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에 동반된 축복   로마서 5장 1-11절

미국의 헨리 위드 비쳐 목사는 “고난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찾아옵니다. 이는 사람을 슬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하며, 불쌍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씨를 천 배로 늘리기 위해 쟁기질로 땅을 비옥하게 하듯, 고난은 우리에게 기쁨과 영적인 결실을 더하여 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신도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은 경험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하기 쉽습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유익을 찾기보다는 또 다시 좌절과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고난은 고통이 아니라 고난을 통한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소망을 품게 합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내어주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 하나님과의 화해가 결국 그들을 최종적인 구원의 영광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평화와 소망(1-4)

성도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해결해야할 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죄(罪)’라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통해 죄의 문제를 잘 해결이 될 수 있는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있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내용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1-4)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보여주듯이, 본문에서는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들에 대한 결론입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할 것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경험하는 결과들을 제시합니다. 그 의로움에 근거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⑴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1)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얻은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입니다. 이곳에서 ‘화평’은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14). 이는 인간 내면의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라 관계적 개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화평을 받자!’가 아니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화평을 누리고 있는가?’입니다. 화평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권세와 화평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평안함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님과의 화평이란 거짓입니다.

⑵ 즐거움을 누리는 삶(2)

바울은 4장까지에서 다른 또 하나의 주요 주제를 언급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상기시키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자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 아니라 잠시 동안 주어질 뿐이고, 세상의 즐거움을 얻을수록 만족되지 않고,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기쁨은 충만한 기쁨입니다. 우리 내면에 주신 기쁨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은 대제사장이 지성소를 들어간 것처럼, 은혜의 장막 안으로 들어간 능력과 권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⑶ 소망을 누리는 삶(3-4)

믿음으로 의롭게 될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환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환란은 인내를, 그리고 그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우리를 훈련시킨 후에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 어려운 문제점들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항상 평온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질문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 있다면, 모든 것이 순탄해야 되지 않는가? 만사형통(萬事亨通)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도의 만사형통(萬事亨通)만을 말씀하진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은 만사형통하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더 많이 당합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이나 죄악에 정당히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환난을 받습니다. 왜, 성도들은 세상의 악한 방법과 타협하지 않습니까? 고난받을 줄 알면서도 말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은 왕의 품위(品位)가 있어야 합니다. 왕이 내시(內侍)같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 사람들이,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죄악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마귀를 자녀와 같은 행동을 해서 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의 악한 것들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더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10:22,23). 우리 성도들이 고난을 받아도 인내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소망을 이루는 줄 알이로다”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소망(所望)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하늘 나라의 소망입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은 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소망의 근거로서의 하나님 사랑(5-8)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환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환난을 받는다면, 성도들이 환난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더 나가서 환난 중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소망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망에 대한 것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영적인 천국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들이 천국을 소망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핍박합니다.

⑴ 성령을 통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5)

로마서 1:16절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울은 5절에서 그 복음의 약속인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즐거워 할 수 있는 비결을 보여 주십니다. 5절에서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비결을 바울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다’(5)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5에 이르기 전까지 ‘성령’이라는 단어를 3회만 사용할 정도로 아껴왔습니다. 5-7장에서 이 세대의 죄와 사망의 다스림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음 세대의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역설하게 될 바울은, 8장에 이르러서야 그 생명의 결정적인 운반자로 성령을 소개합니다. 스데반 집사님께서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면서 돌에 맞아서 기쁘게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7:55-56). 영적인 눈이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도 ‘성령이 충만하여’(7:55)라고 소개합니다. 본문의 말씀에도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원인을 말씀합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소망을 확신시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순간순간 필요에 따라 조금씩 배급받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성령에 의하여 성도들의 마음에 쏟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른땅에 물을 부어서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해 주시듯이,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우리의 심령에 풍성하고도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날마다 담대하게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세상의 죄악에 패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말씀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적국(敵國)에게 패배해서 승리한 적군의 장군 앞에서 패배했다고 머리를 숙이는 일을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분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승리해 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⑵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6-8)

하나님의 사랑이 말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5-8절에서 바울은 ‘죽다’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충격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한 대상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그 사랑이 주는 충격을 더 해줍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동료 인간들 중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쉽지 않음을 바울은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라서 1:18-32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사망(1:32)의 다스림에서 헤어 나올 힘이 없는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충격적입니다. 10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는 더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원수와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큽니다.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순종을 감당하셨습니다.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순종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확증’ 되었습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구속행위의 동기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불뱀의 심판을 하셨을 때,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게 하셔서 구리 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살아나셨듯이 말입니다(민수기 21:9).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늘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화해에 근거한 구원의 확신(9-11)

마귀는 거짓 것들인, 육신 쾌락, 세상적인 물질, 욕심을 채우는 만족 등과 같은 것으로 만족하려고 유혹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잠시 순간적인 만족은 줄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만족들 뒤에는 돌이킬 수 없는 대가의 고통이 따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능력이 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9-11)

이 구절들은 우리의 신분과 하나님과의 화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하게 된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은 것입니다.

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얻은 의로움과 구원(9)

마지막 소단락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미래적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줍니다. 우리는 희생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 즉 ‘죄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9a) 죄인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하셨다면, 이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간 우리를 그 그리스도 때문에 최후의 심판에 나타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실 것은 더더욱 자명한 일입니다(9b).

⑵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을 통한 화해와 구원(10)

10절은 이를 재차 확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케 하셨습니다. 그러한 희생적 사랑을 감수하신 하나님이, 이제 하나님과 화해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부활 생명에 동참케 하실 것은 더욱 자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화해하다’라는 단어는 외교적인 용어입니다. 한때 적대국이었던 나라가 동맹국이 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당시에는 ‘화목’이 가능하려면, 항상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묘사하는 화목은 상식을 뒤집습니다. 바울서신에서 이 단어는 4회 더 등장하는데, 고린도후서 5:18-20에 3회나 사용됩니다. ‘화해’라는 말은 5:1에서 바울이 사용한 표현 그대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평화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과 고린도후서 5:18-20 모두에 나타난 화해의 가르침에서 눈여겨볼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먼저 화해의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린도후서 5:1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화해 사역을 위해 순종하신 분으로 등장합니다. 둘째로, 두 본문 모두 화해의 개념을 하나님/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주제와 성도가 얻는 의로움의 혜택과 연관시켜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린도후서 5:14)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21) 9-10절 모두에서 바울은 성도가 얻게 될 미래적 구원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신 과거의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한 현재적 의로움과 화해의 관계와 연결시킵니다.

⑶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을 자랑함(11)

바울이 재차 확인하듯이, 하나님과의 화해와 미래적 구원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해 있으므로 그리스도 이 외에 자랑할 자가 없습니다. 잠시, 성도들은 뜻하지 않는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란 사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들에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성도들은 자유함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도록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이미 세상을 이기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   (요한1서 3장 1-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三․二-三)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이 시간,『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보편적으로, 넓은 의미로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다 하는 뜻으로,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하는 뜻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말씀하는 이「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뜻은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특수한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 복음 一장 十二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서 난 자들이라.』
  다시 말하면, 우리 성경에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하는 말은 아무나 가리킨 말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믿는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 이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본문 중 一절에 보면『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한 복음 八장 四十四절에 보면, 주님께서 당시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 가운데『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그렇게 말했습니다. 듣기 좀 어려운 말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못되었으면 아직도 마귀의 자녀올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 먼저 깊이 나 자신을 살펴서 내가 과연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받들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이런 몇 가지 점을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원수 되었던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을 베풀어서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 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원수 되었던 우리를 천지를 지으신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만 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삼으셨습니다.
  가령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 특권을 좀 기억할 수 있겠는지요? 옛날 우리 한국에는 임금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어떤 임금께서 우리 나라 백성 가운데 가장 천한 사람, 특별히 죄 많이 지은 젊은 남녀를 사람으로써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입양을 하고 왕의 아들과 딸을 삼았다고 한다면 그 젊은 왕자와 공주가 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임금님의 얼굴을 쳐다볼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 생각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이미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죄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이요, 사실 그리스도를 못박은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실 뿐더러 우리를 종으로 삼아 주셔도 감사하겠거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삼아주셨습니다. 아들과 딸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제 생각에는 천사보다 더 높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천사는 하나님 앞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자이니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으면 천사 위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그 지위, 그 영광, 그 특권이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압니까? 만일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 안다고 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감격한 마음이 많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은 지위만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닙니다, 상속자입니다. 후사(後嗣) 자입니다. 영원히 하늘의 기업을 이을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 특권을 먼저 기억해야 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소망이 어떠한지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기 보니 장차 어떻게 될 것이 아직 나타나지는 아니했지마는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는 우리도 그와 같이 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아직도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앞으로 어떤 하루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때가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사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지,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왜? 우리처럼 더럽고 우리처럼 부족한 것이 그리스도와 같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여기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지금 불완전하지마는, 우리가 지금 부족하지마는, 우리가 사실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의 신령한 혈관 속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죽음이 없는 불멸의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때에는 그 때부터 우리 마음속에 거룩한 성품을 새로 유전으로 받았습니다. 옛날 예사 사람의 유전은 우리가 버리고, 죄 지은 아담 혈통의 유전을 우리가 다 버리고, 하나님의 새 유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성결하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풍부한 성품이 새로운 유전으로 우리 마음가운데 와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아직 다 나타나지 아니했지마는 이 앞으로 완성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봄 동산에 자라나는 꽃나무와 같습니다.
  그 꽃나무가 처음에 풀밭에서 싹이 돋을 때야 다란 풀이나 꽃나무나 뭐 별로 다른 것 있습니까? 그저 다 비슷하지요. 그러나 그 꽃나무가 자라면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이렇게 아름다운 꽃으로 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초생달은 아주 작고 빛이 희미하지만 이것이 점점 커져서 보름달이 될 때가 있다는 그 말입니다.
  구름 속에 있는 잔 빗방울이 그대로 있을 때, 무슨 빛이 납니까? 그러나 햇빛을 받을 때에는 청, 황, 적…七색의 무지개가 될 수 있어요. 우리 믿는 자의 소망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의 딸로서의 우리의 장래가 이와 같이 아름답고 이와 같이 위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현재 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현재 의무가 무엇일까요? 이런 특권이 있고, 이런 소망이 있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현재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달이 되었으면,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대해서 동양에서 오랫동안 늘 힘써서 가르쳐 온 효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효자와 효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젊은 사람들, 여기 말하지마는 우리 부모에게 대해서 효도하는 첫 길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것은 우선 부모님의 마음 상하는 일을 안 하는 것이 효도의 첫 길입니다.
  제 경험 가운데도 벌써 여러 가정에서 부모 된 사람이 자녀 때문에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왜? 그 아들과 딸이 있기는 있는데 아들과 딸이 죄를 짓습니다. 옳은 길을 가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 아버지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우리가 제일 조심할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짓지 아니해야 됩니다. 사실 요한 一서에 보면『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아무 죄도 안 짓는다는 말은 아니고, 계속해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도 이 죄악 세상에서 살 때에 잠깐 잘못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어떤 것이 죄인 줄 뻔히 알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고 하면 제일 먼저 죄를 짓지 않아야 됩니다. 죄를 멀리 해야 됩니다.

 

  또 그 다음에 효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래 우리 동양도덕에서 가르쳐 내려오는「양지」를 해야 됩니다. 뜻을 잘 받들어야 됩니다.『언제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라』는 뜻입니다. 제가 들으니 옛날 효자들이나 양반 가정의 자녀들은 아침저녁으로 꼭 부모에게 가서 문안을 드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풍속이 거의 다 없어졌지요. 아마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첫 길은 항상 부모님께 가까이 있을 것이요, 편지도 자주하고, 자주 문안하고, 안부를 항상 물어보고, 부모 가까이 에 있는 것일 거예요. 아마 그 비슷하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해서도 효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 하는 것일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로, 묵상으로, 예배에 참석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뿐더러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언제든지 어디 있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함으로.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신 말씀이『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내 뜻대로 이루려고 온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또 우리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면, 항상 부지런해서  부모님이 기뻐하는 일을 많이 해야지요. 좋은 사업을 많이 해야지요. 아마 그와 비슷할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효자가 되려고 하면 주의 일을 많이 해야지요. 아무리 잘난 아들과 딸이 있다고 할지라도 게을러서 일하지 않는 자녀를 두었으면, 그것이야말로 민망한 노릇이지요. 부지런해서 주의 일을 열심히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리고 자식은 아무래도 부모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부모를 닮아야 합니다. 부모의 성품을 닮아야지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고 화평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떻든지 사랑과 화평의 성품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닮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 말씀하실 때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믿는 형제와 형제, 자매와 자매, 동포와 동포 사이에 사랑과 화평의 생활을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귀하고 훌륭한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혹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에 그 징계를 바로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잠언 三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며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사랑하는 이들을 채찍질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시기를『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지 아니하신다고 할 것이면 우리는 사생 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참 아들은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이 징계를 받을 때에 기쁜 마음으로 받을 줄 알아야 참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것입니다. 제가 옛날 어떤 친구를 한 번 찾아가 보니까 책상에다 시계를 놓기는 놓았는데 엎어놓았어요. 그래서 시간을 보려면 제켜서 보고 다시 엎어놓는단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이상해서『그 시계를 왜 엎어놓았습니까?』하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그이가 얼른 대답하는 말이『그거 이상합니다. 이놈의 시계는 꼭 엎어놓아야 바로 갑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엎어놓을 때가 있어요 왜? 바로 가라고. 징계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말씀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할 것입니다. 효자가 자기 아버지의 말씀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효자가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까? 사실 세상의 부모는 요새 보니까 더러 아들과 딸을 내다 버립디다. 하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과 딸을 끝까지 그 손에 쥐고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처음에 은혜를 받아서 그저 주님의 일만 하고, 옷도 해주면 가난한 사람에게 갖다주고 이렇게 되니까 자기 아버지는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큰 부자요 포목상 주인이었는데 이 애가 커서 자기의 사업을 계 대할까 생각했는데 사업을 할 생각은 안하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주의 일만 하고 도무지 자기가 하라고 하는 일은 안 한단 말입니다. 책망해도 쓸 데 없고 때려도 쓸 데 없어요. 마지막에는 성이 나서『이놈, 내 아들 된 것을 아주 파면해 버리겠다』고 호적에서 빼어버리고 그 때 법관에게 가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법관도 할 수 없이『이제는 아무개 아들이 아니라』고 호적에서 빼도록 선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성 프랜시스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입었던 옷까지 다 벗어서는 자기 옆에 계신 아버지에게 갖다 놓으면서『아버지, 이것 받으세요. 이 앞으로는 내 아버지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혹 우리를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성 프랜시스를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면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모든 근심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더 길게 말할 시간이 없습니다. 여기 앉은 여러분이나 여기 선 저나 이렇게 다 부족하지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그 위신, 그 지위, 그 영광, 그 품성을 잊지 마십시다. 또 우리가 이렇게 부족하지마는 장래에 완성될 때가 있는 것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 때에 어떻든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지 말고, 하나님을 항상 기쁘시게 하면서 사랑과 화평의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에도 기쁨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5권 中에서   (一九六三년 七월 七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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