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성 바벨론 4 (계 18:7-8)
7.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이 시간에 “큰 성 바벨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미국에서는 미식축구 결승을 1억 2천만 명이 동시에 시청할 만큼 미식축구에 대한 열기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총장들의 속을 제일 썩이는 것 중 하나가 대학 축구팀을 강화하라는 동창회의 압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압력 속에서도 시카고대학은 30세에 총장이 된 로버트 허친스의 방침에 따라 축구장 문을 굳게 폐문하고 대학의 본연인 학문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참 대단한 총장입니다.
이런 지조가 우리 신앙인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롬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죄악이 발달하고 모두가 그 풍조에 휩쓸려 가면서 우리를 바보로 여긴다 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히 변치 아니할 소중한 믿음을 지켜나가야 할 뿐 아니라, 이 패역한 세상에 밝은 빛이 되어 세상을 개혁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 원하시고 계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4.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의 가치를 배설물로 만드십니다.
7절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이 말씀 속에서 바벨론의 영화와 사치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변의 많은 식민지의 모든 부요와 영광이 바벨론으로 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사 14장에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는데 거기 보면 바벨론은 압제하던 자, 강포한 성, 악인의 몽둥이, 통치자의 규(珪, 손에 쥐던 패)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스홀(지옥)이 소동하여 너를 영접한다고 말하면서 14:11에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라고 예언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얼마나 세속을 숭배하고 잘해주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 경건한 신자 만들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지만 한 영혼 세속화시키기는 너무나도 쉽습니다. 세상을 제일로 삼는 그들일지라도 예수 믿어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달라집니다.
어떻게 달라집니까? 더 이상 세상을 호화롭거나 영화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즉 은혜 받은 성도의 눈에 세상은 참으로 천박스럽고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을 받게 됩니다. 구더기보다 못한 존재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빌3:7-8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배설물은 바로 똥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저희 신은 배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고 살았던 과거는 사라지고 이제는 세상 죄가 부끄러움과 수치와 멸망의 어리석음으로 인식되고 고난과 애통되는 일로 인식되고 이제는 죄악을 버릴 정도가 아니라 원수처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을 사랑함이 심령의 큰 교통입니다. 사람들이 재미 있다 느끼는 모든 것들이 조금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4:1-3) 말했습니다. 더 이상 그 치욕스런 과거로 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5.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을 추종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여기 착각에 빠진 바벨론의 오만한 말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왕이고 과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여왕이라. 왜 세상이 자기를 여왕이라 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떠받들고 추종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바벨론 왕은 그의 지배하던 나라의 왕들로 하여금 자기를 숭배토록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금 탐심의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골3:5). 욕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아니라. 왜 과부가 아닐까요? 누구와 결혼한 것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과 결혼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세속에 대해 그렇게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 아래 인생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죄와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조강지처처럼 죄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14:2-3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했습니다. 롬3:10-12에도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열렬한 추종자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여황이 아니며 어찌 내가 과부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앞날에는 결단코 비극은 없을 것이라는 장담입니다. 그렇게 장담할 만 합니다. 그것은 역사 이래 한 번도 인간 스스로 죄악을 성공적으로 배척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죄인들에게 선호도가 높았지만 그 호황도 비극을 맞이할 때가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날 즉 성령이 임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더 이상 세상을 추앙하거나 추종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배척하고 몰아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심과 같이 우리 마음에서부터 세상을 몰아냅니다.
자세히 보면 몰아내야 할 세속적인 것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말이나 메시지로부터 시작하여 방향이나 정책이나 의식구조나 삶 등 세속의 물결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모릅니다. 초대교회에도 세속이 침투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기 때문에 야고보가 얼마나 책망했는지 야고보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젠 말씀과 성령으로 더 변화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6.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 경악케 하십니다.
8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여기 하루는 ‘홀연히, 일 시간에, 창졸 지간에’로 번역되는 말로 성경에서는 은혜의 역사를 시사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은혜 역사의 시간적 특징은 홀연 함입니다. 그래서 하루 지금 오늘 홀연이라는 말이 은혜와 관련이 깊습니다.
행2:2에도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라 했고, 행9:3에도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했고, 예수 탄생 시 천사들의 나타남이나(눅2:13) 변화 산의 사건도(마17:5) 홀연히 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도 홀연히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고전15:51).
그리고 성경에서 ‘하루’라는 낱말도 대부분 시간적인 개념보다 은혜의 날의 개념에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후6:2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고, 히3:13에도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했습니다.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여기 재앙이 죄에게 임한다는 건 구속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의 날은 일반적으로는 죄인을 심판하는 날이지만, 그 예언이 담고 있는 궁극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강림과 그리고 장차 재림하사 죄를 소멸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신령한 의미입니다(말4:1-6, 욜2:29-31). 이걸 알면 선지서가 풀립니다.
그 때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 있는데 이건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모두 탕진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애통하듯이 세상을 그렇게 느끼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그 무가치하고 냄새나고 쓸모 없고 고통스런 그런 죄 가운데서 왜 애지중지하며 살았나 후회가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더 이상 세상은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80년대 정치폭력의 대명사로 사람들에게 각인됐던 용팔이로 알려진 김용남 씨가 20년이 지난 지금 조폭시절 입에 달고 살던 술, 담배, 주먹과 이별하고 하나님과 열애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기사에서 기자가 그를 만나러 그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들어서기 전부터 우렁찬 찬양소리가 들렸는데 얼마나 찬양에 열중하는지 기자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봐도 어린아이 모습이지 조폭에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미소는 순수했고, 해맑은 눈동자에 수줍음이 가득한 미소, 작은 체구, 정돈된 콧수염, 만화 속 뽀빠이 아저씨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요즘 하루 2시간씩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시험과 유혹이 강해 신앙생활 힘들어 열심히 기도생활한다고 합니다. 예수 믿고 난 후 가장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말투요. 30년을 조폭세계에 있어서 입만 열면 욕만 나왔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성령 받으면 이렇게 됩니다.
7. 세상은 성령의 불로 잔재조차 남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여기 불로 사르신다는 건 죄악의 잔재조차 남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크게 받으면 가슴 치며 애통하며 죄는 불살라지고 은혜를 주리고 목말라 사모하며 죄악은 잔재조차 허용치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살전5:22-23에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사9:5-6에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전쟁 이야기 같지만 메시아의 초림 이야기입니다. 이 은혜는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왜 세상 죄를 심판함에 있어서 강하신 하나님을 언급할까요? 그만큼 세상을 떼어내버리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세상 죄악이 그렇게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 주 하나님의 은혜는 강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다 이기실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민33:3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다 한 것처럼 죄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걱정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죄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복음을 믿고 늘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은혜 받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에 대한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성령의 은혜로 우리 믿는 자들의 마음에서부터 세상이 심판 받고 나아가 주님이 오시는 그 날 세상의 죄악은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나 깨나 주님의 임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오셨고 오시고 계시고 또 온전히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은 물론 이 세상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도록 날마다 심판의 영으로 임하시는 주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귀한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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