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눈으로 창13:10-18, 히 11:1-6
영어 단어에 보면 “보다”는 단어에 ‘see’ 와 ‘look’이 있습니다. 둘 다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see’는 눈에 들어오는 것을 그냥 보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look’은 목적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의미를 생각하며 보는 것입니다. 통찰력을 가지고 뜻을 찾으면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눈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냥 보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를 생각하고 뜻을 찾으며, 통찰력을 가지고 보는 사람입니다.
신약 본문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8:5-10의 내용을 보면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이 중풍 병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 삽 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백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바로 이 백부장의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즉 백부장은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대상이요, 실상은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본 사람이요, 주님을 통해 고침 받은 하인을 본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은 찾아보기가 쉽지 안 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님 안에서 그분이 약속하신 구원과 천국을 믿는 믿음으로 바라보며 삽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믿음의 눈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사람이 아닌 주님을 바라봅니다.
구약 본문 창13:18에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기를 힘썼습니다. 주님께 제단을 쌓는 일에 힘쓰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힘쓸 때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복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람을 볼 때가 있었습니다. 애급에 내려갔다가 애급 왕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까봐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속이다가 아내를 빼앗길 번했습니다. (창12:10-20) 베드로도 물결을 바라보다 물에 빠지게 되었고, 사람이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부끄러운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신약 본문 히11:5에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했습니다. 에녹은 세상에 사는 동안 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게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대상인 성부 하나님,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히 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분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분입니다. 그분 안에 구원이 있고, 그분 안에 영생이 있고, 그분 안에 천국이 있고, 그분 안에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면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면 믿음도 흔들리고, 시험에 들게 되어 믿음이 파선되어 믿음의 실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호주에서 사역하던 선교사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2000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일주일동안 편지 50여 통을 쓰고 국제전화도 하고 온갖 궁리를 다해서 계산해 보았지만 삼백만원 정도 밖에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어서 그 계획을 취소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초조감과 좌절감 패배의식 같은 것으로 영적 슬럼프에 빠진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그의 부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시나요?” 선교사가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도 확신하시는지요?” 이 물음에 ‘너는 정말 나를 믿느냐?’라고 번개처럼 스치는 주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사실 하나님 보다 그 많은 후원자들을 믿었던 자신을 회개하고 다시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선교사처럼 잘못된 대상을 향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의 차이는 믿음의 대상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대상은 어떤 사람이 아니요, 성부 하나님이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눈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며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믿음의 사람은 욕망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바라봅니다.
구약 본문 창13:9-10 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했습니다. 불어나는 짐승들로 인해 더 이상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할 수 없어서 아브라함은 먼저 조카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 때 롯은 주저하지 않고 눈에 보기에 좋은 물이 넉넉하고, 하나님의 동산 같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갔습니다.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인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그와 그 가족들이 그 곳에서 어떤 영향을 받게 되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앞세워 눈에 보기에 좋은 그곳을 선택하여 간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주님이 주시는 비전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머문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롯이 택한 곳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주님의 뜻이 있는 곳이요, 주님이 주시는 비전이 있는 곳입니다. 창13:14-17 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대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가 원하는 것을 바라보면 마귀가 원하는 것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롯처럼 세상적인 욕망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마치 선악과를 바라본 하와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것은 선악과입니다. 그 결과는 세상을 본받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파멸입니다.
프랑스에는 유명한 삶은 개구리 요리가 있습니다. 이 요리는 손님이 앉아 있는 식탁 위에 버너와 냄비를 가져다 놓고 직접 보는 앞에서 개구리를 산 채로 냄비에 넣고 조리하는 것입니다. 이때 물이 너무 뜨거우면 개구리가 펄쩍 튀어나오기 때문에 맨 처음 냄비 속에는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의 물을 부어 둡니다. 그러면 개구리는 따뜻한 물이 아주 기분 좋은 듯이 가만히 엎드려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매우 약한 불로 물을 데우기 시작합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서서히 가열하기 때문에 개구리는 자기가 삶아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기분 좋게 잠을 자면서 죽어 가게 됩니다.
롯이 소돔 고모라에 살면서 개구리처럼 삶아지듯 서서히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롯의 처는 멸망을 당한 소돔 고모라와 함께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이나 통일신라가 멸망한 것은 외부의 침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부에 있는 죄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전이 사라짐으로써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목적과 목표의식이 없어져 그냥 내부에서 저절로 무너진 것입니다. 헬렌켈러에게 어떤 사람이 듣지 못하는 농인과 보지 못하는 맹인 중 누가 더 불쌍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육안을 가지고도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축복은 내가 목적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욕심으로 만들어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롯처럼 사람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뜻과 비전을 바라보며 삽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 같은 믿음으로 주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는 성도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바라봅니다.
내가 살면서 어디에 비중을 두고 사느냐를 보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인가 아니면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세상을 위하여 세상 것에만 마음을 쓰다 천국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고, 천국을 발견하고 천국을 위하여 가진 것을 투자하고, 때로는 세상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 3:8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했습니다. 바울은 세상적인 지위와 명예가 높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의 지위와 명예를 배설물로 여긴 것은 그가 더 좋은 본향 천국을 바라봤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천국의 상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는 천국의 영광과 비교하면 마치 배설물과 같았습니다. 바울의 목표는 하늘의 상이었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을 믿음장이라 부릅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열거하면서 이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고, 세상에서는 외국인이나 나그네로 여기면서 더 나은 본향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며 살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9:27-28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성도들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성결한 삶을 살기를 힘쓰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죄의 낙을 따라 살다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고 수치와 심판을 피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미군 부대에서 사무를 보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결혼하였습니다. 귀한 가문에 독자와 결혼하여 임신을 하였습니다.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을 때 온 가족들과 친척들이 모였습니다. 너무나 자손이 귀한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만하는 순간에 그 여자는 병원이 떠나갈 듯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밖에서 궁금하게 여기던 가족들이 문틈으로 물었습니다. “아들인가요?” “아니요.” “딸인가요?” “아니요.” “아니, 그러면 무엇인가요?” 간호사가 말했습니다. “말할 수 없으니 들어와서 보세요.” 들어가서 아이를 보는 순간 온 식구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몸집이 큰 흑인 아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내가 천국에 갈 것인가 지옥에 갈 것인가도 그때 다 밝혀집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소망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바른 믿음의 행실을 가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 썩어지고 없어질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살다가 다시 오실 주님 맞는 성도들이 됩시다. 정리^^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믿음의 눈으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사람이 아닌 주님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사람은 욕망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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