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사는 밀알 교훈 요12:20-25, 행7:54-8:3
한 미국 청년이 일본 오사카에서 나가사키로 가는 배에 탑승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선교사훈련을 받았고 이제 꿈이 부풀어서 선교지로 가고 있는 젊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만나 구원할 영혼들을 생각할 때 너무 가슴이 벅차왔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위해 선상에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마침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서 배 밑에 내려가서 잠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도 느껴졌습니다. 그는 놀라 갑판위로 뛰어올라오니 그 폭우 속에서 배가 침몰직전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구명조끼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여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구명조끼를 입지 않고 물에 빠진 채로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에게 다가간 선교사는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할머니에게 입혀드렸습니다. 그리고 배는 완전히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젊은 선교사는 죽으면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설교를 할 장소와 기회를 주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설교는 이랬습니다. “할머니 나중에 구조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제가 할머니대신 죽고 제 생명을 할머니께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었고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설교를 그 할머니에게 그 위기의 순간에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젊은 선교사는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그 할머니는 다행히 구조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방방곡곡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를 대신해 죽은 그 청년이야기가 그 분이 내 죄를 위해 그 청년처럼 죽었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나를 대신해 죽은 그 젊은 청년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하며 때로는 마음이 벅차올라 울기도 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나중에 유명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대신 자기를 위해 희생당한 그 젊은 청년을 생각하면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대신 죽은 이 청년 선교사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죽어야할 자리에 그 분이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희생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주간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죽음으로 사는 밀알 교훈”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생명 있는 밀알의 희생에 대해 상고해 봅시다.
요12: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본문에서 예수님은 씨의 원리를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셨고 예수님이 친히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처럼 십자가에 죽으사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비유로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우리들에게도 밀알의 삶을 살라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밀알의 삶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희생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희생은 언제나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생이 없이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사는 자들의 모습에 대해 욕하고 비난하지만 희생하는 자들의 모습을 통해 감동을 받고 찬사를 보내기도 합니다.
중국의 광시성에서 관광용 열기구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열기구에는 4명의 네덜란드 관광객과 승무원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승무원들은 열기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느끼자, 열기구의 고도를 최대한 낮춘 후,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들만 뛰어내렸습니다. 관광객들은 영문을 몰라서 가만히 있었고, 그 사이 탈출한 승무원들로 인해 가벼워진 열기구는 하늘로 올라가다 폭발해, 4명의 관광객이 모두 숨진 사고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탈출한 승무원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무책임하고 비난 받을 일입니까?
그런가 하면 독일의 헷센주에서 승객 3명을 태우고 돌아오던 비행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행 도중 이상한 느낌을 받은 조종사 마이클 네런잭은 승객들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비행선을 최대한 육지와 닿게 2m까지 하강시켜 낮춘 뒤 3명의 승객을 모두 탈출시켰습니다. 승객이 무사한 걸 확인한 뒤 자신도 탈출하려 했으나, 너무 가벼워진 비행선은 50m까지 상승했고, 결국 폭발해 조종사는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기사를 접한 네티즌들은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아름다운 조종사에 대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아무리 조종사라 하더라도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희생은 그것이 어떤 상황이든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의로운 자의 희생이라도 그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 준다거나 그의 희생을 통해 참 생명을 얻고 영생 얻는 후사가 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는 다른 의미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더욱 고귀한 희생입니다. 밀알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더 많은 밀알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는 육적 생명 외에도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분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생명으로 다시 사신 분입니다. 생명의 떡이 되신 분입니다. (요6:35) 그러므로 이 생명 되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십자가의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요 20:31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우리로 참 생명을 얻게 하고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생명 되신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리는 것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요 6:6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하셨습니다. 육은 아무리 선해도 영적 생명을 주지 못하고 영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예수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 같이 십자가에 죽음의 희생을 통해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고, 영생에 이르게 하는 복을 주시기 때문에 그 희생이 더욱 소중하고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영적 생명이 있고, 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자들의 안에 영적 생명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5:12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한 것입니다. 이 영적 생명을 주는 일은 하나님이 성령의 역사로 하시는 일로 생명 되신 그리스도 외에 세상 어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 주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스데반의 죽음과 희생에 대해 상고해 봅시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교인이 급증하는 가운데 구제 문제를 둘러싸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불만과 원망이 일어났습니다(행6:1). 열두 사도는 이 문제를 다루느라고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가 없었습니다(행6:2).
그래서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른 일들을 맡을 사람 일곱을 집사로 택하여 세웠습니다(행6:3-6). 그 일곱 사람 중 하나가 스데반 집사였습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행6:5)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행6:8)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을 뿐 아니라(행6:8) 논쟁에서 그를 당할 자가 없을 만큼 지혜가 있었습니다(행6:9-10).
이렇게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결과를 행6:7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 이렇게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고 있을 때 스데반이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의 설교에 마음이 찔린 이들이 이를 갈며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이 스데반의 순교는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 박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그날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들만 남고 예수 믿던 사람들은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행8:1). 기독교가 탄생하자마자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붕괴나 소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믿는 무리들이 무서워서 숨어 산 것이 아니라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행8: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박해로 인해 복음을 더 널리 퍼뜨리시고 박해 아래 있는 교회를 더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게 이루어져 갔습니다. 열두 사도 못지않게 훌륭한 일꾼 스데반이 너무나 일찍 순교한 사실은 교회의 큰 손실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는 결코 헛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순교할 때 한 사람도 믿음의 결실이 없었지만 그가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희생이 될 때 스데반 대신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가장 큰 타격과 손실을 입히던 열혈파 박해자를 기독교 최대의 선교사요 사역자로 만드셔서 교회를 더욱 크고 견고하게 세워나가시는 더욱 큰일을 이루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사울을 바울로 만드신 일입니다.
사울은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그들이 벗어 놓은 옷을 지키고 있었습니다(행7:58). 그는 스데반이 죽은 것을 마땅한 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행8:1). 그가 기독교 박해의 선두주자로 나선 것입니다. 그는 집집마다 뒤져 남아있던 그리스도인들을 남녀 할 것 없이 다 잡아 옥에 가두도록 넘기는 일을 했습니다(행8:3). 그는 그러고도 여전히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행9:1). 그는 예루살렘의 신자들을 잡아 가두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했습니다(행9:1-2). 그것은 그가 그곳에서도 기독교를 따르는 사람을 보게 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올 권한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행9:2). 사울은 그가 원한 공문을 받아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 바람에 그는 땅에 엎드러졌고 거기서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놀라 반문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때 그가 들은 것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3-6)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울은 주님의 분부를 따라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의 안수 기도를 통해 다시 눈을 뜨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는 그릇이 되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었습니다(행9:15-16).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고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행9:18, 20). 그의 사역을 통해 복음이 아시아, 유럽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의 시작이 생명 되신 예수님을 믿는 스데반의 순교로부터 발단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스데반의 고귀한 신앙을 본받는 성도들이 됩시다.
3.끝으로 밀알의 교훈을 상고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즉 그 분 한 분의 희생으로 전 인류가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한 스데반 집사의 순교하는 희생을 통해 예루살렘에만 머물던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 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이 된다면 복음의 진보가 일어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도 훨씬 아름다운 삶의 터전이 되어 갈 것입니다. 희생하는 밀이 되어야하고 그로 인하여 많은 밀이 수확되어야 하며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고, 그런 자들은 주님 앞에 존귀한 자들이 되어 별처럼 빛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 주신 주님을 위해 우리가 다 스데반처럼 순교자가 될 수 없지만 누구나 신앙생활 하면서 희생하는 밀알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믿음의 밀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치우쳐 세상을 사랑하는 악한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방주를 지은 결과로 짐승이나 사람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의 결과가 많은 사람을 살렸으니 귀한 믿음의 밀알이 된 결과인 것입니다.
모세를 믿음으로 보필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밀알이 된 자들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불신앙의 이방 세계에서 믿음의 밀알이 된 자들입니다. 욥은 불 시험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인내로 믿음을 지켜 승리한 믿음의 밀알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다 순교한 사도들과 성도들뿐 아니라 바울과 함께 사역 했던 바나바, 실라, 브리스가 부부, 누가, 디모데 등도 믿음의 밀알이었습니다.
다음에 기도의 밀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죄악으로 멸망할 수박에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여러 번 의인의 수를 변개하며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기도의 밀알이 된 모습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 왔을 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 할 때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는 백성들을 위해 간곡한 중보의 기도를 드린 모습이 기도의 밀알이 된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 아론, 훌은 산 정상에 올라가 지팡이를 든 손을 들고 모세가 기도할 때 아론과 훌이 옆에서 손을 붙잡고 도와 마침내 아말렉을 이기고 승리하게 한 모습이 기도의 밀알이 된 모습입니다. 엘리야가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항해서 하늘에 불이 내려와 제단을 사른 일이나, 그가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간절히 기도하여 3년 6개월 내리지 않던 비가 내리게 한 것도 기도의 밀알이 된 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분부를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한 120문도가 기도의 밀알이었습니다. 전혀 기도하기를 힘쓴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기도의 밀알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금식하며 기도하여 성령의 지시를 따른 모습이 기도 밀알이 된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헌신의 밀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극한 흉년의 때에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한 사르밧 과부나 엘리사 선지자를 대접한 수넵 여인의 모습이 헌신의 밀알 된 모습입니다. 지극한 효성으로 시모인 나오미를 대접한 룻의 모습이 헌신의 밀알이 된 모습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값비싼 라드 향유를 주님께 부은 마리아의 모습이 헌신의 밀알이 된 자의 모습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내어 놓아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했던 한 아이가 헌신의 밀알이 된 모습입니다. 자기 몸이 병든 것 보다 성도들을 더 사랑으로 섬겼던 에바브라디도, 바울을 도와 협력 했던 브리스가 부부, 의원 누가, 자기 집을 교회로 드려 성도들을 섬긴 자주 장사 루디아나, 빌레몬, 많은 사람을 도왔던 도르가와 같은 인물들이 헌신의 밀알이 되었던 소중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인의 모습은 자기가 죽고 희생 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요12:25에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밀알, 기도의 밀알, 헌신의 밀알이 됩시다. 정리^
오늘은 사순절 주간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죽음으로 사는 밀알 교훈”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생명 있는 밀알의 희생에 대해 상고해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과 희생에 대해 상고해 보았습니다.
◈.끝으로 밀알의 교훈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희생의 밀알로 승리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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