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의 아름다움 Ⅱ (아6:5-7)
= 더 깊은 연합 =
요 약
우리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에 연합될 때 하늘의 놀라운 왕권이 입혀진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삶에 연합되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 이웃에게 헌신하며 이웃을 이해하고 이웃과 생사와 고락을 함께 함을 기뻐하게 된다. 신부의 수준은 주님만 사랑하지만 왕후의 수준은 주님과 그의 백성들까지 사랑함이다. 그러나 그 만큼 큰 영광과 권세와 능력과 총애가 주어짐을 기억하자.
설 명
1. 배 경
⇒ 계속하여 왕이 총애의 대상인 왕후를 칭찬하는 내용이다.
2. 적 용
(진단) 배우자의 특수한 점 때문에 불만이 있나요?
(해결) 양보가 어려운 특성이라면 내가 양보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할 때
4) 하늘에 속한 자가 된다.
5절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 반어법의 역설적인 문장으로 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 영광에 왕이 놀라는 장면이다.
5) 이웃에게 헌신하는 자가 된다.
5절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 왕후는 왕만 사랑함에 그치지 않고
그의 백성에게도 헌신함이다.
6) 예수의 마음으로 이웃을 이해한다.
6절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 쌍태를 낳은 양 같고”
: 왕후는 왕의 마음을 이해함과 아울러
그의 백성들의 삶도 이해해야 한다.
7) 이웃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게 된다.
7절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 왕후는 왕과 함께 백성들을 사랑할 다짐이 되어 있기에
왕후 됨을 후회하지 않고 기뻐함이다.
아가 6:5-7
5 (솔로몬)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7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원 문
5 ךיניע יבסה 하세비 에나이크(네 눈을 돌이키라)
ידגנמ 민네게디(내게서)
ינביהרה םהשׁ 쉐헴 히르히브니
(왜냐하면 나에게 확장되어 있기(어지러워 있기) 때문이다)
ךרעשׂ 사례크(네 머리카락이)
םיזעה רדעכ 케에데르 하잊짐(염소 떼와 같이)
ושׁלגשׁ 쉐갈슈(기대어 있는)
דעלגה־ןמ 민 학길르아드(길르앗에서부터)
6 ךינשׁ 쉰나이크(네 이(teeth)는)
םילחרה רדעכ 케에데르 하르헬림(암양 떼와 같도다)
ולעשׁ 쉐알루(올라온) הצחרה־ןמ 민 하라흐차(목욕탕에서부터)
םלכשׁ 쉐쿨람(그들 모두가) תומיאתמ 마트이모트(쌍둥이를 낳은)
הלכשׁו 웨솨쿨라(잃어버린 것은) םהב ןיא 엔 바헴(그들 중에 하나도 없도다)
7 ןומרה הלפכ 케펠라흐 하림몬(석류 한 쪽과 같도다)
ךתקר 락카테크(네 뺨은)
ךתמכל דעבמ 밉바아드 레참마테크(너의 베일 뒤에 있는)
스 토 리
총애의 대상이 된
술람미를 바라본 솔로몬은
왕후의 찬란한 모습에 압도당하여
눈동자만 보아도 두근거리는
행복한 가슴을 가눌 길이 없었다.
어여쁜 그 모습에
더한 자애로움 거기에
위엄까지 입혀진 왕후 술람미는
솔로몬 왕의 진정한 동역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그들의 사랑의 발전은
마음속에 항상 그리는 대상이었고
서로를 위해 헌신함이 힘겹지 않으며
서로의 관심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었으며
서로를 이해함으로 생사고락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강 해)
지난 시간에 우리는 술람미 왕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약 세 가지 방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즉 주님에게 대하여는 기쁨이요 사람에게 대하여는 사랑이요 원수 사단에 대하여는 엄위한 성도의 아름다움의 조건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그의 삶에 연합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세 그리고 주님의 사랑하는 마음과 위엄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연합의 비밀입니다. 그러기 위해 헌신적인 기도생활로 말미암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 필요합니다. 오늘도 부부의 깊은 연합을 배웁니다. 한 마디로 부부생활의 만족은 이렇게 정신적인 연합에까지 나간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왕후로서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이 정신적인 연합을 은유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럼 계속하여 왕후의 아름다움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4. 만왕의 왕의 왕후는 성령으로 감동된 자입니다.
5절에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했습니다.
이 말은 계속되는 왕의 왕비를 향한 찬사입니다. 이 말을 원문으로 보면 (ךיניע יבסה 하세비 에나이크) ‘네 눈을 돌이키라’ (ידגנמ 민네게디) ‘내게서’ (ינביהרה םהשׁ 쉐헴 히르히브니) ‘왜냐하면 나에게 확장되어 있기(어지럽기) 때문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어지럽다 즉 놀래다는 용어를 좀 더 설명하면 ‘압도하다’(NIV) ‘이기다’(AV, ASV)라는 뜻으로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술람미 왕후의 그 영광스런 모습에 왕이 놀라고 압도되어 어지러울 정도라는 의미입니다. 좀 과장된 주관적인 표현처럼 여겨지지만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하고서 그 지혜와 찬란한 왕궁을 보고서 정신이 현황하였다는 왕상10:6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나를 보지 말라” 했는데 이는 문법적으로 반어법적인 역설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즉 왕후의 찬란한 모습에 압도되어 눈동자만 보아도 두근거리는 행복한 가슴입니다. 이 보지 말라를 달리 표현하면 아내에게서 나의 눈을 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의 마음에 떠나지 않는 환상입니다. 아내 역시 사랑하는 남편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녀들을 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혹시 자녀는 잊을 수 없는데 배우자는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우리 속담에 ‘자식은 내 자식이 좋고 곡식은 남의 것이 더 좋다’ 했습니다. 혹시 자식은 내 자식이 가장 좋은데 자신의 배우자는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있다해도 나의 배우자보다는 못합니다. 이러한 가정 회복이 이루어질 때 이 세상은 더욱 건전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부부생활의 성공은 더욱 정신적인 연합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께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신부 수준을 넘어서 주님께서 깜짝 놀라실 아름다운 왕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에 속한 것으로 입혀져야 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라 그녀를 왕후로 삼았습니다(에2:16-18). 그런데 에스더가 왕후로 뽑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비하신 섭리였고 또 에스더가 그 만큼 아름다웠지만 다른 한 가지는 에스더는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게가 정한 물품 외에는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왕후로 뽑히기 위해서 처녀들이 열두 달 동안 여섯 달씩 몰약과 향품을 이용하여 자기 몸을 정결케 하는 기간을 거쳤는데 더 아름다워지겠다고 다른 물품을 더 쓴 여자들은 다 불합격되고 정해진 두 물품만 쓴 에스더는 합격이 되었습니다. 여기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즉 몰약이 십자가 고난을 상징한 것이라면 향품은 부활을 상징하며 열두 달 12는 제자수로서 신앙 훈련의 개념입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를 적용 받아 그리스도의 신령한 것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그 때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복음과 성령으로 감동된 성도만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5. 만왕의 왕의 왕후는 이웃까지 사랑하는 헌신이 있습니다.
5절에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말씀 드리기 앞서 4:1-3의 칭찬과 본문 5-7절의 칭찬을 비교해야 합니다. 본문 5-7의 칭찬은 앞의 4:1-3의 칭찬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배경과 그 의미는 다릅니다. 가령 4장의 칭찬은 혼인 및 개인적인 애정과 관련된 것이지만 본문은 왕후의 공적인 신분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 증거로 4:1-5과 6:5-7을 비교하면 비슷하나 동일하지 않고 칭찬의 종류도 본문에는 입술 유방 목 등의 개인적인 애정과 관계되는 종류가 모두 삭제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길르앗 산에 누운 무리 염소 떼 같은 머리털은 왕후의 무엇을 상징합니까? 우리가 4:1에서 이 머리털을 순종과 헌신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고전11:6-5).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전에는 신부로서의 헌신이지만 여기서는 왕후로서의 헌신입니다. 즉 남편에 대한 헌신에 국한되지 않고 남편이 관심 갖는 백성들에 대한 헌신입니다. 그것은 왕의 총애를 받는 대표적인 왕비이므로 왕과 함께 백성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 만은 아닙니다. 진실로 왕을 사랑할 때 왕의 관심사가 나의 관심사가 됨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그녀의 헌신의 구체적인 것을 봅니다. 즉 많은 머리숱은 시늉이 아니라 전적인 헌신을 가리킵니다. 또 구불구불한 큰 곱슬머리는 작은 곱슬처럼 자기 주관이나 고집적 혹은 억지가 아니고 혹은 곧은 머리처럼 무성의한 헌신이 아니라 기쁘고 즐겁게 자원하는 헌신입니다. 사실 왕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고도의 헌신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왕만이 아니라 왕의 백성들까지 사랑해야 하는 어머니와 같은 역할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왕후는 백성들에게 왕을 빼앗기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후는 독수공방으로 고독하기 일수입니다. 그러므로 남편과의 단란하고 아기자기한 삶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왕후로서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술람미 왕후는 왕을 진실로 사랑하기에 왕은 물론 왕의 관심하는 백성들까지 사랑합니다. 이 고도의 정신적인 연합을 배경으로 하여 가정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부부생활의 진정한 만족은 서로를 위해서 죽도록 봉사하고자 하는 헌신을 불러온다는 교훈입니다. 이 땅에 부부가 많지만 이처럼 정신적으로 하나된 부부는 많지 않습니다. 이 정신적인 연합은 서로 사랑함으로만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면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여 주님이 관심 쓰시는 백성들을 위해 수고하고 고난받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아내가 되는 것과 흡사한 것입니다. 이 위치는 남편과 아울러 온 교인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 고도의 헌신이 아니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준으로 볼 때 신부와 왕후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부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신랑만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나 왕후는 왕과 함께 백성들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왕과 관계없이 백성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왕을 사랑하기에 왕이 관심하는 일에도 헌신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요 원수 사랑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요약하면 두 가지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을 따라 참으로 이웃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의 더 깊은 사랑과 연합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왕후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충만함이란 신부의 수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풍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왕후 술람미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헌신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6. 예수님의 왕후는 백성들의 현실을 참으로 이해합니다.
6절에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했습니다.
이 말씀 역시 4:2절에 이미 소개된 것으로 이것을 말씀을 소화하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상황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해하므로 귀한 교훈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이었습니다. 이처럼 신부의 수준이라면 말씀만 잘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왕후의 수준이라면 이제는 말씀과 아울러 백성들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란 이가 흰 것을 강조함이요,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란 모든 치아의 충실함을 뜻합니다. 양은 다른 목축이 먹어 치운 목초지에서도 방목할 수 있을 만큼 그 이가 섬세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4:2의 암양이 아니라 암양 떼입니다. 이것은 더욱 넓고 풍성한 이해력을 가리킵니다. 이제는 한 남자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가 관심 갖는 온 백성들을 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충 소리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은 총애 받는 왕후의 배경을 통해서 부부생활의 성공을 통해 오는 정신적인 연합의 다른 면을 교훈합니다. 즉 이 정신적인 연합은 배우자의 작은 것도 이해하거나 배려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럽게 하는 간섭이 아니라 배우자의 마음을 알고 돕는 세심한 이해와 배려입니다. 이럴 때 배우자의 주밀한 생각으로 인해 작은 것이지만 감탄하게 됩니다. 이러한 깊은 연합은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물론 성생활만을 강조함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생활도 중요한 한 단면입니다. 이처럼 성생활에 세심한 배려가 있다면 다른 면의 배려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흔히 가정에서 배우자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줄조차도 알지 못하는 일이 많음은 불행한 일입니다.
이처럼 만왕의 왕의 왕후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짐입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면 범사에 놀라운 관심과 배려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모든 이해와 감정과 사역에 하나된 자신을 보고서 스스로 놀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에 더욱 감동되면 만백성들의 어머니 같은 사랑이 중심에서 솟아납니다. 이 단계만 올라가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할 수가 있습니다. 이 백성들의 현실을 이해하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왕비는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합니다.
7절에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했습니다.
뺨은 감정 표현의 장소요 연지와 곤지를 찍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의 상징입니다(삼상16:12, 17:42). 그런데 반짝이며 희고 붉은 씨로 가득 찬 쪼갠 석류 한 쪽은 마음속의 기쁨과 행복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여기 또 언급된 것은 술람미가 전에 신부 때 신랑을 바라보며 기뻐하던 그 행복스런 얼굴이 왕후의 모습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술람미가 왕과 함께 왕의 백성들을 위한 삶에 동참함을 그토록 기뻐하고 행복스러워 한다는 의미입니다. 술람미가 왕만이 아니라 왕이 관심 갖는 백성들을 위해 이런 헌신적인 일을 해야 하는 그 임무를 싫어한다면 왕후의 얼굴에 기쁨이 충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부의 사랑은 동고 동락 그리고 동역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가정이 더욱 온전해 지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추구해야 할 왕후의 영적 수준입니다. 이처럼 모세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히11:24-26).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고백했습니다(빌2:17-18).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일 뿐 아니라 그의 백성들까지도 사랑하는 왕후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주님의 사랑을 깊이 기억하고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십시다. 진실로 주님의 그 사랑 안에서 자라갈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만왕의 왕 되신 주님의 크신 영광이 함께 하시는 영광스런 황후가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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