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권면 벧전 2:11-17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을 베드로는 로마의 식민지인 소아시아 여러 나라에 흩으져있는 성도들에게 권면 하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대로 식민지 생활을 청산하기 위하여 총독을 향하여 항거하고 저항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자신의 심성의 정욕부터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
1.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밤에 정욕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칼을 도루 칼집에 넣어라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리라 권면을 예수님으로 부터 직접들은 바가 있습니다. 검을 통제치 못하는 사람은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자기 정욕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부끄러웁을 당케 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욕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화를 제어하지 못해서 이 땅의 성도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그런 무책임한 성도입니까?
우선 본문 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그러면 왜 정욕을 제어 해야합니까? 다른 번역 본에는 세상 쾌락에 말려들지 말며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성도가 왜 세상쾌락을 멀리해야할 이유를 두 가지 되고 있습니다.
1>우리는 나그네와 행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그네와 행인의 전제가 무엇입니까?
지금 현재 거주하고 있는 그곳이 본향이 아니라 고향이 아니라 돌아갈 고향이 따로 있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살고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재미에 마치 고향이 이세상뿐인 사람인 양 그렇게 쉽게 말려 들 수가 없습니다.여러분 나의 고향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가 본향에 오라고 부르시면 하던 것모두 두고 본향을 찾아 갈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절 말씀에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별명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것이 바른 믿음이고 허물 많은 이 세상에서 저 천국 본향을 소유한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2>육신의 정욕은 그냥 내버려두면 영혼을 거슬려 싸웁니다.
육신은 본래 영혼을 잘 따르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육신 마음속에 정욕이 찾아오면 영혼의 생각을 말을 듣지 않고 육신이 영혼의 지시를 듣지 않고 세상쾌락에 빠져 허덕이게 됩니다. 육신에 욕심이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변하여 육신의 일만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각 속에 육신 적인 정이 돋아 났습니다.
베드로는 육정의 충정으로 이런 일이 났습니다. 주님 내가 있는 어떻게 스승이 잡히신다 말입니까?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네 뒤로 물러 섰거라 하시면 "네가 어찌하여 육신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좀처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일치되기란 힘듭니다. 로마서 8:6-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할 수도 없음이라[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내속에서 활동하고 있는생각이 육신의 소욕인지 영의 소욕인지 가려 보시기를 원합니다.
2.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께 영원 토록영광을 돌리는 것이 성도의 이 땅에서 사명이라는 것을 잘압니다. 그러나 쉽게 잘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삶을 삽니까?
12절은 우리에게 그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비방하는 이방인에 대하여 맞서서 비방하거나 무시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악행을 한다고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두 가지 원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비방하는 사람에게 선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선대 하는 사람에게 선행으로 되갑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나를 비방하는 사람에게 선대 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스데반,바울,다윗과같은 사람의 위대성은 어디에 있습니까?자기를 비방하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비방하는 사람을 향하여 피어나는 꽃입니다. 여자든 남자든 싸워보면 본성이 들어 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비방을 당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수의 사랑이 들어 날수 있는 기회가 온줄로알고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되갚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가득한 사람만이 가능한일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 자기를 비방하다 못해 두 아들 동신,동인 이를 죽인 살해범을 양자를 삼으신 그 사랑 - 예수의 그 사랑이 아니고는 껴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아픔이 있습니까? 예수의 사랑으로 껴안을 수는 없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어느 때까지 해야 합니까?
2>권고하시는 날까지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권고하시는 날이 언제입니까? 이 세상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려오시는 날입니다.우리 성도들의 가장 큰 위로가 무엇입니까? 우리 구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눈에 눈물을 어제나 자제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서 시원하게 원통함이 다 풀리 지지 않더래도 우리 주님 권고 하시고자 오시는날이 성도에게는 남아 있습니다. 요한 일서 2:1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름은 그리스도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결과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많이 생겨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이 심판 주로 오시는 그날까지 비방하는 사람에게 선행을 보입시다.나는 무엇으로 선행을 보일까 지금 나를 비방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를 위하여 사랑의 기도로 선행을 나타보이겠습니까?
3.세 번째의 권면은 인간의 제도에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이고 절실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라 는 것이 아닙니다.세상의 제도는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살아갈 수도 없고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인생의 지혜가 필요하고 좌절과 낙망 속에서도 소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도에 순복하는 궁극적 목적과 현실 속에서 그 한계는 어디까지며 결국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제도 마땅하고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제도에 순복하라는 것입니다.권력을 무서워하는 마음으로 순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목적하고 권력에 순복하라는 것입니까?
주를 위하여 세상권력에 순복하라는 본문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세상권력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형편은 소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네로황제가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의 압박을 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당시 수신자의 대부분이 노예신분이 였을 것이 다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자유를 위해 투쟁을 해야하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하여 못마땅한 네로의 압정과 탄압을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를 위하여 집권하는 네로를 본다면 당장 일어서야 하겠지요 그러나 베드로 그를 찌라도 순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입니다.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2>어디까지 순복 해야합니까? 그의 방백에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앞절에서 왕이라고 하는 것은 네로 황제를 지칭하고 그의 보내신 방백이라는 말은 총독을 가리킵니다. 압제하는 총독에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회 참여도 포기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행동이 주의 뜻이 라면 능히 혁명에 가담할 수도 있습니다. 몇 가지 전제를 해야 합니다.
첫째 혁명을 일으킨다고 전보다 나아진다는 절대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둘째 단지 지금 잘못된 법율아래 있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혁명에 가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은 기도로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윌리암 펜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던가,혹은 독재자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저주를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의 통치속에서 생활하든지 아니면 독재자의 압박을 주를 위하여 감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이렇게 하므로 어떤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까?
무식한자의 말을 막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거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나라가 우선 이냐 교회가 우선 이냐 하는 질문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미술이 더 예술적이냐 아니면 음악이 더 예술적인 것이냐 묻는 것 같은가 꼭 같습니다. 쟝르가 다릅니다. 비교한다는 그 자체가 우수광 서럽습니다. 그 쟝르에서 맡은 바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의 세력과 국가의 세력을 재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사라도 국가의 실정법을 위반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권력자라고 해서 죄사함을 베풀고 영생을 선물로 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분야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추구하는 바가 다릅니다. 국가는 복지 국가가 목표입니다. 교회는 유토피아가 목표가 아닙니다.이 땅에서는 고난과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영원한 천국에서의 시민행사를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두개가 서로 연관은 있지만 서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견주고 비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 입니다. 이 땅에서 군주와 통독에게 주를 위하여 순복하면 할말을 막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8:7-9를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8]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9]그런즉 너희자 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우리는 양 세계를 다 이해합니다. 저들은 예수믿는 세계를 이해 하지 못합니다. 입을 막는 길은 우리는 주를 위하여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자유를 십분 발휘합시다
4.말은 하기 쉬워도 이 땅에서 살면서 성도의 삶을 살기란 그렇게 쉽지않습니다.
이 삶을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된 삶을 살아갈 때에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찾아봅시다
1>악을 감추는 자유를 사용하지 맙시다.
본문 16절을 읽어봅시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하라"
우리는 법으로부터 자유 합니다. 죄로부터 자유 합니다. 그러나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교회에 숨지 마십시오. 여러분 세상에서 지탄받을 일을 저지르고 교회를 은신처로 삼지 마십시오.
갈 5: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우리는 모든 것에 자유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를 육체의 소욕을 이루는 데 이 자유를 삼지 마십시오.
2>여러분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이라면 형제를 사랑하고 뭇사람은 공경하는 사람 일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뭇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대인 관계가 원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이라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지금여러분은 어떻습니까?
3>하나님을 두려워할줄아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이 될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예배를 드립니까? 사람이 두려워...사람의 종입니다. 율법이 두려워서입니까? 어쩔 수 없이 율법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이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종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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