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을 가진 나그네/벧전 1:1-9
알래스카에서 발생하였던 지진으로 한 마을에 새로운 신앙적인 기운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 마을에는 올 세인트 교회와 성 요셉 교회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교회는 이상한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교회를 더 호화롭게 장식하고 파이프 오르간 같은 기물들을 더 고급품으로 들여놓느냐 하는 경쟁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두 교회는 모두 경제적으로 넉넉한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구제나 선교를 위한 프로그램은 참으로 빈약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수난일이었는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그렇게 평온하던 동네는 마치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거의 다 파괴되었고 아름답게 꾸며졌던 두 교회 역시 재가 되다시피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서 부활절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 두 교회 성도들은 비교적 덜 파손된 성 요셉 교회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잿더미 위에서 드린 부활절 연합예배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눈물의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아름답던 교회당이 흉측하게 파괴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잘못된 허영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날 그 도시의 시청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 쪽은 "필요한 물품을 적어 넣으시오"라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쪽은 "재해민에게 나눠줄 물품이 있습니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두 교회를 합친 150여명이 한 명도 필요한 물건을 요청하지 않고 모두가 한 가지씩이라도 나누어 줄 수 있는 물건을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그들은 지진 때문에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져야 할 모습이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화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건만 어찌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함없이 살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무서운 박해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결코 신앙을 버리지 말고 굳세게 신앙을 지켜 영광스러운 면류관의 주인공들이 되라고 권면하는 서신의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신앙적인 박해는 없지만 세계를 풍미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물결 속에서 생존을 향한 처절한 구조조정의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이 민족에게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고난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흩어진 나그네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떠나 이방 땅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본토에는 약 490만 명밖에 살고 있지 않은데 타국에는 1천만 명이 넘는 이들이 살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타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는 이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 , Diaspora)라고 합니다.
디아스포라는 아주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 남북 분열왕국 시대에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하므로(B.C. 722년) 그들의 포로로 끌려가면서부터 시작하여 남쪽 유다 왕국 역시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B.C. 586년) 포로로 끌려가 디아스포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후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애굽, 소아시아, 아르메니아, 그리스, 이탈리아, 이란, 그리고 로마제국의 여러 곳으로 이주를 해야만 했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제와 톨레미 1세는 유대인 분산정책에 의해서 유대인을 애굽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 뒤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는 약 2,000 세대의 유대인을 소아시아로 강제로 대이동시켰고, 마지막으로 A.D.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로마의 폼페이 장군은 모든 유대인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쫓아내 로마제국 전지역으로 해산시켰습니다. 그 뒤 1945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디아스포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은 수세기에 걸쳐 흩어지고 흩어지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말해주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참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언약을 어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디아스포라가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았기 때문에 징계를 받게 된 것이지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혹은 하나님이 신의가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런 고통에 처하도록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렇게 수천 년의 디아스포라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멸절되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지키심과 인도하심이 없이는 오늘의 이스라엘이 재건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많은 영적인 교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영원한 하늘나라, 곧 우리의 본향에서 떠나서 이 죄악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구성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롭고 고독한 땅, 처절한 실패의 자리, 부패하고 타락한 이 세상에 흩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가야 할 고향, 건설해야 할 조국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오라 하시는 저 천국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우리의 삶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목적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로마 곳곳으로 흩으신 것은 물론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가운데서도 역사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계를 받는 가운데서도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로 뻗어나갈 길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선교기지는 로마 각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보내진 복음의 전진기지들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 것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행복을 우리의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부귀영화는 들의 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인생은 그날의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 103:15-16)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주님이 부르시는 날 우리의 나그네길을 중단하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2. 우리는 거듭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박해로 고난당하고 있는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3절) 하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무서운 박해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거듭났고 시들지 않는 소망 가운데 있다고 위로하였습니다. 실상 우리 인간은 조상 아담의 범죄 이후 영원한 형벌인 심판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1서 5:11,12).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생명이 있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안으로는 유대인들이 율법파괴자라고 핍박하고 밖으로는 로마 황제의 무서운 해를 받아 내우외환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떠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키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영생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구원의 확신을 얻은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떤 환난과 핍박과 곤고나 칼이나 기근이나 적신이 찾아와도 신앙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 거듭남의 신앙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시련 속에서도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여러 가지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때로는 핍박도 있을 수 있고 사단의 유혹도 있습니다. 이렇게 핍박과 유혹이 닥칠 때 거듭남의 확신이 없는 이들은 그 모든 것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신앙이 확실한 사람은 그 어떤 환난이나 시험을 능히 이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핍박과 유혹을 통하여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무서운 박해 속에서 자라난 종교입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선교사들이나 교회지도자들의 순교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악명 높은 네로 황제가 로마 대화재(A.D. 64년) 사건을 빌미로 기독교 대박해를 시작한 이후 기독교는 로마제국에 의해 처절한 박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네로 당시 로마시는 목재 건물로 되어 있었고 길은 매우 좁았기 때문에 대 화재의 위험성이 언제나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에 화재가 발생하자 로마의 전 도시가 삽시간에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고 3일이 지나서야 겨우 불길이 잡히게 되었습니다.
로마시민이라면 이 화재가 네로의 소행임을 모두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방화한 이유로써 대 건축가로서 로마시를 재건해 보려는 네로의 야망을 지적합니다. 또한 방화의 주범으로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몰아 기독교를 발본색인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일석이조의 속셈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가 방화자로 기독교인들을 몰게 되므로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그 사회에서 발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의 박해로 기독교인들은 몸이 찢기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처절한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굶주린 사자가 으르렁대는 원형극장에 몰아넣어 처참하게 물어 뜯어먹도록 하였고, 또 양의 가죽을 기독교인들에게 입혀 사냥개로 물어뜯어 먹게 하였으며, 온 몸에 역청을 바르고서는 불을 붙여 인간 횃불을 만들어 죽였고,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일부만 당하는 박해가 아니라 누구든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시인하기만 하면 그렇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 같은 토굴 속에서 집단으로 숨죽이며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런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순교를 기꺼이 맞이하게 되었던 것은 영광스러운 하늘나라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생명을 바치는 것은 고사하고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바치는 것조차 꺼리는 정도의 얕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상고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을 반성할 여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저 영원한 "산 소망"이 있기에 그 어떤 것도 참으면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희구하는 물질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쇠하지 않는 생명력이 넘치는 소망을 말합니다. 이 소망은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죽은 자는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는 새로운 몸으로 변화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의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확실한 구원에 이른 자들로서 우리 앞에 있는 무서운 역경의 파도가 몰려와도 실망하고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영원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제적 괴로움 때문에 주님을 떠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담대하게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승리가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극복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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