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민족이 사는 길 대하6:24-27, 행2:36-42
1971년 월남전에서 얼굴과 온 몸에 중화상을 입고 귀국한 파월 상이용사 K씨는 용기를 내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수술비를 도와달라고 편지를 썼고 대통령은 수술비를 보냈습니다. K씨는 서울 명동에 있는 A성형외과에서 대수술을 받고 갱생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장 장상숙(68)씨는 수술비를 받지 않고 K씨에게 그 돈을 자립할 수 있는 밑천으로 쓰라고 돌려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박 대통령은 병원장 장씨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심신을 바친 상이용사에게 장 여사께서 베푼 혜택은 행동으로 애국 애족한 높은 덕행이며 국민에게 훌륭한 귀감이 될 것으로 믿고 대통령으로서 진심으로 치하하는 바입니다. 1971년 6월 4일 대통령 박정희”.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 병원장과 같은 마음을 가진 백성들이 있을 때 이 나라는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광복 기념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나와 민족이 사는 길”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 안에서 해방되는 길입니다.
구약 본문 대하6:24-25에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주께로 돌아와서 이 성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했습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이 범죄 함으로 고난과 국난이 올 때 성전에 나와 회개할 때 용서하시고 회복의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죄는 동시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불화가 일어납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막힌 담이 생깁니다. 평안이 사라집니다. 징계가 옵니다. 죄인들 사이에도 죄가 들어오면, 갈라서게 되고, 원수가 된다고 합니다. 도둑놈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금은방을 털었습니다. 그런데 털은 물건을 서로 감춰두면, 이런 도둑놈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싸우다가 헤어진다고 합니다. 하물며 죄인의 모습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면서 죄인인줄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사람은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의 죄가 보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죄를 자복하고 회개가 일어나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신약 본문 행2:37-38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했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던 무리들이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어찌할꼬 할 때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 하시면서 까지 사죄의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를 씻어 정결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게 되고,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며, 사랑을 받게 되고, 참 평안을 얻게 됩니다. 죄의 종에서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자가 됩니다. 1865년까지 미국 남부의 흑인은 대부분이 노예였습니다. 남부의 목화농장에서 일하는 노예가 많았습니다. 부모가 노예이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잡혀온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노동을 해야 했고 달이 밝은 밤엔 자정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음식은 소금에 절인 고기 한 조각과 소량의 옥수수가 전부였습니다.
주인에게 고분고분 순종치 않으면 가혹한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들을 소유한 농장 주인들은 노예들을 사고팔았습니다. 탈출을 하려다가 잡히면 중벌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유가 없는 노예의 삶은 하루가 천년이었습니다.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준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입니다. 북군인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해 남군과 싸워 이겼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킨 것은 죄와 죽음의 노예인 자기 자신을 대속의 은혜로 해방시켜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지도자가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어 죄와 마귀의 노예 된 자들을 복음으로 자유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로 내 죄를 깨달아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성도가 되고, 이런 지도자 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2.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길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은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봉헌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봉헌기도의 일부분으로써 국가의 안녕과 민족의 미래를 위하는 기도입니다. 솔로몬은 성전봉헌의 기도를 드리면서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임을 강조합니다. 혹 성전에서 기도할 수 없는 형편이 된다 해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도 기도를 응답해 줄 것을 간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성전은 항상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구별 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실 때 그 기준을 성전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에서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선민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에 순종하여 구별된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선민이 성전을 멀리하여 예배를 등한시 하거나, 말씀에 불순종하여 살게 되니 징계가 따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심한 고통을 당하다 보면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선민 이스라엘 민족도 고난 중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더 빨리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길이 내가 사는 길이고,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신약 본문 행2:38에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이 세례에 대한 교훈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어야 한다는 뜻이 함축 되어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고백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죄의 종노릇 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믿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았음도 하늘에 앉혀주실 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생명까지 희생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항상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징계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죄를 깨닫고 회개 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합니다. 그 길의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진노와 심판과 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한 길은 나와 민족이 망하는 길입니다. 고대의 로마시대에 기독교를 몹시 미워하고 박해하던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기독교인을 불러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죽음을 앞에 둔 기독교도를 조롱했습니다. “도대체 네가 믿는 주라고 하는 목수 나사렛 예수는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
그의 조롱에 앞에 서 있던 기독교도는 주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그 황제의 영혼을 주께 드리면서 황제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나사렛 예수는 그의 하늘나라의 목공실에서 폐하를 위하여 관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님을 망령되게 말하던 황제는 그 자리에서 그 인생의 최후를 맞이했다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신 분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되는 그 순간에는 하늘 권능과 공의로 응징하시는 심판주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나와 민족이 살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백성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3.성령의 도우심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길입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삶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후회를 하면서 회개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후회와 참된 회개란 무엇일까요? ‘후회’란 자기사랑의 한 형태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정한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용서하실지라도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벌을 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후회의 감정은 행동에 변화를 주지 못하며 이로 인해 감정만 소모될 뿐입니다. 교회에 나와 매일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감정에 빠져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진정한 '회개'와 눈물의 기도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 앞에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어서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져 내려서 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죄의 비참한 삶에서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따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은 새로운 마음이 창조되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회개한 심령은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과 투쟁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한 심령이 죄에서 자유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간구함으로 마침내 거듭남의 경험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와 거듭남의 경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회개한 자의 마음 가운데 정한 마음이 창조되고 정직한 심령을 가지게 됩니다.
신약 본문 행2:38-39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깨달음도, 회개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도 성령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성도에게 성령 충만한 은혜가 임하면 내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먼저 심령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렘24:7에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했습니다. 이는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일그러진 죄악 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을 죽인 무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위대하고 놀라운 변화입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형상을 떠난 인간을 향하여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 충만한 은혜가 임하여 탕자가 고난 가운데서 깨닫고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 돌아온 것처럼 나와 민족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에 행동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초대교회의 사건은 마음에 약간의 감동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변화되어 영적인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는 가운데 선한 일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되는 대로 우리는 실천하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기도할 마음, 구제할 마음, 위로할 마음, 봉사할 마음, 전도할 마음,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길 마음 등을 주시는데도 우리는 이를 무시하고 신앙적 게으름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성령께서 필요해서 하게 하실 때에는 바로 실천을 하는 성도가 성령 충만한 좋은 성도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다 보면 성령을 소멸하는 자가 되고, 성령님을 탄식하게 하다 성령께서 떠나게 되어 신앙의 실패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모르고 밟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해 영적 세계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영적세계의 가치관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일을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처럼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3천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세계에 가치관을 갖고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기도에 전혀 힘쓰므로 구제와 전도와 선한 일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유익이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 것을 쫏는 삶을 버리고 영적 세계에 관심을 갖고 사모하는 가치관을 가지는 성도가 됩시다. 성령의 역사는 위대한 변화를 일으킨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령 충만하여 우리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나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살리는 사람으로 살다가 다시 오실 주님을 맞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오늘 광복 기념 주일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나와 민족이 사는 길”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나와 민족이 사는 길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 안에서 해방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길입니다. 성령께서는 심령을 변화 시키고, 행동을 변화 시키고, 가치관을 변화시키십니다. 아멘.
'구약 > 역대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배하는 교회의 일상생활에서의 승리 (대하 20:1-30) (0) | 2021.01.22 |
---|---|
일편단심 신앙으로.(역대하16장6-10) (0) | 2019.01.12 |
고침 받기 위해 대하7장11-16, 약5:13-18 (0) | 2018.10.06 |
참된 개혁의 열매 대하30:1-12, 롬6:15-23 (0) | 2016.10.28 |
말씀을 따른 버림과 회복 (대하34:1-7) (0) | 2015.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