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차원 마26:26-29
인간은 행복하게 살기위해 절대 필요한 것이 감사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 향한 인간의 신앙적인 응답이며 인간사회에서 서로들 이해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전 세계 문화국민의 공통적인 인사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합니다. (Thank you!)라는 말입니다. 감사가 많은 사람은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가 있습니다.
성숙한 인격은 자기부족을 알고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들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성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출석하게 된 후 자기에게서 크게 변화된 모습을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전에는 교만한 내가 이제까지의 부족함과 죄인 됨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생활 속에 감사할 것이 많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감사할 것이 많아졌다는 것은 삶이 풍성해진 것이요. 행복해 졌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행복과 불행으로 결정짓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외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빈부나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행복하고 어떤 사람들이 불행하던가요?
고래 등 같은 수억 원짜리 저택에 살고 값비싼 자가용을 두고 호의호식하면 행복한가요? 그러나 이런 환경 속에서도 절망하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행복도 마음에서 오고 인간의 불행도 마음에서 옵니다.
마음속에 불평과 원망을 품고 사는 생활 을 하는 자는 불행한 자요 아마 지옥에 사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감사하는 자는 삶이 행복해 집니다. 즐겁습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전에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에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하였으나 자기더러 한 가지 말을 더하라고 말한다면 서슴지 않고 믿음, 소망, 사랑, 감사는 항상 있을 것인데 하며 감사를 더하겠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참 신앙이란 감사의 열매로 압니다.
샤머니즘이란 간절한 기원은 있으나 감사가 없고, 축복은 바라나 희생과 고난을 회피하는 신앙형태입니다. 감사는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습니다. 믿음 가운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결국 신앙의 차원입니다. 인격의 척도입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조건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는 감사요, 받았기 때문에 하는 감사합니다. 농사를 짓고 추수하면서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를 이유 있는 감사라고 합니다. “ 때문에” 감사합니다.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에, 건강을 회복하고 받은바 은혜 때문에 하는 감사인 것입니다.
이것 역시 귀중한 감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감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회는 당연한 감사 조 차 안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녀 된 자가 어버이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것을 잊어버릴 때 인간다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의 받은바 은혜가 감사할 생각으로 그 마음에 울려오지 않는다면 모든 축복은 참 축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부요나 재산일지라도 이는 진정한 축복이 될 수 없으며 자기의 소유가 아닙니다.
현재 있는 물질적인 재산에 감사할 때 비로소 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나를 낳아 준 부모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순간 그 부모가 나의 부모가 됩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감사하는 순간에 비로소 그 때 내 남편 내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때 비로소 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감사할 것이 많아야 하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자는 부요한 자요, 축복받은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하늘의 보화를 주십니다.
어떤 성도가 열심히 기도하여도 자기에게 특별한 응답이 없어서 실망하던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천사의 안내로 천국의 보화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한곳에 가니 텅 비어 있더랍니다. 왜 이렇게 비어있느냐고 물으니 눈물을 흘리며 간구한 자들이 응답으로 받아갔기 때문에 창고가 비어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갔더니 많은 보화가 가득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감사하는 자에게 주려고 예비한 것인데 감사하는 자가 적어 그대로 쌓여 있노라고 하였습니다. 꿈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감사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심령 속에 하늘의 은혜가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가정 속에도 보화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보화가 쌓이기를 원하십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 무엇 때문에 하는 감사는 종종 위험이 따릅니다. 만약에 그 무엇 무엇이 주어지지 아니할 때에는 결국 원망과 불평으로 바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어진 것 때문에 감사하는 일은 당연한 우리의 의무이지만 초보적인 감사의 단계입니다.
둘째: 역설적인 감사입니다. 조건 없는 감사입니다.
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렸음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감사입니다. 특별한 감사입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사업이 잘되고 병이 고쳐지고 자녀가 일류대학에 입학이 되고, 어떤 사람은 무슨 까닭이 있어서 하나님을 잘 믿고, 감사하고, 까닭이 없으면 신앙도 버리고 감사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심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까닭 없이 감사하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할 때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나이까? 하였습니다.
동방의 의인으로 가산이 넉넉하고 훌륭한 자녀 10남매를 두고 세상 적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스바 사람 갈대아 사람에게 다 빼앗기고 10남매 자녀들은 맏형 집에서 즐기고 있을 때 태풍이 몰아치며 집이 무너져 압사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욥의 마음이 얼마나 곤고합니까? 그러나 욥은 감사했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당하면서 감사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외로운 욥이 엄청난 시련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시련을 감사로 받아 넘겼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 왓슨 즉 또한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찬송을 받으실지니 이다.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기도문에 이런 것이 있답니다. “하나님이여 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뜻이 있는 것으로 믿고 현실을 묵묵히 참고 감사로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옵니다.”
빌립보 감방에 갇혀 있는 바울과 실라를 생각해 봅시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았습니다. 온 몽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은 착고에 든든히 채워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고달프고 억울한 인생의 밤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칠흑 같은 절망의 밤에 눈물로 감사하며 심혼의 깊은 노래를 부르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왜 이토록 불만과 불평이 많을까요? 바울과 실라에 비하면 짜증낼만한 일이 전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토굴 대신 푹신한 침대위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았던 가난한 생활에 비하면 너무도 부요하게 살면서도 왜 자족하는 마음이 없을까요?
우리의 발이 착고에 매여 있지 않고 멋진 구두를 신고 자유롭게 발걸음을 이 땅에 거닐면서도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왜 감사가 적을 까요?
우리는 조금만 불편해도 짜증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을 봅시다. 서로 모이면 터져 나오는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이 감사가 없는 백성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조용히 생각합시다. 감사를 잊지 맙시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대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감사의 차원을 높이십시다.
셋째: 희생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준 감사입니다. 최후 만찬에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며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셨습니다.
또 잔을 가지 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곤 언약의 피니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감사야 말로 자기를 희생시켜 함께 은혜를 나누는 공동의 감사였습니다. 이러한 감사는 참으로 차원 높은 감사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감사는 무엇 무엇이 그에게 주어진 감사도 아니고 죽음을 앞에 둔 고난 중에도 불구하고 드린 감사도 아니요, 그가 드린 감사의 떡은 자기의 몸을 제물로 주기 위한 감사였습니다. 남을 위해 죽을 몸의 상징인 떡을 가지시고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하셨습니다. 그것은 죄 사함을 얻어 기뻐하고 감사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구원을 위하여 흘리시는 언약의 피였습니다. 남을 위해 흘릴 피를 가지시고 감사하셨다는 말입니다.
제3차원의 감사 다른 사람을 위해 내 귀중한 것을 나누어 주면서 그것을 함께 감사할 수 있다는 비밀을 말합니다. 여기에 참으로 그리스도의 감사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받음으로 감사는 평범한 복입니다. 주고 감사하는 것이 더 큰 복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남는 복입니다.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남을 위로하고 남에게 대접하면서 감사를 서로 나눕시다. 이런 감사는 주면서 감사하기 때문에 아가페적인 사랑의 감사입니다.
추수감사절을 영어로 The Thanks Giving Day.라고 부릅니다.
감사하면서 준다는 뜻입니다. 드리므로 감사하고 감사하므로 주고 나누는 믿음을 여기에 진정한 사랑의 감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떡을 들고 이 잔을 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는데 무엇을 기념하라는 것일까요? 기념해서 무엇을 얻고자 함일까요? 오늘 예수님의 진심을 헤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위하여 자기 몸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 떡과 이 잔속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감사가 헌신으로 나타나는 것을 행동화하여야 합니다. 참다운 무언가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우러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죄인 된 자기가 예수님으로부터 사유하심을 받는 것에 대한 감사가 드디어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값진 옥합의 향유를 부었다고 합니다. 이 떡을 들고 이 잔을 들 때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나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헌신하려는 감사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결국 참된 감사는 은혜에 대해 내 몸을 바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감사란 곧 헌신에서 기쁨을 찾아야 참 감사인 것입니다.
이 몸을 바치며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 속에서만 감사가 지닌 신비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감사에서 나온 헌신만이 기쁨을 얻고, 보람을 얻고, 행복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에 미치는 순간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예수님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은 감사로서 넘쳐야 합니다. 이제 이를 위하여 옥합을 깨뜨리고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어야 말로 행복의 절정이며 삶의 극치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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