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복음

주 안에 거하는 자 요15:5-12

nam씨 2017. 9. 8. 20:12


주 안에 거하는 자 15:5-12, 4:1-7

제임스 무어(James W. Moore) '다 실패했을 때' 라는 책에 나오는 사업가 '로버트' 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보스턴의 주택단지 개발업자로서 32백만 달러의 자본금으로 운영하던 큰 사업가였지만, 자금 사정이 악화되어 파산하고 맙니다.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주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살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교회 다니며 눈물을 흘리기는 평생 처음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의지했더니 죽은 딸이 살아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가슴을 방망이로 마구 치는 것 같았습니다. "왜 내 사업체가 죽었느냐? 예수님과 같이 안 했기에 죽었구나! 예수님과 같이 한 야이로는 죽은 딸이 살아났다는데, 내 사업체는 왜 죽었는가? 예수님을 떠나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녔기에 죽은 것이로구나!" 로버트는 그 날 설교를 들으며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자금도 아니고 은행도 아니었습니다. 가지인 자신이 포도나무인 예수에게 붙어있지 못했던 결과이었습니다. 그는 나무이신 예수만 의지하고 살리라 다시는 예수를 떠나지 않으리라고 결단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사업이 잘 풀려져 직원을 50명이나 고용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의 관계가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에게 붙어 있어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 안에 거하는 자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 안에 거하는 자는,

 

1.참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몇 가지 관계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4장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먹을 양식이요 생명의 물이라고 하였습니다. 10장에서는 예수님은 목자요 우리들은 그의 양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양의 문이라 하셨습니다. 14장에서는 예수님은 우리들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5장에서는 예수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 안에 거할 것을 강조해 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함께 읽은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4)고 하시면서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기도의 응답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을 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본문 요15: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기쁨이 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16: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아서만 기쁜 것이 아니라 그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내 기도를 들으심을 깨달음으로 더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것이 생겨도 빌4:6 의 말씀처럼 염려 대신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또한 과거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육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대상으로 살았지만 이제 주님 안에 거하여 살게 됨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빛의 열매를 맺고, 전도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대상으로 살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로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됩니다.

무엇보다 주님 안에서 십자가 사랑으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이 구원의 은총은 예수님 외에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그 누구도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거짓에 속아 미혹되고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거탄진 장로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거 장로님이 예비군훈련 때 만난 어떤 스님을 전도하면서 그 분을 구원해 달라고 많이 기도했답니다. 장로님은 기도하기를 주님 부처가 누구입니까? 불교는 구원은 있는 겁니까? 그 정체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몇 달 동안 그런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 오후 4시쯤 기도 중에 석가모니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놀라 뒤로 피하면서 오른손을 들어 몇 번이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석가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축복 받은 젊은이여! 난 평생 동안 조금 깨달아 겨우 알게 되었는데, 어찌 그리 쉽게 깨달았는가. 정말 부럽고 귀하며 고귀한 은혜요. 하늘에서 당신이 받을 상이 너무나 부럽습니다." 하기에 거 장로는 당신은 우상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 죽게 하고 있는데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합니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난 한 번도 내 형상이나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라고 한 적이 없소. 난 분명히 가르쳤소. 나는 작은 호롱불에 불과하지만내 뒤에 광명한 태양보다 더 밝은 분이 오신다고 분명히 말을 했소. 평생 동안 내 힘으로 구원이 있나 생각하였지만 80살이 다 되서야 간신히 하나님이 확실히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사실을 분명히 알렸으나 후세 사람들은 내 의도대로 하지 아니하고 지금의 종교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젊은이의 상급이 부럽소. 나중에 만납시다.” 하면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장로님은 불교가 무엇인지 그 정체를 한순간에 알 수 있었습니다. 불교에는 구원이 없고, 석가란 인간의 한 사람일 뿐이요, 인간의 힘으로는 살 수 없고 오직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 안에서 참된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참 사랑과 관용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은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까지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포도나무에서 가지가 진액을 공급받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을 공급받아 사랑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사랑 안에서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 가운데 유오디아와 순두개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 서 있는 삶의 모습으로 관용 즉 너그러운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면서 이어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할 이유, 그것은 주님이 가까우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너희 인생의 종말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죽음을 맞을지, 언제 주님이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날이 지금 당장 되어 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용서를 받은 성도는 죽기 전에, 주님 만나기 전에 급히 할 일이 주님이 주기도를 통해 가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한 고백대로 우리의 사랑과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더불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각자의 자라온 배경, 신앙 관점, 생활 방식, 습관 등이 서로 다른데 이런 면들을 조화를 이루며 맞추어가야 합니다. 더불어 함께하려면 더불어 함께 살려는 마음가짐과 실제적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관용입니다. 조금 실수하고, 조금 다르고, 조금 부족해도 서로 관용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고, 오히려 격려해주는 그런 우리 성도가 되고, 그런 교회가 되기를 힘쓰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의 관용은 많이 배웠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회적 교양을 쌓았다고 해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연조가 깊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주님의 마음을 품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서로에 대한 관용이 있고, 이 관용이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 모두에게 알게 되는 그런 관용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러기들은 ‘V자 대형으로 날아갑니다. 조류 학자들은 기러기들의 ‘V자 대형을 연구해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첫째, 기러기는 혼자 날 때보다 함께 V자로 날 때 71%나 더 오래 날 수 있습니다. 둘째, 동료를 조금이라도 편히 날게 하기 위하여 V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앞에서 날아가는 인도자 기러기가 가장 빨리 지치니까 서로 위치를 바꿔가며 날아갑니다. 셋째, 기러기들은 날면서 계속 소리를 지릅니다. 이유는 자기의 위치를 알리고, 또 다른 이유는 서로를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넷째, 만일 기러기 한 마리가 아프거나 부상당해 함께하지 못할 때 서너 마리의 동료가 이 낙오자와 더불어 머문다고 합니다.

본능을 따라 사는 미물들도 서로를 위해 배려하며 살아가는데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사랑으로 용서하고 관용하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참 사랑과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참 생명과 평강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에 많이 나오는 말씀 중에 하나가 생명이란 말입니다. 1:4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등 등^^^

따라서 생명 되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참 생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생명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에게는 참 생명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영생에 참여하는 자들이 됩니다. 참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심판과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하셨습니다. 딤후1: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두려움이 있다면 사단이 주는 것인 줄 알고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물질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 물질로 인해 교만이 오고, 타락이 오고, 다툼이 오고, 번민하게 합니다. 많은 지식이나, 명예, 권세가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 것 때문에 더 번민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생물학자 배스티언(S. L. Bastian)은 작은 나뭇가지나 덤불 속에 집을 짓고 사는 거미류를 관찰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거미는 나뭇가지나 덤불에 걸쳐 있는 울타리 속에 새끼들을 부화하는데, 만일 그 곳에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이 발생해서 새끼들이 놀라게 되면 어느 순간 어미 거미가 쏜살같이 달려와서 새끼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미 거미가 어떻게 새끼들의 동요를 금방 알아채는지 주의를 기울여 살펴 본 결과, 이 거미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새끼들의 잠재적 위험에 대비해서 경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즉 각 새끼 거미에게는 가는 비단 줄 같은 것이 붙어 있고 이것이 어미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데, 새끼들이 적들의 위협을 받아 몸을 심하게 움직이면 그들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므로 어미가 즉시로 새끼들을 보호하러 달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세아11:4에서 하나님은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미 거미가 명주처럼 보드라운 실로 자기 새끼들을 자기 곁에 두듯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며,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감싸고 있음을 알기에 죽음도 성도 안에 있는 평안을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 생명과 참 평안을 소유하고 살다가 하늘 영광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 안에 거하는 자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참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참 사랑과 관용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참 생명과 평강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