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무덤의 신비 사53:7-12, 요20:1-10
어느 주일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은 부활주일을 맞아 자기 반 어린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달걀 모양으로 생긴 빈 플라스틱 상자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얘들아! 방금 너희들에게 설명한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셨다. 그러니 부활은 곧 생명을 뜻하는 것이란다. 이제 선생님이 너희에게 15분의 시간을 줄 테니까 그 상자 속에 생명을 상징하는 것을 하나씩 담아오도록 해라. 알겠지?"
그러면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즐겁게 뛰어다니면서 각자가 그 나름대로 생명을 뜻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씩 빈 상자 속에 담았습니다. 이제 시간이 되어 아이들은 다시 선생님 앞에 모여 차례대로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모두에게 내어 보이면서 설명했습니다.
첫째 아이의 상자 속에는 예쁜 꽃이 들어있었습니다. 아이는 “이 꽃이 이렇게 아름답게 피어있다는 것은 이 꽃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 꽃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선생님과 아이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둘째 아이가 노랑나비가 들어 있는 상자를 열고 설명할 때 모두가 "와!"하면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차례차례 풀잎, 개미 등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을 보이면서 설명했고,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아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조금은 우둔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종종 다른 아이들에게서 바보라고 놀림을 받기도 하던 아이였는데, 모두가 그를 주목하면서 "과연 저 아이가 무엇을 담아서 왔을까?"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얼른 자기의 상자를 열지 못하고 주저주저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괜찮아,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네 손에 있는 상자를 한 번 열어봐."하며 격려했습니다. 그 아이는 마지못해서 자기 손에 있는 상자를 열었는데, 그 상자 속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러면 그렇지.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오겠어?"라고 비웃으며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치면서 "선생님, 예수님의 무덤도 비었잖아요?"그 소리에 모두가 일시적으로 숙연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주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입니다. 빈 무덤은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부활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빈 무덤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빈 무덤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보여줍니다.
구약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인류 구원을 위한 오묘하신 섭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대해 사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마땅히 행할 길을 버리고 그릇 행하여 각기 죄악의 제 길로 갔기 때문에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케 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경외하게 하고, 섬기게 하며, 순종하게 하여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서고, 무리들을 충동질 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주님의 길이 아닌 제 길로 간 것입니다.
*무지한 군중들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충동질 하니 그들이 시키는 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쳤습니다. 무지한 군중들 역시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당시 정치 지도자인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께는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무지한 무리들의 여론만 따라 의인을 십자가형에 내어줍니다. 대신 불의한 살인자 바라바를 살려줍니다. 정치가들이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너무 악하게 대합니다.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면서 놀렸습니다.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가진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누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막15:17-25) 군인들은 군인대로 각기 제 길로 간 것입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행인대로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지나가는 자들이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면서 예수를 모욕한 것입니다. 행인들 역시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각기 제 길로 간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의 저주의 죽음을 위해 모든 괴로움과 고통과 모욕을 온몸으로 다 받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에 대해 본문 사53:4-5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했습니다.
주께서 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미약하나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멀찍이서 동태를 살피는 제자들, 울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 여인들,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실 때 나귀를 내어 준 주인, 군병들에 의해 억지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 주님의 장사를 위해 향품을 준비해 온 니고데모, 주님을 위해 자기의 묘실을 내어준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 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본문 사53:9에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수난과 함께 한 부자가 예비한 무덤에 들어가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연히 되어 진 일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이심을 깨닫고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빈 무덤은 주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음을 보여줍니다.
신약 본문 요20:1에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와 보고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라고 되어 있고, 그냥 무덤에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품을 준비해서 찾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여자들이 올라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해서 무덤의 돌을 옮겨 줄까..”하고 걱정을 하면서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아예 상상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본문 요20:6-7 에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했습니다. 무덤이 비어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평소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마태복음에만 네 차례, 아주 강하게 말씀을 하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열흘 전에, 또 3일 전에 강조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믿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생각했을 텐데, 이들은 전혀 부활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추측은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입니다. 누가 죽은 사람의 시신이 필요하다고 훔쳐가겠습니까?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었는데 주님을 잡아 죽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리라는 말을 기억하고 빌라도에게 와서 “이 예수라는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 사흘 후에 자기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한 말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무덤을 3일 동안만 지켜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서 큰 돌로 무덤 문을 막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이사 황제의 도장을 찍어서 인봉을 하고, 그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파수꾼을 세워서 무덤을 굳게 지켰다고 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에 와 보니 돌문은 저만치 굴러가 무덤 문이 열려 있고, 파수병들은 놀라 초죽음 상태가 되어 있었고, 두 천사가 ‘왜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하며,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고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빈 무덤은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다는 증거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나 살고 너 죽자" 인 반면에, 유태인들은 "나도 살고, 너도 살자" 라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어떨 것 같습니까? "너 죽고 나 죽자"라고 합니다. 같이 죽자는 것입니다. 내가 못사니 너도 같이 못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무서운 민족이라고 합니다. 목숨 내 걸고 달려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나 죽고, 너 살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생명 주신 것은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죽으신 그 사랑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한 자요,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하늘 소망으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3.빔 무덤은 국면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빈 무덤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제자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다시 모이고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다시 살아나셨다’, 여기서부터 기독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기초입니다. 만일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빈 무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19장과 20장의 분위기가 참 대조적입니다.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절규합니다. 많은 사람이 절망합니다. 두려움과 한숨이 예루살렘을 채웁니다. 누가복음서에는 ‘그 되어가는 것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가슴을 두드릴 만큼 답답한 일이 온 예루살렘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막달라 마리아의 울음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두려움이 평안으로 바뀝니다. 두려워서 문을 닫고 숨어있던 제자들이 뛰쳐나가서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런 변화가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절을 영어로 ‘Easter’라고 합니다. ‘동쪽’이라는 말입니다. 동쪽에서는 해가 들어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님께서 태양과 같이 동쪽에서 확 떠오르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추위가 물러갑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이 달라집니다.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자기의 삶을 헌신합니다. 자기의 물질, 욕심 부리지 아니하고 다 내어 놓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놀라운 변화가 부활을 믿게 될 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질 때에 슬픔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두려움이 평강으로 변합니다. 눈물이 환희로 변합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변합니다. 넓은 길로 마음대로 활보하며 살던 사람이 좁은 문, 좁은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삽니다. 방탕하게 살던 사람이 죄를 버리고 성결하게 삽니다.
부활 신앙이 충만할수록 더 좋은 부활에 이르기를 소망하며 삽니다. 부활이라고 다 같은 부활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자들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 즉 심판을 받기 위해 다시 살아나는 부활입니다. 심판을 받고 둘째 사망에 던져지고 형벌을 받기 위한 부활입니다.
믿는 자들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로 주님과 함께 영생에 참여하는 부활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부활에도 급이 다릅니다. 히 12:35에 보면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부활이 똑 같은 게 아니라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이 따르는 더 좋은 부활, 더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겨우 구원에 참여하는 부끄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어떤 노인이 정원에서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도대체 언제쯤이나 그 나무에서 열매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노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무래도 70년은 지나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다시 대답을 하였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내가 태어났을 때 과수원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소.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님이 나를 위하여 어린 나무를 심어 놓았기 때문이오. 그것과 똑같은 일이지요.”
이 이야기는 실화이기보다는 누가 지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삶의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현재 자신의 눈앞에 이익만을 생각하며 행동하는데 반하여,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자기가 죽은 후의 미래를 위해서 살라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장래를 위해 잘 심는 자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써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물질 드리고 전도하고 주의 뜻을 따라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그렇지 마는 또 한 면에서는 더 좋은 부활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장이라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더 좋은 부활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희롱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채찍 받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더 좋은 부활을 위해서 결박과 옥에 갇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더 좋은 부활을 위해서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켜 죽기도 하고 칼에 죽기도 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다니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더 좋은 부활에 참여하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부활절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빈 무덤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빈 무덤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보여줍니다.
◎.빈 무덤은 주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음을 보여줍니다.
◎.빔 무덤은 국면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아멘.
출처 :땅끝 사랑 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 호현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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