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듣는 자세 (슥 7장8-14)
스가랴선지는 바벨론 포로시대에 출생하여 고국으로 돌아와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는 그의 선조들이 “왜 이방인에게 포로가 된 비운의 민족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슥 1:4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 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의 징계를 받은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선지는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기를 원했습니다.슥 8:13에 “전에는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으나 이제부터 말씀을 청종하면……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말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스가랴선지의 권고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그러면 귀한 말씀을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하겠습니까
1. 말씀을 들음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응당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으로 해야할 것은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대소사에 있어 이 점을 밝힌 다음에 할 것입니다. 반은 나 자신을 위해서 반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했다고 합시다. 사람의 칭찬을 받으면 마음속이 은근히 기쁩니다. 이렇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겉으로 하나님을 위한다면 속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 다 똑똑히 드러나지 않아도 장래에는 드러나고야 맙니다. 자신을 위해서 한 모든 일은 다 불살라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초목으로 지은 집인 까닭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비로소 금 은 보석으로 지은 집인 때문입니다. 불이 그 공을 나타낼 것입니다. 타지 않아야 합니다. 타버릴 역사를 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괴롭히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쓸데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느라고 분주하나 하나님께서는 쓸데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닌 금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금식이나 비애가 아닙니다. 그가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한결 같으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느라고 분주하나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듣는 것을 원하실 뿐입니다. 울며 회개하면서도 말씀듣기를 싫어합니다. 금식하며 슬퍼하면서도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막고 있습니다. 저들은 5월 7일 즐거이 금식합니다. 자기 몸을 해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 무슨 쓸대 있는 일입니까 그날 그때에 저들을 향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비애가 아니요, 금식이 아니요, 우는 것이 아니요, 귀막은 것을 뽑아 버리고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말씀 청종하기를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 청종하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우선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죄악이 자리 잡은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을 일단 거부합니다. 어두운 마귀 권세가 진을 치고 빛의 말씀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으므로 말씀 듣기를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 죄악에 묻힌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오기도 싫어하고 말씀 듣기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이 금보다 더 귀한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상 삶의 방법 중에 돈이 귀한 줄을 알기 때문에 돈 버는 일이라면 삼촌도 팔아먹으려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금은보화를 가지는 것보다 더욱 귀한 줄을 안다면 교회 정문 앞에 장사진의 줄이 이어질 것입니다. 말씀듣기가 싫어지고 읽기가 싫어진 사람은 영적 식욕이 감퇴된 환자입니다. 육신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고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성도가 있으면 정확히 영적 진찰을 해 보십시오. 고장 난 원인을 찾아 치료하여 식욕이 다시 왕성해지시기를 기원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눅 10:39). 마리아의 집에 주께서 들어오시사 말씀을 하실 때 그는 “주의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부단히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정중히 드려야 합니다. 소수의 무리만이 들을 것이 아니라 전 인류가 함께 들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살 수 있는 참희 소식을 들으려면 하나님의 입을 주시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려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3. 등으로 향하지 말고 가슴으로 향하여야 합니다.
11절에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등을 향하는 자세는 잘못된 자세입니다. 등을 향한다는 뜻은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교제를 끊자는 것이며 원수시 한다는 뜻입니다. 태양을 등지면 어두움이 오듯이 하나님을 등지면 저주가 찾아 올 것입니다. 탕자는 돈이 있고, 건강이 있었으나 아버지를 등질 때 거지 신세가 되고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는 하느님을 향하여 등을 돌려 대서는 안 됩니다. 가슴으로 향하여야 합니다. 가슴을 향한다는 뜻은 영접한다는 뜻이며 기다리고 사모하는 알뜰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맞이하게 될 때 참 삶과 엄청난 축복을 맞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슴을 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십시오. 이탈리아의 건축가이며 조각가요 화가로 유명한 미켈란젤로(AD 1475-1564)는 1547년 이후 베드로 대성당의 천정화를 그렸는데 얼마나 정성스럽게 그렸는지 오직 위만을 바라보며 성화를 그리느라고 목이 위로 향하여 굳어졌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등을 향하지 말고 가슴을 향하여 정중히 않으십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세입니다.
4.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12절 말씀에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금강석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빙자하여 전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여호와께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정상입니다. 시간 속에서 내일을 알지 못하고 허덕이는 인간들이 영원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축복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생명을 사랑한다고 하면 생명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금강석 같은 마음은 딱딱한 마음,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바닥과 같은 마음입니다. 말씀의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마음입니다. 새들이 와서 주어 먹어버리는 마음입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손해를 보고 마는 것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말씀을 듣던 청중들은 겸손하여 에스라가 율법의 말씀을 증거 할 때 “아멘, 아멘” 하며 응답하였습니다(느 8:6).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 앞에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곧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세입니다. 금강석 같은 곧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시오. 말씀의 씨가 틀 수 있는 옥토 같은 마음 밭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5. 응답하는 자세라야 합니다
13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로 14절에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쳐지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의 살아계신 아버지이십니다. 인격을 가졌으면 대화가 뒤따라야 합니다. 부자간의 관계에서도 대화가 단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의 아버지로서 끊임없이 대화를 걸어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체 없이 응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의 소식을 힘써 전했으나 그 세대가 불응하였습니다. 그래서 눅 7:32에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는 비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은 어릴 때 여호와께서 삼상 3:10에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실 때 사무엘이 대답하기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사 6:8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는 여호와의 음성이 들릴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생명의 물체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인간들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하여 응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말씀에 응답”이란 말씀을 듣는 내가 그 말씀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즉시 언행심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소귀에 경 읽기”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합니다.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대화를 걸어온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황송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듣기 원하는 자 되 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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