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지나 영광과 기쁨으로 요16:16-24, 롬8:17-25
50여 년 전에 미국에 텍사스 주에서 석유사업으로 거부가 된 젊은 사업가 세 친구, 존 뉴턴, 루이 웨이터포드, 프레스톤은 어렸을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피곤하게 사무에 시달리던 중 하루는 휴가를 내어 화려한 뉴욕에 가서 몇 일간을 즐기고 오자고 약속하고 준비를 했습니다. 호화롭기로 유명한 엠버서더 호텔 29층에 뉴욕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넓고 좋은 방 세 개를 예약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되어 호텔 프론트 앞에 세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지배인이 나오더니 정중하게 사과를 합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수리중입니다. 수리가 끝날 때까지 대단히 죄송하지만 2층에 방 하나 내어드릴 테니 거기서 좀 쉬시다가 올라가시면 어떻겠습니까? 걸어서 29층까지 가시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 세 사람은 젊은 사람들이라 좀 힘들더라도 29층까지 걸어서 올라가겠다고 대답하고는 보따리를 들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괜찮더니 10층 이상을 올라가니까 힘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다소 후회를 하면서 그들은 조금만 참고 오르면 29층에 올라가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기대에 차서 참고 올라갔습니다. 다 올라가서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열쇠를 프론트에서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갑자기 피로가 확 몰려들어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열쇠를 가지러 다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난감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견딘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고통이라도 앞에 있는 소망만 분명하다면 그 소망에 이끌려서 현재의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던 그 소망이 허망한 허상에 불과하고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면 그 소망은 헛된 소망이 되고, 결국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 영광 보좌에 오르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은 결코 헛된 소망이 아닙니다. 주님이 예비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광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사순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고난을 지나 영광과 기쁨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서 본문 요16:20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 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생은 고난으로 이어진 삶이었습니다. 가난으로 오는 고난, 시험으로 오는 고난, 멸시 천대로 오는 고난, 배척과 배신당함에서 오는 고난, 모함하고 죽이려는 자들로부터 받은 고난, 채찍과 비웃음으로부터 오는 고난,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고난 등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분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53:3-6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는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은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당당하시기 위한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고난당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들도 고난을 주님과 함께 당했습니다. 그래도 기꺼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얼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리라, 또 조금 후에 나를 보리라“는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임산부의 해산의 고통과 해산 후의 기쁨으로 비유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주께서 십자가 지실 때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요, 절망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장차 더 큰 고난을 당하다가 어떻게 죽임을 당할지 아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그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어떤 영광을 얻게 될 지도 아셨습니다.
서신서 본문 롬8:17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자인데 고난당하신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향하는 삶의 형태를 보면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과거에 매여 사는 자입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어." 말하며 자랑을 합니다. 과거의 좋은 시절을 꿈속에서 그리며 지금의 어려움은 괴롭고 힘든 것이며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또 과거의 실패나 아픈 추억을 항상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음에 현실 지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가 무슨 소용이고, 또 보지 못한 내일이 무슨 소용이냐,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하고 오직 오늘뿐이므로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찰라 주의요, 향락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앞을 내다보는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의 것을 잊어버리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비록 힘들고 고난이 따르지만 인내 하면서 더 좋은 내일을 준비하고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바로 미래지향적인 삶입니다. 이 땅의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묵묵히 주님이 가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천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을 따르는 자의 결국은 영광과 기쁨입니다.
주님은 본문 요16:22에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기뻐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바람처럼 우리 인생길에 항상 기쁨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인생길에는 일이 형통하여 기쁨이 있는가 하면, 어느 사이엔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불쑥 찾아옵니다. 이처럼 인생길에 형통함과 곤고함이 있는 이유를 전도서 7: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누구나 항상 형통하고 기뻐할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좋은 날씨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늘 햇빛만 내리쬐고 비가 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사막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도 있고 때로는 곤고한 날도 있어야 합니다.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아온 환자에게 의사가 “가급적 복잡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기쁘게 살기를 힘쓰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더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기뻐할 게 있어야 기뻐하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누구나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생각대로 행복과 기쁨의 삶이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막스 러너’라고 하는 사람이 텔레비전 대담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 하면 세상 것으로는 만족도, 기쁨도 찾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성도의 기쁨은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참된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질적으로 다른 기쁨입니다. 성도는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 본문 요16:24 하반 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말씀 하신 것처럼 기도하여 받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많이 당했습니다. 매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순교하는 고난 중에서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서도 장차 받을 영광을 소망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롬8:17-18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저울의 한쪽에 현재의 고난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 장래의 영광을 올려놓았습니다. 서로 비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에 비해 너무나도 가벼웠습니다. 반대로 장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에 비해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그 둘을 저울 위에 올려놓자마자 저울은 완전히 기울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비교할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중한 것입니다. 고난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합니다. 고난은 이 땅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는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집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입을 열어 담대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은 분노한 모습으로 이를 갈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늘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도 보았습니다. 그는 감격 가운데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노라!" 그 때 여기저기에서 돌이 마구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참으로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기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러면서 그는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는 그는 잠을 자는 듯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고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천사와 같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따르는 고난 중에서도 영원한 하늘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3.주님과 함께 영광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롬8:24-25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가 믿음으로 살면서 고난이 올 때 어떠한 자세로 고난에 대처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참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참고, 장래의 영광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장래의 영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현재의 고난을 잘 참아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 성도들이 참고 기다릴 몇 가지 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장래의 영광에 대한 믿음입니다. 고난만 바라보지 말고, 고난 너머에 있는 찬란한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고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우리가 생각할 때 현재의 고난은 쉽게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영광도 큽니다. 중국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가 쓴 글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 강철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팔면 5달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말의 편자를 만들어 팔면 10달러를 벌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으로 바늘을 만들어 팔면 300달러를 벌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을 더 두드려서 날카로운 면도칼을 만들어 팔면 3,000달러나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으로 시계 속에 들어가는 정밀한 스프링을 만들어서 팔게 되면 30,000달러의 값어치가 나는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똑같은 재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들겨 연단할수록 그 강도는 더 높아집니다. 값어치도 점점 더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오는 고난이 성도를 연단하여 더욱 가치 있는 존귀한 자로 만들어 가시는 섭리를 알아야 합니다.
다음에 우리에게는 허다한 응원군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격려의 소리입니다. 응원의 소리입니다.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는 소리입니다. 본문 롬8:19∼22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들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학수고대하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12:1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고 계십니다.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늘 소망이 있습니다. 본문 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했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다 변하고, 썩고, 쇠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2:15-17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했습니다.
성도의 소망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미래의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 주님과 성도들과의 사랑의 교제의 소망,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며 인내로 달려갈 길을 다 마치는 복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사순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고난을 지나 영광과 기쁨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의 결국은 영광과 기쁨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아멘.
'신약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께서 메시야인 증거 / 요한복음 5장 30-39절 (0) | 2021.02.07 |
---|---|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 요16:19-24 (0) | 2020.07.09 |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6장 1-15절) (0) | 2020.02.08 |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자들 요14:1-6, 계21:1-8 (0) | 2019.08.16 |
빈 무덤의 신비 요20:1-10 (0) | 2019.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