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십자가 보혈 벧전1:15-23 레16:11-22,
어느 날 스펄전 목사님이 울고 계셨습니다. 부인이 의아해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어요? 힘든 일이 있어요? 아니면 슬픈 소식이라도 들었어요?’ 이 말을 들은 하나님의 사람 스펄전은 눈물을 그치고 차분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지금 울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소? 그것은 말이오, 오늘은 내가 십자가를 생각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더란 말이오. 이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느껴졌소. 나에게 십자가의 감격이 없고 이렇게 메말라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할 수 있겠소? 우리가 세상일에 파묻혀 정신없이 살다 보면 십자가의 감동, 구원의 감격,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감격을 잊고 메마른 마음으로 살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최대 위기가 우리는 곧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핍박이나 환난이 올 때 어려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어려운 시대에는 더욱 신앙이 뜨거웠고 교리의 순수성이 보존되고 교회가 많은 성장을 했습니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고 부족함이 없게 될 때 오히려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그 때가 신앙생활의 더 큰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불감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우리가 얻은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있는가 살펴봅시다. 신앙생활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은,
1.나의 속죄와 구속을 위한 보혈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예, 저희는 다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렇다면 자기가 지은 죄의 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만큼 돌을 주워 오너라.' 그래서 제자들이 다 길가로 나가서 돌을 주워 옵니다. 베드로는 아주 큰 돌을 주워 왔습니다. 가롯 유다는 콩 알만 한 돌을 주워 왔습니다. 자기 주먹만 한 돌을 주워 온 제자도 있었고 자기 주먹보다 더 큰 돌을 주워 온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각자 자기의 돌을 들고 저 산으로 올라가자.' 가롯 유다는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올라갑니다. 베드로는 끙끙거리면서 큰 돌을 메고 올라갑니다.
산꼭대기에 다 올라가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들고 온 돌을 자기 앞에 내려놓아라. 다들 시장하지. 그 돌로 빵을 만들어 먹자꾸나.' 역전의 순간입니다.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바로 가롯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베드로와 같은 입장에서 보면 내가 지은 죄가 이렇게 득이 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내가 아주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복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 길을 찾게 됩니다. 살 길을 찾는 사람을 구도자라고 합니다. 진정한 구도자는 우리의 영원한 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빵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더 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롬5:20)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문제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각하느냐, 자각하지 못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간절히 찾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죄를 지은 사람은 사형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를 해결하는 길은 단 하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그런데 누구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일까요? 죄 없는 자의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 죄 아래 태어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죄 없는 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속죄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성자라도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은 독생 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게 하셔서 십자가를 지도록 하시고 속죄하는 피를 흘리시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이 범죄 한 이후 하나님께서 바로 계획하신 일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성경 곳곳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이 예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만이 속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주님을 사랑합시다.
2.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의 보혈입니다.
구약 본문 레위기에도 이미 십자가의 모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7월 10일을 대 속죄일로 지켰습니다. 그날 백성들은 일 년 동안의 죄를 속죄 받는 날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10절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 지니라, -- 21절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 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 찌니라”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 두 마리의 염소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한 마리는 잡아서 제물로 성전에 바쳤고, 그 염소의 피는 대제사장에 의해서 속죄 소에 뿌려지고 고기는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은 지성소 깊숙이 들어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밖에서 초 긴장상태에서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소 안에서 제사 드리던 제사장이 가끔씩 죽어나오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옷에는 방울을 달고 끈을 달아서 속죄 소에 들여보냈습니다. 지성소 속에서 제사지내느라고 몸을 움직일 때 마다 방울 소리가 나면 밖에서도 안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울 소리가 나지 않으면 안에서 제사장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옷에 매달은 줄을 당겨서 끌어냈습니다. 그 지성소 안에는 대제사장 한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이 바친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시면 지성소 안에 빛나는 광채가 비취었습니다. 그 빛을 “쉐키나 광채”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밖에서 기다리다가 지성소 안에서 환한 쉐키나 광채가 나타나면 “우리가 드린 제물을 받으셨구나!”하고 안심하고 한 해 동안 죄 사함을 받음을 감사하면서 밖에서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또 한 마리의 염소는 “아사셀 염소”라고 부릅니다. ‘아사셀’은 ‘에즈’-‘염소’ 라는 말과 ‘아잘’-‘내어 보내다.’ 라는 뜻으로 광야로 ‘내어 보내는 염소’라는 뜻입니다. 또 ‘아사셀’의 어근 ‘아잘’-‘없이 하다’ ‘제거 하다.’ 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염소의 머리에 대제사장이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다. 그때 안수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아뢰며 그 죄들을 염소의 머리에 전가시키는 안수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염소가 수난의 행보를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짊어진 염소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거리를 통과해서 감람산을 지나 동쪽 요단강까지 끌려가 요단강 넘어 광야에 버려집니다. 이 염소가 예루살렘 거리를 가는 동안 연도에 백성들이 모여 지나가는 어린 염소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습니다. 침을 뱉고 돌팔매질을 하고 털을 뽑고 회초리로 때려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게 합니다. 그렇게 기진한 염소를 끌고 요단강까지 가서 마침내 강 건너 광야에 버립니다. 그러면 이 염소가 광야에서 기진하여 죽던지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맹수들에게 찢겨져서 죽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에서는 죄 사함 받음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여기 드려진 제물에서 장차 나타날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의 모형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 새 피땀 흘리는 기도를 하시고 제사장이 보낸 하수인들에게 끌려가실 때 따르던 제자들마저 주님 홀로 두고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겨 피를 흘리시고 조롱을 당하시며 가야바, 헤롯, 빌라도 앞에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며 신문을 받으시고, 어떤 이는 갈대로 때리고, 어떤 이는 뺨을 치며, 어떤 이는 침을 뱉는 등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사셀 염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시고, 양 손과 발에 못이 박혀 피가 흐르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심장이 터져 피와 물이 다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서 몸이 찢겨 제물이 되고, 피를 속죄 소에 뿌려진 다른 한 마리 희생의 염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모습이 레위기서에서 보여준 주님의 십자가 모형입니다. 그러니 이 속죄를 위한 십자가의 도, 이 구원의 도가 얼마나 심오한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이 구원의 섭리가 성경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렇게 희생시키면서 까지 세상을 구원하실 뜻을 이미 성경을 통해 그 섭리하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신비하고 숭고하여 숙연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사랑의 감격 가운데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3.보혈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주님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예비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무거운 죄 짐에서 해방되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 함을 얻고, 그 안에서 신령한 복을 받고,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하늘 기업의 후사가 되는 하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런 은혜와 은총을 입은 성도들이 주님 사랑에 보답하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래 전에 한 선교사가 임지로 가는 도중에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하고 가까이 가보니 아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그 엄마가 주인을 보고 "주인님, 나도 아들과 함께 사 주십시오. 저희 모자(母子)가 함께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하며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안 돼!"하며 아들만 끌고 가는데 그 엄마는 생명을 내걸고 함께 사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도 울고, 아들도 울고... 한번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던 그 선교사는 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 그 두 모자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선교사가 풀밭에서 비명을 지르고 넘어졌습니다. 실신이 된 선교사의 뒷발에 독사의 이빨 자국이 나 있자 엄마 노예가 입을 대어 독을 빨아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거의 죽었던 선교사가 일어나 보니 독기를 입으로 빨던 엄마 노예는 얼굴이 퉁퉁 부어 죽어 있었습니다. 엄마 노예는 자기를 사 준 고마운 선교사,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자유를 준 이 선교사를 위하여 사망의 독을 입으로 빨았던 것입니다. 사랑을 입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면서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무릎 쓰고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선교사의 은혜에 보답한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과 형벌에서 생명을 희생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건져 주신 그 사랑에 어떻게 보답하며 살까요? 먼저 하나님께 거룩하게 사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삶입니다. 신약 본문 벧전1:16-17에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했습니다. 성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입니다. 아버지 앞에 이중으로 살거나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눈과 귀를 의식하고 경건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주님의 피 흘리심의 희생과 순종을 본받아 사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며 사는 것입니다. 벧전1:18-19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생활 하면서 오는 고난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주님의 보배로운 희생의 피로 구속을 받았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마음에 서운한 일을 이기지 못하거나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하며 순종하는 삶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며 사는 것입니다. 벧전1:22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했습니다. 성도의 최대의 미덕과 아름다운 행위는 사랑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의 마땅한 행실은 뜨겁게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마땅한 최고의 행실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정리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은,
1.나의 속죄와 구속을 위한 보혈입니다.
2.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의 보혈입니다.
3.보혈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주님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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