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베드로전서

은혜로운 구원 벧전 1 : 10 - 13

nam씨 2021. 9. 25. 20:00

은혜로운 구원  벧전 1 : 10 - 13

 

우리는 우리들의 문제에 마음을 두고 살다가 보니 정작 마음을 두고 연구하며 살펴야 할 것에 대하여서는 마음을 두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뒤쳐지지 않고 자리를 얻어서 굶지 않고 살까? 어떻게 하면 미래가 보장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유의 생각이 우리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하고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지만 우리가 관심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관심으로 뇌리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니 선지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들은 물론 구약의 선지자들을 말합니다만 그들은 이 구원에 대하여서는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조사하고 부지런히 찾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의 태도를 연상하게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라고 했습니다. 구원에 대하여 이와 같이 조사하고 연구하는 마음은 믿는 자들이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자세와 같이 생각됩니다. 이것이 소중하기 때문에 여기에 마음을 두고 생각하고 살피면서 연구하는 자세는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자세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자에게 이것은 어떻게 안전을 확보하며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관심보다 더 중요한 관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구원에 대하여 베드로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지를 봅시다. 먼저 '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9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을 말합니다. 영혼의 구원이란 흔히 말하듯이 영혼만의 구원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과 혼과 육신으로 구분하여 영혼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온 인간 전체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 아래 있는 우리는 안전과 평안을 구하며 먹어야 살기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국으로 얻는 구원은 이러한 모든 인간적인 욕구에서 벗어나서 육신의 안전과 평안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만을 구하며 육신의 먹을 것보다는 하나님으로 배불러하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원되어 성령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영혼의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째로 이 구원의 특징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10절에서 '이 구원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면서 '너희에게 임할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그저 주시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엄청나게 수고하셨고 노력하신 결과로 가져오게 된 놀라운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3절에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보잘것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허리를 동이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서라고 바라고 기다릴 가치가 있고도 남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 그저 주어졌기 때문에 그 특징을 한 마디로 한다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사람들은 이런 구원의 성격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기다리고 바라는 것도 없고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시면서 이루신 놀라운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도 어느 정도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듯이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 세상 사는 것에 너무나 치심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이루고 있는 것이 구원 못지 않게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옛날에 못먹고 못살 때는 주님 오실 것을 바라고 노래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은 그런 현상이 전혀 없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상태가 다른 것은 없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적인 삶 속에 빠져서 살면서 그것을 천국에 못지 않게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은혜를 은혜로 알고 놀라워하는 것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은혜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받는 자도 그것의 은혜성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세상에 찌들려 성도들이 은혜성을 잊어 가는 위험성을 보고 특별히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은혜성을 잊지 않고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믿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성 즉 하나님이 수고하시고 이루신 놀라운 것을 가장 절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 은혜성을 가장 절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느 시, 어떠한 때에 있을 것인 지를 상고했습니다. 그리하여 선지자들은 구원이 이스라엘이 망했다가 다시 돌아 온 후에 있을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모세는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 때에는 '오직 여호와의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8, 14)고 했습니다. 이사야도 이스라엘이 망하여 황폐한 후에 남겨진 이스라엘을 통하여 메시야가 다스리는 세상이 도래할 것을 말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서의 주된 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32;36-44), 에스겔(33장 이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은 각기 특성을 가진 네 나라가 지난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말했고(단7:17-18), 소선지서들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학개서는 포로로 돌아 온 이후에 만국을 진동시킬 여호와의 나라가 미래에 올 것을 내다보며 이것을 바라보고 살도록 이스라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스가랴는 그 나라의 성격이 어떠할 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질 구원이 어떤 시기에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를 내다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난과 돌아옴을 통해서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을 내다보았습니다. 이것은 특히 이사야서가 53장의 종의 수난과 부활을 말하면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했었다가 아들을 보내어서 고난받고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게 일하셨던가를 깨달을 수 있으며 또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며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셨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선지자들이 이렇게 미래를 내다 본 것은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 것은 성령의 사역이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구약의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쨌든 선지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이러한 미래를 말했다는 것은 구원의 은혜로운 성격을 더욱 부각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은혜로운 성격은 또한 선지자들의 섬긴 것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을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약의 교회를 위해서 섬긴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선지자들은 신약의 교회를 섬겼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선지자들의 말씀이 없이 불쑥 이루어진 것이라면 신약의 성도들이 참으로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라면 관념적인 종교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오랫동안 말씀하여 오시다가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그 뿌리와 역사를 알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이로 말미암아 인간이 머리에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신약의 교회를 위하여 치밀하게 일해오신 결과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이러한 사역들은 신약의 교회에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 것인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하늘의 천사도 알기를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에게도 숨겨져 있던 것이 이제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통하여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희미하게 내다보았었고 또 하늘의 천사도 알기를 원하였던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보는 자들을 향해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나타난 구원을 보는 자들이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보다도 복되고 하늘의 천사들보다 복이 있는 사람들이 신약의 신자들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이여 너희는 행복자로다'고 했던 말씀이 사실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복됨을 망각하고 이 세상에 빠져 있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 사는 것도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인 줄 알아야 하겠지만 참으로 우리가 되새기고 살펴야 할 것은 바로 이 구원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세상에 의하여 시들해져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살피던 구원은 이제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단지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망각해 가는 마음이 되지 않도록 주셨고 또 주실 은혜를 바라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