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슥11
11장은 9-10장의 내용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이 생깁니다. 9-10장에서는 이스라엘을 모아서 온 세상까지 미치는 화평의 나라를 이룰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여호와의 구원을 받아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서 빛난다고 했었습니다(9:10,16).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꿈을 가질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선지자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11장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11장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장들에서 말했던 희망과 본 장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은 어떤 관계가 있는 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1장에서 말하는 심판이 어떤 사람들을 향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1장의 내용은 한 가지에 대한 가르침이지만 본문은 세 부분으로 단락이 지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1-3절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가 넘어지고 훼멸되며 바산의 상수리나무가 엎드러지는 것 때문에 목자가 곡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백향목과 잣나무는 물론 사람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말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귀인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수리나무 역시 사람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말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목자가 곡하는 것은 요단의 비옥한 초장이 황무지가 되어 그곳에 사자가 사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폐허가 이스라엘 땅에 임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은 4-14절까지입니다. 여기서는 선지자의 독특한 사역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먼저 잡힐 양떼를 먹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잡힌다는 말은 살육당한다는 말인데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살육당한 양떼를 먹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살육은 앞에서 말한 심판 때문에 일어날 살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에게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은 실제로 잡힐 양떼를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니면 어떤 환상을 보고 이렇게 말하도록 하셨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여튼 하나님은 살육당할 양떼를 먹이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실제 교육의 도구로서 어떤 양떼를 두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 가능성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고 하십니까? 이 양떼는 산 자들이 잡아먹어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팔아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으니 여호와께 찬송하리라고 하는 양떼입니다. 아무도 양떼에 책임감을 느낀다거나 귀하게 생각하는 자가 없습니다. 목자들도 이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이들이 팔리고 잡아먹히는 것은 목자들이 그들을 돌아보지 않으며 넘겨주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5).
여기서 말하는 양떼는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6절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말씀을 보아서 양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도 양떼 곧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니 선지자가 볼 때에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한 양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할 양떼를 선지자로 하여금 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양떼를 먹입니다. 막대기 둘을 만들어서 하나는 은총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다른 하나는 연락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은총이란 말은 '아름다움,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연락이라는 말은 묶는 것을 뜻합니다. 단합 또는 연합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가 양떼 곧 백성을 치기로 하였을 때 백성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또 연합된 백성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목자로서의 언약을 맺고 이 일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로서 일을 하다가 보니 이스라엘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운 목자인 선지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선지자 역시 이들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양을 치려고 했고 이미 있는 목자들은 자기들의 안락과 편안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기존 목자들이 하나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기존 목자들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양떼인 백성에게도 목자의 사역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고 하면서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잘랐습니다. 이것은 백성과 세운 목자 계약을 파기하는 징표였습니다(10). 그 백성들은 그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11). 여호와께서 자기들의 목자 되심을 포기하시는 것이로구나 라는 뜻을 깨달았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목자직을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고가를 달라고 했습니다. 주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겠지만 고가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이 은 30을 목자의 삯으로 달아 주었습니다. 은 30은 노예 한 사람의 가격에 해당하는 값입니다(출21:32). 여호와께서 자기들의 목자 됨을 포기하신다면 울며 애통하며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인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은 30을 달아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목자 됨을 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단지 그들의 심부름이나 해 주는 종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13)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부수고 다시 만들 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만드시겠다는 결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를 종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전부 심판해버리고 새로이 다시 이스라엘을 만들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분노로 변하여 심판하여버리고 새로이 만들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연락의 막대기도 잘라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하나됨을 바랐던 선지자의 소원은 인간의 단합을 꿈꾸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단합과 힘을 꾀하였던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라고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14). 인간들의 단합이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단합을 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목자도 백성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목자들을 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목자를 치므로 백성도 치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7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치는 자는 현재 이스라엘의 거짓된 목자들과 똑같은 목자 즉 잔인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를 목자로 세워서 거짓된 자들을 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가 세워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요 비극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잡혀 죽을 양을 치라는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현재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양을 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장차 면류관의 보석 같이 빛날 백성들로 이루어질 화평의 나라는 자기 배만 채우는 목자나 하나님을 자기 심부름이나 해 주는 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선지자에게 가르쳐 주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적 이스라엘과 단절입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바벨론 포로에서 남겨져서 돌아온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지자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잡혀 죽을 양을 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9-10장의 소망과 11장의 심판이 어떻게 조화가 되는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성전을 짓는 당시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종처럼 생각하고 있던 백성들도 역시 하나님이 원하시던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교회의 역사상 진리였고 지금도 진리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실패를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스가랴는 한 달만에 싸워서 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들과 더불어 싸우고 또 싸우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미움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목회란 성공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 싸우다가 실패하고 죽는 것이 정상입니다. 목회란 죽을 모퉁이지 살 모퉁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와 반대로 안싸우고 잘 다독거리는 것을 목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믿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모두가 자기 사랑에 빠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하지 않고 자기 사랑에 빠져 자기가 존중함을 받고 자기가 사는 길을 추구하더라는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도 스갸라의 말을 듣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을 자기들을 도와주는 종놈 세워놓은 정도로 생각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성전을 짓고 열심을 내고 있는데 그들의 마음은 경외하는 마음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하님을 찾고 믿는 것 같았는데 알고보니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때문에 구원이 좋게 들리고, 사랑한다는 말이 좋게 들리고, 은혜라는 말이 좋게 들리고,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좋게 들려서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이 행동했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모두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인데도 그것이 믿음인 것 같이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전을 짓고 열심을 내어 종교적인 온갖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믿음이요 어떤 자가 믿는 자입니까? 이러한 자기 사랑, 인간 사랑은 나귀 새끼 타고 오셨다가 죽음을 당하신 분과 함께 이미 죽은 줄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타고 오셨다가 말 타고 힘 자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예수님이 말탄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할 때 자기도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자기의 어떤 것을 믿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잘나고 똑똑하고 가진 것을 믿지 않습니다. 목회 성공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단합과 돈과 호사를 믿지 않습니다. 오로지 믿는 것은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만을 믿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겸손하신 예수님 뿐이지 그 외의 어떤 것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 외의 것들에 대하여서는 죽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지 않고 다른 어떤 것을 믿는 것을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그러므로 9장은 그 나라에 부적합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를 분별하도록 선지자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도 이 가르침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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