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6장 1-15절)
오병이어(五餠二魚),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음식이 12 광주리나 되었다는 기적 사건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대표적인 기적 중의 하나입니다. 이 사건에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 입장이든지, 성경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도 오병이어에 대해서는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 두 사람의 병자를 치유하는 것보다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사건은 입소문의 파급력이 대단했을 겁니다.
그런데, 논외로 한 번 생각 해 볼 것은, 성경에서 놀라운 일들을 표현 할 때, ‘표적이다, 이적이다, 기적이다’ 이렇게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말 같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이적’은 아주 놀라운 일(wonder)을 말합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영어로 ‘The Seven Wonders of the Wolrd’입니다. 그 당시에도 놀랍고 시간이 지나도 모든 사람이 놀랍다고 공감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의미 합니다. ‘기적(Miracle)’은 자연 법칙을 초과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대표적으로 모세 때에 애굽의 10가지 재앙이나, 여호수아 때에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적과 기적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실체화 되어서 사건 그 자체가 충격이나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표적(Sign, 헬-세메이온, 표시, 징조)’은 이적이나 기적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표적은 어떤 사건의 실체 보다는 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전달하려고 하는 본래의 뜻이나 그 사건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에 중점을 둡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표적’을 나타내실 때는, 예수님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되신다는 신적 권위를 보여 주시거나,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모습들을 체험하게 해 주시려고 할 때입니다. 성경 읽으시면서 ‘표적’이라는 말이 나오면, 사건의 현상(내용) 보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집중해서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7개의 큰 표적 사건(① 가나의 혼인잔치 - 물이 포도주로, ② 왕의 신하 고침, ③ 베데스다 연못가 38년 된 병자 치유, ④ 오병이어 ⑤ 바다 위를 걸으심 ⑥ 실로암 연못 가 - 날 때부터 맹인 치유, ⑦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이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일곱 가지 사건만 기록한 것은, 놀라운 사건들의 내용에 흥분하기보다, 그 사건을 일으키신 예수님께 더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14절에서, 오병이어도 ‘표적’ 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내용은 다 알고 있으니, 말씀 들으실 때, 이 표적이 말해 주고 있는 의미와, 표적이 일어나기 전, 후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2절에서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이동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따라 왔습니다. 큰 무리가 따라온 이유는,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이나 걷지 못하고 구걸하던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치유 광경을 목격하거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구원자요, 전능한 치료자가 되신다는 사실, 즉 예수님 자체에 집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서 따라다녔다기보다는, 자신의 아픈 몸이 치유 받기를 바라거나 혹은 기적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어 하는 구경꾼의 심정으로 따라온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표적’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이적이나 기적을 보러 온 것이지, 표적의 이면에 서 계신 진정한 실체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두지 못했다는 것이 짐작이 됩니다.
홍해 바다를 마른 땅으로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큰 기적 사건을 수백 만 명이 라이브(Live)로 목격 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들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원망하게 것은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 뒤에 역사하시는 표적의 하나님의 실체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매일 같이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매일 같이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반복되지 않으면 곧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배신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기적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일종의 거래를 시도하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무언가 주시거나 기도에 응답하시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안 주시거나 응답이 없으시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이중적인 태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연약한 인간은 누구나 다 이런 태도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에 따라 왔던 큰 무리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여주었던 모습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나 자신이 예수님께 정말 집중하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자 빌립을 보겠습니다. (5~7절) 예수님은 큰 무리들이 배고픔에 굶주리는 것을 보시고, 빌립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시험 하고자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절) 빌립이,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라고 대답 합니다. 빌립은 이 상황을 돈으로 해결해 보려고 가늠을 해 보았습니다. 빌립을 부정적으로 보면 지극히 계산적인 사람이라고 할 것이며, 긍정적으로 보면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빌립이 예수님에게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빌립이 뭐라고 대답했어야 정답에 가까웠을 까요? “예수님, 저 무리들이 지치고 배고파하는 것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저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먹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넉넉히 배부르게 먹이실 수 있으십니다” 이렇게 대답 했으면, 아마도 예수님은 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을 겁니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심리는 계산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 할 때 이스라엘 온 백성이 성을 한 바퀴씩 돌라는 말도 안 되는 전술을 듣고도 그대로 따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40년 광야 생활의 연단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빌립은 비록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아직까지는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었고, 눈앞에 예수님이 계신데도 예수님을 그저 인간으로만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본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그 이유는, 영적인 존재로 만유 안에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수시로 만나고 경험하라는 보장을 해 주신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보면서 사람의 머리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문제와 상황에 부딪쳤을 때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문제 해결을 돈으로 연결 지어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문제와 상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 문제와 상황 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신 전능 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이나 되는 군중들을 가리키시면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이제는 정답을 다 아시죠. “네, 예수님이시면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저들을 먹이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아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심을 믿으시고, 어떤 상황, 어떤 문제에 부딪치더라도 오직 예수님에게만 집중하셔서, 문제 문제들을 거뜬히 해결해 나가시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인물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절) 라고 말합니다. 빌립이 돈으로 계산 했다면, 안드레는 현물을 가지고 계산을 했습니다. 빌립과 마찬 가지로 안드레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안드레와 같은 사람들의 특징은 매사에 “없어 없어, 안 돼 안 돼, 싫어 싫어, 못해 못해” 이렇게 단정적으로 일을 잘라버리면서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충분한 여력이 있을 때만, 그리고 확실한 성공 가능성이 보장 될 때문 움직입니다. 안드레를 긍정적으로 보면 안정지향적인 행보를 한다고 볼 수 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소심하고 의심이 많은 변덕쟁이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가능 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사람들의 짧은 생각이지 예수님에게는 불가능이라는 것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저것 따져서 시작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완벽하게 준비 되어 계십니다.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면, 그냥 곧바로 시작하면 됩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알아서 재물을 채워 주실 것이고, 협력할 사람이 필요하시면 데려다가 붙여 주실 것이고, 서류가 필요하면 서류를, 상황의 변화가 필요하면 모든 불가능의 상황도 가능의 상황으로 단 번에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들리는 대로 곧바로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믿음의 사람입니다. 없어서, 부족해서, 불가능해 보여서 움직이게 못하게 하는 것은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것을 시기하는 사탄의 술책입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들은 인도하시는 대로, 말씀 하시는 대로 곧바로 행동에 옮기시는 강하고 국센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을 따라왔던 큰 무리들의 반응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아멘.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말하였다고 했습니다. 11절에서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에서 보듯이, 떡과 물고기의 나누어 주는 양을 제한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양껏 먹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참 좋은 모습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반응 한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다른 말로 바꾸면 먹을 것을 실컷 먹도록 해 주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속마음을 다 아셨습니다. 15절에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억지로 붙들어 두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먹을거리가 필요했고, 그것을 충족시켜 주실 분이 예수님 이셨습니다. 마치 집안에 꼭꼭 숨겨둔 화수분(貨水盆,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처럼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하고서,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로 붙들어 두려 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님을 이렇게 대하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일용할 음식 주시는 예수님에게 집중하게 되면 감사가 터져 나오지만, 먹을거리에만 집중하면, “다음에는 뭐 주시나요?, 언제 주시나요? 그 때도 많이 주시나요? 더 맛있는 메뉴는 없나요?” 계속 요구가 많아지고, 당연히 예수님은 그 때마다 척척 먹거리를 내놓아야 하는 분이 되고야 맙니다. 이들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15절 마지막에,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참 씁쓸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지만, 예수님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고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아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나을까요? 대답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예수님을 원합니다.
그러나 실상 삶의 자리에서는 현실적인 필요를 달라는 요구가 우선이고, 그것을 취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배부른 것에만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2천 년 전의 배고픈 오천 명의 모습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자신의 연약한 모습임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항상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며 생활 했던 빌립과 안드레와 같은 제자들조차도 순간순간 예수님에게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내게 백억의 돈을 주신다면, 40평집에 들어가게만 해 주신 다면, 지긋지긋한 빛만 청산하게 해 주신다면, 원하는 학교, 직장에 들어가게만 해 주신 다면, 이번 중요한 사업 건만 잘 계약하게 해 주신 다면, 다이어트에 성공하게만 해 주신다면, 교회 건축만 하게 해 주신다면....”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마치 굶주린 오천 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먹을거리를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배부르면, 요구 사항이 이루어지면 “예수님은 선지자 이십니다” 라고 칭송했던 무리들처럼, 무엇이든지 다 순종할 것 같지만, 정작 그 기쁨에 도취되어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상황은 다 받아 누리고 예수님께 더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신 것에 교만해 져서 예수님이 산으로 홀로 떠나가시게 놔둔다면 우리는 영원히 배고픔에 빠져 광야에서 헤매 이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먹을 것을 주시든, 기적을 행하시든,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예수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시는가, 예수님이 어디로 발길을 움직이시는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무엇인가, 오직 예수님에게 집중하여야 합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들은, 주시면 주시는 대로 감사하고, 안 주시면 안 주시는 대로 계속 순종하면서, 나의 도움이시오,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만 집중하며, 기도의 삶, 예배의 삶, 복음 전도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시는 믿음의 길에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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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많은 것을 구하기에는 열심이었지만 정작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에게는 집중하지 못하였습니다. 먹을 것만을 바라는 무리들을 피해 산으로 홀로 떠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는 믿음과 순종의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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