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편단심 신앙으로.(역대하16장6-10)
이 이야기는 1997년 1월경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 경찰서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경찰병원의 과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일의 성격상 거의 좌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일을 당하고 그분은 낙심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충성했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
결국 이분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목사님의 위로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쯤 지났을 때 그분이 ‘좌천 감사헌금’ 100만원을 들고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면목이 없습니다. 저번에 저는 좌천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이 전에 있던 경찰서 지역에 탈옥수 신창원이 나타났는데, 그 신창원을 잡지 못해서 후임 경찰서장이 파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냥 거기 서장으로 있었으면 큰일을 치를 뻔 했지만 보직 변경이 좌천인줄 알았는데 파면을 면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좌천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성도는 신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움이 심하면 신앙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시인의 말대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습니까?
가끔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도 있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깊은 속마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새해를 시작한 우리 ◯◯교회 식구들의 신앙은 마지막까지 성공하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복해 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사 왕의 처음 성공과 마지막 실패
본문에 나오는 아사왕은 역대하 14-15장을 보면 총 41년간 왕으로 있었습니다.
재위 10년쯤 되었을 때, 아사왕은 우상숭배의 단을 훼파하는 1차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라에 몇 년 동안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 후 구스(에티오피아)의 세라왕이 100만 대군과 병거 300승을 몰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아사 왕은 기도로 그 대군을 물리치면서(대하 14:9-15)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히 체험했고, 은혜가 아주 충만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즈음에 선지자 아사랴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을 듣고(대하15:1-7), 아사 왕 15년에 2차 대규모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우상을 없애고, 제단을 수리하고, 우상숭배 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이기로 언약을 개혁하고(12절), 심지어는 자신의 어머니 ‘마아가’가 우상숭배를 하자 태후의 위까지 폐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사 왕 35년까지 20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20년 동안 태평성대가 문제였습니다. 태평성대와 함께 점차 아사의 신앙은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누구라도 만사형통할 때 더 기도하고, 더 겸손해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멀리하자 곧 큰 환난과 기도제목이 생겼습니다. 아사 왕 36년에 형제 국가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왕이 침략해옵니다. 예루살렘 북쪽에 라마를 건축하며 나라의 중요한 길목을 막았습니다. 남 유다는 이제 사방으로 압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진 아사왕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나섰습니다. 눈에 보기에 힘이 있어 보이는 이방의 왕 아람 왕을 의지하게 됩니다.
사람의 방법대로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취해 뇌물로 힘을 샀습니다. 이에 동조한 아람 왕벤하닷은 이스라엘의 후미 몇 개의 성을 쳤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바아사 왕은 라마 건축을 그만두고 후퇴를 합니다. 아사 왕은 북이스라엘 바아사 왕이 후퇴하며 남긴 건축 재료로 게바와 미스바성을 건축하게 됩니다(대하 16:1-6). 겉으로 보면 남유다 아사의 치밀한 전략으로 인한 승리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적인 방법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특별히 아람 왕 벤하닷의 원조를 받으려고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조공으로 바친 행위는 치욕적인 행위였습니다. 구스 왕의 백만 대군을 물리칠 때의 웅대하고 멋있는 신앙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아사 왕의 모습을 보고 한탄한 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7절에 나오는 ‘하나니’입니다. 하나니는 아사 왕에게 나와서 말했습니다.
본문 9절인데요, 쉬운 성경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온 땅에서 온전히 여호와께 몸을 맡기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강하게 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아사 왕이여, 왕은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왕은 여러 전쟁에 시달려야 할 것입니다.”
이 말에 아사왕은 진노합니다. 여기서 선지자 하나니의 말에 응하는 왕의태도에 관심을 두고 살펴보셔야 합니다. 은혜가 넘칠 때는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순종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은혜에서 멀어지면 사탄의 영향력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말에 오해를 하고, 노여움을 사고,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이게 우리들의 일상의 모습일 것입니다. 결국 아사 왕은 하나니를 비롯해서 그의 동조자 몇 사람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나아가 12절을 보면 재위 39년에는 심한 병에 들었어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만 찾다가 결국 재위 41년에 죽게 됩니다(11-14절).
은혜로 시작했다가 멸망으로 일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신앙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불신앙으로 버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아사 왕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신앙을 원하는지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새해를 출발하는 우리에게 어떤 신앙을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
1. 일편단심 하나님만 한분만 바라보는 눈
아사 왕이 제 1차 신앙 개혁에 나서자 하나님은 유다에 몇 년간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스 왕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후에 2차 신앙 개혁을 하자 하나님은 유다에 장기간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개혁에 나설 때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앞장 10-15절 까지는 2차 종교 개혁의 현장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 중에 12-14절을 함께 읽어 봅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 소리로 외치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아사왕은 백성들과 함께 오직 하나님 한분만 찾기로 언약하였습니다. 아사왕은 백성들과 함께 오직 하나님 한분만 찾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자들은 모두 죽여버리기로 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작정하는 개혁운동을 벌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기뻐하셨고, 그들을 만나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일편단심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면 반드시 역사와 기적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구스의 백만 대군을 물리치듯이 우리도 각종 문제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가장 복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의지하려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먼저 찾고, 지성과 이성을 먼저 이지하려는 생각에서 단호한 개혁을 선언하십시오. 일편단심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온갖 우상을 철폐하며 우리의 신앙을 날마다 새롭게 개혁하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변화입니다. 변화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화되지 말아야 하지만 변화되어야 할 것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자신을 개혁시켜야 합니다.
지금 성령 충만하고, 지금 은혜 생활하고 있고, 지금이 좋다고 거기 머물려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나에게는 현재의 새로운 은혜 체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쉽게 오염됩니다. 고인 물은 썩게 되어있습니다. 신앙도,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말씀을 접하지 않으면 나태하게 될 수 있습니다. 계속 헌신하지 않으면 신앙이 후퇴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개혁하지 않으면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끊임없이 개혁하면 나중 된 자가 처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
2. 일편단심 하나님을 향해 열린 귀
이제 본문 10절 말씀을 먼저 읽고 말씀을 나누십니다.“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본 절에서 아사 왕의 행위를 보십시오. 선지자 하나니가 책망의 말을 하자 아사 왕은 크게 노해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평소에 충성스런 선지자가 전하는 바른 말이라면 아사 왕은 그 말을 듣고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신앙을 잃어버리니까 귀까지 닫혔습니다.
그처럼 하나님 말씀에 귀가 막히면 사람 말에도 귀가 막히게 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왕들의 비참한 말로는 대개 그 이유가 단순합니다.
귀가 막히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듣지 않는 것으로부터 부패가 시작되고, 병들기 시작하고, 멸망이 시작됩니다.
어느 역사든 하나님께서는 타락하는 왕에게 마지막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최후의 사자를 보냅니다.
그 최후의 사자는 왕이 그때까지 가장 신임하고 헌신하던 측근의 신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왕은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아도 그 사람 말만은 들어야 합니다.
그때 회개하면 그 왕은 대개 성군이 됩니다.
왜 다윗이 성군이 되었습니까?
밧세바사건으로 인한 간음과 살인죄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가 책망했을 때 “아니, 왕을 이렇게 모욕해! 도대체 왕을 뭐로 알아!”라고 하면서 나단 선지자를 옥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눈물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사 왕도 하나니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다면 다윗 왕처럼 성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한때는 잘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 관계가 잘못되면 사람관계도 잘못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의 증거가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증거가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막힌 사람은 대개 하나님과의 관계도 막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힌 사람은 대개 사람 관계도 막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열린 마음과 열린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특별히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예배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되니 더 이상 하나님 말씀이 은혜롭게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잘 들으십시오.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징조는 말씀의 단맛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은혜의 첫 걸음은 말씀에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귀가 막히면 잎만 무성한 열매 없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말씀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없다면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첫 사랑과 열린 귀를 회복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대개 보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 남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축복 받느냐? 아니면 버림 받느냐?”의 차이는 “귀가 열려 있느냐? 아니면 닫혀 있느냐?”의 차이로 결정됩니다.
성공한 사람은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는 거드름으로 귀가 닫힐 수도 있고, 실패한 사람은 “내가 이렇게 실패했다고 우습게보나?”하는 자존심으로 귀가 닫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해도 겸손하게 말씀을 잘 받고, 실패해도 겸손하게 말씀을 잘 받는 것입니다.
귀가 열리면 축복의 문도 열립니다.
반면에 귀가 막히면 고통의 문이 열립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충고를 달게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잘하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
3. 일편단심 하나님을 향한 신앙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사 왕처럼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지자 하나니는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쳐가는 아사 왕을 책망할 때 본문 9절에서 말했습니다.
이제 본문 9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본문에서 관심있게 살펴볼 단어가 있스비다. ‘전심으로’입니다.
여기 ‘전심으로’라는 말에는 3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선은 ‘최선을 다해서’라는 뜻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 성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만하면 됐다!”라고 하지 말고 현재의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 일에도 충성해야 하지만 교회 밖의 일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성도는 가정생활, 교회생활, 일터생활의 삼위일체가 다 좋아야 합니다.
다음은 ‘집중해서’라는 뜻입니다.
오래전에 한 기업가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표어를 내걸고 사업을 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다 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은 전문가를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자기가 남보다 잘할 수 있는 일과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표어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중요한 일에 집중하자!”라는 표어입니다.
하고 싶은 일에 다 손을 대면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편단심으로’라는 뜻입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야훼께서는 당신께 일편단심인 사람에게 용기를 주시려고 온 나라를 두루 살피고 계십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는 이렇듯이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임금님께서는 전쟁으로 시달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여호와께서는 하나님께 일편단심인 사람에게 용기를 주시려고 온 나라를 두루 살피고 계십니다.”
어김없이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이 결국 최후에 축복받는 자가 되고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에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이 보기가 좋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일편단심 신앙인이 되십시오.
어떻게 우리는 일편단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어느 곳에든지 오래 있다 보면 문제점이나, 약점이 보입니다.
그때 그 약점을 창조적인 관점으로, 긍정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일편단심으로 충성하려면 자신의 충성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이만큼 충성하는데.... 내가 이만큼 중요한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최대한으로 기여하고 최소한으로 기대해야 합니다.
알을 하나 놓고 온 동네가 시끄럽도록 “꼬끼요!”하는 암탉과 같은 성도가 되지 말고, 백 가지 일을 잘하고도 묵묵히 충성하는 황소와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행복은 조용히 헌신하는 사람의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누구보다 축복하실 것입니다.
묵묵히 충성하면 어디선가 복된 소식이 들려질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게 사업 파트너가 “거래하자!”고 전화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어려운 일이 있어도 충성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때 내가 충성스런 사람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누가 복된 사람입니까?
교회 부흥기에 교회를 찾아 재밌게 즐기는 사람보다 교회 침체기에 교회를 지키고 기필코 교회를 일으키는 사람이 훨씬 복된 사람입니다.
형통한 날에 충성을 과시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서 묵묵히 섬기는 것이 진짜 충성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재미로 다니지 말고 의미로 다녀야 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내 고정 좌석까지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다 끝나고 아무도 없을 때 목회자는 그 자리만 바라봐도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편단심으로 좋은 일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일편단심으로 충성하고, 누가 시기해도 일편단심으로 충성하고, 누가 오해해도 일편단심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가난할 때는 기도도 많이 했고 어려울 때는 충성도 많이 했는데, 오히려 조금 살게 되니까 불평하고 원망하고 판단해서 결국 아사 왕처럼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충성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독실한 존재는 오직 한 마음을 품고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지금도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편단심 민들레를 찾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지금보다 더욱 충성함으로 축복받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
1. 일편단심 하나님만 한분만 바라보는 눈
2. 일편단심 하나님을 향해 열린 귀
3. 일편단심 하나님을 향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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