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회복을 위해 마21:12-17
신약 본문의 배경을 보면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는 국내외에서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적어도 3백만 명 정도가 모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나오는데, 범죄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매체로서 꼭 제물을 들고 나옵니다.
이렇게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온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드리는 소와 양의 숫자가 30만 내지 40만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가까이서 오는 사람들은 제물을 끌고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먼 지역이나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소나 양을 끌고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번거로움에 편리를 봐주기 위해서 제물을 이방인의 뜰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할 수 있도록 배려 하셨는데, 소나 양 대신 값싼 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먼저 성전에 들리셨는데, 이방인의 뜰에서 제물을 팔고, 환전하는 모습을 보시고 진노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신 이유가 무엇인지, 성전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전 회복을 위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성전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족장 시대에는 족장들이 중심이 되어 가정에서 가족과 더불어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 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예배)를 드릴 때 피의 희생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임재가 있었습니다. 율법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에서 제단을 쌓았고, 포로시대 이후에는 성전과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신약 시대 이후 교회로 불리어지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신 뜻이 무엇 인지를 구약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포로기의 예언자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오는 물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본문 겔47:1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했습니다. 물은 생명이요, 풍요의 상징입니다. 물가나 시냇가에 심긴 나무, 물댄 동산, 샘 곁에 심긴 무성한 가지 다 물과 관련된 축복입니다.
에덴동산이 풍요한 동산인 것은 그곳에서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라는 네 개의 큰 강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도 그렇습니다. 이곳이 낙원인 이유는 어린 양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처음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스며 나올 정도로 작습니다. 그러나 이 물이 동쪽을 향하여 흘러나가는데 갈수록 불어나기 시작하여 후에는 헤엄쳐서 건너야 할 정도로 충만하여져서 엄청난 강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통하여 세상을 살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강물이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복음, 성령의 은혜가 죽은 자를 살리고, 질병을 치유로, 어두움을 빛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원망을 감사로, 두려움을 평안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성전에서 흘러내린 도도한 강물이 흘러가자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본문 6-7절을 보면 이 강물이 동방을 향해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곳은 바로 사막이요 광야입니다. 이 유대 광야 한 가운데로 물길이 흘러가자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울창한 숲을 이룹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인생이 이렇습니다. 사막처럼 메마른 인생이 울창한 숲과 같은 인생이 됩니다. 고목나무처럼 마른 인생이 물오른 연한 나무처럼 싱싱한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이렇게 바꾸어 놓습니다.
그 물에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살게 되고, 고기가 많으니까 어부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고깃배가 많아지고, 그물을 쳤는데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까지 빽빽이 그물을 칩니다. 바다 주변에는 시들지 않고, 사시사철, 다달이 온갖 열매 맺는 과일로 풍성합니다. 과일 잎사귀는 약초가 됩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나무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 세상을 살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을 통해 이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신 뜻을 알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의로운 백성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2.예수께서 성전을 보시고 진노하신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 본문 마21:12-13 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셔서 5일간의 사역들을 마치시고 골고다 길로 가시는데 먼저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 안에서 매매하고 장사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또 돈 바꾸는 환전 상인들과 제물용으로 쓰이는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는 4개의 뜰이 있었습니다. 맨 위의 뜰은 성전 건물 즉 성소, 지성소가 있는 뜰로서 이것을 제사장의 뜰이라 했고, 이보다 한층 아래 뜰은 유대인 남자들의 뜰로서 이 뜰에 들어가려면 장정 20명이 여닫는 청동제 문인 “니가놀” 문을 통해 들어가는 뜰입니다. 그 다음 한층 아래 뜰이 유대인 여자들의 뜰인데 미문으로 출입했습니다. 제일 낮고 넓은 뜰이 이방인 뜰인데 여기에는 누구나 들어 갈수가 있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바로 이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여기서 소, 양, 비둘기 등의 제물로 쓰이는 짐승과 성전 세를 내기 위한 환전 행위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매매 행위는 지방이나 외국 이방지역에서 오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문제는 이들의 행위가 폭리를 취한데 있었습니다. 성전 밖에서 사는 값의 10배 이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비싼 값을 주고 여기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밖에서 사온 제물은 검사관의 검사에 거의 퇴짜를 맡고 통과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성전세도 반 세겔은 은화로서 원래 유월절 전까지 지방 납세 소에 내야하는 것인데 그때 내지 못한 사람을 위해 마련되었는데, 당시 환전 수수료가 노동자의 반나절 노임에 해당되는 폭리를 취해 여기에서 얻어지는 이익의 대부분은 성전지기와 대제사장에 돌아갔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성전에서의 매매 행위를 “강도의 굴혈”이라고 분개하신 것이며 그 하수인 장사꾼들을 내어 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직으로 주신 직분이 봉사와 섬김의 임무, 말씀의 순종의 임무를 떠나 이권으로 전락하여 타락할 때 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직이 타락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될 수 없고, 은혜의 역사, 생명 살리는 역사가 일어 날 수 없게 되어 성전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진노 하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가 된 것도 성직의 타락, 백성들의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성직자가 타락하게 되면 성전은 성전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으로 회개가 일어나야 성전이 살아나고, 말씀이 힘을 얻게 되고, 은혜가 흘러가게 되어 회개하고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당시 성직자들은 회개의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일 궁리를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아셨기에 주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탄식 하시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으리라고 예루살렘 성전이 철저히 무너지게 될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 예고하신 대로 로마의 침략을 받아 성전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회개도 기회가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영원한 심판과 멸망이 따라오게 됩니다. 책망은 사랑이요, 기회입니다.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고침도 없습니다. 얼마 전 고급차를 타고 가던 재벌 그룹 부회장의 아들일행이 소형차를 타고 가던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폭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뇌수술을 받아야할 정도로 중태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찰에 붙잡힌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소형차를 타는 주제에 시비를 걸어서 그랬다”느니, “돈을 주면 될 것 아니냐?”, “재수가 없어 그랬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뉘우치는 기색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보고 황금만능주의와 사랑의 결핍증이 빚어낸 우발적인 충동사건이라고 평했습니다. 그들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돈은 줄줄 알았지만 막상 주어야할 사랑이나 초달은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망을 복의 기회로 바꾸는 슬기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성도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와 목회자들과 중직자들을 위해, 자신을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갈수록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져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 세속의 물결이 교회에 흘러들어와 세속화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을 염려하고 회개해야 할 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성전만 성전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성전입니다. 고전6:19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에 있는 내 마음 성전에서도 매매하는 자들과 같은 악이 벌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만 높이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셔야 하는데, 내 마음에 탐욕이, 권세가, 명예가, 세상 연락이 주님을 대신하여 내 마음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회개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로잡지 못하면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필할 길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가꾸어야 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의 모습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보면, 먼저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장사치들을 내어 쫓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13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성전이 바로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통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여 살 수 있습니다. 성도가 기도할 수 있는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어느 곳 보다도 좋은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이방 땅에 있을 때에도 경건한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쪽의 창문을 열고 그 곳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다음에 고침 받는 곳으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케 하신 후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고, 병든 자가 고침 받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 전에 나와 예배를 통해 병든 육신이 고침 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저는 자들과 소경들, 손 마른 자, 고창병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등 각색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육신의 병뿐 아니라, 마음에 병든 자들, 영혼에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곳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본문 15-16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하셨습니다. 성전은 기도하고 치유 받는 곳뿐만이 아니라 찬송과 감사로 영광 돌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보이는 성전과 내 마음 성전을 가꾸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이 되게 합시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전 회복을 위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전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보시고 진노하신 까닭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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