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의 상품 ( 18:12-15)

 

22.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고운 밀가루와 고운 가루가 되려면 형체가 남지 않도록 갈 듯이, 온전히 부서지고 깨지는 자아처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자아처리는 온유와 순종과 겸손이 그 핵심으로 하나님을 주로 삼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고도의 자아처리를 이루려면 제자와 같이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기쁨으로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의 감화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같은 강한 기도생활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도 우리를 곱게 처리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도덕 예절 수련 교육 치료 감금 법률 교도 일반종교 등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완전할 수 없거니와, 그 의는 시험이 오면 불탈 것이고, 때로는 도를 닦다가 정신적 신체적인 불구나 악령에 접신 되는 등 심신을 파괴하고, 끝없는 노력만 요구되고 결과는 없는 그 삶은 고단하고 고독하고 그 마지막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23. 더 풍성한 열매 맺게 해주겠다는 상품입니다.

 

밀이요 성경에서 밀의 교훈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12:24). 좋은 열매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진리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도를 가르치셨고, 기도와 찬송과 사랑 등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훈련과,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좋은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찍혀 불어 던져집니다.

 

이처럼 세상도 멋진 열매를 맺게 하겠다고 장담합니다. 그 예로 사탄은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대성할 수 있는 목회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4).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참된 제자의 길보다 화려한 외형적인 것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 전도와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한 사람 만드는 일을 제일의 비전으로 삼지 않고 수효나 재정이나 건물 등에 치중함으로 두 가지 모두 놓치는 것을 봅니다. 자신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이 장담하는 좋은 열매란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

 

<가축류>

 

24. 더 훌륭한 일군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소와 여기서부터는 유용한 가축들로 성공적인 사역자를 만들어 주겠다는 세상의 장담입니다. 성경에서 소는 일군을 상징합니다(고전9:9-10). 소가 유용한 가축인 것은 주인의 의도에 따라 쓰임 받기에 넉넉한 힘과 자세와 인내와 성품과 지능과 헌신을 가지고 충성하기 때문입니다. 일생 큰 힘으로 주인을 섬긴 후 살과 뼈까지도 고스란히 바치는 그 헌신은 주의 종들의 모습을 담기에 충분합니다.

 

이처럼 세상도 소 같은 큰 일군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 꿈을 가져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라. 너는 할 수 있다.’ 등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르치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세가 없이 내 꿈과 내 계획과 내 방법만 앞선다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 실수를 깨닫는 데 80년이 걸렸는데 지금도 많이 범하는 실수 중 하나입니다(123:1-2).

 

25. 더 거룩한 일군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양과 양은 지능이 뛰어나지 않지만, 온유한 성격에다 메마른 땅에서도 이동하면서 먹이를 찾고 털과 고기를 제공하는 유익한 동물이요, 성전에서 쓰이는 귀한 희생 제물로서 죄를 대속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1:29, 53:5). 12:19-20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한 예언대로 주님의 일생은 온유의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도 양 같은 의롭고 희생적인 일군을 약속합니다. 바벨론 상품에서 양이란 자기 의입니다. 내 방법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예수를 몰랐을 때 율법으로 위대한 일군이 되려고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고 힘쓴 결과는 도리어 예수를 박해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3:12에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했듯이 자신의 능력과 경건이 아님을 알고 강하고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26. 더 능력의 일군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말과 말은 이동 수단과 전쟁의 도구로 기동성과 신속성과 정복력을 가능하게 한 동물로, 말의 등장은 약한 군대를 강한 군대로 만들었습니다. “의 유용성은 잘 길들어 주인의 뜻대로 움직일 때 나타납니다.

 

이처럼 세상도 능력의 일군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능력을 추구하는 신비 위주로 나가다 귀신의 영을 받거나, 나쁜 열매를 맺어 교회가 풍비박산 나거나 사이비 이단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은 쓰임 받는 겸손한 자세가 아니라 능력 받아 어떻게 하겠다는 등 성령을 부리는 교만한 자세로는 하나님의 쓰시는 일군이 되지 못합니다.

 

27. 더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일하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수레와 수레는 짐을 실어 나르는 도구로,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성물 중 일부를 운반할 때도 쓰였습니다(7:3-5). 무거운 짐을 운송해야 하는 레위인들에게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민7:9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한 대로 법궤는 어깨에 메어야지 수레에 실으면 안 됩니다.

 

이처럼 세상은 편의주의적 신앙생활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건물 음향 영상 운송 시설 조직 행정 정보 등이 발전하여 편리해지는 것은 환영하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함에는 편해져서는 안 됩니다. A.I.가 성령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신앙 갖는 건 반대하지 않으나 적당히 해라.' 이것이 사탄의 속삭임입니다(6:46). 사이버상에서 예배하는 것은 간식이지 주식이 되면 안 됩니다. 유튜브의 영상예배로 만족하던가요? 다른 것은 편리해도 좋으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은 안 됩니다.

 

<사람>

 

28. 몸까지도 편안한 생활을 약속합니다.

 

종들과 원문에는 소마타, 몸들입니다. 27:13에 노예는 무역품 중 하나였고, 요한이 살던 당시 로마의 3분의 1이 노예였는데 대부분은 일을 시키거나 접대부로 심지어 원형극장의 볼거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종들이 일을 대신 해주니 그들이 할 일은 게으름과 쾌락과 호화로운 사치 생활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예수 안에서 한 몸인 지체요,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했듯 신앙 안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 섬겨야 할 종들입니다.

 

이처럼 세상도 우리의 편리를 봐주며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주일성수 개념도 없고 경건생활을 강조하지 않고 술 취하고 우상 섬기고 세상 사람들과 다름이 없이 사는 풍조가 있다면 이미 세상이 침투했다고 보면 됩니다.  27장을 보면 바울을 태운 죄수선이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지 않고 더 즐겁고 편하게 보내려고 뵈닉스로 가다가(27:12) 유라굴라를 만나 무려 14일이나 불안과 공포의 어둠 속에서 고통을 당했듯, 신앙생활에 육신이 편할 길을 택한다면 그 결과는 헤어나오기 어려운 시험과 파멸입니다.

 

29.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영혼들이라 주석에는 노예의 생명을 가리킨 것이라 했습니다. 앞에서는 종들과”(몸들)이었는데 여기는 영혼들입니다. 이 말씀에서 많은 노예의 생명이 오고 갔던 당시 원형경기장이 연상됩니다. 왜 이런 일을 할까요? 인간의 근본이 악한 데다 뭔가 자극적이고 찌릿함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들의 대결입니다. 이건 왕을 비롯한 최상류층이 아니면 즐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후3:5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한 말씀처럼, 최상의 만족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기쁨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생각해도 행복해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도 공허한 마음에 만족을 채워주겠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신비주의로 끌고 갑니다. 신비주의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구함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무엇을 더 추구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도 멀어지고 사탄이 틈탑니다. 혹은 자칭 보이는 가짜 하나님 혹은 자칭 보이는 가짜 예수에게로 끌고 갑니다. 그것은 내 영혼을 사이비 교주에게 털리는 것입니다. 혹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표적 중심의 믿음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12:39, 고전1:22).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만났다면 이런 어리석은 세속의 바벨론 상품에 속지 않게 됩니다.

 

<종합해 보면>

 

1) 세상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던지는 미끼가 29가지로 설명됩니다. 믿음의 방법으로 살지 않는다면 29가지로 말하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 분별하는 눈을 여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본문 계시록의 말씀이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2) 매매불가 원인은 성도의 변화입니다.

 

14 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바벨론이 그토록 탐하던 음식들이 철저히 떠났음을 '떠났다. 없어졌다.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라는 3가지 동사를 통해서 강조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변화라기보다 성도에게 초점을 맞춘 설명으로, 이처럼 변화 받은 성도에게 바벨론의 과일들은 영혼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바벨론이 탐하던 과일이란 결국 세상이 인간의 마음이듯, 세상이 탐하던 것은 곧 죄인이 추구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과일이란 은유적인 표현으로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연상시킵니다(3:6, 요일2:16). 육신의 눈에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지만 장성한 성도들에게는 영혼을 죽이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3) 세상은 미혹을 위한 간사한 음식과 같습니다.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는 문법상 앞의 말을 되풀이하거나 보충하는 평행법 문장으로 강조형입니다. 먼저, “맛있는 것들은 원문에 리파라, 빛나다, 값이 비싸다는 의미로, 성경에서 맛있는 것은 마음을 사기 위하여 베푼 비싸고 간사한 음식을 가리키고(23:1-3), “빛난 것은 포도주의 매력을 의미할 때 쓴 말로(23:31), 여기에 걸리면 꼼짝없이 포섭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거짓된 것이며, 영혼을 미혹하여 죄악으로 끌고 가려는 것들일 뿐입니다.

 

4) 장성한 성도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17:6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했듯, 바벨론이 취한 빛난 포도주는 결국 우리들의 피였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성도들을 넘어뜨리고 주의 종들을 시험 들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요 특기입니다. 맹수가 어리거나 약한 짐승을 공격하듯 주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경외함에 부족한 어린 신앙이 세상의 사냥감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성도들은 이제 세상의 먹잇감이 되지 않습니다.

 

5)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의 마음은 견고합니다.

 

14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7:19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벨론의 멸망으로 바벨론의 상품들도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역시 그만큼 붕괴하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죄악의 바벨론을 사랑하고 떠받들고 유지 발전시켜 오던 죄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했습니다(벧전4:3, 살전5:21-22, 벧후2:20-22).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했고, 살전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한 것처럼, 악을 다시 보지 못할 만큼 온전히 거룩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일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 우리의 말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세상 말을 들으면 세상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과 성령 안에서 더욱 장성하고 영적으로 분별하여 세상의 말 듣지 말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세상을 이긴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세상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   로마서 5장 12-21절

 

신앙을 점검하는 두 가지 기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와 ‘기쁨’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누리면서 감사하며 살아가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잘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른 성도들의 삶은 생활 가운데 자신의 ‘자랑’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환경에 대한 ‘불평’이 아닌 삶에 대한 ‘기쁨’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당신의 삶 속에 항상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길 축복합니다.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한 사람의 죽으심과 부활이 어떻게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바울은 시조 아담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첫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모든 인류에게 사망의 권세를 시작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순종함으로 모든 인류에게 생명의 권세를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로서 한 사람의 행위가 선악 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첫 아담을 통한 사망(12-14)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면 아담 때문에 죄가 들어왔다는 주장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항변합니다. 그들은 ‘왜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는데,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라는 반문합니다. 그 질문을 다음에서 설명합니다.

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12-14)

하나님의 화해 사역의 대상인 인간들을 연약하고(6), 경건하지 못하고(6), 죄인이며(8), 하나님의 원수로 묘사한 바울은 이제 죄와 사망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⑴ 한 사람으로 시작된 죄(12)

사도 바울은 첫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표현하면서 설명합니다. 먼저 시조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제시합니다(12). 이 말을 들으면서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는데,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라는 기초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 사람 첫 아담이 가져다준 결과는 사망이었습니다. 첫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 했기 때문에, 그 자손인 모든 인류는 죄의 영향력 아래 탄생한 것입니다. 이는 조상이 노예이면 자동적으로 그 후손들은 모두 노예인 것과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합니다. 한국 대표 팀들이 경기할 때마다 열광적으로 응원합니다. 한국 대표 팀이 승리하면, 마치 자신이 승리한 것처럼 기뻐합니다. 패하면 자신이 패한 것처럼 괴로워합니다. 우리들이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뛰는 것도 아닙니다. 축구장의 승패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우리들이 한국 대표팀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첫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이러한 영적인 정체성 때문입니다. 첫 아담을 통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사망이 왕노릇 하고, 사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사망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에는 장수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족보나 세상의 족보들은 모두 죽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범죄 함으로 그 죄악의 뿌리가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범죄 하는 것은 그 죄의 뿌리가 낳은 열매입니다. 우리는 죄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한, 이 땅을 살면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우리들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심판하심입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죄의 삯(대가)을 사망으로 지불해야할 원칙입니다.

⑵ 죄를 위해 투입된 율법(13-14)

사망이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 사실을 역사적으로 설명합니다(13-14). 죄가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시절에도 아담 이후 모두가 죽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죽게 된 이유가 확연하게 들어났습니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 먼저는 빛을 비추면 들어납니다. 그 먼저는 빛을 비추기 전에도 있었지만, 단지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율법을 통해 알게 되어 집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죄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율법 전에 살았다할지라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담 이후로 속한 모든 인류는 사망의 그늘 아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해 아담과 같은 또 다른 분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둘째 아담을 통한 은혜(15-19)

첫 아담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는 아담이 모든 인류에게 영향력을 끼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그리스도가 끼친 영향력에 대해 비교하고 있습니다.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5-19)

모든 인류가 아담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사망이 왕노릇 함으로 죽음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담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사망의 효력을 발휘하였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효력을 발휘합니다(15-17). 아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아 넘칩니다. 결국 아담은 죽음을 가져다주지만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 받았는데, 또 다른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 속한 모든 사람이 의롭다 칭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첫 아담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지만 효력의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아담은 사망을 퍼뜨렸지만, 그리스도는 생명을 퍼뜨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에게 미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의 원리로 하나님과 함께하게 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누린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말씀합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수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한 자들은 사망으로부터 자유한 자들입니다. 2011년 3월, 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된 적이 있습니다. 일본과 주변 국가들이 원자로에서 새어나온 방사능(放射能)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각 정부에서는 방사능 비가 좋지 않기 때문에 맞지 말고 피하라고 권했습니다. 만약 그런 정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방사능이 포함된 비를 맞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방사능의 영향력 아래서 피폭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죽음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인류를 살리셔서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여전히 아담의 영향력 아래 존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왕노릇하고 사망의 권세 앞에 붙잡힌 인생으로 사망의 영향력 아래 존재하는 임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 대표성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혜 아래서 율법의 역할(20-21)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라면 율법의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율법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은가?’라는 숙제가 발생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류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20-21)

우리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씀에 대해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죄가 많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많아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범죄하면서 양심이 마비되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13).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면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범죄를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쳐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고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점점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성이 들어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적인 탄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러한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1-25)

모든 인류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들여다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감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왕노릇 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죄와 사망에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잘 받아들여 합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이 당신을 지배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모든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발견하였습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얼마나 엄청난 축복을 받았으며, 그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아담 이후 죄를 통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을 통해 속죄해 주셨고 그 은혜 안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굳게 잡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주님께 붙잡힌 사람 43:1-7, 3:11-16

신약 본문 12절에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님께 잡힌바 되어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 붙잡힌 사람은 이사야 본문 1절의 말씀처럼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하시는 몇 가지 근거는, 먼저, 우리를 창조하시고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니라.’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은 다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존재라 해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지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도 아시고 우리의 아픔도 다 아시고 도우십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1절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했습니다. 세계 많은 나라 중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해 세계 열방을 구원하시고자 하셨고, 세상에 허다한 사람들 중에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 주의 백성 삼으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했는데, 여기 구속 의 히브리어 가알 은 대가를 지불하고 무엇을 살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출애굽 할 때 애굽의 모든 장자를 희생시키면서 노예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3절에는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다하셨고, 4절에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주며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를 통해 죄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셨고 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벧전1:19, 고전6:19-20). 이러한 근거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께 붙잡힌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 붙잡힌 사람은,

 

1.주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구약 본문 4절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이라고 했습니다. 선민인 유대 백성들은 죄와 무지로 악을 행하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고 있는 상황 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처럼, 비천한 사람들처럼, 의지할 것 없는 소망 없는 불쌍한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보배롭고 존귀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잡힌 자이면서도 때로 고난 중에 있거나, 실패하여 어려움 중에 있거나, 질병으로 고통 중에 처할 때가 있지만 그런 중에도 여전히 주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며 사랑받는 자 중에 하나로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낡고 보잘 것 없는 바이올린 하나가 경매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이 1실링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방안에 폭소가 일어나더니 그 값으로 그에게 주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경매인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말했습니다. "누가 이 바이올린으로 한번 연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잠시 방안에 침묵이 흐른 뒤 한 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 노인은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몇 번 활을 시험해 음을 맞추고 나서 그 낡은 악기로 연주를 시작할 때 절묘한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에 매혹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끝났을 때 방안은 감동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다시 경매인은 바이올린을 들고 값을 물었습니다. "5파운드" "10파운드" 결국 "100파운드"로 낙찰되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그것은 전과 다름없는 바이올린이었는데---. 그 낡은 바이올린은 대가의 연주에 의해 명품으로 바꾸어졌던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낡은 바이올린처럼 우리들이 쓸모없고 무능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한 명품 인생으로 바뀔 수 있음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걸레는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걸레이고, 보석은 아무리 진흙탕에 묻혀 있어도 보석입니다. 주님께 붙잡혀 보배로운 자가 되면 아무리 허물이 많아도 주님이 보실 때는 여전히 보배롭고 존귀한 자가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는 배우지도 못했고, 출신, 신분, 직업 어느 하나 사람들 앞에 변변히 내 놓을 만한 것이 없었고, 거기다 허물도 많았던 자였습니다. 그는 다혈질의 사람으로 혈기라는 허물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무리들이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는 검을 빼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를 향해 내려치므로 귀가 잘라졌는데, 주님은 귀를 고쳐주시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얼마 후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고 하시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16;23)라고 말했다가 예수님께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16;24)라고 책망을 들은 자였고, 주님께서 잡혀가실 때 멀찍이 따라가다가 예수님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 했어도 주님은 그를 보배롭게 여겨 그를 통해 일시에 3천명이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오기도 하고,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그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병이 낫는 귀한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김 받고 사랑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 위해 바른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을 모르고 목표를 바르게 가지지 못하면 인생을 그르치게 되어 후에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따르게 됩니다. 모든 물건에는 그것을 만든 목적이 있습니다. 비행기, 자동차, 시계, 과도 등 모두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다. 그런데 과도로 과일을 깍지 않고 사람을 살상하게 되면 살인 무기가 되는 것처럼 사람도 목적이 잘 못되면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타락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생들을 통해 기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구약 본문 7절에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신약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는 목적을 잘 못 알고 살다가 주님을 만난 후 인생의 목적을 바로 알고 먹든 마시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했고, 살든지 죽든지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한다.‘하면서 본문 12-14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뒤에 있는 것을 잊고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이기 때문에 목적지가 있어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목적지를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소년 시절, 그의 가정교사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고 합니다. 선생은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왕자께서는 임금이 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희랍을 통일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소아시아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뒤에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점령할 것입니다." "그 뒤에는?"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손에 넣겠습니다." "인도 점령이 끝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 때쯤이면 저도 죽겠죠." 스승은 왕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신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멀리 돌아다니다 죽으나, 지금 죽어버리나 별로 큰 차이가 없겠습니다."이 이야기는 가치 없는 것에 목표를 두는 인생은 가치 없는 인생이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교훈입니다.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의 자기의 목표대로 왕이 되어 세상을 정복했으나 33세에 요절했는데, 그의 유언대로 자기의 빈 두 손을 관 밖으로 내어놓아 백성들에게 인생의 허무를 알게 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목표가 헛되면 인생도 헛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인생의 목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행인과 나그네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 아버지 집에 가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뚜렷해야 하는 합니다. 바울은 경주자와 같이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갔기에 죽음을 앞두고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 바른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살다가 바울처럼 그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늘 믿음에 굳게 서서 강하고 담대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두려움은 성도의 큰 장애물이고, 암초와도 같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에서는 기도와 명상도 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교육)이 들려오지도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 정탐 후 두려움 때문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이사야 42장에 이스라엘이 죄와 무지로 인하여 덫에 걸리고, 노략질을 당하며 고난과 어려움들로 두려움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사야 43장 초두에 하나님은 그러나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강력하게 권면하셨습니다. 주님은 큰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서신서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 박해를 받고 큰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주께서 밤에 환상가운데 말씀 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8:9)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담대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두려운 일이 많은 현실에서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택해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고 사랑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디언 최초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육학 박사가 된 바르텟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언청이로 태어나 부모의 학대와 형제의 멸시를 받으며, 친구들과도 가까이 하지 못하고 동네의 개와 쥐들과 함께 불쌍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을 잘 믿는 백인 여자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 여자는 소년을 데려다가 돌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외로움은 서서히 물러가고 새로운 사랑이 이 아이를 감싸게 되었습니다. 무관심과 멸시천대를 받던 이 아이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장 큰 평안과 기쁨과 담대함과 감격을 느낄 수 있었던 때는 학위를 받았을 때가 아니었고, 좋은 옷을 입게 되었을 때도 아니었고, 내가 쓰레기 더미에 있을 때 백인 아줌마가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아 주었을 때라고 고백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랑이 그를 담대하게 했고, 새로운 인생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어떤 역경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 중에서 귀환해야 할 과제 앞에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과 불 가운데 지날 때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신앙 때문에 풀무 불에 던져졌어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어 건지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 위기를 만날 때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그를 담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과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 7절에 내가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자라고 했습니다. 주님께 붙잡힌 성도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하신 자들입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어리석어 보여도 하나님의 명예를 드러내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어느 초등학생이 종업식을 마치고 어머니에게 와서 "엄마는 음악가가 좋아, 아니면 미술가가 좋아?"라고 묻자 엄마는 음악가도 좋고, 미술가도 다 좋단다.”라고 대답하자 책가방 속에서 통지표를 내어놓습니다. 음악: 가 미술: . 하하^^공부 못해도 주님께 붙잡히면 영광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소유 된 백성임을 믿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강하고 담대한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께 붙잡힌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께 붙잡힌 사람은,

.주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주님 위해 바른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늘 믿음에 굳게 서서 강하고 담대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아멘.

 

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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