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기쁨과 즐거움 요16:19-24, 롬5:1-11
릭 이젤(Rick Ezell)의 ‘위기(Defining Moments)’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장인이 있었습니다. 최상의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 질이 좋은 나무를 구하려고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가장 좋은 국내산 나무를 고르고, 또 질 좋은 외국산 나무를 수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이올린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수목한계선(tree line)에서 자란 나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나무는 옹이가 많고, 이리저리 뒤틀린 모양이었습니다. 수목한계선(樹木限界線)은 기후가 건조하고 차가워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한계선을 말합니다. 추위와 건조한 기후 때문에 자라다가 고사당할 위기에 놓였다가, 다시 기후가 좋아지면 자라는 나무가 수목한계선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그러다 보니 비가 많이 오는 밀림에서 자란 나무처럼 곧고 큰 나무로 자라지 못합니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산꼭대기에서 부는 황량한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다 보니 모양이 곧지 않고, 크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단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장인은 이 나무로 바이올린을 만들었습니다. 그 바이올린은 그때까지 만들었던 어떤 바이올린보다도 훌륭한 소리를 냈습니다. 릭 이젤 목사는 덧붙입니다. “우리 중에도 수목한계선에서 살고 있는 사람, 즉 고통스런 세상에서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와중에서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십니다. 땅속에 묻혀 있는 석탄이 섭씨 550도에서 1평방 인치 당 750톤의 압력을 받게 되면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도 시련과 고통을 겪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연단의 과정을 통과할 때 비로소 찬란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비바람과 풍파를 견디며 자란 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악기의 재목이 되는 것처럼,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쓰신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진 자는 환란 중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은,
1.주님과의 화평한 교제를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다락방 설교의 절정은 요 16:33에서 발견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내 안에 평안이 있을 때 기쁨도 즐거움도 있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평안한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환란과 풍파가 많은 세상에서 평안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요? 33절 말씀에서 대조되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내 안에서”는 “평안” 이지만,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라고 평안과 환난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예수 안과 세상 안 사이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납니다.
세상에 살면서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산다고 기쁘고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기쁘고 즐거움이 있어도 잠깐입니다.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금세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지고 맙니다. 세상이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화평한 교제를 나누며 주님 안에 거하여 사는 사람에게 환경을 초월하여 참 평안이 깃들게 되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내 안에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지만 담대하여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세상이 내 안에 있는 평안과 기쁨, 즐거움을 빼앗지 못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5:4-5에서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생의 모든 자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가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나의 영적 위치가 ‘세상 안’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비로소 가능 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현실은 고난과 어려움일지라도 변화되는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복음서 본문 요16: 20-22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은 대부분의 경우 다른 것으로 대치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고통을 변화시켜서 기쁨을 주십니다. 그 예를 본문에서 아이를 밴 여자가 해산 하는 고통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잉태한 아이가 나올 때는 해산의 아픔과 고통이 따르게 되지만 일단 탄생하고 난 뒤에는 그 고통이 변하여 탄생의 기쁨이 됩니다. 이 모습이 변형의 영적 원리입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지만, 보디발 장군의 부인이 모함을 해서 요셉을 감옥에 넣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억울함과 원통한 일을 승리와 축복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라고 말했습니다. (창50:20)
*다니엘이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자 굴에서 건지심으로 왕을 통해 다니엘을 높이고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저주와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도 그의 처절한 죽으심을 부활의 영광으로 변형시켜 인류 구속의 승리로 바꾸셨습니다. 이 영적 원리는 우리들이 살면서 만나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에도 같은 모습으로 적용이 됩니다. 위에서 예를 든 아이 밴 여자. 요셉, 다니엘, 예수님이 당면한 현실은 고통이요, 억울함이요, 죽음의 위기요, 십자가를 지는 고난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복으로,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주 안에서 항상 기쁘고 즐거워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화평의 교제를 통해 주 안에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2.하늘 영원한 소망을 가진 데서 옵니다.
본문 요16:22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물론이고, 믿음을 가졌어도 그 믿음이 적은 사람은 어려움을 당할 때 어려움과 문제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근심과 두려움에 빠져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신 후 믿음이 적은 제자들이 염려와 근심 낙심으로 가득한 모습을 바라보시며,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6)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과 문제들만 보지 말고 변함없이 도우실 하나님을 바라 볼 것을 요구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야 근심과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고, 그런 중에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자체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주님이 죽음의 길을 가신다는데 그것을 염려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황하고, 염려와 근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반응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십자가 후 부활에 대한 믿음도 없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적은 믿음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근심할지언정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게 될 단계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믿을 만한 장성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마음의 불안과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후 제자들은 한동안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었지만, 주께서 말씀 하신 대로 부활 하셔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 주실 때 그들의 믿음이 회복 되었고, 주님의 분부를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합심하여 기도하다 성령 충만을 체험하고 난 후 장성한 믿음이 되어 박해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늘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게 되는 장성한 믿음의 용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큰 믿음의 사람에게는 환경과 관계없이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게 됩니다.
서신서 본문 롬5:5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의 ‘소망’은 원어로 ‘엘피다’인데 ‘좋은 것에 대한 기대’를 의미합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환상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실현이 될 약속입니다. 잠시 기대했다 사라지는 일시적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 소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4: 16-18)
이 하늘 소망은 어떠한 시험도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큰 불이익을 당해도, 박해를 받고 출회를 당해도, 굶주린 사자에게 찢김을 당해도, 칼로 목 베어 순교를 당해도, 톱으로 켜서 죽음을 당해도, 불에 화형을 당해도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순교의 영광에 참예하게 됨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죽어 갔습니다.
성도에게는 홀연히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소망, 휴거의 소망이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했습니다. (살전4: 16-18) 우리 모두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세상 누구도, 무엇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 본문 요16:22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기쁨은 환경이나 여건, 성공과 실패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하며,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를 준비해 주심을 생각하면서 오늘에 주어진 모든 일을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은 세상이 알지도, 받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말씀에는 “기쁨”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기뻐할 일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후부터 지금까지 순교한 성도들의 절반 이상이 초대교회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도 역시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위협과 굶주림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사도 바울도 늘 기뻐했습니다.
빌립보서 4:4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기뻐할 것을 거듭 당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주님을 섬길 때에 때로는 예상되는 환란으로 인하여 근심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서신서 본문 롬5:3-4절에 "다만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환난이 올 때에 인내합니다. 참고 견딥니다. 그래서 금이나 은처럼 연단(鍊緞) 되어 집니다. 더욱 더 주님을 사모하여 의지 하게 되고, 인내하며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삽니다. 욥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욥기23:10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을 허락하기로 계획하실 때는 목적인 소망을 계획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뿐 아니라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환란을 통한 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연단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8:16에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뒤를 이은 다윗 왕의 다른 점 중의 하나가 연단입니다. 연단의 과정을 밟지 못한 사울은 권력의 맛에 변질 되어 사욕에 이끌려 처음에 가졌던 겸손과 순수함을 버리더니 하나님께 불순종 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까지 연단의 과정을 격은 다윗의 신앙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고, 하나님만 의지 하고, 높이는 신앙이 되었으며, 그의 그러한 모습을 인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연단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벧전1:6-7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약1:3-4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을 당하나 인내하게 하고 연단 받게 하여 소망을 이루게 하려는 계획을 가진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지킨 믿음의 선진들을 열거한 히브리서 기자는 히11:에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연단된 믿음으로 하늘 소망을 바라는 자를 세상이 이길 수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늘 소망을 가진 자들의 기쁨과 즐거움은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모두 연단된 믿음으로 하늘 소망 가운데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주님의 영광에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은,
◆.주님과의 화평한 교제를 통해서 옵니다.
◆.하늘 영원한 소망을 가진 데서 옵니다.
◆.세상 누구도, 무엇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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