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아가

호도의 동산 (아6:11-14)

nam씨 2016. 2. 19. 20:47


호도의 동산 (6:11-14)

= 하나님의 뜻을 받듦 =

 

요 약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면 하나님 뜻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섭리적인 환경을 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그 뜻을 마음을 다하여 적극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범을 사용하사 많은 감동을 끼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주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행해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설 명

 

1. 배 경

술람미가 남편의 의중을 살펴 대해 주는 적극성이다.

 

 

2. 적 용

(진단) 평소에 원인 없는 불손함 때문에 당황하시나요?

(해결) 원인은 성적인 욕구불만에 있으니 최선을 다하십시오.

 

 

3. 하나님 뜻을 알려면

 

1) 성경을 통해서

11골짜기의 푸른 초목

 

2)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11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3) 섭리적인 환경을 통해서

11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4.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1) 순종하라

11-12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2) 모범이 되라

13술람미 여자야 -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3) 주님의 사람으로 살라

13술람미 여자야

 

4) 하나님의 기쁨이 되라

14절에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아가 6:11-14

 

11 (술람미)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12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13 (왕후비빈시녀들)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14 (솔로몬)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원 문

 

11 זוגא תנג־לא 엘 긴나트 에고즈(사과나무 열매에게)

יתדרי 야라드티(내가 내려갔도다) תוארל 리르오트(보려고)

לחנה יבאב 베입베 한나칼(골짜기의 꽃을) תוארל 리르오트(보려고)

ןפגה החרפה 하파르하 학게펜(어떻게 포도나무가 싹이 텄는지)

וםינמרהצנה 헤네추 하림모님(석류나무가 꽃을 터뜨렸는지)

12 יתעדי אל 로 야다티(내가 모르는도다) ישׁפנ 나프쉬(내 마음이)

ינתמשׂ 사마트니(내 마음이 תובכרמ 마르케보트(수레에)

בידנ־ימע 암미 나디브(내 귀한 백성 곁에 있는)

13 יבושׁ יבושׁ 슈비 슈비(너는 돌아오고 돌아오라)

תימלושׁה 핫슐라미트(술람미 여인이여) יבושׁ יבושׁ 슈비 슈비(돌아오고 돌아오라)

ךב־הזחנו 웨네헤제 바크(그러면 우리가 너를 보리라)

14 וזחת־המ 마 테헤주(왜 너희가 보려하느냐)

תימלושׁב 밧슐라미트(술람미 여인이여)

תלוחמכ 키메홀라트(춤추는 것처럼)

םינחמה 함마하나임(두 팔 앞에서)

 

스 토 리

 

백성들의 찬사를 받은 술람미

그러나 자만하지 않았고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왕과 왕의 관심인 그의 백성들에게 있었다.

그녀는 백성들에게 희망과 믿음이 되어 왕을 도와 호도 동산처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숙원이었다.

백성들의 봄이 오기를 고대하며

호도 동산의 푸른 초목이며

포도나무의 순이며

석류나무의 꽃이

피었는지 살피던 그녀는

알지 못하는 순간에

마음에 끌려 백성들의

수레들 가운데 끼여들어

그들과 함께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백성들은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술람미의 활동을 본 왕후들과 비빈들은 자신들의

모델이요 대역인 술람미가 영웅처럼 자랑스러웠고 솔로몬

역시 그러한 술람미 왕후의 모습이 심히 대견스러웠다.

과연 그녀는 곤경에 처한 야곱이 마하나임에서

천군을 만났던 것처럼 백성들에게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강 해)

이 시간에는 호도 동산이라는 제목입니다. 호도동산은 왕이 늘 내려와서 쉬어도 가고 여러 왕의 소유의 과실나무도 있는 휴양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3:15). 이 장소가 사웨 골짜기 즉 왕곡, 왕의 골짜기로 불리움을 받은 곳입니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성 아래 있는 기드론 골짜기입니다. 그 동안 아가서에서 동산이 나오면 늘 사랑의 품을 가리킴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내의 품이 아니라 남편의 품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술람미가 전과는 달리 남편 홀로 애쓰도록 자신을 방치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남편을 이끌어 가는 내용입니다.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11-12절은 두 사람의 성적인 만족을 시사하며, 13-14절은 부러워하는 왕궁 여자들을 통하여 술람미 왕후의 뛰어남을 간접적으로 부각시킴이고, 7:1-9절 상 반절까지는 시각적으로도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는 술람미 왕후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부부의 만족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취함으로 만족하지 않고 협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취하는 사람 역시 반대로 취함을 받아 상대가 만족할 때 그것이 배가하는 만족이 됩니다. 나아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시각적으로까지 취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또 다른 새로운 만족의 행진은 7:10-13에도 계속됩니다.

 

그런데 신령한 세계에도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영혼의 만족이 있습니다. 고후3:5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만족도 각인의 신앙 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기억할 점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완전하시고 부족하심이 없으시되(23) 문제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고 만족하게 해드림으로 우리에게 참된 영혼의 만족이 옵니다(7:12, 고후3:5).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신령한 지도를 받아 나아갈 때 소성강의 그 풍성함 같이 진정한 은혜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만족을 위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함이 필요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11-12절 본문 이해를 먼저 하고자 합니다. 본문은 왕후 술람미의 노래입니다(그랜드종합주석, 강병도, 데오도레트, 델리치, 에발트, 최클러, 퍼시, 굿, 부우드로이드, M.스튜어트). 본문에 나타난 외형적인 내용은 그냥 봄에 있었던 백성들을 염려하는 술람미의 이야기입니다. “술람미는 추운 겨울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다 봄소식을 알기 위해 호도동산으로 내려갑니다. 내려가서 초목이 났는지 포도나무의 움이 돋았는지 석류나무에 꽃이 피었는지 살피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끌려 백성들의 수레 가운데 이르러 그 수레들과 함께 백성들의 품으로 달려갑니다.” 이 내용은 이제 백성을 사랑하는 남편인 왕과 추구함에서 일치함을 시사합니다. 이 백성을 향해 달려가는 이 모습은 아가서의 마지막 절인 8:14에도 계속되듯 왕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이 때 백성들은 오고 있으며 또 올 왕을 통해 많은 돌봄과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처럼 솔로몬이 항상 백성들을 염려하여 자신도 모르게 늘 백성들을 향해 달려갔듯 이제는 왕비가 왕의 관심사와 동일한 그 일치한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으로서는 대단히 대견스럽고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자체만으로도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신부 된 성도들의 복음 사역의 예표로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합니다.

 

본문의 묘사는 부부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왕후의 활동을 배경으로 앞에서도 그랬듯이 실상은 부부생활의 어떤 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본문으로 몇 가지의 내용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중요한 해석의 열쇠가 골짜기의 호도동산인데 아가서에서 동산은 늘 사랑하는 자의 품을 가리킵니다. 그 모양을 연상시키는 해학적인 면으로 가상해 볼지라도 골짜기의 호도동산은 남편의 깊은 품을 상징합니다. 실재로 술람미의 이 행동을 솔로몬이 6:14에서 마하나임의 춤이라고 표현했으며 이 춤에 대해서 7:1 이하의 묘사로 보아 나체의 춤이 분명합니다. 물론 술람미가 무대에서 나체 춤을 추었다기보다 남편을 시각적으로 만족시키는 아내의 가정에서의 모습을 시문학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나체의 마하나임은 아내의 중요한 테크닉의 하나입니다. 5:7에서 술람미가 훤히 비치는 그물 같은 너울의 속옷을 입었듯 적절히 표현되는 의상이 필요합니다. 남자의 성감대는 주로 마음의 성감대입니다. 이 마음의 성감대는 흔히 시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은 신속해서 시각의 자극을 받는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상은 아내가 준비할 테크닉 중의 테크닉입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대부분 아내의 이런 테크닉 부족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위한 의상을 준비하여 연출하시기 바랍니다. 침실에서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남편의 시각을 위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른 왕후들은 왕궁의 예법의 틀에만 사로잡혀 부끄러워 이 춤을 출 줄 모릅니다. 그 결과 남편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나라 유교 전통의 부부들은 서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심히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유교적인 틀에 매여서는 성생활의 발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은 척 이것을 미덕으로 알아왔습니다. 그러기에 남편은 아내의 마하나임의 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왕실의 체모를 깨고 마하나임의 춤을 출 줄 아는 술람미는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부간이므로 부끄러워 말고(2:25) 마하나임의 춤을 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즉 술람미는 남편이 추구하는 이 면 저 면을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남편을 위한 아내의 테크닉은 비정상적인 매춘의 세계에서나 상업적인 광고에 도용되어 퇴폐적으로 인식되어 있거나 혹은 밖의 외출 시에는 남의 시선을 끌만큼 최선을 다하면서 가정에서만은 그렇지 않음은 매우 유감스런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남편의 마음을 읽는 술람미의 슬기로움을 봅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면 무엇보다 그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온전한 하나님 뜻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1절에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그랬습니다.

여기 초목을 비롯한 포도나무 순이나 석류나무의 꽃은 모두 이른봄을 알리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술람미가 봄이 오기를 얼마나 소망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어떤 단계를 보여줍니다. 푸른 초목’(יבא 이베)녹색식물을 뜻하는데 생명의 상징으로 백성들이 죽음의 곤경에서 벗어났는지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기본적인 민생문제입니다. 다음은 포도나무는 산업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들의 얼마나 부요한 가운데 있는지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리고 석류’(ןומיר 림몬)는 이른봄에 꽃이 피므로 그 꽃은 봄의 신호였습니다. 이 꽃은 기쁨의 감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백성들이 얼마나 행복한 가운데 있는지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 같은 관심은 삼 단계에 이르는 백성들의 봄에 관한 관심은 물론이고 남편의 신체적인 현상을 3단계로 본 것입니다. 이러한 용례로서 뒤의 7:12을 증거로 들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골짜기의 푸른 초목에 관한 관심입니다. 이 초목은 풀과 나무에 관한 것으로 그 돋아남의 유무를 관찰함은 곧 생명성의 여부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남편의 남근을 5:14에서 아로새긴 상아에 푸른 청옥을 입힘으로 묘사했듯 이는 남편의 발기의 유무에 대한 관심입니다. 보통의 남자라면 그 생각은 곧 바로 신체로 연결됩니다. 이것이 남자의 비밀이요 솔로몬에게 시집 온 술람미가 경험으로 얻은 남자에 대한 지식입니다. 남자는 여자와는 달리 마음의 상태가 곧 바로 신체로 나타나는 점이 그 특징입니다. 조그만 관심만 갖는다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이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내들이 이것을 알면서도 늘 그렇다는 식으로 무관심하여 남편의 중심과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추구점을 받들어 주지 못합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부부생활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건강한 남자의 특성상 단순 발기일 수 있으나 이것이 남편의 마음을 읽는 아주 기초적인 점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입니다. 이것이 초목이 상징하는 교훈입니다. 대개 풀이나 나무는 우리 인성과 관계가 있습니다(40:6). 이처럼 성경은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복음을 기록한 책이며 혹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도 알 수 있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곧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많은 성도들이 너무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거나 알아도 항상 하시는 말씀이라 생각하여 무관심합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얼마나 우리와 영적인 교제를 원하시는지 모릅니다. 혹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 맺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그 심정을 발견합니다. 혹은 선지서의 죄악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몰라서라기보다 알면서도 무관심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세상일에는 종일 관심을 가지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는 무관심이라면 하나님의 마음 얼마나 서운하시겠습니까?

 

2. 성령의 감동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다시 11절에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그랬습니다.

다음은 포도나무는 산업과 관련된 것으로서 포도나무의 순은 매우 이른봄에 돋아납니다. 즉 왕비 술람미가 포도나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백성들의 부요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렇듯 남편의 발기 상태가 건강을 암시하는 단순한 발기인지 아니면 고통을 수반하는 참기 어려운 것인지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그 부요성의 유무입니다. 그 부요성이란 발기의 상태를 가르킵니다. 남자에게 있어서 발기는 심한 고통으로 다가올 정도입니다. 이 때 팽창해 있기 때문에 두드러집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시각을 통해서나 얼굴의 표정을 통해서도 쉽게 감지됩니다. 그런데 여자는 심리적으로 수줍거나 자신이 신체적으로 무딘 특성 때문에 남편의 마음을 무관심하거나 이해할지라도 때로는 귀찮다고 애절한 요구마저 거절합니다. 그래서 아내야말로 목석이거나 구제불능의 몰인정한 사람으로 인식하곤 합니다. 혹은 아내는 남편의 갑작스런 요구에 당황하거나 심지어는 짐승 같이 여기기도 합니다. 물론 남편은 아내를 위한 배려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온 밤을 TV를 시청한 후 곤히 자는 아내에게 온전한 협조를 요구해서는 무리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부생활은 아내에게는 가정생활의 일부이기 쉽지만 남편에게 있어서는 가정생활의 거의 전부라 할만큼 비중이 큽니다.

 

그리고 부부에게 있어서 자기 몸의 문제는 이제 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배우자가 서로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고전7:3). 이것은 부부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니 참지 말고 솔직히 알려 주어야 합니다. 이 고민을 스스로 해결하지 말고 반드시 배우자가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몸의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술람미는 이제 남편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술람미는 짧은 결혼의 경험이지만 이 경험을 통하여 남편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여 남편의 요구를 아는 방법을 터득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럼 포도나무의 순은 신령한 관점에서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심령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외에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지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이 무디면 성령의 생명적인 인도하심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2:13-14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한 바와 같습니다. 성도의 중심 속에 성령의 소원이 나타나기 때문에 거룩한 심령은 쉽게 그 감동을 느끼고 그 소원을 갖게 됩니다. 이 성령의 소원은 얼마나 강하고 간절한 것인지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롬8:26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했는데 학자들은 이 현상을 성령께서 우리 영혼과 더불어 기도의 소원으로 충만케 하시는 현상으로 봅니다.

 

이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혀 행20:22-24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했던 바울은 복음 전도를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만큼 성령의 소원은 강합니다. 조금만 영적으로 장성하여 새로워지면 그 소원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 감동은 이제 우리가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이 감동을 받고서 외면한다면 성령을 소멸하는 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의 모든 문제는 주님의 문제이고 주님의 문제는 이제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기도를 통해서 최소한 소상히 알려는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삶에서 염려하지 않도록 책임져 주셔야 하고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반드시 수용하여 순종해 드려야 합니다.

 

3. 섭리적인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다시 11절에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그랬습니다.

여기 석류’(ןומיר 림몬)는 이른봄에 꽃이 피므로 그 꽃은 봄의 신호였습니다. 이 꽃은 석류 열매가 풍자하듯 기쁨의 감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백성들이 얼마나 행복한 가운데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뜻합니다. 이렇게 술람미는 남편인 왕의 중심을 이해함으로 함께 봄 혹은 백성들의 봄을 사모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봄은 보는 관점에 따라 계절의 봄을 의미하기도 하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되는 백성들의 봄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석류꽃 핌의 여부를 부부생활에 적용한다면 남편의 극도의 발기 상태를 표현한 은유입니다. 본래 석류 열매는 여성 호르몬이 많이 함유되어 월경 불순이나 최음제로서 써오던 과일입니다. 그 예로 7:12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한 구절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 움이 돋음은 정력이 돋아남을 시사합니다. 꽃술이 퍼짐은 그 모양과 같이 발기를 시사합니다. 그리고 석류꽃이 핌은 그 모양이 상징하듯 완전히 발기되어 돌출 되는 참기 어려운 시점입니다. 남편을 밖에 방치해 두었던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 만큼 술람미는 전의 소극적이던 것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남편의 그러한 상태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만한 부부생활은 서로의 느낌과 요구에 성실함에서 가능합니다. 그 감정은 얼굴의 표정이나 요구하는 언어 혹은 포옹하려는 행위를 통해 나타납니다. 여기에까지 도달한 남편을 거절하면 남편의 마음에는 상처로 남습니다. 물론 남편을 거절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령 월경의 때나 정결하지 못할 때나 분위기가 적절하지 못하거나 다른 일에 열중할 때 등입니다. 그렇지 않고 허락할 수 있음에도 마지못해서 하는 경우나 간혹 아예 싫어하는 여성들도 있는데 이는 배우자에게 불행을 안겨 주는 일이므로 삼가야 합니다. 고전7:2-5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했듯 부부간의 성 거절은 비 성경적입니다. 이는 배우자로 큰 좌절과 시험 가운데로 빠뜨리는 일이 됩니다. 이 서로의 무관심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가혹한 폭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정과 언어와 행위로 나타나는 요청만큼은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신령한 관점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또 다른 방향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섭리적인 행위입니다(103:7). 그것은 환경을 통한 비유나 징계나 형통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징계의 환경이라면 이 말씀은 복종하지 않고서는 철회되지 않는 강력한 것입니다. 이 징계적 환경은 우리가 반드시 회개하고 복종하여 신앙의 훈련을 받아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의 것입니다. 혹은 환경을 통한 형통이라면 이 역시 순종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길을 주셨는데 순종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그 곳으로 보내십니다. 나중에야 아쉬워해도 불신앙과 불순종한 자신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섭리적인 환경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이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과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적극적으로 순종함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기쁨으로 흔쾌히 그리고 열심을 다해 순종해야 합니다.

 

11-12절에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호도 동산은 남편의 품안을 가리킵니다. 호도는 단단한 표피의 주름이 패인 견과입니다. 그러나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뿐 이 때가 남편의 발기 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 호도동산으로 내려감은 남편의 발기 이전의 수축 상태를 의미하는 은유입니다. 이제는 전과는 달리 술람미가 열심을 내어 남편을 취하려는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이러한 리드하는 테크닉을 통해 수축은 사라지고 발기에 이릅니다. 나아가 이 같은 노력은 여자에게도 큰 감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전과는 달리 그것을 수용하고 싶은 간절함이 생겨납니다. 이 때만큼 남편의 몸이 귀할 때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란 남편의 발기된 모양을 해학적으로 비유한 점도 있지만 아울러 마치 귀한 백성을 만난 듯 다가가거나 수용하고 싶은 절실한 충동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비로소 술람미는 자기 마음의 성감대를 발견합니다. 최고의 성감대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의 성감대만 달아오르면 부부생활은 원만하게 이루어집니다. 남편의 마음의 성감대를 위해서는 아내의 노출이 그 방법이요, 아내의 성감대를 위해서는 남편의 배려와 자상함이 그 방법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아내는 남편의 마음의 성감대를 위해 화장과 의상의 정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외설 비디오를 의지함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죄악이 되니 주의해야 합니다. 아내 역시 남편의 호도동산에 관심을 가짐이 자신의 준비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 마음의 성감대는 신속히 몸의 모든 성감대를 자극합니다. 그래서 최고이 성감대가 마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부지중에”(יתעדי אל, 로 야다티)내가 모르는도다란 의미가 그렇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달아오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시점에서부터 부부생활은 획기적으로 변하여 아내가 피동에 머물지 않고 부부생활을 이끌어 갑니다. 남자의 특징은 취할 때는 물론 취함을 받을 때 더 만족감을 느끼며 성감대 역시 여자와는 달리 마음의 성감대가 보다 앞서기 때문에 비록 고개를 숙였을지라도 남자들은 성생활에 애를 쓰고자 합니다. 이처럼 아내가 마음의 성감대를 사용할 줄 알 때 자신의 상태를 바꿀 수 있거나 상태와는 관계가 없이 애쓰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성감대는 남편을 위해서 애써주는 가운데 일어나기도 한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비로소 부부는 성생활의 갈등과 불협화음을 깨고 마음과 육체적으로 일치에 도달하게 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수레는 행함의 상징이요, 부지중에는 마음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뜨거운 중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3:1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했고, 30:9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하셨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지켰으나 술람미의 달라진 점이 그렇듯이 이제는 흔쾌히 도리어 기뻐하고 사모하는 심정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주님의 기쁘심을 위해서 충전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에 그렇게 기쁨으로 흔쾌히 순종하셨습니다. 이를 예언한 시40:7-8을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했습니다. 이것이 장성한 성도들에게 볼 수 있는 크게 달라진 점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주님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지 마시고 기쁨으로 그 뜻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2. 모범으로서 도전을 주는 도구가 됩니다.

 

13절에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했습니다.

여기 13절은 왕후들의 노래입니다. 여기에 대한 견해 중에는 신변을 책임진 염려하는 예루살렘 여자들(Kwil and Delitzsch, 박윤선, 강병도)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술람미의 백성들에 대한 관심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적지에 뛰어든 것도 아니고 일상적인 시녀들의 임무를 솔로몬이 여기에 굳이 강조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한 사람들을 왕후와 비빈들로 보아야 합니다(Wycliffe). 그 이유는 마하나임의 춤은 왕후 활동의 비유이며 자신들은 감히 불가능한 사역을 술람미가 자기들을 대신하여 그 체면과 위상을 세워 주었고 그 활동이 자신들의 대리만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왕후들은 이 술람미 왕후의 모습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이 본문을 달리 술람미의 성적인 매력으로 볼 때 이런 마하나임의 춤을 부러워 할 대상은 왕후 말고는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술람미를 술람미 여자 즉 솔로몬의 여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여기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란 말은 단순히 술람미가 하는 일을 방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말에는 그러한 일을 감당하는 술람미가 그들 모두에게 영웅이요 선망의 대상임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조차 술람미를 사모할 만큼 되었으니 술람미 여자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런데 이 부름을 부부생활에 적용하면 왕후들이 왕의 사랑을 독차지한 술람미 왕후를 부러워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부름 속에 마하나임의 춤이 솔로몬의 여자가 됨과 깊은 관계가 있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마하나임의 춤은 이미 언급한 대로 남편을 위한 아내의 중요한 테크닉입니다. 이 춤이야말로 남편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버릴 수 있습니다. 유교적 관습에 젖은 남편은 처음에는 머쓱해서 싫은 듯하지만 내심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노출과 애교를 암시하는 이 마하나임의 춤에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혹시 남편이 싫어하는 의상이 있다면 버리시고 고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은 서투른 애교로 인해 남편을 더 도망치게 할 수 있으니 모든 것은 점진성을 갖고 시행하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히 술람미 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장한 성도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자극하시고 도전의식을 줍니다. 그래서 아직 육신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흠모하게 만들고 사모하게 만들고 혹은 시기 나게 만들어서 모두가 그렇게 아름다운 신령한 수준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이것을 가리켜 모범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의 종들은 참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다른 주의 종들을 보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부러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커다란 자극과 도전의식을 갖습니다.

 

3. 온전히 주님의 사람으로 삽니다.

 

다시 13절에 술람미 여자야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기 술람미”(תימלושׁ 슐라미트)란 본 절에 한 번 나오는데 술람미의 고향 수넴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으나(Delitzsch, Wycliffe, Lange, Redford) 술람미란 어원적으로 솔로몬(המלשׁ 쉘로모)의 여성형으로 솔로몬의 여인을 가리킵니다(Jack S. Deree). 여기서 술람미가 얼마나 솔로몬과 마음적으로 하나된 여자인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술람미는 남편과 뜻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솔로몬의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받들기를 원하는 왕후였습니다. 혹은 솔로몬의 마음을 술람미가 정복했다는 뜻도 됩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확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13: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을 최초로 얻은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그들이 예수를 참되게 믿어 변화될 뿐 아니라 사랑 운동의 두드러진 특징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믿어 그리스도의 왕후가 되었지만 과연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고 있는지 살펴보십시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그만큼 주를 위해 헌신됨을 시사합니다(딤전6:11). 술람미 즉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순종할 때 됩니다. 그래서 딤후3:16-17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4. 하나님의 온전한 기쁨이 됩니다.

 

14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했습니다.

이는 솔로몬이 왕후들의 말에 반문하는 말입니다. 여기 마하나임의 춤이란 갓 지파의 전통적인 원무(圓舞)인지 불분명하지만 분명한 것은 창 32장의 천군 천사들을 기초로 한 말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야곱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있었습니다. 뒤에는 라반의 군대, 앞에는 에서의 군대 그러나 천군 천사들 앞에서 그들은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일차적인 의미로는 왕비로서의 백성들을 위한 술람미의 활동이 천사처럼 선하고 아름다우며 또 천군처럼 힘이 있어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왕적인 권세를 입은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는 오늘날 영부인들의 구제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보려느냐 함은 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심히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는 내용입니다. 이를 이차적으로 부부생활에 적용하면 술람미 왕후 때문에 솔로몬이 남편으로서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는 먼저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마음과 왕적인 권세를 입어야 만이 가능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은혜를 받아야 주의 일합니다. 이렇게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능력과 예수의 축복을 입고 나갈 때 저주와 불신과 죄악과 고통의 세상에는 대 변혁이 일어납니다. 그 때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귀한 주님의 백성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아 기쁨으로 말씀대로 살 때 그것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방법입니다. 즉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죄와 사단과 세상을 이겨 말씀대로 살고 예수의 마음과 그 권능으로 죄악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때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추는 천군 천사의 춤인 마하나임의 춤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술람미처럼 천군 천사의 마하나임의 춤을 춥시다. 그러기 위해 성령 충만함을 입으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쁨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주의 일을 합시다. 그래서 죄악과 슬픔으로 싸늘한 이 세상을 새 싹이 돋는 아름다운 호도의 봄 동산으로 만드십시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총애 받는 왕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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