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4주 주일설교.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스가랴 9장 9~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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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절 넷째주일이며 곧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12월 한 달 동안 ‘소망’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으로 소망의 풍성함을 가득 채우셔서 성탄절 복된 기쁜소식을 들으며 우리 주님과 감격적인 만남의 은혜를 누리시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실체를 알고 있지만 구약 시대에는 구원자에 대한 예언만 있을 뿐이지, 그 분이 누구신지, 언제 오실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 탄생의 예언의 말씀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말씀 세 곳을 읽어 드립니다.
①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② 미가서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③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말씀과 더불어서 오늘 스가랴 9장 9절에 “겸손의 왕이시다, 나귀새끼(예루살렘 입성)를 타실 것이다”라는 말씀도 구원자에 대한 예언의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학자들은 구약에만 300곳이 넘는 예언 구절이 있고 모두 다 성취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구원자 탄생 예언 구절이 많이 있음에도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본체 이시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며칠 후에 그 충격적인 대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지만 범위를 나에게 집중시켜서, 나 한사람을 만나시려는 목표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 하십시오.
나를 만남의 대상으로, 구원의 대상으로 여겨 주시고 친히 찾아와 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만 가슴에 담고 간절하게 기도하시면, 구원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모두의 마음 속에 기쁨으로, 영광으로, 평강의 왕으로 임하여 주실 것입니다.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기다리며 모두에게 만남의 은혜가 충만하에 임하시기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9절은 메시아 탄생 예언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9절, 10절까지 읽어 드립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아멘.
이 두 구절은 메시아(구원자)가 이 땅에 도래(到來, 어떤 때나 기회가 닥쳐오다)할 것인데 그 구원자는 “겸손의 왕”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구원자를 맞이하게 될 사람들을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하였는네, 이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구원자가 오실 것을 믿고,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사람들(선민, 하나님에게 속한 자녀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역시 구원자를 고대하며 소망함으로 대림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분은 시온의 딸이나 예루살렘의 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겸손의 왕” 이신 구원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9절에서와 같이 “크게 기뻐하고 즐거이 부를지어다”라는 말씀처럼, 날마다 찬양하며 구원자에 대해서 가장 높은 영광을 선포하는 마음으로 만남을 준비해야 합니다.
“겸손의 왕”은 이 땅에 오시면서 악과 거짓과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는 공의를 행사 하실 것이고, 선을 행하고 진리를 따르고 죄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구원자는 왕의 위엄과 권세를 지니시고 오시겠지만 그 분은 겸손하기가 그지없으셔서 작은 나귀새끼를 타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가장 누추한 마구간에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겸손하신 평강의 왕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9절에 “보라 왕이 네게 임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겸손의 왕으로 임하시는 그 분을 똑똑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영안이 열려서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된다면 그동안 대림절에 소망으로 기도했던 만남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겸손하신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성탄의 아침이 오는 그 날까지 성령충만을 구하며 성령의 영안이 열리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셔야 합니다.
10절은 겸손의 왕이신 구원자가 온 세상에 평화의 왕권을 수립하실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10절 초반부에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에브라임은 분열왕국 시대에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이며 북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다 왕국의 수도이며 이것도 유다 나라 자체를 말합니다.
겸손의 왕이 오시면 분열되어 싸우고 반목하고 전쟁을 일삼던 두 나라의 병거와 말과 활을 끊어 버려서 더 이상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지금도 구원자가 이 세상에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면 모든 나라의 전쟁과 기근과 핍박은 다 사라지고 오직 평화만이 영원토록 있을 겁니다.
10절 후반분에 그가, 곧 구원자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주신다고 하였으며, 바다와 땅 끝까지 이르러 통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겸손의 왕이 이 세상 만국을 다스리실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말씀이며, 그가 통치하는 방식은 전쟁과 무력과 권력이 아닌 겸손과 평화와 공존의 방식이 될 것임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구원자가 오시면 성경에 예언 된 대로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뛰놀며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는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시록에 21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하면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는 말씀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세상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정말로 겸손의 왕으로 임하시는 구원자를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 영적인 교제와 연합을 이루는 성탄절을 보내게 된다면, 그런 분들의 마음속에는 겸손의 왕, 평화의 왕, 만왕의 왕이 통치 하심으로 모든 눈물과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과 영광만이 충만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될 것을 간절히 기대하고 기도하며 대림절을 지나왔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그 만남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은혜의 만남을 반드시 이루시고, 겸손의 왕 앞에 머리 숙여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리는 성탄절로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나머지 말씀들은 겸손의 왕이 이 땅에 오셔서 만국을 다스리시면서 행하시게 될 역사들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11~12절을 읽어 드립니다.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아멘.
12절에 ‘소망’이 나옵니다. 첫 번째 역사는 소망을 품은 자들에게 돌아오게 될 역사입니다. 그들에게는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갑절은 문자적으로 두 배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채움, 풍성함을 뜻합니다. 모든 면에서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돌아오게 되는 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면 11절에서와 같이 구덩이에 갇혀 있습니다. 그 구덩이에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죄악에 물들은 인류 전체가 모두 물 없는 구덩이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갇힌자들이 풀려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은 11절 중간에 나오는 말씀대로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물 없는 구덩에 갇혀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들이 풀려나는 역사기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는 히브리서 말씀이 구약에서 이미 예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물 없는 구덩이에 갇힌자들이 풀려 나고, 갑절이나 받는 은혜를 누릴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되는 자들이 누구인지을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나는 해당되겠지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덩이에서 풀려나는 사람들은 분명하게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내가 물 없는 구덩이에 갇혀 있다는 생각(인지, 의식)을 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현재 상황이 죄로 인해서 도저히 심판과 멸망을 피하지 못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임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나를 건져내 주고, 물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에 칼빈이 말한 것을 설명해 드린 대로 나에 대한 자각(죄로 인한 비참한 나의 모습 인식)이 있어야 구원의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씀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둘째, 우리는 비록 갇혀 있지만 끝까지 소망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소망을 품는 다면 무언가는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 필연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품고 대림절을 지나서 만남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언가 일어난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갇혀 있지만 반드시 소망을 품은 자로 살아가서 반드시 약속한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물 없이 구덩이에 갇힌 자들일지라도 끝까지 소망을 품은 자들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우리 모두에게는 갑절이나 갚게 되는 은혜의 역사가 임하게 될 것라는 사실(약속)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으며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임을 한 시도 잊지 마시고, 오직 구원자가 오셔서 건져 내 주시기를 더욱 고대하는 마음으로 대림절 마지막 한주를 인내하며 만남의 소망으로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갇힌자에게 소망을 주시는 말씀에 이어 두 번째 나타나는 역사는 13~15절입니다. 읽어 드립니다.
“13.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14.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15.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아멘.
이 구절들은 한 마디로 겸솜의 왕이 오셔서 “원수에 대한 승리”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분열하고 서로 다투던 유다와 에브라임을 활과 화살로 삼아서 헬라 자식들(이방나라)을 치게 하시며, 여호와가 친히 나팔을 불고 회오리 바람을 타고 앞장서 나갈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여호와가 앞서 싸우시면 승리는 명확합니다.
15절에는 원수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원수를 삼키고 그들의 피가 흠뻑 젖을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전쟁의 승리를 묘사하는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긍극적으로 우리의 주적인 공중의 권세잡은자인 사탄과 그 무리들이 패배하고 원수에게 사로 잡힌 자들이 구원받아 자유함을 얻게 될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소망을 품고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죄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심판과 형벌에서 벗어나 영생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 은혜는 원수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선언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아래 거할 때만이 가능하며, 15절의 말씀은 그렇게 구원으로 역사하실 예수님의 완전한 승리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괴롭혀서 낙심과 슬픔과 패배와 절망에 빠지게 하는 마음들은 전부 다 원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소망을 품고 기도했으니, 우리의 대장 되시는 겸손의 왕이 오셔서 이 모든 원수들을 일거에 물리쳐 주시고,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구원의 빛을 비춰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원수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선언하신 말씀에 힘입어 내 인생에, 내 영혼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이루어 주실 구원자를 더욱 간절히 소망하며 성탄절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대림절 마지막 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완벽하게 마무리 해 나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원수에게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씀에 이어 세 번째 나타나게 될 역사인 16~17절을 읽어 드립니다.
“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17.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아멘.
마지막 역사는 겸손의 왕이 오시면 오로지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원자가 오시면 우리는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날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왕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와 하나님 나라(영역이 아닌 통치)에 거하면서 형통함과 강건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형통함과 강건함을 누리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습니다. 왕의 자녀로 살아가고 왕이 다스리는 땅에서의 영광을 누리는 일을 마다할 사람도 역시 없습니다. 이것은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원하고 바라는 일생일대의 소원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소망을 품고 기다하며 인내하는 가운데 기도를 쉬지 않으면 반드시 그 날에 이르러 형통함과 강건함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왕의 자녀로 살아가고 그 나라의 땅을 거니는 일도 멀지 않았습니다. 소망만 잃지 않으면 그날은 반드시 오게 될 것이고, 속히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하여도 흥분되고 마음이 하늘로 붕 떠 올라가는 느낌입니다.
겸손 왕, 평화의 왕, 만왕의 왕이 오시면 일어나게 될 세 가지 역사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물 없이 구덩이에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에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는 역사입니다.
둘째, 만군의 여호와께서 원수를 물리치시고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완벽한 구원을 이루실 역사입니다.
셋째, 겸손의 왕이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게 되면 우리 모두는 왕의 자녀로, 왕의 나라 땅을 밟고 다니는 자들로 살아가면서 형통함과 강건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역사입니다.
이 세가지 역사는 약속이며 반드시, 끝까지 소망을 품은 자들에게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받을 대상이고, 이 약속의 주인공입니다. 내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몸과 마음을 더욱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우리 주님이 오심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리는 그 날로 힘차게 나아가시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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