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질의 바른 믿음 마7:17-27, 히11:1-6
성경은 믿음의 책입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고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는 말도 안 되는 내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조명해 주심으로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은혜이고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모든 내용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올바른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응답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천국에 갑니다. 그런데 믿음 중에도 거짓 믿음도 있고, 바른 믿음이 있습니다. 거짓 믿음으로는 천국에 갈수도 없고, 주님 앞에 인정받을 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본문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교회에 나오면 입으로 주님을 부르지만, 그 속에도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서 오히려 믿음이 더 좋은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에 거기에 현혹되어 넘어가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선전하는 경우나, 또 기도를 하면서 자랑하는 말을 많이 하고, 얼굴에 금식한 것을 나타내려 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6:2-7).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고 하십니다(마 25:12).
사명자들 중에도 거짓된 사명자가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라는 직분을 받아 많은 일을 하였고 또한 신비로운 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고 다 충성된 일꾼이 아닙니다.
좋은 사명자나 성도는 양질의 좋은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유1:20-21 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했습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양질의 바른 믿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바른 기초위에 세워진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본문 24절에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것은 반석 위에 기초를 두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떤 기초위에 집을 세우느냐에 따라 무너짐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반석이냐 모래이냐? 반석은 변화가 없지만 모래는 쉽게 변합니다. 이스라엘 지역의 모래는 우리나라의 진흙과도 같습니다. 보통 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비만 오면 이스라엘의 모래는 석회질과 같아서 금방 무르게 되어 허물어집니다. 그래서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세운 집은 견고하여 비바람이 불어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길 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때 네가 복이 있다 말씀하시고 베드로(반석)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모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이성이나 물질, 명예, 권세, 과학, 종교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성공이란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달립니다. 곧 무너질 모래 위에 열심히 집을 짓습니다.
바른 믿음의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세웁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반석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할 때 천국에 갑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예수님의 이름 밖에 없습니다. 기도 응답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죄 사함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말세가 되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놓아버립니다. 말세의 특징 중에 하나가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입니다. 전에는 오직 예수였던 기독교가 이제는 예수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도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대놓고 합니다. 설교시간에 외치고, 책에 그렇게 쓰고, 심지어 방송에 나와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목사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붙잡지 않고 다른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목자는 바른 믿음에서 떠난 자입니다.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거짓된 사역자입니다.
마지막 시대는 진리 싸움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붙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게 하고, 다른 것을 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의 사람은 죽는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붙드는 자가 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자가 됩니다.(히12:2)
본문 히11:1-2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했습니다.
미국의 존 맥스웰 목사가 오하이오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냥꾼으로 유명한 교우와 함께 100리쯤 쭉 뻗은 고속도로를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교우의 특별한 면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기 다람쥐가 있네요.” 그러나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저기를 보십시오. 오리가 두 마리나 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여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사슴을 보십시오.” “토끼가 지나갔습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사냥꾼 교우는 십여 마리의 짐승을 봤습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같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사냥꾼은 쉽게 보는 것을 맥스웰 목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직 고속도로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냥꾼의 눈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짐승들이 보이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 눈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천국의 소망이 무엇인지, 믿음의 결국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 바른 믿음의 기초위에 믿음의 집을 짓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지혜롭게 믿음의 집을 세워 가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본문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바란다는 말은 헬라어로 ‘엘피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기대하다. 바라다. 소망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기대가 없고 바라는 것이 없고 소망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지혜롭게 믿음의 집을 세워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임재를 기대해야 합니다.
임재라는 말은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 계시는 것을 임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임재가 지속되는 것을 동행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분이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실패한 모세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니 애급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는 사명자로 소명을 받고 그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과 참 신을 가리는 대결을 했습니다. 제단에 불이 떨어지도록 먼저 850명이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었지만 엘리야가 사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즉시 불이 떨어져 제단을 살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보이고 거짓 선지자들을 척결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이 임재하시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물고기를 잡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울에게 주님이 임재하시니 그가 꺼꾸러지고 변화되어 복음 전도자로서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실의에 찬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주님의 임재를 깨닫고 곧바로 소망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120문도에게 성령 충만으로 임재하시니 담대한 믿음의 증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우리가 사는 삶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동행하는 삶이 지혜롭게 세워가는 믿음입니다.
다음에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대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주님의 재림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기회도 끝이 납니다. 은혜 받을 기회, 구원 얻을 기회, 충성할 기회도 끝이 납니다. 성령기름 예비할 기회도 끝납니다. 마귀의 시험도 끝납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고난도 끝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자들은 기회를 잘 선용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믿음이 자라기를 힘씁니다.
어느 목사님이 청년 시절에 가나안 농군학교에 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고구마 하나가 머리통만 하더랍니다. 고구마 간식을 주는데 여섯 토막 여덟 토막을 내어도 될 정도였답니다. 고 김용기 장로님이 그 고구마를 들고 고구마가 왜 그렇게 커졌는지 청년들에게 가르쳐 주더랍니다. 김용기 장로는 고구마가 잠자는 걸 보지 못하고 충격을 준답니다. 아침에 이슬을 먹고 고구마가 푹 퍼져 잠들어 있으면 호미를 들고 가서 흙을 파서 돋워 주면서 손으로 잠자는 고구마를 툭툭 건드려 준답니다. 빗자루로 고구마를 슬슬 쓸어주면서 충격을 준다는 것입니다. 충격을 받으면 고구마가 긴장을 해서 커진답니다. 한번 충격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커진답니다. 그래서 고구마가 머리통만 해졌다고 설명하더랍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에게도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잘 자라라고 건드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건드리시면 충격을 받은 고구마가 충격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자라는 것처럼 우리들이 영적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소망하며 하늘 상급을 기대하며 삽니다. 히브리서 본문 11장은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10절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하늘의 성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13,14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것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본향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 소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마태복음 본문의 말씀처럼 가기 좋은 넓은 문, 넓은 길로 가지 아니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좁은 문, 좁은 길로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 따라 갑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좋은 열매 맺는 삶을 살기를 힙씁니다. 마7:18-19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했습니다. 우리모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동행하며,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하늘 상급을 기대하며 지혜롭게 믿음의 집을 세워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3.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따르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를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에서 베푸신 교훈 또는 산에서 하신 보배로운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산상수훈의 결론부분으로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는 누가 천국에 들어가느냐 입니다. 주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내용은 인생의 집을 어떻게 짓느냐 입니다. 집을 짓는데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환난이 올 때 무너지지 않는 집은 모래위에 지은 집이 아니라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는 것입니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24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주님 말씀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고,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짓는 지혜로운 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런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질의 바른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믿음입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을 하셨습니다. 상당히 연세가 많으신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부임하시고 첫 설교로서 사랑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교인들 모두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지난주일 설교를 똑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교인들은 수군대면서 킥킥 웃었습니다. “아무래도 목사님께서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기억력이 좀 떨어지는 모양이야. 어떻게 지난주일 설교를 그대로 하실 수가 있을까?”
그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또 다시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은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시골 사람들이라고 목사님이 우리를 무시하는 모양이다.” 결국 교인들은 목사님을 내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목사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보따리를 싸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교인들은 목사님이 좀 안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한 달을 채울 겸, 그 다음 주일에 고별 설교를 하시고 가시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목사님은 다음 주일에 설교를 하셨습니다. 역시 그 날도 똑같은 내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 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 없는 모습을 보였으면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고별설교를 하시는 시점에서도 똑같은 설교를 하셨을까?” 그들은 자신들을 되돌아보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들은 울면서 목사님이 못 가시도록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교회에 그대로 계시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목사님께서 당연히 똑같은 설교를 하리라고 예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목사님은 다른 설교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사랑하면서 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물질생활에서부터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십일조생활을 하지 않는 분이 있으면 이제부터 모두가 십일조를 하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이 그 설교를 듣고 나서 십일조를 했을 것 같습니까? 안 했을 것 같습니까?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안 하면 1년 내내 계속 똑같은 설교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고 적고 간에 다 순종해서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또 바뀌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전도에서 나타납니다. 모두가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나가서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설교가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 모두가 앞을 다투어서 봉사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니까 교회가 놀랍게 바뀌어졌습니다. 교인들 스스로는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날이 갈수록 크게 부흥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집을 잘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성도가 양질의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성도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양질의 바른 믿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양질의 바른 믿음은,
1.바른 기초위에 세워진 믿음입니다.
2.지혜롭게 믿음의 집을 세워 가는 믿음입니다.
3.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따르는 믿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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