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함 받은 자의 복 마22장1-14 사43:1-10,
부산에 사는 74세 노 의사 집에 제자 의사가 방문했습니다. 결혼 주례를 맡게 된 스승에게 인사차 예비신부와 함께 찾아온 것입니다. 평소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던 분이 그날따라 약속 시간에서 20분이 지나도 귀가하지 않았습니다. 10분쯤 더 지났을 때 스승이 나타났습니다. 서둘러 달려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씀하셨습니다. "늦어서 미안하네. 급한 환자가 생겨서 그만…."
곧 저녁식사가 나왔습니다. 식사가 끝날 즈음 스승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사실은 오늘 저녁 식사 약속이 겹쳤어. 자네와의 선약이 있어 다른 약속을 취소해버렸지." 그러자 제자가 농담 삼아 받아쳤습니다. "당연하죠, 제가 주례 선생님께 인사하러 왔는데 아무리 중요한 거라도 깨야죠." "그렇지, 암 그래야겠지." 노 의사는 허허 웃어넘겼습니다.
사실은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이 서슬 퍼랬던 제5공화국 시절 1984년 어느 날 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했던 때였습니다. 대통령은 지역 인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다면서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미리 선정한 몇 분들을 초청할 것을 비서에게 지시했습니다. 비서들을 황급히 서둘러 명단에 들어 있는 분들에게 전화를 돌렸습니다. 그중에는 몇 십 년째 무료 진료와 의료봉사를 하며 빈민을 위한 민간의료보험을 처음 실시해 지역과 국가를 넘어 세계적인 인물이 된 장기려 박사가 들어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초대를 알리는 비서에게 장 박사는 말했습니다. “어쩌죠, 제가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대통령님의 저녁 초대에 응할 수가 없답니다.” 그날 대통령이 장 박사를 만나자고했던 것은 장 박사를 보사부 장관에 발탁하려던 자리였다고 후일담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날 제자와 저녁 약속이 있었던 노 의사 성산 장기려(1911~1995)박사는 젊은 제자와의 약속 때문에 대통령의 초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세상 권력을 가진 사람의 초대는 그렇게 거절해도 되지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초청에는 만사를 뒤로하고 응해야 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초청에 응한 자들 가운데는 청함을 받은 자들이 있고, 청함과 함께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택함을 받은 자의 복”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을 혼인 잔치에 비유한 말씀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모든 것이 갖춰져 부족함이 없는 곳이기에 잔칫집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잔치도 돌잔치, 생일잔치, 회갑잔치, 팔순 잔치가 아닌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를 배설하신 분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시고 신랑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시며 신부는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을 두고 하시는 혼인잔치입니다. 열 처녀 비유도 같은 맥락으로 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임금은 소와 짐승을 잡아 풍성하게 음식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나가서 청해놓은 사람들에게 이제 잔칫집에 오라고 '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유대인들의 당시 풍습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잔치를 할 때 미리 초대일자는 안 알리고 초청을 한다고 합니다. 그 후에 날짜가 정해지면 미리 초청해 놓은 사람들에게 알려서 그 날짜에 오도록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종들은 잔칫날이 되어 동네로 들어가서 부지런히 전했으나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부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 않습니다. 마22:5-6에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했습니다. 거절한 이유는 일상적인 생활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해진 초대에 거절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에 보면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때문입니다. 직장 때문에, 사업 때문에, 학교 때문에, 수능 준비 때문에, 학원 때문에, 가족 때문에, 결혼식 때문에, 누구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휴가 때문에, 회사 야유회이기 때문에 등 등 일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상의 모든 이유는 거절할 이유가 아닙니다.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부자가 되고 사업이 잘 되었다면 그 임금이 잔치를 베풀고 초대하는데 감사하여 시간을 내서 우선적으로 참석해야지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거절하는 것은 임금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돌보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신 사랑을 외면하고 초대에 응하지 아니하고 하는 엉뚱한 곳에 가 있다면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초청해 주시는 그 사랑에 감격하며 응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네 개의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며 그것도 전국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할 정도로 피아노를 잘 치는 피아니스트 이희아양 이야기입니다. 어느 해 어린이날에 청와대에 초청되었을 때 '나는 오늘 청와대에 가요. 대통령 할아버지 만날 거예요. 너무 너무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한 손에 손가락이 두 개씩 있고, 다리까지 기형인 선천성 1급 장애인인 아이가 그 장애를 극복하고 피아니스트로 성장할 수 있었던 그 아름다운 삶의 주인공이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을 때 '나 같은 사람이 청와대 갈 수 있나요?' 나 같은 사람이 대통령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초청한 곳은 청와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곳입니다. 미국의 백악관보다도, 소련의 크레므린 궁전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썩지 않고 영원토록 변함없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집, 그곳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 걱정이 없고 죽음의 걱정도 없고 인간과의 관계의 문제가 없으며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천국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거절하는 사람은 너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잡다한 일에 분주하여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기 쉽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쉬우며, 강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고 부드러운 그리스도의 영생에로의 초청의 소리를 듣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을 주님은 너무 안타까워하십니다.
사람들이 초청에 거절하자 화가 난 임금은 길 사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했습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가리지 말고 초대해서 가득 채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거리에 나가 초대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잔치 집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이미 하나님의 선민으로 초대되어있던 사람들인데 정작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를 따르고 영접하도록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전도자들을 통해 초청했을 때 그들은 오만하게도 그 초청을 거절하고 대적하여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거리에 나가 유대인이든 이방 사람이든 죄인이든 가릴 것 없이 초청을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초청에 응하여 자리를 다 채웠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초청에 항상 즐거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초대 받은 자들 가운데에는 택함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 마22:14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했습니다. 구약 본문 사43:10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했습니다. 청함을 받고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지 못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고, 바른 믿음의 고백도 못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들입니다.
한 아이가 혼자 제 방에서 장난감 벽돌을 가지고 이것을 높이 쌓으면서 놓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와서 아이의 방에 가보니 아버지가 왔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벽돌쌓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 지금 뭘 하고 있니?"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뒤돌아보면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면서 "쉿! 조용히 하세요, 지금 교회를 짓고 있어요." 아버지가 깜짝 놀랐습니다. 늘 어린 것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그리고 예배드릴 때마다 떠들어서 조용히 하라고 주의시킬 정도로 이 아이는 늘 말썽이었는데 이만큼 믿음이 있었구나! 자못 대견스럽고 흐뭇했습니다.
아빠가 관심 있게 또 묻습니다. "얘야!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되는데?" 그러자 아이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빠! 그것도 모르세요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다 잠들었으니까요 떠들면 모두 깨잖아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이들 데리고 교회 나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갔을 때마다 이 아버지는 졸은 것이 아니라 아예 잤거든요.
이 모습은 택함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참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택함 받은 자들은 말씀을 듣는 귀가 열려 있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으며, 왜 그분을 믿고 영접해야 하는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변화 되어야 하고,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또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압니다.
본문 마22:12-13에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하셨습니다. 여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초대는 되었지만 그에게 그러한 변화와 반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 주인공 역시 그 사실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어떤 변명도 없이 유구무언인 것을 보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결국 입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지 못했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경외심이 외적 표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그러한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경외심이 의, 사랑, 화평, 감사, 겸손, 기쁨, 충성, 섬김 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고 했습니다. 여기서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 없이 살았던 때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것을 벗어버리고 그 대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 새 사람이 입은 예복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나타나는 삶의 표현입니다.
예복(禮服)은 주로 예식이나 의식 때에 입는 옷입니다. 유대에서는 혼례의 초대 객에게는, 특별한 예복을 제공하여 입게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착용치 않는 것은 주인에 대하여 실례로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준비하고 입어야 할 예복이 있습니다.
*구속이라는 예복입니다. 갈 3:2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더럽혀진 우리에게는 우리를 감싸는 예복이 되십니다. 계7:14에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택함 받은 자들은 반듯이 십자가의 피로 씻음 받아 구원받아 피 뿌린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의라는 예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입는 예복은 의로움의 옷입니다. 이 의로움의 옷은 성도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삶의 기본적인 요소인 것으로 믿음으로 얻는 의요, 또한 실질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는 의로운 삶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화라는 예복입니다. 계 19:8에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옷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입을 옷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면 반드시 이 옷을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반드시 거룩함을 이루며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실천들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모두 초대 받은 자로 끝나지 않고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택함 받은 자들의 표식은 서로를 존중히 여깁니다.
사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했습니다. 4절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했고, 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자들인지를 분명히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사는 성도들은 형통의 때에도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을 돌립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을 만나도 늘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한 순간도 여러분과 저를 잊지 않으십니다. 홍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결코 노아를 잊지 않고 지켜보신 것처럼 그분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워싱턴에 가면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속에 손때에 이겨져 눌린 손가락 자국이 있습니다. 여러 번 같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자국입니다. 그곳은 시편 34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시리로다. 링컨은 남북전쟁과 그의 평생에 걸친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확신과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음이 눌린 자국까지 나도록 되풀이해서 읽은 시편의 말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체제 밑에서 박해를 받던 범브랜트(Richard Wurmbrand)목사는 그가 옥중에 있을 때에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씌어 있는가를 세어 보았더니 꼭 365번이 기록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숫자는 1년 365일 매일 한 번씩에 해당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택함 받은 자들을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기에 택함을 받은 자들 역시 누구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자가 됩니다.
어느 나라에 궁궐 밖의 서민들과 대화하며 사귀는 것을 즐기는 여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왕은 믿음이 좋은 한 여인의 집을 찾아가 같이 기도하고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대화중에 그 여인의 믿음에 감동받은 여왕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을 찾아와준 손님 중에 가장 고귀한 손님은 누구입니까?” 여왕은 그녀가 “당연히 예수님 이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에게 가장 고귀한 손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여왕님이십니다. 여왕님은 제 생애에 최고의 손님이십니다.”
그녀의 대답에 실망한 여왕은 다시 물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당신을 찾아주신 최고의 손님 일꺼라고 믿고 있었는데요...” 그러자 여인은 “여왕님, 예수님은 결코 손님이 아닙니다. 저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저희 집에 처음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주인으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결코 손님처럼 왔다가 다시 가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세상의 누구보다, 그 무엇도 주님 보다 더 존귀하고, 더 보배롭고, 더 사랑할 만한 대상은 없습니다. 그런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택함을 받은 자의 복”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대 받은 자들 가운데에는 택함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택함 받은 자들의 표식은 서로를 존중히 여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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