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지 않아도 될 환난들 (슥 13:7-9)
이 시간에 [받지 않아도 될 환난들]이라는 제목입니다. 환난 많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면제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면제시키거나 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육체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24:22에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하신바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언은 장차 예수님께서 잡히실 것과 제자들의 도망, 이스라엘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멸망, 그리고 초대교회가 환난 당할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약 500년 후에 정확히 성취되었음을 우리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정확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은 이미 성취됐지만 결코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내용적으로는 지금도 계속 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환난을 당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환난은 지금도 어김없이 다가오려 하지만 믿음으로 그 환난을 피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하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받지 않아도 될 환난은 무엇일까요?
1. 양들이 흩어지는 환난입니다.
7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예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체포 되실 때 제자들이 도망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을 치니 양인 제자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스가랴가 예언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처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진다는 것은 변함없는 목장의 법칙입니다. 왜냐하면 양은 목자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맘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또 제자들을 세워 보이는 목자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지만 하나님의 일을 보이는 면에서 대행할 지상의 목자도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를 치면 양들이 크게 흩어집니다.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은 그 믿음들이 무너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전에 예수님을 치더니 이제는 지상의 목자들을 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야 교회를 무너뜨리고 양들을 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지상의 목자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온갖 것으로 유혹하고 환난과 시험으로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헤롯이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고, 일제도 교회 없애려고 얼마나 목회자들을 괴롭혔습니까? 그들이 목사와 장로를 모조리 죽이려고 작정한 불과 며칠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터지고 일제는 무조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양들이 흩어지고 실족하는 환난은 결코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신학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와 내 가족과 모든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든 선한 목자가 있는 곳에는 복을 받았고, 또 목자를 위한 기도부대가 있는 교회는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목자를 위한 기도부대가 있다면 교회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교회는 발전하고 양들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양들이 흩어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환난입니다.
8절에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대부분 멸절 당하고 일부만 남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그대로 성취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칼에 죽고 남은 사람은 세계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가혹하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여기 “삼분지 이”라는 말은 ‘두 몫’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분지 일”은 ‘셋째 몫’이라는 뜻입니다. 몫이란 쓰기 위해 따로 정해놓은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본래 하나님의 뜻은 한 몫만이 아니라 다 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타락하여 메시아를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이 안나와 시므온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었다면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악한 종이 되어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비극이요 환난입니다. 이런 믿음 없어 당하는 환난은 우리가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 받아야지 징계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징계도 하나님의 사랑이긴 하나 징계란 하시는 하나님도 맘 아프고 받는 자녀도 고통스럽습니다. 징계가 필요 없는 순종하는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상급에서 스스로 버림당하고 징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순탄한 가나안의 축복을 버리고 다수가 광야에서 엎드러지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번 주에 호분성 권사의 천국 간증 읽어 보셨지요? 물질로는 갑부요 구원의 확신도 없으면서 자기 아버지가 교회에 공로가 많다고 교회를 이럭저럭하며 분파를 만들고 싸우던 그 어떤 사람, 천국에는 그의 이름도 집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최후의 소망이 그것인데 지금 천국에 우리 이름도 집도 상도 없다면 얼마나 절망입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복만은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막노동을 하며 세상에서나 교회에서까지 무시 받고 살지만 항상 말씀과 기도에 힘쓰고 남을 돕고 좋은 일에 앞장서던 어느 권사님의 천국 집은 높은 곳에 온갖 아름다운 보석으로 지어졌고 창고마다 보석으로 가득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충성하시든지 구경하는 그 순간에도 귀한 보석이 쌓이고 있더랍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푸성귀를 팔며 가난하지만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말없이 화장실 청소나 교회 허드레 일 맡아서 하고 많지는 않지만 푸성귀 판돈을 모아 자식들 교육하고 구제헌금 빼놓지 않고 남몰래 신학생들을 돕던 어느 집사님은 어마어마한 하늘 궁전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사람이 충성하면 더 크게 보십니다. 없다고 핑계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더 크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축복에 참여할지언정 멸절 당하거나 징계 받는 불신앙의 백성들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일생 연단만 받는 완악함에서 오는 환난입니다.
9절에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 예언은 일차로 연단 받은 초대교회를 통해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이 말씀대로 초대교회에 불어 닥친 환난은 믿음을 온전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환난의 연단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지금 크기의 차이일 뿐이지 연단 받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귀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히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적극적으로 변화 받으면 하나님께서 환난의 연단을 계속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단만 받다가 우리 일생이 끝납니다. 그것도 은혜이긴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러므로 속히 변화 되십시다. 진실로 변화하십시다. 그래서 연단의 수업에서 졸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 나를 돌아보는 이 신앙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경건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운동은 기도하면서 일어나는데 그 교본은 말씀이고 참고서는 예언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씀을 기복에다 두지 않고 성경의 기록 의도대로 설교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 의도가 무엇입니까? 딤후3:15-17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하신대로 구원 얻게 하고 바른 신앙인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 예언은사의 회복입니다. 예언은사는 신앙을 개인적으로 지도하는데 탁월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고전14:24-25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이처럼 불신자도 예언은사에 놀라 회개하고 신자도 예언은사를 통해 자기에게 적용되는 말씀에 놀라 깨닫고 회개하고 위로받고 바른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교회의 예언이 주의 이름을 빙자한 점치는 예언이 많았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우상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어졌을 뿐 기도의 내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느 분의 간증인데 하나님께서 “내가 무슨 무당이냐? 왜 자꾸 무당이나 점쟁이한테 묻는 것처럼 물어보느냐?” 책망하시면서 “본인들 스스로 기도에 전념하고 부르짖고 매달리면 해결해 주시는데 왜 자꾸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는지 모르겠구나.” 하시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너는 점을 치느냐? 점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대신 자기 신앙을 지도받는 예언이 되어야 합니다. 예언은 회중 예언도 있지만 개인지도도 합니다. 신앙의 개인지도, 얼마나 귀한 은사입니까? 그래서 고전14:3에 예언을 정의하기를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그랬습니다. 이 예언은사가 회복될 때 각인이 이제는 바른 신앙에 관심 가지고 더욱 참되고 겸손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소망은 강단의 회복과 예언은사의 회복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그 때 성도의 신부 단장은 속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회개하게 되어 환난의 연단도 길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가 변화는 안 되면서 평생 연단만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졸업도 없는 끝없는 완악함에서 오는 환난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이스라엘과 초대교회에 불어 닥친 이 시험은 지금도 동일하게 다가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받지 않아도 될 환난을 받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 부족으로 목자가 침을 당해 성도들이 흩어지고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복을 받을지언정 징계 받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훈련에 임하여 연단의 환난이 끝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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