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하는 십사만 사천 1 (계 14:1)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오늘부터는 “찬양하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말씀 드리기 전에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한 중국 여류작가가 뉴욕 거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남루한 옷차림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나약한 모습이었는데 얼굴은 온통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여류 작가는 꽃을 고르며 물었습니다. "할머니,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가요?" 그러자 할머니는 한껏 미소를 띤 얼굴로 "왜 즐겁지 않겠어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요." 그래서 작가는 "번뇌에 대해 마음 편히 생각하시는 재주가 있으신 것 같군요."
그러자 할머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픈 하루였죠. 그런데 사흘 후 부활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저는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사흘을 기다린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모든 게 정상으로 변해 있는 거예요." 할머니의 이 말은 여류 작가는 뭔가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사흘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사흘은 온전입니다. 온전히 주와 함께 죽으시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2:11-12)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믿음으로 온전히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하늘의 사람으로 왕노릇하는 하늘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줍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공로로 온전히 죽으면 오늘의 현실에서도 시온산에서 어린양 예수님과 함께 찬양하는 복된 성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십사만 사천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1.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1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십사만 사천에 대해서 이미 계 7장에서 다룬바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숫자는 그냥 수가 아니라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니까 144,000은 그냥 만들어진 숫자가 아닙니다. 144,000은 12✕12✕1000을 곱해서 나온 수입니다.
12는 12지파, 12방백, 12사도에서 볼 수 있듯이 선택의 수인데, 12는 하나님의 완전수 3에, 땅의 수 4를 곱해서 나온 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죄인을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자기 백성 삼으심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12지파, 12사도는 이 땅에서 선택 받은 신구약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구약 성도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2:18-20).
그런데 144,000은 12✕12에 1,000을 곱한 수입니다. 1,000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1,000은 셀 수 없이 많음을 의미하는 충만수입니다. 예를 들면 시68:17에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삼상18:7에도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그렇게 셀 수 없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롬11:25에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여기 충만한 수라 했는데 144,000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44,000은 어느 이단 주장처럼 그들의 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택하시고 부르신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 성도는 높이 되신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하늘의 사람으로 영광스럽게 서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그 안에서 우리도 승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144,000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선택 받은 우리들을 가리킨 이야기입니다.
2.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성도들입니다.
1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여기 어린양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속주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시온 산에 섰다는 것은 시2:6의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신 대로 죽으셨으나 다시 사시고 높이 되신 그리스도의 승리적 왕직을 가리킵니다.
시편 2편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승리를 말씀한 메시아장입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 도다”(1-3절)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시2:6의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즉 빌2:9-11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144,000이 그 승리하시고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위치에서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귀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성도는 예수와 함께 하늘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그와 함께”란 말이 나오는데 이 문구는 바울서신에서 중요한 용어인데 “그의 안에”와 같은 의미로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복음적 동의어입니다. 그러니까 144,000은 예수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섰다는 말은 진리에 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 진리에 굳게 서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함께 부활했으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된 자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144,000은 예수 믿고 복음 진리에 굳게 선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진리에만 선 것이 아닙니다.
3. 예수 안에서 얻은 승리를 믿음으로 누리는 사람입니다.
다시 1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여기 시온산에 섰다. 시온산은 온갖 고초 가운데 다윗이 왕이 되어 첫 번째 수도를 정한 곳으로 최초로 다윗의 왕적 권위가 인정된 곳입니다. 또한 시온 산은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으로 성결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시온산에 섰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승리와 거룩을 누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24:3-6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사만 사천은 겸손의 자리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의 복음을 믿음으로 누려 죄악에서 승리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서서 늘 승리의 영광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그 우리의 찬양은 "승리를 얻겠네."가 아니라 "승리를 얻었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믿음과 아울러 겸손함과 영적교제 속에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여기 십사만 사천은 7장의 인치는 면을 강조함과는 달리 666과 같은 온갖 유혹도 다 이겨낸 승리의 복음에 선 지속적인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히3:6에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한 대로 예수의 승리의 복음을 끝까지 붙잡고 나아가시면 믿음이 완성될 날이 오게 됩니다.
4. 그들은 구속의 결과로 변화된 성도들입니다.
1절 하반 절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앞의 666표를 받을 때와 같이 여기에도 이마가 나옵니다. 그러나 666과 144,000은 상반된 개념입니다. 즉 666이 죄의 인격과 삶이라면 여기 144,000은 하나님의 형상의 성화된 인격입니다.
여기 144,000의 이마에 성자와 성부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이름이란 언제나 실체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양의 이름은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은 자임을, 그리고 그 아버지 이름이란 그가 아버지 하나님을 닮았음을 암시한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은 은총은 우리를 성령 안에서 온전케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44,000은 어느 누가 아닌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 우리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144,000은 나의 영적 자화상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더욱 십자가의 공로를 받아들여 죽어지고 어떤 환경과 유혹 앞에서도 끝까지 구원과 승리를 믿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놀라운 진리를 온전히 누리시는 144,000의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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