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하는 십사만 사천 3 (계 14:3)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시간 “찬양하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주에는 144,000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했고 성부와 성자를 닮은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랐단 말씀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그들이 부르는 새 노래 속에서 또 다른 모습을 봅니다.
9. 그들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3절 “그들이 보좌 앞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은 은혜의 자리이지만 특히 보좌 앞을 강조한 것은 보좌는 다스리시는 주권을 상징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 절대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되려면 내 주장과 내 감정을 철저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내가 나타나면 하나님의 영광 가립니다.
민 20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했는데 모세가 너무 속상해서 거기에 감정을 섞었다가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습니까? 내가 나타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웁니다. 이처럼 나는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10. 그들은 복음적인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네 생물과” 144,000은 네 생물 앞에서도 새 노래를 불었습니다. 보좌에 네 생물과 24장로가 둘러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네 생물 앞이라고 따로 강조할까요?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이면 다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앞에 그 누구가 있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생물이 등장하는 것은 본문이 보여주고자 하는 어떤 메시지 때문입니다.
먼저 네 생물이 뭘까요? 네 생물은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구룹천사를 가리키지만, 상징적으로는 사복음을 가리킵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복음을 분류하면서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이라, 마가복음을 소복음이라, 누가복음을 사람복음이라, 요한복음을 독수리복음이라 불렀습니다.
마태복음을 사자복음이라 한 것은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왕 예수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 권세와 위엄처럼 사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이 소복음이라 하는 것은 이는 마가복음이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기 때문이고, 누가복음이 사람복음이라 하는 것은 누가복음이 완전한 인성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리고 요한복음을 독수리복음이라 하는 것은 요한복음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신성을 지녔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144,000이 네 생물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다름 아닌 복음적인 신앙을 가졌음을 상징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율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떠나 유대교적 율법으로 돌아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갈4:19)고 말했습니다.
11. 그들은 교회의 도우심을 받는 자들입니다.
“장로들 앞에서” 여기 144,000이 장로들 앞에서 노래를 불었던 것은 장로에게 찬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역할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 장로는 계4:4에 24장로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24명의 장로가 아니라 24는 12+12 즉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사도 즉 하나님의 부름 받은 공동체를 대표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24장로를 넓게 보면 신구약의 교회를 상징하고 좁게 보면 신구약의 하나님의 종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생각해야 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종에는 사도 목사 교사 선지자 능력을 행하는 자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왜 그 많은 명칭 중에서 장로였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장로는 오늘날 장로가 아니고 사도 중에서도 나이 많아 일생 교회를 위하여 수고를 많이 했고 말씀과 은혜에 있어서 원숙한 하나님의 종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장로 베드로, 장로 요한 등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본래는 사도였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이 사도들의 초기가 아니라 대부분 이 때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장로란 완숙한 주의 사역자를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목회도 하면 할수록 포도주의 깊은 맛과 같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오늘날 교회가 너무 젊은 목회자만 원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요일2:13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했듯이 장로는 깊은 아비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존경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벧전5:5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144,000이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그들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또 교회의 사역자들의 온전한 지도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 떠나서도 신앙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혹 한 두 명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편적으로는 적용할 수 없는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사역자들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엡4:11-12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12. 그들은 복음을 진정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 새 노래를 부르니” 여기 새 노래란 무엇일까요?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노래 역시 해 아래서는 새 노래가 없습니다. 이별 사랑 친구 눈물 인생 등 수많은 노래들은 가사와 곡조만 다를 뿐 오래 전부터 이미 불러오던 노래들입니다.
그럼 새 노래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계5:9-10에 24장로들이 불렀던 노래를 새 노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5:9-10에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그러니까 새 노래란 다름 아닌 어린양의 피로서 구속 받은 구원의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전에 24장로들이 불렀던 그 노래를 이제는 144,000이 부르고 있습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장성했고, 그만큼 진리 안에서 굳게 섰고, 그만큼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고, 또 진리 안에서 새롭게 된 믿음, 새롭게 된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새노래는 세상 사람들도 노래하는 일반은총으로 깨달을 수 없는 특별은총 즉 성경을 기본으로 한 구속의 노래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앉으나 서나 “아이고 아이고” 탄식입니까? 아니면 그 슬픔이 변하여 “나 자유 얻었네. 우리 복을 받았네.” 그렇게 노래하십니까? 육신의 눈으로 자신과 환경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복음 안에서 새로워진 자화상과 환경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 144,000은 복음을 이해하고 복음에 섰으며 날마다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총을 찬양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 그들은 믿음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3절 하반 절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여기 “땅에서 속량함을” 받았다란 그들이 아직 지상에서 살아가지만 땅에 속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또 속량함을 받았다고 했듯 예수의 피 공로에 굳게 선 자임과 아울러 그들의 찬양이 다름 아닌 구원의 찬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구원의 실재를 누리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영원한 영광과 함께 구원해 주신 그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 노래는 체험자가 아니면 부를 수 없는 노래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조상들의 애환에 찬 그 슬픔의 노래들을 오늘의 세대들이 아무리 부른들 그것은 자기와 상관이 없는 하나의 고전에 대한 취미나 흉내일 뿐입니다. 평생 대를 이어 노비가 되는 그 비참을 체험해 보지 않고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식을 낳아도 그 기쁨보다 그 아이의 인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훌렸습니다.
그럼 어떻게 144,000과 같이 진정한 구원의 찬양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께서 구원의 확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귀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객관적 구원을 찬양하면 주관적 구원의 체험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날마다 나를 구원하신 복음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곡을 창고에 거둬들이고 감사하는 절기로 수장절을 지켰습니다. 수장절이란 우리가 장차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어 구원의 은총을 찬양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을 다름 아니라 지금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 나라 시민이 된 우리가 지금 부를 노래입니다. 그 때 우리는 144,000과 같이 그 구원과 영광의 실재를 누리는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144,000의 영광의 무리에 들게 하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144,000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찬양대가 되어 날마다 그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생활로 144,000이 누리는 이 놀라운 은혜로 늘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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