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타고 오신 예수님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현상에서는 정의로운 자들이 불의한 자들에게 패배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정의를 포기하고 불의의 편에 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 속에서 용기 얻기를 원합니다.

 

어린양이 이제는 백마 탄 신적 용사로 등장합니다.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6:15)이 다가왔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철장으로 다스리는 아이(12:5)는 이제 심판하러 옵니다(19:15). 심판을 받은 자들은 공중의 새의 먹이가 됩니다. 13장의 두 짐승도 유황불 못에 던져지고, 어린양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바벨론 멸망 이후에 바벨론의 동맹 세력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제 용만 남았습니다(20:1-3).

 

백마를 탄 신적 용사(11-16)

성도는 십자가 군병으로 우리 앞에 나가 대적과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승리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요한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하늘의 군대들이 백마 탄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군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1-16)

17:1-19:10은 음녀 바벨론의 환상이고, 21:9-22:5은 신부 새 예루살렘의 환상입니다. 19:11-21:8은 음녀 바벨론에서 신부 새 예루살렘으로의 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다룹니다. 4:1에서는 하늘 문이 열리고 요한이 올라갑니다. 두루마리의 복음을 증언합니다. 19:11에서는 하늘 문이 열리고 신적 용사가 전쟁하러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듣고 보는 환상들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하늘 무대에서의 신적 활동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19:11 이후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을 볼 일도, 들을 일도 없습니다. 하늘이 역사의 시공간을 뚫고 땅에서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입니다.

요한은 계시록 앞 단락들에서 이 파루시아(19:11-21)를 예고하는 다섯 가지 지표들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1) 6:15의 인 심판을 받는 자들은 19:18에 등장합니다. 심판을 피한 자들이 이제는 새의 먹이가 됩니다. 6:17에 예고한 심판이 19:11-21에 기술됩니다. (2) 12:5에서 철장으로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어린아이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19:15에서 심판하기 위해 땅으로 돌아옵니다. (3) 14:20의 포도 추수에서 천사가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 틀에 넣습니다. 그런데 포도주들을 밟는 자의 정체는 남겨두었습니다. 19:15에서 그 정체가 밝혀집니다. 신적 용사인 그리스도입니다. (4) 16:14,16에서 악한 영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의 전투’를 위해 왕들을 모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계시록에서 여기와 19:15에서만 등장합니다. 왕들의 모음은 시편 2:2을 인유하는데 19:19에서 분명하게 반향 합니다. (5) 17:14에서 어린양의 타이틀은 짐승과 왕들의 정복자로서 19:16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추종자들은 19:14에서 하늘 군대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 다섯 가지 지표들은 파루시아 환상에서 수렴되어, 일종의 합주곡을 만들고 있습니다.

(1) 신적 용사의 등장(11-14)

성전(포)의 이미지가 전체 단락을 지배합니다. 바벨론을 배후에서 조종한 짐승들과 바벨론의 부역자들을 심판하러 옵니다. 구약과 쿰란 공동체와 열심당원들과 유대 백성이 기대했던 종말의 성전에 대한 기대를 반영합니다. 요한은 모든 기대를 넘어서서, 하늘에서 오는 신적 용사를 무대에 등장시킵니다. 스가랴 9장에서 나귀를 타고 행진하는 어린양은 이제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등장합니다. 로마제국의 역사적 라이벌이었던 동방의 파르티아 왕과 그의 기병대를 연상시킵니다.

신적 용사는 한편으로 대적을 심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도의 정당성 입증을 위해 오십니다. 하늘 군대도 백마를 타고 흰 옷을 입고 뒤따릅니다. 이들이 입은 옷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하늘 성소에서 섬기던 하늘의 군대입니다. 흰색은 박해를 받은 성도들이 ‘옳다고 인정’을 받는 정당성 입증과 관련된 색입니다. 신적 용사가 벌이는 전투는 문자 그대로의 전투가 아닙니다. 12장에서 미가엘과 용이 벌인 하늘 법정의 전쟁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악의 세력들과 싸웁니다. 하나는 정의로 심판하는 심판자입니다(11-12). 그래서 이름이 ‘충신과 진실’(신실과 참)입니다. 언약에 신실한 분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대적을 심판하고 그 백성이 옳음을 입증한다는 약속을 지키러 옵니다. 그래서 거짓과는 반대되는 참이십니다. 다른 하나는 신실한 증인(11장)입니다. 피 뿌린 옷은 신실한 증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의 피 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백마를 탄 기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자기만 아는 이름, 비밀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문학적 기교로 독자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a) ‘충신과 진실’로 칭합니다. (b) 자기만이 아는 이름입니다. (a')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합니다. 다른 누구에게 일려진 이름은 이마와 옷에 드러나 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름은 무엇입니까? 16절에서 드러납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입니다. 다리에 기록된 이름입니다. 용사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옷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드러나는 이름입니다. 자신만이 알도록 기록된 이름이지만, 요한은 세심한 독자가 눈여겨볼 수 있도록 문학적 장치를 해놓았습니다. 알지 못하는 이름은 여호와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름(nomen ineffabile, 필로, 모세의 생애 3:519, 529)입니다. 여호와는 대제사장의 이마에 있는 금으로 된 명찰에 쓰여 있는데, 유대인들은 읽을 때 발음을 하지 않기에 어떻게 부르는지 모릅니다.

(2) 신적 용사의 성전(15-16)

15절은 네 가지 구약 본문을 복합 인유합니다(이사야 49:2; 11:4; 시편 2:9; 이사야 63:2-6). 하나님 백성의 대적에 대한 심판을 말하는 본문들입니다. 입의 검(이사야 49:2; 11:4)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사야 11:4을 칠십인역은 ‘그 입의 호흡으로 악인들을 도살할 것이다’로 번역합니다. ‘검’의 은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합니다. 히브리서 4:12과 지혜서 18:15-16에서도 검증됩니다. 지혜서 본문은 하나님 말씀과 계명들을 동등하게 여기는데, 이집트인들을 응징하였던 ‘예리한 검’과 더불어 하늘 보좌로부터 튀어나옵니다. 두 본문에서 검의 은유는 심판의 실행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철장으로 다스리다’는 시편 2:9의 인유입니다. 시편 2:8-9, 12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불경한 왕들을 전복한다고 예언합니다. 이들 왕들은 주와 메시아를 대적하는 자세를 취하고 공모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63:2-6은 포도주 틀을 밟는 자의 정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벨론의 부역자들을 심판합니다. 포도주 틀에 있는 포도를 짓밟듯이 철저한 심판입니다.

 

짐승에 대한 심판(17-18)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악이 강해 보이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끝까지 인내하며 영적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악한 세력의 미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이 속히 오셔서 짐승과 추종자들에게 예비하신 궁극적인 심팜을 이루어 주시길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17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17-18)

심판과 구원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음녀 바벨론이 주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여 부역했던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천사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그 군대에 다가올 멸망을 에스겔 39:4, 17-20에 선포된 곡과 마곡의 패망에 사용된 이미지를 사용하여 선언합니다. 포식성 새들의 초대는 다가올 패망의 확실성을 비유적으로 강조합니다. 왜 이 시점에서 에스겔을 인유하고 있습니까? 악의 세력의 말세의 패배를 언급하고 있는 다른 구약 예언들(다니엘 2, 7-12장; 스가랴 14장)에서도 도출할 수 있었겠지만 에스겔 39장의 그림이 포함된 이유는 이 단락의 주요 요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곡과 마곡을 패망시키신다, 이스라엘을 압제한 자들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그의 거룩한 이름을 알게 만드십니다. 신적 이름의 계시가 주목적입니다. 그리스도도 심판과 구원을 통해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이름을 열방에 알릴 것입니다.

 

두 짐승의 심판(19-21)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두렵지만,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심판이 두려움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과 함께 승리의 영광을 얻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실하시고 참되시며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를 원합니다.

19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1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19-21)

이 단락은 16:14와 20:8의 복사판입니다. 요한계시록 19:19은 16:14과 20:8에서와 같이 최후 전쟁에 대한 동일한 전주곡을 언급한다. 16:14에서 귀신의 영들이 온 땅에 거주하는 왕들을 불러 모아서 함께 전쟁을 일으키려고 미혹합니다. 20:7-8에서 사탄은 열방, 즉 곡과 마곡을 미혹하여 그들을 함께 불러 모아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나올 것입니다. 왕들과 그들의 군대는 자신의 힘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귀신의 영향력으로 모여듭니다. 여기서 전투는 그리스도와 그의 하늘 군대를 대항하여 수행됩니다. 시편 2:2의 인유입니다. 전투 결과는 두 짐승의 포획입니다. 13장에서 등장한 두 짐승으로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입니다. 유황불 못에 던져져서 그리스도의 칼로 처형되고, 그 시신은 공중의 새들이 먹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중인 이야기의 패러디입니다. 두 중인과 같은 처벌을 받는데, 살아나지 않고 비참하게 죽어 장사도 치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원수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은 모든 성도가 소망하는 바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멸망,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예언은 현실에서 악의 세력에 핍박 받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절대로 절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승리는 내 것일세(롬 7:7-25)

우리나라 군대에서 소대장이 부하들을 모아놓고 정신교육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국군이 북한군의 전력에 비해서 공군력은 확실히 우세하고 해군력은 비슷하다. 문제는 육군이다. 육군의 전력이 북한군보다 열세하다. 과연 너희들은 북한군과 일대일로 싸울 때 한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가?”

한 용감한 병사가 손을 번쩍 들면서 “저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을 책임지겠습니다.” 그랬더니 옆의 병사가 덩달아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그럼 이 친구가 내 몫까지 맡았으니 집에 가겠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려서 디즈니 만화 영화를 참 좋아했습니다. 주일 아침 8에 방영을 했습니다. 즐거운 주일 아침이 디즈니 만화 영화와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때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습니다.

도널드 덕이 선택의 기로에서 선한 길과 나쁜 길의 갈등에 서 있습니다. 날개 달린 천사 도널드가 나타나서 도널드를 좋은 길로 가라고 격려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시커먼 옷을 입고 삼지창을 든 마귀 도널드가 나타나서 편한 길을 선택하라고 유혹합니다. 대개 도널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편한 길을 선택했다가 큰 코를 다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1. 내면의 전쟁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15절로 23절의 말씀을 보면 믿는 자의 내면에서도 선과 악을 향한 갈등이 있다고 말합니다. 내 마음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데 내 육체는 악을 행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하는데 내 겉 사람은 죄의 법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내 마음, 속사람은 같은 의미입니다. 내 육신, 지체도 같은 의미입니다. 두 세력이 서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진정한 내 모습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속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롬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노라
(롬7:25)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

이것이 진정한 자아입니다. 변화된 내 모습입니다. 거듭난 내 영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영혼은 변화되었으나 여전히 내 육신은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이런 선과 악의 내면적인 갈등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양심이 있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와의 싸움을 하게 됩니다. 높은 도덕률과 윤리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고 양심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나쁜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만약에 차이점이 없다면 심각해집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똑 같이 선과 악의 내면적인 갈등이 있는데 믿는 자가 고민하다가 그만 악에게 끌려 다닌다면 굳이 믿을 필요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다면 내면적인 갈등이 있을 때 반드시 선을 선택하여 승리하는 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이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승리가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이요. 믿는 자는 승리가 이미 보장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속사람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점이 다른 점입니다.


2. 승리가 보장된 전쟁

믿지 않는 자들도 때로는 선과 악의 기로에서 선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선을 많이 행한다 할지라도 죄악을 행한 것에 대한 죄 값을 치를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또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죄악과 쾌락의 노예가 되어서 인생을 허비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승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내면적인 갈등이 있다 할지라도 이미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이겨놓은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고, 우리는 그 은혜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이겼다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우리는 연합군의 승리 때문에 해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 때문에 해방되었고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입니다.

1)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시103:12)

처음 믿을 때 죄 사함 받은 것은 영원한 죄 사함이요 완전한 죄 사함인 것입니다. 내 생각에 회개를 철저히 했다고 생각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받으시고 완전하고도 영원한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2)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딤전4:5)

예수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십자가로 이기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유혹이 우리를 붙잡아두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한 번 죄악에 빠지면 브레이크 없이 점점 더 타락하였는데, 이제는 가끔씩 이전 버릇이 나와도 머물러 있지 않고 얼른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죄의 영향력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죄의 존재로부터 해방(요일3:2,3)

이미 구원 받았지만 아직 우리 육체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죄를 많이 짓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 육체가 부활하게 되면 육체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처럼 죄의 본성이 없는 거룩한 육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가 보장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자가 새끼들에게 사냥법을 훈련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미 사자가 팔팔한 사냥감을 한 마리 잡아서 앞발로 한 번 휘둘러서 제대로 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물을 새끼 사자들 앞에 풀어놓았습니다. 새끼 사자들은 만만하게 보고 달려들지만 그 동물은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칩니다. 그러면 어미 사자가 어느새 그 쪽으로 달려가서 길을 막고 한 때 딱 때립니다. 비틀거리는 사냥감에게 새끼 사자들이 달려들어 마지막 숨을 끊어놓습니다. 새끼 사자들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적인 전쟁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이미 예수님에게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앞장세우고 이빨 빠진 마귀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면 죄와 마귀는 우리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3. 승리를 위한 세 가지 깨달음

본문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세 가지를 깨달음이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롬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을 모를 때에는 탐나는 것이 있으면 그냥 슬쩍했습니다. 조금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그것이 나를 제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것이 도둑질이요 죄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았습니다. 그 죄를 씻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도 알았습니다.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심각하게 된 것입니다.

(롬7:13)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게 하려 함이니라

이처럼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 죄를 지었을 때는 심각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우리의 육체는 얼마나 부패하고 죄악이 가득한가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여기까지입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우리가 얼마나 죄인임을 깨닫게 하지만 율법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고 죄책감이 있다면 그것은 율법이 작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궁극적인 승리에 도달합니다.


2) 나의 무능을 깨닫는 것입니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율법을 통하여 죄인임을 깨달았으니 그 때부터 사람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죄를 안 짓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모순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궁극적인 승리로 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 하나하나가 우리를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로 이끌어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3)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율법을 많이 알았던 자입니다. 그 만큼 그는 열심을 가지고 주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자신은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패한 내 육체를 이길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처절한 외침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알고 죄인임을 깨달았지만 내 힘으로는 도저히 선을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승리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십자가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죄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도우시는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앉아도 예수, 일어나도 예수, 앞으로 가도 예수, 옆으로 가도 예수, 잠자리에 누워서도 예수. 항상 예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오직 예수로 결론이 나지 않으면 내 힘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갑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 이것은 제가 지고 가야하는 삶의 무게입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오직 예수, 주님만 바라보고 살게 하소서. 주님만 바라볼 때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루하루 생활 가운데 실현됩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고 순간순간 기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와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너무나 부족합니다. 날마다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시계를 자꾸 보는데 시계를 보는 것처럼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어제 새벽 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에게 다가가서 안수를 하는데 이 분이 진동을 하면서 방언으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방언을 하셨느냐고 물었더니 작년에 집에서 반신욕을 하면서 기도하는데 진동이 오더니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할 때마다 진동이 오고 이상한 소리가 나오곤 해서 이것이 방언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반신욕을 하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삶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운전을 하면서 기도하다가 방언의 은사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전도자 디엘 무디 목사님은 기도시간에는 성령충만을 받지 못했는데 길을 가면서 기도하다가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850년 1월 6일 주일이었습니다. 영국의 콜체스터시는 심한 눈보라로 도시 전체의 교통이 마비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도시에는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15살 짜리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주일이었지만 심한 눈보라에 교통이 마비되었기에, 소년은 자기 교회에 가지 못하고 집 가까이에 있는 작은 교회에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안에 들어가 보니 그 교회 목사님도 눈보라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어느 평신도가 강단에서 말씀을 봉독하고 있었습니다. 몇 명되지 않는 성도들이었지만 강단에 선 성도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45:22의 말씀을 읽었습니다."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는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평신도였기에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설교를 해본 경험도 많지 않기에 떠듬떠듬했습니다. 그는 그저 본문 말씀만 자꾸 반복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름 없는 성도의 반복적인 외침에 그 소년은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보았습니다."나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가?"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설교자는 그 소년을 손가락으로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젊은이여, 당신은 몹시도 피곤해 보입니다. 젊은이여, 처절하게 살다가 처절하게 죽지 않기를 바랍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그때 그 한 마디의 외침은 그 소년의 잠자던 속사람을 완전히 깨워주었습니다. 그는 그때의 일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일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위대한 설교가 스펄젼이었습니다.
스펄젼은 뒤에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러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때의 그 말이 계기가 되어 나의 속사람은 비로소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를 덮고 있던 모든 구름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나를 뒤덮고 있던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며 나는 내 생애에 처음으로 의의 태양을 보았다."
스펄젼은 이날 비로소 죄의 권능에서 해방되어 거듭나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곤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십시오. 운전을 하면서 길을 가면서 기도하십시오. 방언의 은사를 받으신 분은 방언으로 기도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주님은 우리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줄로 믿습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믿는 자의 받을 성령   (요한복음 7:37~39)


본문 37절에 보면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초청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목마르다’는 말은 인생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38절)고 하신 말씀은 예수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39절)을 의미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인간은 누구나 고통과 고난 속에 태어났지만 예수를 믿는 자는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그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강 같은 기쁨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은

첫째, 육체의 고통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욥 33:19) 인간은 이런 저런 많은 질병으로 인하여 육체의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할 때는 육체의 고통이 물러가고 병도 낫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의 원동력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도도 하게 되고, 찬송도 부르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인간의 의술로 고치지 못하는 병도 고침 받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많은 병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나았습니다.
성령은 육체의 고통을 치유해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육체에 희망을 줍니다(행 2:26). 그리고 영광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벧전 4:14). 또한 우리 몸을 성령의 전이 되게 해주십니다. 고린도전서 6:19,20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둘째, 심적인 고통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육체의 고통도 힘들지만 심적인 고통은 더 힘듭니다. 육체의 상처는 약으로 치유될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잘 낫지 않습니다. 욥기 7:11에 보면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고 소망과 위로와 기쁨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마음의 평강을 유지하려고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4:18에 보면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악하게 사는 사람은 그 마음에까지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육체의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은 마음의 고통을 주는 사람입니다.
에스겔 36:26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은 우리 속의 굳은 마음을 다 제거해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 마음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셋째, 영적인 고통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인간의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영적인 고통입니다. 영적인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때 오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성령의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욥기 7:11에 보면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면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감사한 말을 하게 되지만, 영혼의 고통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원망한다는 것은 벌써 마음에 평안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누가복음 16:23,24에 보면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영혼의 고통은 바로 지옥의 고통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위에 영적인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찾아 주께로 인도하여 치유 받게 해주어야 합니다.
시편 118:5에 보면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혹 영적인 고통이 있습니까?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성령께서 영적인 고통을 치유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우리 인생의 모든 연약함을 다 책임져 주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할 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승리할 수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실력이나 경험을 앞세우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성령께서 모든 일에 승리하게 해주시고 돌봐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섯째, 항상 소망이 넘치도록 축복해주십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소망이 넘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달려가도 걸어가도 곤비함이 없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는 것도 성령은 되게 하십니다(슥 4:6). 성령의 능력으로 항상 소망이 넘치는 축복이 있을 때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충만히 받아 육체의 고통과 심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을 치유 받고, 연약함에서 벗어나 항상 샘솟는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피종진 목사 설교  중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 ( 19:6-10)

<성경 본문>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다양한 견해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한 견해를 보면 ‘하늘에 집결된 성도의 전 회중이다. 구약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부관계로 표현하였듯 예수님도 영적 신부인 성도들의 신랑으로 비유하셨다. 구속받은 큰 무리다. 창녀 바벨론을 심판했으니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가 결혼식 하는 것만 남았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영접되어 누리게 될 내세의 복된 생활을 가리킨다. 재림 후 성도들이 부활하거나 휴거 되어 천년왕국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모습이다. 지상의 교회가 들림을 받아 공중에서 주를 맞이하여 가질 엄숙한 혼례식이다. 7년 환난 마지막 끝에 혼인잔치가 베풀어진다. 요한이 단지 천년 뒤에 있을 그 축복 기간을 미리 상상하여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한 지참금을 다 지불함으로 사신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은 하나님 백성들의 다양한 휴거 후에 올 것이다. 이 혼인은 주님의 통치 곧 왕국을 가져오며 초청된 손님들이 단체적인 신부인 동시에 신랑과 공동 왕이 될 것이다. 이들은 14만 4천의 성도들이다. 7년 환난 전에 들려 올라간 교회만 신부 될 자격이 있다. 이 잔치는 영원무궁토록 계속된다. 휴거된 후에 심판대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받을 자격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등이 있습니다. ☞ 복음으로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항구적 임재의 삶’을 보여 줍니다.

<임재의식과 임재체험>
요14:16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임재의식 - 체험 유무를 떠나 함께하신다는 믿음
임재의 체험 - 함께하심을 느끼는 행복과 친밀한 교제

<임재의 체험>
ㄱ. 거룩과 사랑의 조건입니다.
ㄴ. 비교 불가한 최상의 행복과 영광입니다.
ㄷ. 신앙훈련을 위해 임재의 체험을 활용하십니다.
ㄹ. 그보다 먼저 주님을 사랑함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항구적인 임재를 위하여>
1.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믿음 - 6절 “또 내가 들으니"
2. 주님과 그 말씀에 순복 - “통치하시도다”
3. 성령의 은혜로 충만 -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4. 사랑과 믿음으로 기뻐함 - 7절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5. 신부 수준에 이르러야 -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6. 거룩함으로 단장 - 7-8절 “자신을 준비"

<어린양의 혼인 잔치>
1. 영원불변의 진리 - 9절 “기록하라"
2. 지극히 복된 잔치 - “복이 있도다”
3. 감격 중의 감격 - 10절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4. 이 수준에 이르면 귀히 쓰심 -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5. 사역의 비전 - 온전한 신부로 세우는 일

<임재의식과 임재체험>

14:16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약속하신 것처럼 주님은 믿는 자에게 영원히 임재해 계십니다. 그러므로 체험이 있든지 없든지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임재의 체험은 약간 다릅니다. 임재의 체험의 행복과 감격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만큼 복됩니다. 그런데도 그 감격을 놓치고 홀로 외로울 때가 많았다면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로서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12:14, 16:16-17:1).

 

<임재의 체험>

. 거룩과 사랑의 조건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재림의 날에 성도들이 공중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원히 함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감사한 것은 재림 이전일지라도 주님을 진실로 믿고 사랑하면 함께 하셔서 그 임재를 누리게 하십니다. 항구적인 임재의 조건은 거룩과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19:1-5에서 음녀에 대한 심판선고와 화형식을 이어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비교 불가한 최상의 행복과 영광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4번째 할렐시로서(19:6)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며 기뻐하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우리 인생에서 최대 최고의 영광된 사건이 될 것이고, 살전4:17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 대로 주님은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 신앙훈련을 위해 임재의 체험을 활용하십니다.

13:5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듯 주님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나, 우리의 신앙 여부에 따라 임재의 체험을 하게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합당한 자로 만들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임재의 체험이 없다면 죄를 멀리하고 믿음과 사랑 안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 주님을 사랑함으로 행복해야 합니다.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한 말씀처럼 행복의 기준을 임재의 체험에 두지 말고 사랑과 믿음 안에서 주님을 생각해도 행복이 넘쳐야 합니다. 즉 주님이 주시는 은혜 때문이 아니라 주님 자신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항구적인 임재를 위한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1.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찬양이 시작되는데 이 찬양은 앞의 5절에서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말씀으로 보아 하늘에 속한 신부들의 찬양입니다. 그리고 그 음성은 아6:10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한 왕후 술람미에 대한 묘사가 연상됩니다.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으니 그 음성이 수많은 천사와도 같았고(2:13, 5:11),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니 예수님의 음성과도 같았고(1:15), 그리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았으니 하나님 아버지나(4:5) 네 생물과도 같은 소리였습니다(6:1). 목소리가 그 실체의 내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음성만으로도 신부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즉 많은 물소리처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1:16-17, 4:15), 큰 우렛소리와도 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죄와 사탄에 대해서는 엄중하고(19:2, 97:10, 12:9, 12:28-29), 천사의 허다한 무리와 같이 경배하고 순복하고 충성하고 헌신적인 모습입니다(벧전3:5-6, 21:9). 이 소리는 하늘의 속하고 능력 받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소리로,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경외의 믿음이 충만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런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이 있을 때 항구적인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2. 주님과 그 말씀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여기 ”, “하나님” “통치하시도다 한 세 낱말에서 볼 수 있듯이 절대 순종의 하나님 주권 신앙이 확립되었고,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고(6:4-5, 73:23-25, 고후6:14-16),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통치가 되는 온유와 순종의 사람입니다(5:22-23, 벧전3:5). 5:22-2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한 말ㅆ과 같습니다. 예수를 주로 삼고 순복함은 항구적인 임재를 위한 필수적인 자세입니다. 반면 잠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25:24) 한 것처럼, 교만하고 불순종한다면 항구적인 임재를 누릴 수 없습니다.

 

3.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한 것처럼, 성령의 충만과 전능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난 열매를 보더라도 누구도 금지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열매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변화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점도 하나님의 전능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는 찬양은 하늘 신부들의 체험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반증으로 은혜 생활하지 않으면 사탄이 우리를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항구적인 임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김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4. 신랑 예수님을 사랑과 믿음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우리라는 복수형에서 보듯이 이 즐거움과 기쁨은 신랑 예수를 사랑하는 신부들의 기쁨입니다. 마치 산골인 수넴에 살던 술람미가 솔로몬 왕에게 시집을 왔으니 기쁘기도 하지만 신분을 생각할 때 얼마나 떨렸을까요? 한때는 산골 여자와 결혼한다는 왕궁의 질타도 있었다는 점에서(2:11-12), 사랑하는 신랑만 바라봐야지 휘황찬란한 궁궐과 제복 입은 문무백관이나 반대 목소리를 냈던 이들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갈5:16-18 항상 기뻐하라 -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했듯, 신부들의 즐거움과 기쁨은 예수의 복음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모신 자는 그 안의 모두를 다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의 기준을 임재의 체험에 두지 말고 사랑과 믿음 안에서 주님만 생각해도 행복이 넘쳐야 합니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열심히 훈련해야 할 주제입니다.

 

5. 그리스도의 신부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여기 이르렀고 엘덴 오다.’를 의미하는 엘코마이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직설법으로 혼인 기약(期約)이 현재 이르렀음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여기 '엘코마이'는 내가 "속히 오리라"(22:7)하실 때도 쓰였듯 문법상 현재형입니다. 문법적으로 보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이르러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재림과 함께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있는데(살전4:16-17) 그렇다면 이미 재림하신 것인가? 이것은 재림의 시제를 이해하지 못해서 오는 의문입니다.

 

즉 주님은 초림으로 오셨고, 지금도 믿는 자에게 임하셨고, 사모하는 자에게 더 충만히 임하시길 원하시며, 장차 온전히 오실 것이라는 재림의 시제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육체까지도 변화시키시고 온전히 함께하시기 위하여 장차 재림하십니다. 그런데 호6:3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신 것처럼, 지금도 합당한 믿음을 가진다면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장성한 신부의 수준에 이르러 항구적인 임재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6. 거룩함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합니다.

 

7-8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여기서 우리가 준비할 것이 자신입니다. 즉 하나님은 다른 무엇을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한 말씀처럼 아내가 준비할 것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입니다(요일3:2-3, 벧전3:3-5).

 

그런데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 입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은 이처럼 거룩함과 사랑함으로 잘 준비한 자에게 혼인식에 임하도록 신부의 예복을 입도록 허락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함과 거룩함에 도달하지 않으면 아직 신부의 수준이 아닙니다. 45:10-11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했듯, 땅의 나라에서 하늘나라로 시집을 왔는데 아직도 고멜과 같이 세상을 못 잊어 집착한다면 신랑이 좋아하겠습니까? 이제는 세상 것 다 떨어버리고 예수님께 온전히 마음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막9:2-3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한 말씀처럼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거룩함으로 변화된 행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깨끗하되 죄를 버림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신부의 얼굴은 주님을 기뻐하고 사랑함으로 빛나야 합니다. 선물 때문이 아니라 주님만 생각해도 행복해서 견딜 수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사랑과 거룩으로 단장하면 우리를 고독함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기대해도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 약속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여기 기록하라라는 말씀은 성경을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기록하라 하시고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복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창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신 말씀에서 엿보듯,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참된 평안과 행복을 모른 체 고독과 어둠과 사망의 불행한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심으로 회복하셔서, 성자 하나님이신 자신과 신비적 연합을 이루게 하셨는데, 그 연합의 완성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야말로 본래적 회복이요,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이요, 성숙한 신부로서 인격적인 연합이며,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평안과 행복과 기쁨입니다. 이처럼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영원 전부터 계획된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2. 이 잔치는 지극히 복된 잔치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셨는데 청함을 받는 자가 복됨은 부르심에 응할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46:3-4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하셨듯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잔치가 복된 것은 의 주님이 우리와 온전히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3. 이 잔치는 감격 중의 감격입니다.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여기서 요한이 얼마나 감동했으면 부지중에 천사에게 절하고 마는 실수를 범합니다. 이단 배격자로 유명한 요한이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것은,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얼마나 복되고 감격스러운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수라기보다 일종의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만왕의 왕 예수님의 왕후로 간택되었다는 것은 놀라서 기절해야 할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며 날마다 감격 가운데 사시기를 바랍니다.

 

4. 이 수준에 이르면 귀히 쓰십니다.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또다시 놀라운 것을 봅니다. 그가 분명 천사였는데(9) 그 천사가 말하기를 난 네 형제와 같이 된 종이라고 자기 본래 신분을 드러냅니다. 즉 그의 감동적인 메시지 앞에 경배까지 할 정도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나도 너와 같이 예수 믿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 수준에 이르면 천사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됩니다(14:12, 고전3:9).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 증거로 다음 절부터 대장 예수를 따르는 백마 탄 하늘 군대가 나옵니다.

 

16:15-20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하신 것과 같이 주님이 더불어 일하시는 천사와 같은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온전한 믿음과 사랑의 수준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5. 놀라운 사역의 비전을 발견합니다.

 

천사가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신 것처럼 영광을 사람에게 돌려서도 안 되고 그 영광을 우리가 받아서도 안 됩니다. 한편 여기 형제 천사는 우리 사역자들에게 놀라운 비전을 줍니다. 요한이 실수로 엎드려 경배하려 할 만큼 우리 사역에 하나님이 온전히 함께하심도 비전이지만, 신랑 되신 예수를 전하며 성도를 온전한 신부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복된 사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랑 예수님 만날 준비 되셨습니까? 재림의 그 날은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지만, 확실한 것은 이 순간에도 자신을 거룩하게 준비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과 함께하는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할 벅찬 소망을 품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더 주님만 사랑함으로 항구적인 임재와, 장차 더 온전한 것을 가득히 안고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는 가장 복된 예수님의 신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매맺는 삶을 위한 확신 (롬 7:1-6)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거룩한 자녀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한 열매는 내 노력과 의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은 것처럼 열매도 전적인 은혜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매 맺는 삶을 위한 믿음의 확신입니다.

두 가지 믿음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나는 예수님과 결혼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은 나로 하여금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 열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반드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열매 맺는 삶을 위한 확신에 거하시고 실제로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 과거에 나는 율법과 결혼한 사람이었습니다.

(롬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었으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성경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결혼관계를 비유로 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부일지라도 배우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서로에게 법적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에 배우자가 살아있는 데도 다른 이성과 결혼을 했다면 그것은 간통이요 간음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은 자유롭게 됩니다. 새로운 이성을 만나서 재혼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율법과 결혼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전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매우 엄격하고 관용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잘못을 했을 때는 여지없이 책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무서운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잘못하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부족한 아내인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남편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지옥 같은 결혼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서운 남편인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여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하고 새로운 남편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전 남편에게서 벗어났을까요? 남편인 율법이 죽었기 때문일까요?

성경은 남편인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라 아내인 내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실 때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나도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앞에 나온 비유 그대로 전 남편인 율법이 죽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과의 결혼관계에서 내가 자유롭게 되는 길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 현재 나는 예수님과 결혼하였습니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이미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전 남편인 율법과 합법적으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나에게 더 이상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아닙니다.

호적상에 사망신고가 되었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출생신고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살면서 새로운 남편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 내가 만나게 된 좋은 신랑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새 남편에게로 갔습니다. 본문에 말하는 바대로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인 것입니다.

새로운 남편은 너무나 좋은 남편입니다. 전 남편인 율법과 비교했을 때 새 남편인 예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십니다.

전 남편이었던 율법은 잘못을 하기라도 하면 무서운 얼굴로 책망하고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고 호통을 칩니다. 하지만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남편입니다. 잘못을 했을 때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가르쳐주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고 호통을 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대신해서 책임을 지고 감싸줍니다. 정말 좋은 남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남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남편입니까? 율법 같은 남편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좋은 남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약 성경에 전 남편과 헤어지고 새 남편을 만나서 행복하게 된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을 설명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룻이라는 모압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베들레헴 출신 유대인이었습니다. 남편의 집안은 원래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근을 피해서 고향을 버리고 우상숭배가 가득한 이방의 나라 모압 땅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룻은 이 때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룻의 시댁에 불행이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뒤 이어서 시아주버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급기야 룻의 남편까지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시댁 집안은 과부가 된 여자 셋뿐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손위 동서와 룻 자신뿐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을 그네들의 친정으로 보내고 자기 혼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룻은 기특하게도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서원하며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남편 집안 사람인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율법에 정한 대로 남편의 형제들이 없으면 친척 가운데 제일 가까운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제도에 의해서 룻은 새 남편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믿음과 인격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겸손과 충성됨을 기쁘게 여겼고 룻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룻은 새 남편을 만나서 너무나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오벳이요 오벳이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을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습니다.

룻은 과거에 죄인이었습니다.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우상숭배의 죄 가운데 있던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남편을 잃어버린 청상과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불행을 딛고 행복을 얻게 하였습니다. 너무나 좋은 남편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린 것입니다.

룻과 같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룻처럼 죄인이었고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능한 남편 밑에서 숨도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새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3. 예수님이 열매 맺게 하십니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열매 맺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어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결혼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는 마치 포도나무의 가지가 절로 포도송이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주렁주렁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서 어떻게 열매를 맺게 하실까요? 그것은 행복한 부부 관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행복한 부부는 자연스럽게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두 사람은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고 육체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가면 배가 부르기 시작하고 열달 후에 두 사람을 닮은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자녀를 양육하면서 사랑과 기쁨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어집니다.

혹시 결혼하신 부부 가운데 자녀를 낳기 위해서 저녁마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신 분이 계십니까? 머리띠를 두르고 결심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고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고 행복해하고 미소 짓다가 보니까 어느 새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새근새근 자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처럼 부부는 사랑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입니다. 신부가 누구를 봅니까? 다른 남자를 자꾸 쳐다보고 엉뚱한 데 쳐다보면 되겠습니까? 부부싸움이 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결혼했는데 자꾸 세상의 것들을 좇아가고 사랑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자꾸 대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철없는 신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 얼굴을 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남편이십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남편에게 영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에게 순종할 때 아내가 더 높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사람은 남편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찬송가를 흥얼흥얼 부르고 다니는 사람은 예수님과 데이트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남편을 홀로 독수공방을 만드는 아내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내입니까? 순종하는 아내입니까? 아니면 남편을 독수공방하게 만드는 아내입니까? 부디 철없는 아내가 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열매를 맺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게 됩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이런 열매들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제 더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사모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님과 결혼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저절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함께 고백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이전보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강림주일   (행 2:1-4)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첫째는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하는 사건과 둘째는 내가 그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사건일 것입니다. 성령님이 초대교회에 임하신 사건은 지구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것이 인류 최대의 사건이냐 하면 비로소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절을 교회의 생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 받기 전까지는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야 했는지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으로는 도무지 풀지 못하는 문제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풀리지 않던 사건을 풀리도록 한 날이 성령님의 강림일 입니다. 이 날은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후 오십 일째 되는 날이기에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이 보혜사란 영어로는 돕는 자,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슬픔을 당하고 있을 때 몹쓸 병에 걸려 있을 때 하나님이 언제나 동고동락하시면서 우리의 주인으로 함께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없이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주의 일을 한다는 것처럼 고문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목회 한다는 것처럼 저주는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되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고,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이고, 사람이 거듭나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며, 능력과 기적도 성령의 역사로! 열매 맺는 신앙생활, 능력 있는 신앙생활도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함께 행1:4, 5절을 읽겠습니다. "4)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10일이 지난 후 성령님은 강림하셨고 모여서 기도하고 있던 120명의 사람들을 사로잡으셨습니다.

이 약속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때로부터 약 830년 전에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진 약속이기도 합니다. 욜2:28,29절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고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누구에게 주십니까? 행2:3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만이 아니라 어떤 제한된 숫자나 특별한 사람에게만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먼데 사람! 즉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든지 부르시는 사람"들 속에 저와 여러분이 들어 있는 줄 믿습니다. 이 약속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부어준다는 약속입니다.

특별히 38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무슨 말씀입니까? "회개한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모든 먼데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러니 이 약속은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약속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받은 여러분들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행1:8절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권능을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헌신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하여 여러분의 일생을 드리기를 원합니까? 어느 정도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두 이 질문에 "아멘"을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령을 대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외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행1:15절에는 이 사람들의 수가 120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는 열두 사도가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도 그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중에 있었고, 예수님의 동생들이었던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누이동생들(마13:55-56, 막6:3),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던 여인들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집 안의 장남 아닙니까? 장남이 집 안을 책임져야 하는데, 매일 밖으로만 나돌고 집 안 일은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에게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지요? 요한은 아예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요7:3-5)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했던 이 형제들이 120명중에 있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 성령 강림 역사를 소개하면서 중요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은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같이 기도를 해도 서로 다른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들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어 "주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역사하십니다.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대선의 모든 식구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고 서로 사랑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리워하는 오순절의 모습입니다.

2.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임하셨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임하셨습니다. 어떤 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습니까?
  
첫째는 약속을 붙잡고 기다렸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인 장소는 "다락방"(행1:13)이었습니다. 일명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승천하실 때, 승천의 광경을 바라본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오순절 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승천 할 때 예수님의 분부하심을 들은 사람은 500여명 정도였지만 10여일 동안 그 약속을 변함 없이 믿고 기다린 사람의 수는 120명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1:14)

어떤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붙잡고 기도에 전무 하는 사람들입니다. 부디 약속의 말씀을 강하게 붙잡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관심이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남아서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성령 받는 일보다 더 관심 있는 일이 있는 사람들은 그 곳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정말 관심을 많이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동참하는 성도들을 볼 때에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더욱 주님과 교회에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일과 주님의 교회에 대한 관심이 그 외의 어떤 것에 대한 관심보다 더 크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먼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들은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소리가 많습니다. 많은 소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소리가 있습니다. 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습니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전에는 없었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방언을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오순절에 주신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요20:19-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것이 성령을 주신 목적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내 보내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심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확신하시고 이 고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우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인하여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령강림절에 이것을 기대합니다.

1)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불신자가 신자로, 전에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그들이 하나님으로 채워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2) 인격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을 장악하기 시작하니 인격이 변화됩니다. 삶이 변화됩니다. 언어가 변화됩니다. 생활이 달라집니다. 열매가 없었던 사람이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3) 능력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들의 몸을 통해서 나타나니 그들이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결심해도 되지 않던 일이! 마음을 먹어도 되지 않던 일이! 그렇게 몸부림치고 안타까워 울어도 되지 않던 일이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립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심령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행2:26) 즉 마음의 기쁨과 육체가 희망이 나타났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다윗의 예언이지만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이와 같이 썩을 수밖에 없는 육체이지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말하기를 "마음이 즐거우면 종일 걸어가도 피곤치 않지만, 마음이 괴로우면 십리길만 가도 지친다."고 했습니다. 스펄젼은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는 웃는 은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만이 참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오순절 사건은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적인 사건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신실하게 기도하고 성령을 대망 하는 성도들과 교회들에게서 오순절 적인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는 줄 믿습니다.

모쪼록 성령강림절에 우리 모두 성령을 대망 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존재의 변화, 인격의 변화, 능력의 변화, 심령의 변화를 맛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강림주일설교. 각 사람에게 충만하게 임하신 성령 하나님 (사도행전 2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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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는데,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아버지께서 약속 하신 것을 기다리라”( 1:4,5)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그 대로 열흘이 지나서 성령이 강림 하셨습니다. 이날을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이라고 부르는데, 오순절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오늘입니다.

 

특별히 올해 성령 강림주일에는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현장예배를 회복하는 의미로, 총회의 지침에 발맞추어 오늘을 예배 회복의 날로 선포하며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2천 년 전에 강한 바람소리와 함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하셨던”( 2:2,3) 성령 충만의 역사가, 오늘 예배하는 00교회의 모든 성도의 머리위에, 심령위에, 삶의 모든 시간 위에 회복으로, 능력으로, 소망으로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는 다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도, 성령이 누구이신지, 성령이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세 가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 성령은 누구신가에 대해서, 2. 성령은 어떤 일을(나에게) 하시는가에 대해서, 3. 마지막으로 성령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짐)을 고백해 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를 말씀 드릴 때 성령의 큰 감동 주심으로, 성령의 실체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첫째, 성령은 누구이신가?(어떤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해 오해하거나, 너무 쉽게 생각하기를, 성령은 능력이나 힘(Power)을 행사하는 존재, 특별한 체험을 하게하고, 은사를 주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하면 연상되는 것이, 뜨겁다, , 바람, 비둘기 이런 것들을 연상합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면 예언, 방언, 신유(병 고치는 은사), 축사(귀신 쫓아내는 사역) , 신비한 기적이나 이적 현상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성령이 이렇게 역사하시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런 인식은 성령을 아주 제한적으로, 그리고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생각 할 때 복잡할 것 없이 단 하나의 명확한 인식만 가지면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십니다. 아멘. 우리 함께 따라 해 보겠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십니다 아멘.

 

 

성경에서 성령이 하나님 이라는 단언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2 11절에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의 2 10절에서는, “~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알 수 있는 일을, 성령도 동일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땅을 판 돈을 일부 숨긴 아나니아에게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 5:3~4)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성령을 속이는 것이 때문에, 이 또한 성령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다른 많은 기록에서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성령은 분명하게 삼위일체 하나님 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정의 할 때 가장 중요한 용어가 동일 본질이다. 구별은 되지만 구분은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 이신데 세 분의 위격(位格, persons,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별되어 일하고 계시지만, 본질적으로 구분(분리) 되지 않는 하나의 본체라는 말입니다. (The three persons are distinct, yet are one "substance(실체,본질), essence(본질) or nature(본성,성품,특성)". 들으셔도 말이 어렵죠. 신학 공부하신 분들도 어려워하는 용어입니다.

 

 

이 말씀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열이나 순서나 능력이나 위치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로 불려 진다고 해서 서열이 두 번째 라는 뜻이 아니고, 성령님이 세 번째로 불려 진다고 해서 힘이 제일 약하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한 전지전능하심으로 함께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을 대할 때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라고 부르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학생이나 목회자가 아닌 이상 굉장히 어색합니다.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우리가 성령을 대할 때, 단순히 성령님 이라는 인식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을 대하듯이, 성자 예수님을 대하듯이,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남달라지실 겁니다.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해 드릴 때, 위로와 평강의 은혜가 넘치도록 임하게 될 것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항상 바라고 원하는 가운데, 오순절 성령의 충만하신 강림의 역사가, 모든 인생의 믿음의 여정 위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둘째, 성령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1)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 하시고, 예수님이 가르치고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이 세 가지가 성령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직접 말씀 하시기를,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다”( 15:23), 성령이 예수님을 증거 하시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12-13) 성령이 진리로 인도 하시죠.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4:26) 성령이 예수님의 모는 언행을 복습하게 해 주시죠.

 

이렇게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이 구원자요 심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사역, 이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함께 미래를 약속 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계속 알아 가시려면 절대적으로 성령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죄와 사망에 대해서,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 진리와 거짓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성령을 통해서만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성령이 하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역은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중생, Born Again) 하십니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3,5)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새 삶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고, 죄에서 돌이키기로 진심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에 성령은 그 믿는 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십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영접) 누구나 다 이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령은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고, 들어가게 하시는 도움의 역할을 해 주십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결코 새 사람(의인)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하고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거듭 날 때의 상황, , 믿음, 고백, 회개가 내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거듭남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조건들이 계속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있다면, 이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11:6)고 했는데,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즐겨하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고 계시다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0) 라고 했으니, 매일 같이 구원자 예수님을 고백하고 구원의 확신 속에 당당히 살아가고 계시죠. 그렇게 하고 계시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2:5, 16) 했으니, 회개하고, 죄 사함 받고, 죄와 악에서 돌이키려는 시도를 계속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계시다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잘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스스로 점검 해 보시고, 내가 거듭난 사람으로 무엇에 소홀하고 있는지 계속 점검하고 내 믿음을 지켜가야 합니다.

 

 

3)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성령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사역 중에 이토록 눈물 나는 말씀 구절이 있을까요? 가족도 나를 위해 함께 슬피 울어주지 않는 각박한 세상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지라도,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고 버릴지라도, 오직 성령 하나님은 내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영원히 내 삶을 지켜 주시고, 내 상처를 아파하시고, 내 힘듦을 안타까워하시고, 내 실패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인생의 괴롭고 쓴 맛을 본 후에라도, 다시 돌이켜 하나님 품 안으로 돌아오기를 간구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위로자요, 상담자요, 인도자가 되시기 때문에, 찾고, 긴급호출 하시면 언제나 응답 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에 대해서 설명 드린 이 세 가지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꼭 기억 하십시오. 성령은 하나님이시라는 것, 성령의 중심 된 사역은 예수님을 알게 하여 주시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들어 주실 수도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이러한 성령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하려고만 고집 부리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고단해 지는 것입니다.

 

 

3. 셋째, 성령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태도

 

오늘 성령 강림 주일, 그리고 예배 회복의 날을 기점으로 나는 앞으로 성령 하나님을 대하면서 이 세 가지만은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새로운 다짐을 스스로 고백해 보겠습니다. 힘차게 따라하시고, 그대로 실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따라합니다.

 

첫째,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4:30)

둘째, 성령을 소멸하지 말자.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셋째, 내 몸은 성령의 전이다.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너희 몸은 ~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성령은 인격이십니다. 우리 몸 안에 항상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아프면 성령도 아프고, 내가 기쁘면 성령도 기쁘고, 내가 못된 짓 하면 성령은 근심 하십니다. 내가 성령에 의지 하지 아니하고 유리방황하면 깊이 탄식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면 말할 수 없는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십니다.

 

오늘 이후 00교회 모든 성도는, 각 자의 자리에서 삶의 예배자로 온전하게 회복되시길 바라며, 그 삶의 자리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능력 주심과 소망 주심이 강하게 역사하는 성령 충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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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셔서, 믿음 가운데 승리의 길을 걸어가도록 은혜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천국 가는 그날 까지 오직 성령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기쁘고 행복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우리 주 예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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