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4대 특성 (히 11:1-2)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 시간 “믿음의 4대 특성”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믿음이 무엇일까요? 가장 간단하게는 믿음이란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믿음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 신앙생활의 전반을 총망라한 용어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좀 독특하게 확신의 측면에서 믿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말씀에 믿음의 네 가지 특성이 나타납니다.
1. 믿음의 방향성입니다.
믿음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요.” “바라는 것”의 원문의 의미는 ‘기대하다, 자신하다. 희망하다, 확신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바라고 희망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믿는 대로 될지어다 하셨으므로 무엇을 바라보느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셨고, 고후3:18에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아름답고 위대한 것을 바라보아야지 세상 바라본다면 그건 비극입니다. 지인에게서 이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인의 동네 사람이 교통법을 위반하여 5만원 벌금을 물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5만원이 아까워 파출소에 가서 미친 체하며 난동을 부렸습니다. 정신이상자로 인정되면 벌금을 취소시켜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그가 생각한 그대로 믿음 그대로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정신병원에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신병원에 가서도 거짓말이 탄로가 날까봐서 계속 난동부리다가 감금되고 독한 주사를 맞고 그러다가 아주 폐인이 되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주는 주사는 아주 중추신경을 다 망가뜨려 폐인되게 하는 그런 주사입니다.
소식을 들은 이웃 사람들이 병원에 가보니 중환자실에 누웠는데 몸은 침대에 꽁꽁 묶여 있고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한 번 뜨더니 감아버리더랍니다. 밥도 삼키지 못하고 식도에 구멍을 내어 죽을 투입하고 있었습니다. 정신병자 행세하다가 아주 죽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까짓 벌금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자리까지 간 가련하고 미련한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잘못된 믿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방향성이 있고 그 바라보는 대로 되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긍정적인 일이 생겨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부정적인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진리 안에서 생각하고 예수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예수 안에서 얼마나 복되고 위대한 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바벨론이 지어 준 다니엘의 이름은 '벨드사살'입니다. 그 뜻은 '벨신이여 생명을 보존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한 번도 그 이름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는 자기를 말할 때마다 '나 다니엘'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이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끝까지 벨신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 방향성이 정확해야 합니다.
2. 믿음은 가시성이 있습니다.
1절에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했는데 이 말씀은 실체는 보이지 않아도 믿음은 보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시성이라. 가시성이란 보인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나팔 불지 않아도 믿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약2:18에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했습니다.
농부가 남의 밭에 일하다 보화를 발견하고 숨겨 두고 자기 집을 다 팔아 샀는데 아직 보화는 감취여 있었지만 농부의 얼굴에 나타난 환희와 행복의 미소만은 결코 감출 수 없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대체, 이처럼 우리 마음의 기쁨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데반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천국을 보았고, 천사도 보았습니다. 그의 얼굴과 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나타난 이적을 통해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은지 나쁜지 얼굴만 봐도 압니다. 말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사는 것 보면 압니다. 신앙생활하는 것 보면 압니다. 교회생활을 보면 압니다. 가정생활하는 것 보면 압니다. 사회생활하는 것 보면 압니다. 인간관계를 보면 압니다. 교회 일할 때 보면 압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보면 압니다. 믿음은 이렇게 행함 속에서 다 나타납니다.
3. 믿음은 확신성이 있습니다.
다시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했는데 여기 "실상", 그리고 "증거"는 모두 마음의 확신을 가리킵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마음의 상태이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뚜렸해서 실체와 다름없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믿어지고 천국이 믿어지고 성경이 믿어져야 합니다.
꿈을 꾸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은 왜 그렇게 현실처럼 생생한지 그런 꾸을 꾸실 때는 무슨 뜻인지 기도하라는 건지 회개하라는 건지 곰곰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현실 만큼 생생해서는 부족합니다. 현실보다 더 뚜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후4:18에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보다 보이는 현실을 더 믿었습니다. 황량한 광야, 강이 있습니까? 나무가 있습니까? 풀 한 포기가 있습니까? 바라볼수록 낙심만 주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망한 것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보다 광야의 환경을 더 사실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슥4:7 말씀처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7)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왕하 6장을 보면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 이것을 본 엘리사의 종이 내 주여 어찌하리이까 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종의 눈을 열어 주니 아람군보다 더 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있었습니다. 아람군대만 보지 말고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4. 믿음은 동질성이 있습니다.
2절에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도 다 그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엘리야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다윗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때 그들이 체험했던 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동일하게 체험합니다. 천로역정과 같이 성도들이 가는 천국 길의 환경은 같습니다.
그래서 엡4:4-6에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12:4-6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다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왜 주었습니까? 당시만 해도 이방인이 구원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때입니다. 그런데 행 11장에 예루살렘 총회에 베드로가 보고할 때 보면 행11:17에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우리가 받은 동일한 성령을 받았기에 주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만 예수를 만난 것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났습니다. 한 사람만 은혜를 받은 것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만 천국을 경험한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지금까지 수십만 명도 더 된다고 합니다. 성령의 충만과 지도와 인도와 능력도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렘6:16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노아가 갔던 그 길, 아브라함이 갔던 그 길, 주님이 앞서 가셨던 그 길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동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12:1-2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도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바른 믿음, 보이는 믿음, 확신의 믿음, 동참하는 동질의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나 저 천국에서나 영원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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