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의 아름다움Ⅳ (아6:10)
= 세상의 빛과 소금 =
요 약
왕후의 아름다움이란 곧 성도들이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는 영광이다. 아침빛과 같이 뚜렷함은 예수 안에서 받은 영적 권세를, 달과 같이 아름다움은 성령 안에서 사랑하는 새로운 성품을, 해와 같이 맑음은 죄악을 버리고 주님만 사랑하는 거룩함을, 군대의 위엄과 같음은 불신과 죄악을 척결하고 죄인을 구하려는 성도의 사명과 승리를 보여준다. 이처럼 주님과의 연합은 세상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설 명
1. 배 경
⇒ 술람미 왕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칭찬이다.
2. 적 용
(진단) 내조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나요?
(해결) 내조하려면 식견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1) 영적 권세를 입으라
10절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 해는 왕의 상징으로 술람미는 왕의 권세와 영광을 입었다.
☆ 엡1:23, 계12:1
2. 사랑하라
10절 “달같이 아름답고”
: 술람미가 백성들에게 어머니 같은 사랑의 존재였다.
☆ 마5:16, 갈5:22-23, 골3:12-14
3. 거룩하라
10절 “해같이 맑고”
: 조강지처로서 그리고 부정부패 등 흠이 없다.
☆ 마5:13-14, 고전12:20-25, 27
4. 사명을 다하라
10절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 악인의 압제에서 백성들을 구출하는 왕후의 정의로움이다.
☆ 갈6:1, 딤전6:12
아가 6:10
10 (백성들)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원 문
10 תאז־ימ 미 조트(이 사람이 누구인가)
הפקשׁנה 한니쉬카파(응시하는)
רחשׁ־ומכ 케모 솨하르(내리는 것과 같이)
הפי 야파(뚜렸히) הנבלכ 칼르바나(달과 같이)
המחכ הרב 바라 카함마(태양과 같이 빛나는)
המיא 아윰마(엄위한)
תולגדנכ 칸니드갈로트(기를 가진 군대와 같이)
스 토 리
솟아오르는 아침해와 같이
평민 출신 술람미의 왕후로서의 영광은
곧 백성들의 영광이었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후의 마음은
백성들에게 보름달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느껴졌으며
조강지처요 부정과 부패를 멀리하려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느 한 점 흠잡을 데가 없었고
온갖 악과 그 환경에서 백성들을 구하려는
정의로운 그녀의 인품은 백성들에게
마치 깃발을 치켜들고 개선하는
군대의 위엄과도 같이
자랑스럽게 보였다.
이와 함께 그녀의
부부생활도 발전하여
상위체위의 발굴로 말미암아
남편에게 다각적인 만족을 줌은 물론
자신의 만족도 누리면서 곧 잘
부부생활을 리드해 나갔다.
(강 해)
이 시간에는 ‘왕후의 아름다움’ 마지막 시간입니다. 본문은 술람미 왕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칭찬입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 예루살렘 여자들의 합창(Keil and Delitzsch, Lange, Redford, Weissbach) 혹은 왕후와 비빈들의 노래(Wycliffe) 혹은 예루살렘 여자들과 왕후와 비빈들 모두의 합창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으나(강병도) 본문의 대화자를 이스라엘 백성들로 봄이 칭찬의 내용으로 보나 노래의 구성으로 보나 뒤따르는 문맥으로 보나 잘 부합합니다. 그러니까 이중 의미의 은유입니다. 만약 이 부분을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래로 국한한다면 부부생활에 관한 교훈의 맥이 끊어집니다. 그러나 이 역시 솔로몬이 백성들의 찬사를 이용하여 술람미의 달라진 성생활을 은유의 기법으로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솔로몬이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8-9절) 칭찬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의 갈망을 정확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 마음이 발전된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상위체위로의 발전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사에 관해서 보다 깊이 설명하고자 합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술람미 왕후를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술람미 여자가 명실공히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당당한 왕후임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왕의 부부에 있어서 부부화목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생활도 이제는 소극에 그치지 아니하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적극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적인 연합에 그치지 아니하고 사랑 안에서 참으로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연합을 이룰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면 주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타나는 칭찬은 약 네 가지인데 우리는 이 칭찬 속에서 세상에서 교회의 영광이 시사되어 있습니다. 이 칭찬은 우리가 세상과 교회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원리를 보여줍니다.
그럼 성도로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면 어떠해야 합니까?
1. 그리스도를 입어 그 영광과 권세가 나타나야 합니다.
10절의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했습니다.
여기 아침빛같이 뚜렷하다는 백성들의 찬사를 술람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백성들을 위한 왕후의 뚜렷한 활동을 시사합니다. 전에는 왕의 내전에서 왕의 사랑만을 추구했으나 이제는 왕의 관심사인 백성을 돌봄에까지 내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술람미를 이 밝은 아침 햇살에 비유함은 왕의 영광과 권세를 입은 왕후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왕후 술람미를 치솟는 아침빛에 비유하여 노래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평민 출신 술람미는 곧 백성의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술람미의 영광을 자기의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술람미의 혼인을 맨 먼저 환영한 무리도 백성들이었고(2:13) 혼인날 열렬히 축하한 무리도 백성들이었습니다(3:11). 이처럼 성도들이 예수님의 인품과 권세와 영광을 입으면 세상 사람들도 흠모하는 찬란한 빛과 소금이 됩니다.
이것을 부부생활에 적용해 보면 술람미도 남편을 본받아 부부생활을 이제 주도해 나감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전처럼 하위체위에만 머물지 않고 상위체위입니다. 이 체위는 서로 번갈아 가는 변화성이 필요합니다. 여성의 성에 대해서는 발굴이라는 용어가 적절할 것입니다. 이 해는 감추어 있어서는 안되고 떠올라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재해 있는 성의 축복을 개발하지 못하고 자신과 배우자를 어둡게 합니다. 이 해가 떠올라올 때 본인은 물론 남편의 얼굴은 더 밝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진 화목에 회복의 날이 올 것입니다. 물론 반드시 상위체위여야 한다기보다 그 체위가 그러한 적극성을 대표한다고 표현함이 옳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성경에서 해는 비유적으로는 왕의 상징이요,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시84:3, 11) 은혜의 상징입니다(마5:45). 그래서 시84:11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했습니다. 그래서 계12:1에 교회의 모습이 해 입은 여자로 나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해(המח 함마)는 심판 때는 어두워지고(사24:23) 구속의 날에는 더욱 밝아지게 될 것이라(사30:26)(James Smith) 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임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날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면 무엇보다 우리에게서 예수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 예수님이 드러나지 않는 한 구원의 감격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롬14:17-18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잘하여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입을 때 각인은 서로에게 해처럼 은혜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고전12:27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고 모두가 은혜로운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고전12:20-25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더욱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귀한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영성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즉 몸된 교회까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연합에 머물지 말고 공동체로 나가야 합니다. 개인주의에 그치는 영성은 진정한 영성의 의미와는 다르며 상호협력의 결여로 더 깊은 영성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지체를 이룬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은 곧 나의 영광이요 나의 영광은 곧 모든 공동체의 영광입니다. 내가 입은 큰 은혜는 온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들어 그 영광과 권세를 입어야 합니다.
2. 주님의 관심을 나의 관심 삼고 이제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 “달같이 아름답다” 고 칭찬했습니다.
달(הנבל 레바나)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밤중에 떠서 어둠을 밝게 해 줍니다. 또한 달은 포근하고 친근한 어머니와 같은 정서를 줍니다. 그래서 모든 어둠에 쌓여 있는 사람들에게 포근한 사랑으로 감싸줍니다. 이는 왕후 술람미가 백성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사랑의 존재였음을 상징합니다. 즉 술람미는 왕후로서 왕이 관심을 가진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는 많은 갈등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일상생활이란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함으로 말미암아 아내를 독수공방시키기 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도 아하수에로 왕을 만난 지가 한 달이 아니었습니까?(에4:11) 그래서 초기의 술람미에게는 백성이야말로 왕의 사랑을 방해하는 원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백성들에게 달과 같이 아름답다고 인정을 받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남편의 관심이 이제는 나의 관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부부생활에 적용해 보면 시각적인 만족을 시사합니다. 아내의 상위체위와 적극적인 그 모습은 배우자의 마음에 지극한 시각적인 만족을 선사합니다. 뒤에 가면 이 시각적인 만족도 더 발전하여 더 구체적인 다각적인 만족이 묘사됩니다만 이 단계에서 상위체위만도 대단한 발전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그 정도야 보편적인 것이 아닐까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솔로몬의 왕궁에서 예법의 틀에서 자란 다른 공주 출신의 왕후들에게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당시 술람미 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시각적인 만족입니다.
이처럼 은혜 안에서 자라지 못한 율법적인 신자들은 주님의 마음은 물론 사람들의 찬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은 물론 이웃 사랑의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골1:4) 했습니다. 그러니까 골로새 교인들은 예수 믿음에 그치지 않고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름다운 열매는 다른 온 천하에서 맺고 있는 복음의 열매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골1:6).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굳게 닫힌 방안에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게 닫힌 이곳에 몇 번 오셨지만 이제 온전히 만나기 위해서는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갈릴리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입니다(마28:7). 이곳은 예수님께서 온갖 병인들과 귀신 들린 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마다 않고 그들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던 곳입니다. 마치 술람미가 이 사실을 알고 그의 남편을 향한 내조의 범위를 넓힐 때 언제나 함께 하는 남편의 사랑을 할 수 있었음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달과 같이 아름답다는 것은 달이 클 대로 큰 보름임을 시사합니다. 율법에서는 이 날을 월망(月望)이라 하였고 시81:3을 보면 이 날에도 제사를 드리라 했습니다. 그리고 잠7:20을 보면 월망은 부정한 아내에게 먼길을 간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기도 했는데 그러니까 그 날에는 아내의 외도가 그쳐지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월삭이 예수 믿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라면 월망은 성령의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과 인격적 연합관계에 들어간 성화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도 주님과 좀 더 원숙한 연합의 관계에서 이제는 주님이 관심 갖는 백성들까지 사랑하는 가운데로 자라가야 합니다.
3. 모두에게 자랑이 되는 거룩을 가져야 합니다.
또 “해같이 맑고” 했습니다.
여기 ‘맑고’(הרב 바라)는 ‘흠이 없이 깨끗하고 밝은 것’(시19:8)을 뜻합니다. 술람미의 무흠의 예를 든다면 먼저 다른 왕후들과 같은 정략적 결혼이 아니며 따라서 어떤 정치적인 의도도 없을뿐더러 솔로몬의 조강지처로서 조금도 흠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왕궁에 터무니없이 자신의 가속을 끌어들이는 등의 부정과 부패도 없어 백성들의 찬사를 받기 합당했습니다. 이스라엘 정치사를 보면 암몬 사람 도비야 같은 이방 사람들과 내통하여 국정을 어렵게 한 적이 많았습니다. 당시 솔로몬도 왕비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돌이킨 것으로 나와 있지만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배후에는 직접 간접으로 으름장 놓는 이방 나라 세력의 관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 점을 볼 때 솔로몬이 사랑 때문에 미혹 당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다른 왕후들과는 달리 사랑의 동기로 맺어진 조강지처이며 가속들이야 왕을 사모하는 백성 중 하나이며 더구나 왕의 포도원을 맡아 포도농사를 짓는 농사꾼일 뿐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백성 가운데 왕후를 삼았던 큰 장점입니다.
이 해같이 맑음은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의미인데 부부생활에 이를 적용하면 아내의 만족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제 전과는 달리 시녀들과 대책을 강구했던 불만족스런 아내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처럼 배우자에게 만족을 주려할 때 자신도 만족을 얻습니다. 남편이 노력하므로 나를 감동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혹은 자기를 마음껏 취하라고 방치함이 남편을 위한 최선의 배려가 아닙니다. 이것은 남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협조가 없이는 서로 만족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만족을 얻는 그 모습에서 만족을 얻는 특징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흔히 남편만 만족하면 되지 이런 생각은 남편의 심리를 모른 오해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부부생활을 이끌어 가는 아내의 만족스런 모습에서 더 수준 높은 여러 방향에서 만족을 얻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 편이 아닌 서로의 노력으로만이 서로 어두웠던 그 모든 불만을 해소시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자는 세상에서 부정 부패와 어떤 어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우리에게 어둠이 존재합니까?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토록 노력하시니 나는 가만있어도 나를 온전히 감화시키시고 온전케 하실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성화는 신인협력으로 가능하다고 함이 조직신학의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기도 성찬 봉사 겸손 등의 성화의 방편을 고집적으로 적용하여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처한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인협력의 경건생활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 2:11절에서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당부합니다. 12절에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3절에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고, 15절에는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고, 17-18절에는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고 주인들에게 순복하고 충성하라고 교훈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때문에 살기 좋게 되었다는 말 듣도록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성도는 백성들을 악의 세력에서 구해야 합니다.
여기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의 의미입니다.
이 문구는 백성들의 찬사 중 네 번째이지만 이미 6:4에서 왕에 의해서 칭찬된 바 있는 문구입니다. 그런데 여기 “누구인가”(3:6, 6:10, 8:5) 라는 질문은 청중의 관심을 고조시켜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고도의 화술임과 동시에 말하는 자가 개인이나 소수 무리가 아닌 대중임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백성들의 말이 더욱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백성들이 왕후의 강하고 엄위와 정의로움을 경험하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즉 악인의 압제에서 백성들을 구출하는 왕후였습니다. 이 일은 왕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왕후도 에스더가 왕에게 호소하였듯 간접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을 향한 왕후의 자상한 보살핌은 그들을 압제에서 해방 받게 합니다. 한 나라의 왕의 올바른 국정 운영은 정의로운 왕후의 보이지 않는 내조에 의해 더욱 돋보입니다.
부부생활에서 이 엄위한 왕후가 보여주는 교훈은 강함입니다. 성생활을 리드해 가려면 강한 의지와 체력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아내는 남편의 수고를 알아야 합니다.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한 남편의 수고란 큽니다. 더구나 아내의 협조 없는 부부생활이란 그 피로감이 큽니다. 그래서 설득해야 하거나 이 때를 기회로 온갖 부담 가는 말을 하거나 견고한 복장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에너지 소모는 배우자에 대해 악감을 갖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이러한 단계는 이미 벗어난 아내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협조하며 도리어 성생활을 리드해 나갑니다. 당시 육십 명의 이방 나라 공주 출신 왕후들은 술람미의 이 사실을 모방하려 해도 불가능했습니다. 그것은 의지와 체력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호사스런 생활과 비만으로 인해 그만한 체력과 인내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위체위는 만족을 추구하거나 만족을 주려는 강한 의지와 체력 없이는 안됩니다. 그러나 술람미에게는 노동으로 인해 강한 체력은 물론 더위와 싸워 기른 인내가 있습니다. 더구나 조강지처로서의 순수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진을 치고 깃발을 세운 군대와 같이 물러설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자입니다. 이 승리는 복음의 말씀에 견고히 서고 성령 충만함으로 누립니다. 이것은 강함과 지속적인 인내의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안일에 빠져 있거나 세속에 빠져 있으면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비만하고 나약하며 안일한 육십 명의 왕후들은 그 수효가 암시하는 대로 육신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전투적인 신앙생활이 없이는 지상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거나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습니다. 이런 강한 믿음만이 다른 약한 지체들을 주의 능력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5:20에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했고, 유1:22-23에는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이 하실 것만 바라는 안일한 신앙이 아니라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그래서 아침빛처럼 뚜렸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와 같이 엄위한 그리스도의 왕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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