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치기까지 해하지 말라 요한계시록7:1~4
우리는 지금까지 계시록 6장 말씀에서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시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인~넷째인은 흰말, 붉은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나와 국가 간의 전쟁과 국내에서 발생하는 내란, 그리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류가 심판을 받는 내용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다섯째 인을 떼자 예수님을 증거하다 박해로 죽은 순교자들이 제단 아래에서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빨리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 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때 주님은 ‘너희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을 늦추고 계십니다. 구원받아야 할 의인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시고 있고 동시에 악이 가득 찰 때까지 심판을 보류하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여섯째 인을 떼자 마침내 종말의 대심판이 시작됩니다. 그 심판은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떨어지는 것처럼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이제 7장에서 일곱 번째 인을 떼는 장면이 바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인을 떼는 장면은 8장에 나오고 7장은 막간 장면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7장을 막간 장면으로 삽입했느냐? 입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이런 막간 장면이 두 번 반복됩니다. 첫째는 여섯째 인을 떼고 7장이 막간장면으로 삽입되어 있고, 8장에서 일곱째 인을 뗍니다. 그리고 8장에서 일곱째 인을 뗄 때 나팔 재앙이 시작되어 9장까지 여섯 나팔 재앙 시리즈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로 10~14장을 또다시 막간 장면으로 처리합니다. 그리고 15장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 재앙이 나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냥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이 순서적으로 쭉 나오면 읽기도 쉽고 내용도 단순해서 좋은데 자꾸 막간장면이 삽입되어 재앙이 늦추어집니다. 이것은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으로 인류를 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심판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임을 알려줍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을 혼내려고 할 때 “내가 셋 셀 동안에 못된 행동 고치지 않으면 너 종아리 맞을 꺼야!”하고는 수를 셉니다. 하나, 둘, 둘반, 둘반에서 반...둘 반에서 반에서 또 반... 하면서 자녀에게 체벌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늦춥니다. 왜요? 마음을 돌이키라 구요! 사실 수를 세는 것은 종아리를 때리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는 들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심판도 시계바늘처럼, 톱니 바뀌 처럼 기계적으로 아무 감정 없이 이루어지는 심판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심판하실 때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 둘, 둘에서 반, 둘에서 반반, 또 반반반...하면서 자꾸 최후의 심판이 늦추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2:4). 베드로 사도도 고백합니다. “주의 약속이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세상이 이럴 수는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단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두 번의 막간 장면을 통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 일 후에란 첫째인~여섯째 인을 떼신 후를 말합니다. 특별히 여섯 번째 인을 뗄 때 지상에서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는 것처럼 땅과 하늘과 우주에 대 혼동이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 후에 또 하나의 환상이 펼쳐집니다. 요한이 영안을 열어서 보니 땅 네 모퉁이에 선 네 천사가 하나님께 땅을 해할 권세를 받아 세상을 멸할 바람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기서 ‘네 천사,’ ‘땅 네 모퉁이,’ ‘땅의 사방의 바람’ 등 4라고 하는 숫자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4라는 숫자는 ‘동서남북’ 세상 전체를 상징합니다. 바람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입니다. 바람의 대상은 땅과 바다와 나무입니다. 여기서 땅은 세상이고, 바다는 세상의 국가들을 말하며, 각종 나무는 인류를 상징한다고 해석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마지막 심판의 바람이 전 세계적으로 불게 됩니다. 이것은 온 세상에 임할 마지막 재앙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네 천사가 이 심판의 바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왜 네 천사가 심판의 바람을 붙잡고 있습니까? 왜 마지막 대 심판의 바람이 늦추어지고 있습니까? 왜 최후의 심판의 시간을 벌어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연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심판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의 심판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심판의 목적은 먼저는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주된 하나님의 관심사이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세상의 심판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심판 중에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시행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7장 막간 장면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심판 지연과 관련된 하나님의 본심이십니다.
6장에서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올 때 누가 능히 서리요? 라는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7장에서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감사하게도 그 무서운 최후의 심판의 날에 모든 사람이 산아 내 위에 무너져라! 바위야 내 위로 덮쳐라! 외치면서 벌벌 떨 때... 감히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을 담대하게 바라보며 기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2~3절 말씀입니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행하지 말라 하더라”
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해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다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를 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마지막 대재앙의 현상은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인류의 끝은 아닙니다. 지금 첫째 인에서부터 여섯째 인의 심판이 산발적으로 점점 강도를 더해 가면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 종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심판하는 와중에 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치는 일을 우선순위로 하십니다. 이것이 끝마쳐지기까지는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라도 먼저 주권적 힘을 가지고 자신의 자녀들을 다 구별하여 구원하십니다. 마치 노아시대 때 대홍수를 통해 온 세상을 심판할 때 그대로 놔두시면 온 땅의 생명이 전멸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방주를 예비하셔서 방주 안에 있는 노아 식구들과 동물들의 씨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때 처럼 최후의 심판 직전에도 노아의 방주의 구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인을 쳤다는 것은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도장을 찍는 경우는 크게 세가지 입니다. 첫째,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도장을 찍습니다.자신이 산 책에 자기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찍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책은 내 것입니다’라는 표시로 소유권을 증명하는 도장을 찍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드넓은 초원에 소를 방목해 키울 때에 주인들이 자기 소를 구별하기 위해서 소의 엉덩이에 인을 박아서 구별합니다. “이 소는 내 소니까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보호를 위해 도장을 찍습니다.공적으로 보내는 서류나 편지 봉투에 도장을 찍는 것은 내용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도장이 찍힌 부분이 훼손되면 봉투 속에 든 내용을 누군가 훔쳐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도장은 보호를 위해서도 찍습니다. 셋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도장을 찍습니다. 공적인 문서에 도장을 찍으면 이 문서가 진짜 사실을 증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도장이 찍히지 않는 문서는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도장은 사실 증명의 용도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틀림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증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계시록 14장 1절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이마에 너는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소유물로서의 확정하는 인침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물론 그것은 성령의 인침입니다. 하나님만 아는 인침입니다. 마귀도 아는 인침입니다. 그리고 성도도 자신이 영적으로 인침 받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 인침을 받았다는 것을 느낀 성도는 영혼의 평안함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빠 아버지라고 담대히 부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내 죄를 깨끗이 씻었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임이 믿어집니다. 인침을 받은 사람은 그런 믿음을 갖습니다.
더불어서 성령으로 인치고 보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한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소유로 인친 것은 그 누구도 손 못 댑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그 소유를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도장으로 인쳐서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고 보호하려고 해도 더 힘쎈 자들이 빼앗아 갑니다. 사기꾼들이 훔쳐 갑니다. 우산에 내 소유라고 이름을 써놓아도 그 딱지를 떼고 가져가 버립니다. 책에 내 것이라고 도장을 찍어 놓아도 가져가 버립니다. 세상에는 내 소유라고 인을 찍어도 안전하게 보호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종말의 때에 주님으로부터 인침을 받은 사람은 감히 그 누구도 손댈 수 없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도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성부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피로서 우리를 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대가를 치루고, 해산의 수고를 거쳐서 우리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 우주의 그 어떤 세력도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보호가 만사형통이나 물리적인 보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보호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은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 말씀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오히려 말씀에 순종하여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인은 고난을 받는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골1:24절). 그러므로 성령의 인침 받은 신자에게 고난이 없고 형통만이 있다는 생각을 거짓 믿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나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리적이고 육신의 보호가 아니라 영적인 보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신앙을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서머나 교회의 안디바가 순교당했고,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순교를 당했으며, 초대교회도 수많은 박해와 고난과 순교를 당했고, 지금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는 도미티안 황제의 시대에도 많은 성도들이 박해와 순교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성도들에게 박해와 고난과 순교가 지속될 것입니다. 박해와 순교의 역사가 곧 교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박해를 허락하십니다. 순교를 허락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친 자들을 육신적으로 다 보호해 주신다면 어떻게 순교자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고난도 박해도 순교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보호가 아니라 영적인 보호입니다. 그들의 몸의 보호가 아니라 영혼의 보호입니다. 그들의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신앙의 보호입니다. 고난 중에도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더욱더 단단해지고, 고난 중에 오히려 감사하면서 그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 믿음의 힘, 기도의 힘이 내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덕분입니다. 결코 내 자아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내 의지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 믿음을 지켜 주시기 때문에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우리를 소망으로 이끌어 갑니다. 원수가 우리를 핍박할 때 우리의 영혼까지 핍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까지 죽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감옥에 가둔다고 지옥으로까지 던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침 받은 자들은 그곳이 군대에 가서 보초를 서고 있든, 억울한 일 당해 감옥에 있든, 병실에 있든, 수술대에 있든, 혹은 사업에 실패해서 지하 단칸방에서 살고 있든 그 곳이 어디든지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저는 이것이 이마에 성령으로 인침 받은 모든 성도들의 영혼의 샬롬이라고 믿습니다. 영혼의 보호를 받고 신앙의 보호를 받으면서 내면에 은혜와 평안이 있는 성도는 세상을 이깁니다. 고난을 이깁니다. 실패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침을 받아 신앙의 보호를 받고 있는 성도는 심판의 날에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찬송가 413장 4절을 참 좋아합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주님께서 심판하는 날에도 성령의 인침을 받고 구원의 보증이 있는 성도의 영혼은 평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영혼을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침 받은 성도가 왜 이렇게 보호를 받아야 합니까?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치열한 영적인 전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께서 인친 자들을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그들의 신앙은 다 무너집니다. 심지어 구원받았다는 확신도 흔들립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들에게는 매일 24시간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면 인침 받은 수가 몇 명입니까? 4절에 보닌까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들이 144,000명이라고 했습니다. 144,000명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144,000명은 교회 전체를 말합니다.
단순히 문자적으로 144,000명 밖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구원받은 12지파 유대인 총수 144,000명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유대인 12지파는 먼저 B.C 720년경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 이후로 10지파의 혈통이 이방인과 섞여버려 사마리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남아 있는 남유다 순수혈통 유다지파, 베냐민 지파도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오늘날 12지파의 순수혈통은 찾기 어렵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12지파는 육신적 유대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족속과 백성들이 포함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1:1)이 때 흩어져 있는 12지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다 포함은 교회 전체를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8)고 했습니다. 여호와 증인이나 신천지 이단은 이 숫자를 자신들에게만 적용하여 구원받은 여호와증인 144,000 혹은 구원받은 신천지인 144,000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144,000명에 들기 위해서는 헌금은 얼마는 해야 하고 전도도 몇 명은 해야 한다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144000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신실하게 신앙 생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144,000명만 구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구원 수를 제한하거나 구원을 경쟁시키는 그런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가장 성경적인 해석은 144,000을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것입니다. 즉, 12×12×1000=144,000으로 계산해서 앞의 12는 신약의 12사도를, 또 다른 12는 구약의 12지파를, 그리고 1000은 하나님의 완전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해서 144,000이라는 숫자는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교회 전체 성도의 수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144,000명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9절에서 144,000명의 수를 다시 확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144,000명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144,000명은 교회가 군대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성경에서는 왜 자꾸 수를 계수합니까? 수를 세는 것은 싸움에 나갈 군대라는 것입니다. 민수기 1장과 26장은 군대에 나갈 20세 이상의 수를 세었는데 1차인구조사는 603,550명 2차 때는 601,730명이었습니다. 백성을 계수하는 것은 군대의 수를 계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4,000명의 숫자를 헤아린다는 것은 지상에 있는 교회의 특징이 바로 전투하는 교회임을 보여줍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영적 전투 중에 있는 여호와의 군사로서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사로서 계수된 사람입니까? 나는 영적 전쟁 중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날마다 영적전쟁을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영적 싸움에 이기는 자로 서 있습니까? 성도는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며, 이길 수밖에 없는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와 싸웁니까? 먼저는 내 안에 있는 적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 밖에 있는 적입니다. 하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사고방식, 세상의 가치관과 그들의 행동양식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탄입니다. 하나님과 교회의 궁극적인 원수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뱀과 전갈과 밟고 승리하는 권세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하는 여호와의 군대로 매일 살아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누가 그의 앞에 설 것인가? 구원받은 144,000명이 서게 됩니다. 그들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흰 옷을 입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구원의 기쁨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교회를 향한 사랑의 말씀입니다. 또한 심판을 이기는 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넉넉한 지켜주심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들 자신입니다. 하나께서 택한 자녀들을 단 한 영혼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택한 자들을 다 구원하시기까지 최후의 심판으로 보류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모든 성도의 이마에 성령으로 인치고 보증하여 심판의 날을 넉넉히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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