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 (슥 14:1-11)
스가랴 14장의 개요를 간단히 말씀하면 슥 14장은 여호와의 날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과 열방의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스가랴서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여호와의 날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쳤던 예언의 중심 주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강림,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가리킵니다. 즉 우리 예수님이 구원자로 나타나셔서 자기 백성들을 모든 원수에게서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시고 복 주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은 그 날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고후6:2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임하는 날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고대하는 여호와의 날을 성령 안에서 지금도 맛볼 수 있다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은혜의 날이 임할 때 진정 온전케 하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의 날에 어떤 온전케 하심이 있을까요?
1. 참 신앙의 남은 자가 됩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고대의 정복전쟁에서 패자가 당하는 전형적인 재난을 묘사한 것입니다. 전쟁에서 진 자는 비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가운데서도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나무는 베어도 그루터기는 그대로 있음과 같이 하나님의 남은 자가 있습니다. 아무리 타락해도 참 믿음 가진 소수는 반드시 꼭 있어요. 예를 들면 다 타락했지만 타락하지 않은 노아와 같이,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그리고 요한계시록 3장에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에 흰옷 입은 소수의 참 신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남은 자입니다.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자입니다. 성령 충만 받았기에 변함이 없습니다.
은혜의 날이 오면 모두 이런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전쟁의 날에 당하는 시련과 같이 인간 이하로 이렇게 당하고 저렇게 당하고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누명을 쓰고 빼앗기고 고난과 고통과 죽음을 당해도 은혜 받은 성도는 그 믿음이 변함없습니다. 은혜가 이렇게 귀합니다. 영원히 불변한 믿음으로 만들어줍니다.
2. 이기는 생명으로 역사하여 주십니다.
3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하시리라” 옛날 전쟁의 날에 싸우시던 것 같이 싸워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주셨습니다. 정말 그래요. 성령 받으면 성령께서 내 앞서 역사하십니다. 옛날에는 미움을 물리치기가 어려웠는데 우리가 고민하기도 전에 주님이 앞서 가셔서 미움은 만날 수 없도록 처리하시고 우리에게서 용서와 사랑이 흘러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범죄하지 않게 하시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하시고 말씀대로 사는 은혜를 주십니다. 전에는 미리 대비하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성령께서 미리 알려 주시고 대비하게도 하십니다. 이 대신 앞서 싸우시는 은혜는 성령 충만 받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3. 피하는 은혜로 나타납니다.
4절에 “감람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감람산을 반으로 갈라 이스라엘에게 피할 곳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웃시아 왕 때 일어난 지진처럼 대 지진이 있어 피하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암1:1).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 “그의 산골짜기”란 ‘나의 산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골짜기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의 짐을 다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아래 모든 짐을 다 부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우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부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십자가에 우리 짐이 다 부려진단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4. 크신 능력과 은사와 역사가 나타납니다.
5절에 “ 모든 거룩한 자”란 천군천사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유1:14에도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했는데 수만의 거룩한 자는 천사입니다. 천사는 우리를 도우라고 보내신 종들입니다. 그러니까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온갖 은사와 역사와 능력과 축복으로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각종 능력과 은사가 임합니다. 천사의 도움이 바로 형통입니다.
5. 천국의 질서 아래 살게 됩니다.
6절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여기 빛이나 광명한 자는 해와 달과 별을 가리킵니다. 이 광명은 창 1장에 나오듯 이 지구에 징조와 연한과 사시와 연한을 이루고 빛과 어두움, 밤과 낮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 지배와 이 법칙을 거슬릴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날에는 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벧후3:10에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그랬습니다. 벧후3:13을 보면 그 때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그 날에 더 이상 세상의 광명이 필요가 없는 더 좋은 곳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 충만 받으면 성도는 몸은 지상에 살지만 영적으로는 천국의 질서 속에 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시면 그것이 해이고 그것이 달이고 별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기 전에는 외부 환경에 기분이 좌우했지만 은혜 받은 후에는 외부의 상황이 아무리 악해도 예수 안에 참 평안이요, 아무리 세상 법칙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법칙에만 충실하면 성공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는 세상을 살아도 천국의 사람이며 천국의 서비스를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6. 생명수가 강같이 흐릅니다.
8절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이스라엘에는 우기와 건기가 있어 겨울에는 물이 범람하고 여름에는 땅이 바짝 바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이 오면 사막에 샘이 넘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낙원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재림의 날은 물론이요, 성령 받으면 이렇게 낙원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7:38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이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요4:13). 그렇게 은혜가 귀합니다.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7. 하나님만 높이게 됩니다.
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여기 “홀로 하나”는 ‘유일하다,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란 유일해서도 나의 하나님이지만 나의 특별한 존재이시기에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재림의 날에 세상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 귀속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 받으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유일하시고 특별한 왕으로 대접하게 됩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나와 세상 것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은혜 받으면 온 천하에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변합니다.
8.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됩니다.
10절에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지대로 보면 아라바는 평원이고 예루살렘은 높은 산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세상의 높은 산들은 다 아라바와 같이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겸손하고 순종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도 와서 높은 산들로 낮아지게 한다고 했는데 실재로 낮춘 산은 없었고 이는 회개로 돌이키게 함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봐야 합니다. 대신 은혜 받으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만 우뚝 솟듯 하나님만 높이고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을 어떻게 아느냐? 기적이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겸손하고 하나님만 높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9. 평안과 사랑 안에 거합니다.
11절에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역사를 볼 때 예루살렘 얼마나 환난을 많이 당한 도성입니까?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저주는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은혜 받으면 새 예루살렘 축복을 받으면서 살게 됩니다. 저주는 다 사라지고 더 이상 염려도 불안도 방황도 목마름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모든 것을 다 몰아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에게 “은혜 받아라. 은혜 받아라.”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은혜 받아야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는 죽을 육체까지도 온전케 되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도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그 온전케 하시는 은혜를 맛보며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 받아서 더욱 온전케 하시는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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