다스린다는 내용인데, 천년왕국에는 크게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 있습니다. 즉 전천년설(천년기 전 재림론)은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에서 천년 간 왕 노릇한다는 설이요, 후천년설(천년기 후 재림론)은 천년왕국이 먼저 있어 세계가 영육 간에 발전하다 마지막 완성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설입니다. 무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 예수 믿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성도들의 복되고 승리적인 삶을 가리킨다고 보는 영적으로 이해하는 설입니다.

 

<천년설에 대한 입장>

정통교회에서 많이 지지하는 설은 역사적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인데 복음으로 본 강해의 특성상 무천년설에 가깝지만, 큰 틀에서 두 가지의 설을 함께 존중합니다. 큰 틀이란 역사적인 면과 영적인 면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육체(고전15:51-54)와 우주까지도(벧후3:10) 새롭게 되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점에서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음과 동시에, 현재 성령 안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충돌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임하고 있고, 이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기도 합니다.

 

<왕 노릇의 조건>

예수를 주(, 머리)로 삼고  4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육신과 세상을 따라 살지 않으며  4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내가 온전히 죽어져야 한다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본문의 위치>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천년왕국 기사의 중간에 첫째 부활의 복됨을 말씀한 것은 예수 믿어 중생함으로 천년왕국에 들어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말세지말 즉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믿음 지키며 살아남은 자들에게만 국한되는 왕국이 아닙니다. 감사한 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셨듯 이 땅에 살아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할까요?

 

1. 예수의 복음으로 임합니다.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천년왕국에 관한 말씀이 나오자마자 마귀 잡는 일부터 나타납니다(11:20). 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탄을 잡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예수님이신데(1:18) 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를 가졌을까요? 그것은 천사가 복음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천국의 문을 열거나 사탄을 지옥에 가둘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심과 아울러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양면성을(11:20, 12:28, 5:32, 요일3:8) 참고할 때 예수 복음이 결과적으로 마귀를 잡는 무저갱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2.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 임합니다.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무저갱의 열쇠가 예수의 복음이라면 큰 쇠사슬은 무엇일까요? “큰 쇠사슬이니 사탄이 세력이 크다는 의미와 아울러, 그 큰 세력을 제압할 만큼 쇠사슬이 크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쇠사슬이 용을 결박하는 실재적인 도구라는 점에서 복음의 실재이신 성령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9:1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고 하셨고, 16:8 그가 와서 -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하셨는데,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즉 성령이 임하시면 심판이 집행되어 사탄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3. 즉 예수 믿고 성령 받는 일이 그 핵심입니다.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셨는데, 예수님의 제자 교육의 3년 반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시키고 경건의 본을 보이시며 닮게 하는 기간이었고, 나머지는 성령의 권능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시록의 목적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통하여 성령의 충만과 능력으로 온전함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어떤 일이 있나요?

 

1. 사단의 활동이 제압됩니다.

 

2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것은 위에 있는 존재이니 승리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사탄을 이기는 비밀은 승리적 확신입니다. 성도는 승리의 보좌에 계신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승리자입니다. 반면 사탄은 예수 십자가 공로로 패배를 당한 자요, 하늘의 전쟁에서 쫓겨난 존재입니다(12:7-9). 이 승리의 복음에 서시기를 바랍니다(12:10-12).

 

한편 마16:19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신 것처럼 천사의 활동은 지상 성도의 믿음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탄이 패배자여도 우리가 자만하거나 방심하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강한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과 만국을 위한 기도를 빼지 않아야 합니다(딤전2:1-2).

 

2. 온갖 흉악한 일이 사라집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이 다양한 명칭에는 모양을 달리하고 범위를 넓혀 가며 배후에서 온갖 술수를 부린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용의 이름 중 옛 뱀은 에덴동산에서 그랬듯이 내 마음인 양 슬그머니 다가와 미혹함을, “마귀”(디아볼로스) 고소자, 비방자라는 뜻으로 하나님 앞과 우리 양심 앞에서 참소하고 정죄함을, “사탄 대적자란 뜻으로 하나님께 반항하고 온갖 방법으로 성도를 대적함을, 그리고 ”(드라콘) 이라는 뜻이지만 다 자란 뱀으로 에덴동산의 수준을 넘어 천하를 꾀는 자”(12:9)임을 보여줍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온전케 하시려는 훈련용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충분히 이길 만큼 믿음과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로서 온전함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3. 평안 가운데 살아갑니다.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여기 무저갱을 무천년설에서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해 속박된 상태라고 해석합니다. 그것은 천년 후에 다시 풀려 대적한다는 점에서 무저갱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 불(20:7-10)과는 별개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이름을 가진 악의 근원인 용을 가둔다는 것은 그만큼 적극적인 믿음을 시사합니다. 기도 제목의 하나인 주기도문의 나라 임하옵시고는 사탄의 멸망도 포함된 기도입니다.

 

4. 참 신앙 안에서 삽니다.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여기 만국 '타 에드네'로서 그 의미는 나라들, 거민, 세상 모든 사람을 뜻하지만, 좁게는 각인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각인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그만큼 진리와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5. 끝까지 승리하게 됩니다.

 

3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이 말씀에는 먼저 그동안 천년왕국 안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셨고,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6. 마지막까지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3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이 말씀이 근심스럽게 하는데 성경에서 찬다는 표현은 시간적 개념보다 경륜의 때를 가리킵니다(1:15, 4:4). 이 경륜은 개인의 종말(임종)에도 적용됩니다(9:4). 잠깐 놓이는 놈이 사탄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험의 때입니다. 그러나 계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하셨기에, 인내의 말씀을 지키며 은혜 안에 산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내란 믿음의 기초인 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흔들림 없는 삶입니다.

 

역사의 종말이 언제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임종의 날도 언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경륜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께도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는데(4:13)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다기왔고, 세례요한도 그랬고,  11장의 두 증인도 사명을 마치자 죽임을 당합니다. 이처럼 사명을 마칠 때가 임종의 날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잠깐 놓"인다고 했는데, “반드시는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했듯 이리저리 피하지만 결국은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잠시’ ‘잠깐’ ‘얼마 동안’ ‘하루 등은 인생의 날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수차 사용되었습니다(20:3, 4:13, 고후4:17-18, 21:13, 4:14, 벧전1:24).

 

그런데 벧후3:8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인생길이 평탄하거나 험악할 수도 있습니다. 노년기는 시험의 때이기도 합니다. 9절에 나오듯 사탄이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하여 성도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둘러 공격하듯, 사탄이 노년기에 쇠약과 고통과 늙음과 빈곤 등의 절실한 육신의 상태를 가지고 의심과 고독과 절망과 두려움 등으로 믿음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육신의 질병은 우울증까지 일으킨다는 점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 목표인 성도의 진 사랑하시는 성이라는 낱말에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보입니다. “성도의 진이란 고후10:4-5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탄과 악을 대적하는 강한 믿음을 주십니다. 가나안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하셨듯 담대함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담대하면 산처럼 크던 문제도 한 줌도 되지 않게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기쁨과 찬송으로 변할 것입니다(10:35-36).

 

그리고 사랑하시는 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존재라는 점에서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한 말씀처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5:5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 했듯 성령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주심을 각각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가까울수록 찬송과 기도를 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한 것은 천년왕국은 임종의 순간까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토록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한 것처럼 우리가 육체를 벗는 것만큼 자유롭고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고후4:17). 그러므로 진리와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지막까지도 스데반처럼 밝고 아름다우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분은 20:7-10에서 노년기의 특별한 은총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자는 누구입니까?

 

1.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4절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이 심판은 뒤의 11절에 나오는 크고 흰 보좌 심판도 아니고, 거기에 앉은 자들이 누구인지, 19:28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하신 말씀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복수형태의 보좌는 교회를 가리키는 24장로의 보좌 외에는 없고,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이 주와 함께 불신과 악을 심판하며 다스리는 은혜로 봐야 합니다.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한 말씀을 볼 때, 어떤 능력을 주셨다 해도 현실에서 누굴 심판할 권세는 없습니다. 다만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 성경의 판결대로, 인간은 구세주가 필요한 죄인이며, 예수 믿지 않고는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전도하며 심판을 알게 하는 일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2.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입니다.

 

4-5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했습니다.

 

첫째 부활이 어떤 것이기에 목 베인 순교자와 짐승의 표 받지 않는 자만 천년왕국에 들어간다는 걸까요? 여기에 대해 무천년설에서는 첫째 부활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루어지는 중생을, 둘째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육체까지도 온전하게 되는 부활이라고 말합니다(12:2, 20:12-14). 반면 전천년설에서는 첫째 부활은 재림 시 성도의 부활이고, 둘째 부활은 천년왕국 후에 악인들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첫째 부활이란 둘째 부활이 있음을 시사함과 동시에 어떤 부활보다 앞선 어떤 부활을 시사합니다(1:20, 2:1).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듯, 다름이 아닌 예수 믿을 때 살아나는 영적 부활입니다(5:25, 11:25-2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천년왕국의 백성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함으로 죄에 대해 죽고 영으로 다시 산 자들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어 영적으로 살아난 첫째 부활한 성도라면 천년왕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3.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4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천년왕국 백성의 대상으로 예수를 증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 소개됩니다. 이들은 믿음 지키기 위해 순교까지 했으니 당연히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형 태형 교수형 등 다양한데 왜 참수형으로 목 베임 당한 순교자만 언급했을까요?

 

우리에게도 목 베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머리부터 교체해야 합니다(1:18, 2:6-7,19). 내가 머리가 되면 하나님의 왕국이 아닙니다. 사람이 왕 노릇하면 그곳은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도 아니고, 인간 나라요 사람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는 위에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계신 표로 머리에 수건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삼고 높이고 순복하고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을 문자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복음전도자로서 순교한 자들인데, 그중에서도 목 베임을 당한 참수형으로 순교한 자들만 천년왕국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 대부분은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신령한 의미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4. 진실로 회개하면서 씻는 사람입니다.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 666 6수가 의미하듯 인격과 행위가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마귀적인 육에 속한 자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천년왕국의 주인공이 되려면 예수 믿고 더러움을 씻고 육신대로 살지 않아야 합니다(2:3). 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했듯, 이마에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평강을 모르고 산다면 물과 피와 성령으로 씻으시기를 바랍니다(요일5:6-8).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양심의 정죄감을 씻고,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과 지식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성령으로 부패한 마음과 행실을 깨끗하게 씻으시기 바랍니다(15:3). 그리고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고(6:13-23), 진리를 순종함과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 형상의 온전함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벧전1:22).

 

5.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천년이 차기까지 그러니까 천년왕국이 계속되는 한 이들은 부활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도 존재하는데 말씀과 성령의 세력이 강할 때 우리 옛사람이 죽어 기승을 부리지 못합니다. 만약 옛사람이 기승을 부린다면 그 마음은 짐승의 나라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천년왕국의 1,000은 충만수입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그리스도 안의 충만한 은혜와 완전한 다스림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 충만함이 지속이 되는 한 영원히 평안하고 안전하고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6. 경배와 거룩의 제사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6절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여기 도리어란 둘째 사망을 넉넉히 이기고 다스리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제사장이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칭했던 멜기세덱을 연상시킵니다(14:18). 아브람을 축복하고 십 분의 일을 받은 사람입니다이처럼 제사장의 주요 임무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축복하는 사역입니다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사장이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를 드리시고 우편에서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합니다즉 하나님의 제사장이 경배에 그 초점이 있다면(6:22-27), 그리스도의 제사장은 영혼 구원과 죄 사함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1:20-23). 이 같은 경배와 거룩의 제사장적인 삶이 천년왕국 안에서 사는 삶의 비밀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의 복은 무엇입니까?

 

1. 복 있는 부활입니다.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첫째 부활은 앞에서 설명했듯 예수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이란 둘째 부활이 있음을 시사함과 동시에 전에 죽었음을 전제한 표현입니다. 아담 안에서 인류가 당한 사망이 바로 첫째 사망입니다(5:14, 고전15:22). 이처럼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만큼 복된 일은 없습니다.

 

2. 거룩한 부활입니다.

 

6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예수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복되고 거룩한 자녀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의로우시고, 함께 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고전1:30, 요일5:4,18). 예수 믿고 은혜 생활하면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심긴 중생의 새 생명이 온전히 자라서 복되고 거룩한 자가 됩니다(6:22, 요일3:10, 고후5:17).

 

3. 사망이 지배하지 않습니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둘째 사망이란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입니다(21:8). 둘째 사망이란 첫째 사망이 있었다는 건데 첫째 사망에 대해서 앞에서 설명했듯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것을 가리킵니다(2:1). 그런데 예수 믿고 첫째 부활로 거듭났으니 지옥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이 지배하지 않습니다(8:2).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예수 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을 떠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4. 죄와 사망을 넉넉히 이깁니다.

 

6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도리어란 둘째 죄와 사망을 넉넉히 이기고 다스리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했듯 두 직분은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 성도의 제사장직은 경배와 거룩함이 주 임무요, 왕직은 믿음과 경배의 그 결과로서 성령으로 죄와 사망을 다스림을 가리킵니다. 즉 신령한 제사장직을 잘 감당함으로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요, 벧전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한 것처럼 이 두 직분은 재림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사람들의 마음과 환경까지도 다스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늘 충만한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왕국 안에서 우리를 넘어뜨리거나 대적할 어떤 악의 세력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4-25) 하셨습니다. 아직 신앙을 갖지 않았거나 깊은 믿음이 없다면 예수 믿고 거듭나서 가장 복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하여 예수 믿고 더욱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4)


오늘 말씀은 1절과 2절에서 각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약속합니다. 1) 정죄함이 없습니다. 2)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3)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1.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런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영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은 내 육체 안에서 나의 영혼과 하나가 되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 본질이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과 하나가 된 것은 곧 예수님과도 하나가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과 소원을 가지고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에 성령과 하나가 된 것은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과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고백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란 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나의 죄로 인하여 내가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이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없는 것이요 완전하게 없는 것입니다.

왜 내게 더 이상 죄로 인한 심판과 형벌이 없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받아야 할 정죄를 이미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롬8:3)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나님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정죄 즉 죄의 심판과 형벌을 다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정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으려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서 낱낱이 다 회개를 해야 돼.”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고 회개를 하고 나서도 용서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다시 부끄러운 죄를 짓기라도 한다면 나를 정죄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 봐라. 참된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죄를 짓지 않느냐?” 내 안에 있는 율법의 소리요 마귀의 정죄였습니다.

저는 과거에 이런 악순환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회개에 대해서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치고, 죄악에서 떠나고자 하는 마음의 결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정의의 인격적인 회개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였습니다.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낱낱이 고백하거나, 뼈를 깎는 듯한 고통스러운 회개를 하지 않아도 내가 인격적으로 죄를 회개했다면 하나님은 그 회개를 받으셨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가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 눅5장 1절로 11절을 보면 베드로는 동업자들과 함께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으나 허탕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배를 띄우라고 말씀하시곤 배 위에서 뭍에 앉아 있는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신 후에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배를 저어 가서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명령이 못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호수는 날이 환하게 밝으면 고기가 잘 안 잡히고, 게다가 깊은 곳은 물고기가 없기 때문에 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베드로는 고백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직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을 때 두 배가 가득할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눅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짧은 고백 속에 베드로는 온전한 회개를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비록 그 배 위에서 눈물 콧물 흘리고 지난 날 갓난아기 때 지은 죄까지 회개하지 않았어도 모든 죄를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줄 때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3:10)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베드로는 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훗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는 큰 죄를 지었지만 그 자리에서 회개함으로 더 이상 정죄함에 빠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에도 예수님께 다시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그 문제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완벽한 회개를 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인격적으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쳤다면 하나님은 그 순간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정죄함 가운데 빠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마귀의 정죄하는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단지 내가 아직 고백하지 못했던 최근의 죄가 있다면 미루지 말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마귀의 정죄함을 뿌리치십시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서재에 있을 때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마귀는 루터에게 종이 한 장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에는 루터가 여태까지 범한 모든 죄의 목록이 낱낱이 기록되어져 있었습니다. 죄의 목록을 들여다보는 순간 루터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앞이 캄캄해지면서 맥이 탁 풀렸습니다. 너무나 옛날 일이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과거의 부끄러운 죄까지도 몽땅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루터에게 “이렇게 죄 많은 네가 무슨 종교개혁을 한다고? 너나 바르게 살아라!” 빈정대며 “너는 너의 죄를 어떻게 할래?” 하고 협박했습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루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비난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히 마귀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부부지간에 또는 형제지간에, 친구지간에, 그 사람의 아픈 과거를 자꾸 들먹이며 비판하고 꼬집고 괴롭히는 사람은 마귀를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결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장 많이 비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알고 보면 비판을 가장 많이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미국 격언 중에, 심장병에 치명적인 두 가지 사실은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과 남을 깍아 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꼬집는 것은 그 사람과 동시에 자신을 죽게 만들므로 백해무익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 나에게도 이런 허물이 있는지 먼저 자신부터 살펴보고 나도 그 처지가 되면 결코 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는, 몇 배 더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겸손히 회개하며 다시는 그런 허물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마귀의 공격을 받고 무척 괴로워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루터야! 너의 모든 죄는 나의 피로 모두 다 깨끗이 씻었다. 그러므로 너를 정죄할 자가 아무도 없느니라.”루터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로마서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 순간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든지 마귀가 나타났던 그 벽을 향하여 잉크병을 힘껏 집어던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하겠느냐?”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루터가 외치는 순간 마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지난 죄를 들추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고 낙심시키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것은 마귀가 하는 못된 짓입니다. 특히 마귀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합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궤계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곧 바로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죄의 심판과 형벌이 없습니다.”


3. 나는 해방되었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죄의 심판과 형벌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른 표현으로 반복합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서로 대조가 됩니다. 그런데 죄와 사망의 법은 죄로 인해서 우리가 죽는 법이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생명과 성령으로 우리가 살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적용되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입니까?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세 가지 해방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 2) 죄의 유혹으로부터 해방 3) 죄의 존재으로부터 해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저주를 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죄의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그 저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저주대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오시어 예수로 인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다스리는 새로운 법, 새로운 원리인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고백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습니다.


4. 나는 성령을 좇아 거룩한 삶을 삽니다.

(롬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을 때 성령을 받아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을 따라 살아갑니다. 성령 없이는 우리가 믿음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십니다. 율법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거룩한 삶을 요구합니다. 내 힘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좇아서 기도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우리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성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 매우 방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한 때 이방종교인 마니교에 빠졌고, 술집에서 일하고 몸을 파는 여자와 동거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다음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함께 살던 여자를 고향으로 보내고 그녀도 예수님을 믿도록 전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참회록]을 썼습니다. 그가 한번은 지난날에 방탕하게 살았던 때에 자주 다니던 골목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술집 여자가 어거스틴을 반기며 “선생님 오래간만입니다. 왜 그 동안 안 보이셨어요? 잠깐 쉬다 가세요.”라며 유혹했습니다.

이 때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았소! 당신이 전에 부르던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고 지금의 어거스틴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어거스틴이요.”라고 답하고 그 길을 늠름하게 지나갔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 때문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좇아 거룩한 삶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가 단번에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중에 순간순간 옛생활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해방된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성령을 좇아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이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과 정죄함이 없다는 것과 주님 주신 해방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입니다.

고백합니다. “나는 성령을 좇아 살아갑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이미 회개한 과거의 죄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과거에 부끄러웠던 모습 때문에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 자녀 삼아주시고 귀한 사명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근의 죄 가운데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마귀에게 정죄 당하지 말고 즉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주님 주신 자유와 해방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성령 충만한 사람의 진가   (행16:19~34)

저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초등학교 1,2학년 때의 일인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 어린 저로서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친구 중에 방앗간 집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 그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방앗간을 구경 시켜주었습니다. 방앗간 안에는 곡식 자루들이 쌓여 있었는데, 퇴근 후라 기계가 돌아가지 않고 고요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어떻게 곡식을 빻고 떡을 만드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친구에게 물었더니 전기 스위치를 넣어야 기계가 움직이는데, 자기는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낮에 다시 오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 궁금해서 바로 다음 날 방앗간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린 제 눈앞에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전날 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그 큰 기계들이 소리를 내며 돌아갑니다. 곡식이 빻아지고, 한쪽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나오는 겁니다. 그때 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전기의 힘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기계가 크고 좋아도 전기의 힘이 없으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처럼, 성령 충만 받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그들만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성령 충만을 받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고,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큰 복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험한 세상을 살아간다 해도 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 모두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 충만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신앙의 인물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성령 충만한 대표적 인물을 꼽는다면 바울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바울은 항상 성령 충만했고, 자신의 삶을 통해 성령 충만한 삶이란 이러 이러한 것이라고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성령 충만의 ‘진가’(眞價)를 보여준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바울의 삶을 통해 보는 성령 충만의 진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1] 성령 충만의 의미 : 성령의 지배 상태
  먼저 성령 충만은 어떤 것인지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령 충만은 성령의 ‘지배’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은 단순한 에너지나 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삼위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성령님’ 혹은 ‘성령 하나님’으로  부르는 겁니다.
  성령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거주하십니다. 이를 가리켜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이미 약속하셨던 내용입니다. 요14:16~17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성령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라 ... 그(=성령 보혜사)는 너희와 함께(with you)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in you) 계시겠음이라”
  바울도 고전6:19에서 이를 증거합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a temple of the Holy Spirit)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이상합니다. 내가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내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시는데, 때로는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우울하고 그럴까요? 왜 어떤 때는 신앙이 올라가고(up), 어떤 때는 내려가고(down) 신앙의 기복(起伏 Ups and Downs)이 생기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충만(聖靈充滿 The Fullness of the Holy Spirit)의 유무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성령 충만하면 신앙이 올라가고 뜨거워집니다. 반면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신앙이 내려가고 냉랭해 집니다. 성령의 내주는 항상 유지되는 ‘영속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그랬다 안 그랬다 ‘간헐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충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주의해야 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명령합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구절에서 바울이 성령 충만을 언급하면서 왜 술 이야기를 꺼내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술과 성령은 정반대인데 말입니다. 그것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현상적으로 비슷한 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술의 영향과 지배를 받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사람이 술을 먹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고, 결국 술이 사람을 먹어버린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인격(지, 정, 의)이 달라집니다. 술 취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면 괜히 슬퍼져서 엉엉 웁니다. 자기는 똑바로 간다고 하는데 갈지(之)자를 그립니다.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냅니다. 술이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겁니다. 마찬가지 성령 충만하면 성령이 그 사람의 인격(지, 정, 의)를 지배하고 통치합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의 지배(支配 control)이며, 성령의 통치(統治 dominate)입니다. 성령 충만은 주권(主權 Lordship)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과연 누가 주권자로서 내 인생, 내 인격을 이끌어 가냐 이겁니다. 내 편에서는 적극 순종하는 거죠. 그런데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는 내가 주인입니다. 내 속의 죄성이나 욕심이 주인입니다. 내 마음대로 합니다. 성령의 뜻에 불순종합니다. 그러면 지정의 모두 악한 쪽으로, 세속적인 쪽으로 이끌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 충만을 공간이나 물질 개념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고무풍선에 바람이 가득 찬 상태로 생각합니다. 그런 오해 때문에 심지어 쉭~ 쉭~ 하면서 성령 받으라고 하는 엉터리 부흥사가 생기는 겁니다. 그런 게 아니죠. 성령 충만은 ‘관계 개념’입니다. 성령님과 나의 관계가 다스리고 순종하는 관계이면 성령 충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님이 ‘충분히’(fully) 나를 다스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성령 충만은 곧 하나님 충만, 예수 충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함께 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함께 해 주십니다. 성령 충만은 성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면서 나의 주인으로 나의 모든 생각, 감정, 의지를 지배하고 통치하고 이끌어 가시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내 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통치하고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5:18 성령 충만 명령 구절과 병행구절인 골3:16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 ” 그러니까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은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2]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 : 성령 충만의 진가
  이와 같이 우리가 성령 충만해지면 우리 삶 가운데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바울의 경우를 통해 살펴봅니다.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에 있을 때 겪은 사건의 기록입니다. 귀신 들려서 점을 치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너무 불쌍해서 귀신을 쫓아줍니다. 귀한 일을 한 거죠. 그런데 여종이 더 이상 점을 치지 못하면서 수입이 없어지자 돈만 아는 악한 주인이 바울에게 분노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리를 붙잡아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당국에 고소합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매를 실컷 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이런 황당한 과정 속에서 바울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살펴보면, “아! 저런 게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이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①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 :
  성령 충만한 바울에게 나타난 첫 번째 모습은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의 환경은 어떻습니까? 로마의 형벌제도는 잔인무도해서 매를 때릴 때 무제한입니다. 매를 맞다 죽는 사람도 수두룩했습니다. 바울이 그런 고통을 당한 겁니다. 그리고 깊은 감옥에 들어갑니다. 지하 감옥이죠. 중 죄수만 갇히는 캄캄하고 답답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밤중에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24절~25절. “24 그가 이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사람은 환경의 영향과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환경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무조건 환경이 나쁘다고 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가정에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그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는 저부하며 자랐지만, 자기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폐인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들은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며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알코올 중독 예방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동일한 환경이지만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에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정신력입니다.
  정신력보다 더 강한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꽉 붙잡아줍니다. 마음 속에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신령한 기쁨을 줍니다. 그러면 환경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극복해냅니다. 승리합니다.  
  바울은 엡5:18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하고, 이어서 뭐라고 말합니까? 엡5:19~20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 충만하면 저절로 찬송이 나오고 기도가 나오고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7:38~39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 이처럼 우리 내면에 생수의 강이 흐르므로 세상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 처해도 마음 속에서 기쁨이 솟아난다는 겁니다.
  성령 충만했던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어도 기뻐할 수 있었고, 찬송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성령 충만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빌립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빌4:4,11~13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 )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마음에 짓눌리지 않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형편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공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헨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를 아시죠. ‘삼중고(三重苦)의 성녀(聖女)’라 불리던 분입니다. 그녀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 장애인이었지만 크리스천으로 세계적인 교육가요 사회사업가였습니다. 세계 최초의 장애인 박사였습니다. 환경으로 보면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는 사실입니다. “아! 참으로 나의 생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도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설리번 선생(Ann Sullivan)의 격려 때문입니다.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사람을 결코 패배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떠한 환경도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여전히 너를 사랑하시므로 너는 얼마든지 삶의 환경을 극복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이 말은 곧 성령 충만하면 환경을 이기고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환경이 나빠서 불행한 게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환경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하나님 능력의 역사(役事) :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을 누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나타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성령 충만한 가운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었습니다. 또 감옥에서는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26절.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물론 바울이 간수를 위해 탈옥하지 않죠. 하지만 35절 이하 보면, 다음 날 상관들이 직접 와서 오히려 출옥하라고 사정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입니다. 기적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 삶 가운데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앞에 있는 태산 같은 문제가 평지가 되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내가 볼 때는 큰 문제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문제가 커도 하나님은 그 문제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이 크게 보이고, 문제는 작게 보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외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 앞에 있는 태산아! 평지가 될지어다!” “주여! 내 앞에 태산을 평지 되게 하옵소서!” 아무쪼록 성령 충만해서 세상에서 어떤 문제가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③ 예수님을 닮은 인격 :
  앞에서 성령 충만은 곧 예수 충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면 자연히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변화됩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의 인격을 보십시오! 잠을 자던 간수가 옥터가 흔들리자 깜짝 놀라 죄수들이 탈옥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법으로는 죄수를 놓치면 간수가 그 죄수의 형벌을 그대로 져야 합니다. 심한 경우 처형을 당합니다. 가족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결하려고 했는데,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28절~29절. “28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바울이 간수의 자결을 제지시키고, 탈옥의 기회를 포기하고 태연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간수는 큰 감동을 받습니다. 넙죽 엎드립니다. 엎드렸다는 말은 원어의 의미로 볼 때 바울을 신적인 존재로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비록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 가운데 빛나는 모습이 있었고, 그의 희생적인 사랑은 간수를 감화시키기에 충분했던 겁니다. 이것은 그가 늘 성령 충만했던 결과입니다. 곧 성령의 열매가 맺어진 결과입니다. 갈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보면 9가지 열매가 나오는데, 이것은 모두 예수님의 고매한 인격의 요소들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런 인격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여러분, ‘얼짱’이란 말 아시죠. 얼굴이 잘 생긴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유행어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얼짱이 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성령 충만, 예수 충만함으로 아름다워집니다. 우리 말 얼굴은 본래 ‘얼(영혼)+꼴(모양)’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즉 영혼의 모양이 얼굴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예뻐지면 얼굴도 예뻐집니다. 물론 생김새 자체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한 마디로 기품이 생기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성령 충만해서 진정한 얼짱 되시기 바랍니다.
  ④ 복음의 증거 :
  성령은 증거의 영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면 자연히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간수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에 관해 증거합니다.
30절~31절.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또 32절~34절을 보면, 간수가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데려갔고, 온 가족이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습니다.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이렇게 해서 간수의 가족들이 루디아와 더불어 빌립보 교회 창립 멤버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깨달아지고 구원의 기쁨이 넘치고, 주체할 수 없어서 그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부디 저와 여러분도 성령 충만해서 가까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계 만민에게 나든지 보내든지 선교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3] 성령 충만 받는 비결 : 말씀과 기도의 생활화 - 회개와 순종  
  이렇게 좋은 성령 충만이지만, 내가 받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령이 나를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생활화하시기 바랍니다. 죄는 성령과 상극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 생활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혹시라도 회개치 않은 죄가 있는지 체크하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한번 스스로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십니까? 부디 성령 충만을 사모하시고 성령 충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성령 충만의 진가를 맛보며 나타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홍문수목사 설교 중에서

백마와 탄 자   계19:11-21

계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忠信)과 진실(眞實)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란 열린 하늘 문을 통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면 백마와 백마를 탄 자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늘입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성경이 열렸다는 것이니 펴 놓인 작은 책을 말하며 하늘이 열린 자는 성경에서 자유한 자요 성경보다 큰 자이니 성경 안에 갇힌 자가 아니라 성경 밖에 있는 자요 사도 선지자들보다 큰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열린 하늘을 통하여 보니 백마를 탄 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요 공의로 싸우는데 승리가 보장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백마를 탄 자'는 첫째 인을 뗄 때 나타난 흰말과 는 전혀 다른 기수(騎手)로서(계6:1-2) 세마포를 입은 어린양의 아내를 말하며 대언의 영을 가진 천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2)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 백마를 탄 자의 이름이 충신(忠信)과 진실(眞實)입니다. 충신은 마음 중심에 예수님의 말씀을 모신 자요 사도 선지자들의 말씀을 소유한 자를 말하며 진실(眞實)은 진리로 열매가 된 자를 말하니 신구약의 진리의 열매는 예수님이요 어린양의 아내를 말합니다.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요 성도들은 사도 선지자들이라고 했으니 사도 선지자들의 진리로 옷을 입은 자는 진리로 열매가 된 자요 어린양의 아내이니 진실(眞實)한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이 충신과 진실입니다.

3)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 '공의(公義)'는 공개된 의(義)를 말하니 성경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백마를 타고 있는 충신과 진실은 성경을 가지고 바벨론을 심판하며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11:3-5에 나타난 메시야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백마를 탄 자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진실함을 말합니다(계19:2, 15:3, 16:5)
'심판하며 싸우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네이 카이 폴레메이'는 모두 현재 시상으로 백마를 탄 자의 심판의 사역은 영원할 것이며 대적 자들을 향한 전투와 심판이 지속적으로 계속될 것을 말합니다.

계19:12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 '그 눈이 불꽃같고'는 계1:14, 2:18에서 언급된 것으로 백마를 탄 자가 일곱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꿰뚫어 볼뿐만 아니라 바벨론을 꿰뚫어 보면서 심판하는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의 심판이 공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판단이 잘못될 수 있으나 일곱 눈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기에 그의 판단과 그에 따른 심판은 공의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고전2:13). 백마를 탄 자의 머리에 있는 면류관(디아데마타)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월계관(스테파노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관(王冠)을 의미합니다. 백마를 탄 자의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다는 것은 12별의 면류관으로(계12:1) 사도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는 온전한 주권과 왕권을 모두 소유하고 계심을 말합니다.

2)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나 신의 능력을 소유한 것을 말합니다. 백마를 탄 자를 충신과 진실이라고 했지만 그 천사를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감추어 두었던 만나를 먹고 흰 돌을 가진 자가 있는데 받은 자밖에는 알지 못한다 하였습니다(계2:17).

계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稱)하더라
1)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 백마를 탄 자요 충신과 진실이라는 자가 입고 있는 옷은 '피 뿌린 옷'이라는 것입니다. 피 뿌린 옷이란 사도 선지자들의 진리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말하니 순교자들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계6:9-10)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으로서 흘리신 피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계1:5, 5:9, 7:14, 12:11). 피는 생명이요(례17:11) 생명은 예수님의 영이요 예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6:63). 그러므로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것을 말합니다. '입었는데'(페리베블레메노스)는 완료 시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를 온전히 되찾아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것을 말하며(계19:19-20, 갈3:27)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칭호와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은 같은 말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成肉身)하셔서 하늘과 땅이 통일되게 하시는 중재자이셨으며(엡1:10, 요1:1, 14, 요일1:1) 본문에 기록된 백마를 탄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을 입고 그 백성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는 중재자가 될 것을 말합니다.

계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란 수많은 거룩한 자들이요(유1:14) 시온 산에 선 144,000명이요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로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에 같이 오는 자들을 말합니다(살전4:14-17).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충신과 진실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계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鐵杖)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 그의 입에서 이(利)한 검(劍)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 사11:3-5, 계1:16과 같은 표현으로 '이(利)한 검'으로 만국을 쳐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과 평강을 가져다 주는 복음으로 알고 있으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회개함으로 구원받게 되는 복음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백마를 탄 충신과 진실이라는 분은 하나님의 말씀인 이(利)한 검으로 바벨론을 심판하는데 사용하더라는 말씀입니다.

2)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 시2:9, 계2:27, 계12:5에서 언급된 말씀입니다. '철장으로 다스리심'은 백마를 탄 자의 강력한 능력과 확고한 심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만국을 확실하게 심판하실 수 있는 절대적 권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말합니다.

3)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 사63:1-6의 말씀으로 포도 수확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대적 자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을 표현하신 것처럼 백마를 탄 자가 모든 대적 자들을 완전히 파멸시키게 될 것을 말합니다.

계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萬王)의 왕이요 만주(萬主)의 주(主)라 하였더라
1)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 백마를 탄 자의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계17:3의 짐승의 몸에 기록된 참람(僭濫)된 이름들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짐승의 몸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대적하는 이름이 기록된 반면에 백마를 탄 자의 몸에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칭호로 사용되었는데(신10:17) 본문에서는 백마를 탄 자가 바벨론을 심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19: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 겔39:17-20에 나타난 곡의 멸망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한 천사가 해에 서서 외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공중에 나는 새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공중을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하나님의 큰 잔치에 와서 모든 고기들을 잡아먹으라는 것입니다. 한 천사는 다른 천사(계7:2. 10:1)이며 해는 여호와 하나님이요(시84:11) 예수님이시니(눅1:78)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천사는 공중을 나는 모든 영물들에게 외치기를 '모든 자(者)의 고기를 잡아 먹으라'고 합니다. 공중에 모든 새란 바벨론에 있던 가증한 새들이 아니라 사도 선지자들의 영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큰 잔치인 아마겟돈에 모여있는 자(者)들을 사도 선지자들의 밥으로 허락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때 하늘의 있는 새들의 피가 신원(伸寃)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잔치'는 계19:7-9에 언급된 믿는 자들이 참여할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같이 하나님께서 배설하는 잔치이나 하나님의 대적 자들을 멸하기 위한 잔치라는 것을 말합니다(계16:12-16). 의로운 자들에게는 즐거운 축제지만 대적 자들에게는 심판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계19: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1) 왕들의 고기와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 '모든 자'는 짐승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으로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대적(對敵)자들의 시체가 새의 먹이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가혹함과 엄격함을 말하며 그들의 죽음이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것이며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계19: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1)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이 백마를 탄 자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계19:6-16).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용을 말하며 땅의 임금들은 시2:2의 말씀처럼 바벨론의 지도자들을 말하니 거짓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대적(對敵)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짐승과 악의 무리들이 연합세력을 형성하여 백마를 탄 자를 대적한다는 말씀입니다. 짐승과 모든 대적(對敵)자들이 하늘의 군대와 전쟁을 일으키나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은 기술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계19:14-15에 언급된 하늘의 군대들을 향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다는 것을 말하니 한 쪽이 멸망하기까지 싸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계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1)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 짐승과 그 무리들이 패하여 하늘의 군대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던 자들입니다(계13:13-14, 16:13).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미혹된 자들에게 짐승의 표를 찍어서 자신들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공표하고(계13:16-17) 그들과 연합하여 하늘의 군대를 향하여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그들은 산 채로 유황불 못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계19:20, 20:2, 10).

2)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하늘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후에 유황불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유황은 당시 사해와 같은 곳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 유황 불붙는 못은 신약성경에서 종종 나타나는 '게헨나'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는데 힌놈의 골짜기에서 '물록'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인간을 불에 태우는 의식을 지낸 곳이었습니다(왕하16:3, 23:10, 렘7:31). '게헨나'는 악한 자들이 죽어서 가는 지옥을 가리켰으며(마5:22)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받는 장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에녹서27:1, 56:3, 90:26).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유황 불붙는 못에 던져졌다는 것은 그들이 완전하게 멸망을 당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계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을 당한 자들이 백마를 탄 자들을 대적하다가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은 계19:11-15의 반복으로 백마를 탄 자가 이(利)한 검이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으로 심판을 받는 짐승의 추종자들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멸망을 당하고 그들의 시체는 가증한 새들의 먹이가 됩니다.

백마 타고 오신 예수님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현상에서는 정의로운 자들이 불의한 자들에게 패배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정의를 포기하고 불의의 편에 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 속에서 용기 얻기를 원합니다.

 

어린양이 이제는 백마 탄 신적 용사로 등장합니다.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6:15)이 다가왔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철장으로 다스리는 아이(12:5)는 이제 심판하러 옵니다(19:15). 심판을 받은 자들은 공중의 새의 먹이가 됩니다. 13장의 두 짐승도 유황불 못에 던져지고, 어린양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바벨론 멸망 이후에 바벨론의 동맹 세력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제 용만 남았습니다(20:1-3).

 

백마를 탄 신적 용사(11-16)

성도는 십자가 군병으로 우리 앞에 나가 대적과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승리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요한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하늘의 군대들이 백마 탄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군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1-16)

17:1-19:10은 음녀 바벨론의 환상이고, 21:9-22:5은 신부 새 예루살렘의 환상입니다. 19:11-21:8은 음녀 바벨론에서 신부 새 예루살렘으로의 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다룹니다. 4:1에서는 하늘 문이 열리고 요한이 올라갑니다. 두루마리의 복음을 증언합니다. 19:11에서는 하늘 문이 열리고 신적 용사가 전쟁하러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듣고 보는 환상들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하늘 무대에서의 신적 활동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19:11 이후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을 볼 일도, 들을 일도 없습니다. 하늘이 역사의 시공간을 뚫고 땅에서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입니다.

요한은 계시록 앞 단락들에서 이 파루시아(19:11-21)를 예고하는 다섯 가지 지표들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1) 6:15의 인 심판을 받는 자들은 19:18에 등장합니다. 심판을 피한 자들이 이제는 새의 먹이가 됩니다. 6:17에 예고한 심판이 19:11-21에 기술됩니다. (2) 12:5에서 철장으로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어린아이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19:15에서 심판하기 위해 땅으로 돌아옵니다. (3) 14:20의 포도 추수에서 천사가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 틀에 넣습니다. 그런데 포도주들을 밟는 자의 정체는 남겨두었습니다. 19:15에서 그 정체가 밝혀집니다. 신적 용사인 그리스도입니다. (4) 16:14,16에서 악한 영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의 전투’를 위해 왕들을 모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계시록에서 여기와 19:15에서만 등장합니다. 왕들의 모음은 시편 2:2을 인유하는데 19:19에서 분명하게 반향 합니다. (5) 17:14에서 어린양의 타이틀은 짐승과 왕들의 정복자로서 19:16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추종자들은 19:14에서 하늘 군대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 다섯 가지 지표들은 파루시아 환상에서 수렴되어, 일종의 합주곡을 만들고 있습니다.

(1) 신적 용사의 등장(11-14)

성전(포)의 이미지가 전체 단락을 지배합니다. 바벨론을 배후에서 조종한 짐승들과 바벨론의 부역자들을 심판하러 옵니다. 구약과 쿰란 공동체와 열심당원들과 유대 백성이 기대했던 종말의 성전에 대한 기대를 반영합니다. 요한은 모든 기대를 넘어서서, 하늘에서 오는 신적 용사를 무대에 등장시킵니다. 스가랴 9장에서 나귀를 타고 행진하는 어린양은 이제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등장합니다. 로마제국의 역사적 라이벌이었던 동방의 파르티아 왕과 그의 기병대를 연상시킵니다.

신적 용사는 한편으로 대적을 심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의 정당성 입증을 위해 오십니다. 하늘 군대도 백마를 타고 흰 옷을 입고 뒤따릅니다. 이들이 입은 옷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하늘 성소에서 섬기던 하늘의 군대입니다. 흰색은 박해를 받은 성도들이 ‘옳다고 인정’을 받는 정당성 입증과 관련된 색입니다. 신적 용사가 벌이는 전투는 문자 그대로의 전투가 아닙니다. 12장에서 미가엘과 용이 벌인 하늘 법정의 전쟁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악의 세력들과 싸웁니다. 하나는 정의로 심판하는 심판자입니다(11-12). 그래서 이름이 ‘충신과 진실’(신실과 참)입니다. 언약에 신실한 분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대적을 심판하고 그 백성이 옳음을 입증한다는 약속을 지키러 옵니다. 그래서 거짓과는 반대되는 참이십니다. 다른 하나는 신실한 증인(11장)입니다. 피 뿌린 옷은 신실한 증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의 피 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백마를 탄 기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자기만 아는 이름, 비밀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문학적 기교로 독자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a) ‘충신과 진실’로 칭합니다. (b) 자기만이 아는 이름입니다. (a')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합니다. 다른 누구에게 일려진 이름은 이마와 옷에 드러나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름은 무엇입니까? 16절에서 드러납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입니다. 다리에 기록된 이름입니다. 용사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옷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드러나는 이름입니다. 자신만이 알도록 기록된 이름이지만, 요한은 세심한 독자가 눈여겨볼 수 있도록 문학적 장치를 해놓았습니다. 알지 못하는 이름은 여호와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름(nomen ineffabile, 필로, 모세의 생애 3:519, 529)입니다. 여호와는 대제사장의 이마에 있는 금으로 된 명찰에 쓰여 있는데, 유대인들은 읽을 때 발음을 하지 않기에 어떻게 부르는지 모릅니다.

(2) 신적 용사의 성전(15-16)

15절은 네 가지 구약 본문을 복합 인유합니다(이사야 49:2; 11:4; 시편 2:9; 이사야 63:2-6). 하나님 백성의 대적에 대한 심판을 말하는 본문들입니다. 입의 검(이사야 49:2; 11:4)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사야 11:4을 칠십인역은 ‘그 입의 호흡으로 악인들을 도살할 것이다’로 번역합니다. ‘검’의 은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합니다. 히브리서 4:12과 지혜서 18:15-16에서도 검증됩니다. 지혜서 본문은 하나님 말씀과 계명들을 동등하게 여기는데, 이집트인들을 응징하였던 ‘예리한 검’과 더불어 하늘 보좌로부터 튀어나옵니다. 두 본문에서 검의 은유는 심판의 실행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철장으로 다스리다’는 시편 2:9의 인유입니다. 시편 2:8-9, 12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불경한 왕들을 전복한다고 예언합니다. 이들 왕들은 주와 메시아를 대적하는 자세를 취하고 공모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63:2-6은 포도주 틀을 밟는 자의 정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벨론의 부역자들을 심판합니다. 포도주 틀에 있는 포도를 짓밟듯이 철저한 심판입니다.

 

짐승에 대한 심판(17-18)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악이 강해 보이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끝까지 인내하며 영적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악한 세력의 미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이 속히 오셔서 짐승과 추종자들에게 예비하신 궁극적인 심팜을 이루어 주시길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17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17-18)

심판과 구원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음녀 바벨론이 주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부역했던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천사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그 군대에 다가올 멸망을 에스겔 39:4, 17-20에 선포된 곡과 마곡의 패망에 사용된 이미지를 사용하여 선언합니다. 포식성 새들의 초대는 다가올 패망의 확실성을 비유적으로 강조합니다. 왜 이 시점에서 에스겔을 인유하고 있습니까? 악의 세력의 말세의 패배를 언급하고 있는 다른 구약 예언들(다니엘 2, 7-12장; 스가랴 14장)에서도 도출할 수 있었겠지만 에스겔 39장의 그림이 포함된 이유는 이 단락의 주요 요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곡과 마곡을 패망시키신다, 이스라엘을 압제한 자들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그의 거룩한 이름을 알게 만드십니다. 신적 이름의 계시가 주목적입니다. 그리스도도 심판과 구원을 통해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름을 열방에 알릴 것입니다.

 

두 짐승의 심판(19-21)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두렵지만,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심판이 두려움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과 함께 승리의 영광을 얻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실하시고 참되시며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를 원합니다.

19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1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19-21)

이 단락은 16:14와 20:8의 복사판입니다. 요한계시록 19:19은 16:14과 20:8에서와 같이 최후 전쟁에 대한 동일한 전주곡을 언급한다. 16:14에서 귀신의 영들이 온 땅에 거주하는 왕들을 불러 모아서 함께 전쟁을 일으키려고 미혹합니다. 20:7-8에서 사탄은 열방, 즉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그들을 함께 불러 모아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나올 것입니다. 왕들과 그들의 군대는 자신의 힘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귀신의 영향력으로 모여듭니다. 여기서 전투는 그리스도와 그의 하늘 군대를 대항하여 수행됩니다. 시편 2:2의 인유입니다. 전투 결과는 두 짐승의 포획입니다. 13장에서 등장한 두 짐승으로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입니다. 유황불 못에 던져져서 그리스도의 칼로 처형되고, 그 시신은 공중의 새들이 먹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중인 이야기의 패러디입니다. 두 중인과 같은 처벌을 받는데, 살아나지 않고 비참하게 죽어 장사도 치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원수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은 모든 성도가 소망하는 바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멸망,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예언은 현실에서 악의 세력에 핍박 받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절대로 절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승리는 내 것일세(롬 7:7-25)

우리나라 군대에서 소대장이 부하들을 모아놓고 정신교육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국군이 북한군의 전력에 비해서 공군력은 확실히 우세하고 해군력은 비슷하다. 문제는 육군이다. 육군의 전력이 북한군보다 열세하다. 과연 너희들은 북한군과 일대일로 싸울 때 한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가?”

한 용감한 병사가 손을 번쩍 들면서 “저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을 책임지겠습니다.” 그랬더니 옆의 병사가 덩달아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그럼 이 친구가 내 몫까지 맡았으니 집에 가겠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려서 디즈니 만화 영화를 참 좋아했습니다. 주일 아침 8에 방영을 했습니다. 즐거운 주일 아침이 디즈니 만화 영화와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때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습니다.

도널드 덕이 선택의 기로에서 선한 길과 나쁜 길의 갈등에 서 있습니다. 날개 달린 천사 도널드가 나타나서 도널드를 좋은 길로 가라고 격려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시커먼 옷을 입고 삼지창을 든 마귀 도널드가 나타나서 편한 길을 선택하라고 유혹합니다. 대개 도널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편한 길을 선택했다가 큰 코를 다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1. 내면의 전쟁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15절로 23절의 말씀을 보면 믿는 자의 내면에서도 선과 악을 향한 갈등이 있다고 말합니다. 내 마음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데 내 육체는 악을 행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하는데 내 겉 사람은 죄의 법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내 마음, 속사람은 같은 의미입니다. 내 육신, 지체도 같은 의미입니다. 두 세력이 서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진정한 내 모습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속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롬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노라
(롬7:25)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

이것이 진정한 자아입니다. 변화된 내 모습입니다. 거듭난 내 영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영혼은 변화되었으나 여전히 내 육신은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이런 선과 악의 내면적인 갈등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양심이 있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와의 싸움을 하게 됩니다. 높은 도덕률과 윤리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고 양심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나쁜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만약에 차이점이 없다면 심각해집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똑 같이 선과 악의 내면적인 갈등이 있는데 믿는 자가 고민하다가 그만 악에게 끌려 다닌다면 굳이 믿을 필요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다면 내면적인 갈등이 있을 때 반드시 선을 선택하여 승리하는 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이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승리가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이요. 믿는 자는 승리가 이미 보장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속사람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점이 다른 점입니다.


2. 승리가 보장된 전쟁

믿지 않는 자들도 때로는 선과 악의 기로에서 선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선을 많이 행한다 할지라도 죄악을 행한 것에 대한 죄 값을 치를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또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죄악과 쾌락의 노예가 되어서 인생을 허비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승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내면적인 갈등이 있다 할지라도 이미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이겨놓은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고, 우리는 그 은혜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이겼다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우리는 연합군의 승리 때문에 해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 때문에 해방되었고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입니다.

1)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시103:12)

처음 믿을 때 죄 사함 받은 것은 영원한 죄 사함이요 완전한 죄 사함인 것입니다. 내 생각에 회개를 철저히 했다고 생각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받으시고 완전하고도 영원한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2)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딤전4:5)

예수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십자가로 이기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유혹이 우리를 붙잡아두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한 번 죄악에 빠지면 브레이크 없이 점점 더 타락하였는데, 이제는 가끔씩 이전 버릇이 나와도 머물러 있지 않고 얼른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죄의 영향력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죄의 존재로부터 해방(요일3:2,3)

이미 구원 받았지만 아직 우리 육체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죄를 많이 짓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 육체가 부활하게 되면 육체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처럼 죄의 본성이 없는 거룩한 육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가 보장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자가 새끼들에게 사냥법을 훈련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미 사자가 팔팔한 사냥감을 한 마리 잡아서 앞발로 한 번 휘둘러서 제대로 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물을 새끼 사자들 앞에 풀어놓았습니다. 새끼 사자들은 만만하게 보고 달려들지만 그 동물은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칩니다. 그러면 어미 사자가 어느새 그 쪽으로 달려가서 길을 막고 한 때 딱 때립니다. 비틀거리는 사냥감에게 새끼 사자들이 달려들어 마지막 숨을 끊어놓습니다. 새끼 사자들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적인 전쟁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이미 예수님에게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앞장세우고 이빨 빠진 마귀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면 죄와 마귀는 우리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3. 승리를 위한 세 가지 깨달음

본문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세 가지를 깨달음이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롬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을 모를 때에는 탐나는 것이 있으면 그냥 슬쩍했습니다. 조금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그것이 나를 제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것이 도둑질이요 죄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았습니다. 그 죄를 씻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도 알았습니다.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심각하게 된 것입니다.

(롬7:13)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게 하려 함이니라

이처럼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 죄를 지었을 때는 심각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우리의 육체는 얼마나 부패하고 죄악이 가득한가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여기까지입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우리가 얼마나 죄인임을 깨닫게 하지만 율법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고 죄책감이 있다면 그것은 율법이 작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궁극적인 승리에 도달합니다.


2) 나의 무능을 깨닫는 것입니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율법을 통하여 죄인임을 깨달았으니 그 때부터 사람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죄를 안 짓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모순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궁극적인 승리로 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 하나하나가 우리를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3)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율법을 많이 알았던 자입니다. 그 만큼 그는 열심을 가지고 주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자신은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패한 내 육체를 이길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처절한 외침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알고 죄인임을 깨달았지만 내 힘으로는 도저히 선을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승리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십자가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도우시는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앉아도 예수, 일어나도 예수, 앞으로 가도 예수, 옆으로 가도 예수, 잠자리에 누워서도 예수. 항상 예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오직 예수로 결론이 나지 않으면 내 힘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갑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 이것은 제가 지고 가야하는 삶의 무게입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오직 예수, 주님만 바라보고 살게 하소서. 주님만 바라볼 때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루하루 생활 가운데 실현됩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고 순간순간 기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와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너무나 부족합니다. 날마다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시계를 자꾸 보는데 시계를 보는 것처럼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어제 새벽 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에게 다가가서 안수를 하는데 이 분이 진동을 하면서 방언으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방언을 하셨느냐고 물었더니 작년에 집에서 반신욕을 하면서 기도하는데 진동이 오더니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할 때마다 진동이 오고 이상한 소리가 나오곤 해서 이것이 방언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반신욕을 하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삶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운전을 하면서 기도하다가 방언의 은사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전도자 디엘 무디 목사님은 기도시간에는 성령충만을 받지 못했는데 길을 가면서 기도하다가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850년 1월 6일 주일이었습니다. 영국의 콜체스터시는 심한 눈보라로 도시 전체의 교통이 마비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도시에는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15살 짜리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주일이었지만 심한 눈보라에 교통이 마비되었기에, 소년은 자기 교회에 가지 못하고 집 가까이에 있는 작은 교회에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안에 들어가 보니 그 교회 목사님도 눈보라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어느 평신도가 강단에서 말씀을 봉독하고 있었습니다. 몇 명되지 않는 성도들이었지만 강단에 선 성도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45:22의 말씀을 읽었습니다."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는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평신도였기에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설교를 해본 경험도 많지 않기에 떠듬떠듬했습니다. 그는 그저 본문 말씀만 자꾸 반복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름 없는 성도의 반복적인 외침에 그 소년은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보았습니다."나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가?"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설교자는 그 소년을 손가락으로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젊은이여, 당신은 몹시도 피곤해 보입니다. 젊은이여, 처절하게 살다가 처절하게 죽지 않기를 바랍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그때 그 한 마디의 외침은 그 소년의 잠자던 속사람을 완전히 깨워주었습니다. 그는 그때의 일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일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위대한 설교가 스펄젼이었습니다.
스펄젼은 뒤에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러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때의 그 말이 계기가 되어 나의 속사람은 비로소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를 덮고 있던 모든 구름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나를 뒤덮고 있던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며 나는 내 생애에 처음으로 의의 태양을 보았다."
스펄젼은 이날 비로소 죄의 권능에서 해방되어 거듭나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곤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십시오. 운전을 하면서 길을 가면서 기도하십시오. 방언의 은사를 받으신 분은 방언으로 기도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주님은 우리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줄로 믿습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믿는 자의 받을 성령   (요한복음 7:37~39)


본문 37절에 보면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초청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목마르다’는 말은 인생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38절)고 하신 말씀은 예수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39절)을 의미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인간은 누구나 고통과 고난 속에 태어났지만 예수를 믿는 자는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그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강 같은 기쁨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은

첫째, 육체의 고통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욥 33:19) 인간은 이런 저런 많은 질병으로 인하여 육체의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할 때는 육체의 고통이 물러가고 병도 낫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의 원동력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도도 하게 되고, 찬송도 부르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인간의 의술로 고치지 못하는 병도 고침 받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많은 병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나았습니다.
성령은 육체의 고통을 치유해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육체에 희망을 줍니다(행 2:26). 그리고 영광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벧전 4:14). 또한 우리 몸을 성령의 전이 되게 해주십니다. 고린도전서 6:19,20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둘째, 심적인 고통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육체의 고통도 힘들지만 심적인 고통은 더 힘듭니다. 육체의 상처는 약으로 치유될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잘 낫지 않습니다. 욥기 7:11에 보면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고 소망과 위로와 기쁨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마음의 평강을 유지하려고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4:18에 보면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악하게 사는 사람은 그 마음에까지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육체의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은 마음의 고통을 주는 사람입니다.
에스겔 36:26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은 우리 속의 굳은 마음을 다 제거해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 마음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셋째, 영적인 고통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인간의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영적인 고통입니다. 영적인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때 오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성령의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욥기 7:11에 보면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면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감사한 말을 하게 되지만, 영혼의 고통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원망한다는 것은 벌써 마음에 평안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누가복음 16:23,24에 보면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영혼의 고통은 바로 지옥의 고통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위에 영적인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찾아 주께로 인도하여 치유 받게 해주어야 합니다.
시편 118:5에 보면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혹 영적인 고통이 있습니까?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성령께서 영적인 고통을 치유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우리 인생의 모든 연약함을 다 책임져 주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할 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승리할 수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실력이나 경험을 앞세우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성령께서 모든 일에 승리하게 해주시고 돌봐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섯째, 항상 소망이 넘치도록 축복해주십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소망이 넘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달려가도 걸어가도 곤비함이 없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는 것도 성령은 되게 하십니다(슥 4:6). 성령의 능력으로 항상 소망이 넘치는 축복이 있을 때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충만히 받아 육체의 고통과 심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을 치유 받고, 연약함에서 벗어나 항상 샘솟는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피종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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