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가 자랑인 사람   사53:4-6, 6:11-18

 

세기적 음악가 헨델(G. F. Handel)이 메시야를 작곡할 때, 본문 이사야서 53장 부분을 작곡하다가 팬을 멈추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식사시간을 알려오는 하인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있소이렇게 성령의 감동과 영감으로 작곡된 헨델의 메시야는 전 세계의 영혼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여 나를 살려주시기 위해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달려 돌아가셨음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온몸을 찢으시고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신약 본문 갈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순절 주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십자가가 자랑인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십자가가 자랑인 사람은,

 

1.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구약 본문 사53:5-6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4절에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 된 것은 그만한 죄가 있었거나,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죽음이라고 여겨 나와 무관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처형된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받을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로마서3: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삶을 이루어 가장 모범적인 사람이라 해도 윤리, 도덕 양심적으로 죄인일 뿐 아니라, 그가 누구든 나를 만드시고 지으신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씻을 수 없는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를 낳아 길러주신 육신의 부모를 외면하고 모른 체 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자기 존재의 출발조차 부인하는 불효자인 것입니다.

 

이런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과 죄악의 모든 형벌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대가로 받을 형벌은 죽음과 심판과 형벌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심판과 형벌을 십자가의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받을 심판과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아주셨으면 이제 믿는 우리에게 적용 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청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받을 형벌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2:14-16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죄의 담을 허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대가를 다 지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 맨 마지막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헬라 원어로는 '테텔레스타이'라고 하는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헬라의 도시를 발굴해 냈을 때 옛날의 세금 영수증을 발견해냈는데 거기에 바로 '테텔레스타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금을 지불했다, 지불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희생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신 고로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부터 죄 값을 다 받으시고 하나님의 책에서, 하나님의 장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빽빽한 구름이 사라진 것 같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를 그렇게 멀리 옮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진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를 대속하셨음을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지나야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선행을 많이 행해서도, 공적을 많이 세워서도, 신앙인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해서, 교회를 오래 다니고 헌금을 많이 해서, 수행과 고행을 많이 해서 얻어지는 것 아니고, 반듯이 십자가 보혈을 지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속죄 하는 십자가 보혈을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 죄의 문제를 해결 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 받을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보혈을 지나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 의롭다함을 얻은 자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 창시자가, 성자가, 의인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말한 자가 없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죄의 문제를 위해 행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만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실 수 있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하실 수 있으며, 사도들이 예수님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가서 1:22-24에서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른 어떤 교훈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생명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는 과거에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본문 갈6:14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원의 능력이 있는 바로 십자가 위에 우리 기독교는 서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을 지나 속죄가 있고,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구원 보다 더 중요한 것도, 시급한 것도 없습니다. 그 구원이 예수님의 속죄에 있습니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 인디언들을 마을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에 옥수수 밭을 만들어 놓고, 한복판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사방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점점 타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한 두 시간만 지나면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불길이 거세기 때문에 뚫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노인이 외쳤습니다. “마을에서 백 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질러라!” 인디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또 불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노인이 하는 말이기에 순종해서 불을 질렀습니다. 불탄 자리가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노인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제는 모두 그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라!” 노인은 한 번 불에 탄 자리는 두 번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을사람 모두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이미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내 안에 죄는 이미 불타 없어진 것과 같습니다. 이 주님 안에 거하면 저주의 지옥 불에서도, 어떤 정죄도, 어떤 형벌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지나 구원받은 백성으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3.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온전한 치유와 평안을 갖게 됨을 믿는 사람입니다.

 

구약 본문 사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했습니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아픔을 주님께 가지고 나와 십자가의 능력으로 치료 받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수시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보혈의 능력을 믿고 맡길 때 고쳐 주시고, 싸매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치유된 심령에 평안함을 주십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했는데, 여기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로 근본적인 평화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너무나 비싸고 귀하기에 거저 주시는 중에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 불안과 염려와 근심 대신 강 같은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신약 본문 갈6:16에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회를 담임하는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J. C. Ortiz)목사는 심한 편두통 때문에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가 기절해서 병원으로 실려 가곤 했습니다. 유명한 의사도 찾아가 보고 좋은 약도 먹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본문을 읽던 중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받았도다.”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이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 때문이 아니고 예수의 피 때문에 네가 네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너를 알고 있는 내가 용서했다. 그런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너는 누구냐? 나보다 더 거룩한 자냐?”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던 그는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자신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놀라운 평안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3주일 후, 편두통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나음을 받은 후안 카를로스 목사는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편두통으로 고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불행과 고통과 아픔이 사라지게 됨을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눅 4:18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기로 보장된 은혜요, 축복들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 온전한 치유와 참 평안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사순절 주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십자가가 자랑인 사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십자가가 자랑인 사람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지나야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온전한 치유와 평안을 갖게 됨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멘.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이사야 551-13)

 

오늘은 신년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2022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주심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올 한해도 함께 하는 가운데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드리면서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어가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연말연시에는 여러 가지로 바쁜 일정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설교 준비하느라 바쁘게 보냈습니다.

 

오늘 신년 주일에 선포되는 이 말씀은 한 해 동안 늘 기억장치에 보관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한 해를 살아가는 지혜의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권능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삶을 이끄시는 진리의 말씀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월의 암송 구절이 오늘 본문 중에 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아멘. 암송하지 않고 그냥 읽기만 해도 너무나 좋은 말씀입니다. 만약 이 말씀이 입에 착착 감기도록 암송이 되고, 간절한 기도문이 된다면, 여러분은 올 한해 아무 걱정 없으실 겁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으로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고,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해 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입에 살살 녹을 때까지 암송하고 또 암송 하십시오.

 

이사야 55장을 보면, 1절 말씀은 정말 많이 들어보신 말씀 이실 것이고, 암송구절이 있는 6절 다음의 7절은 사죄의 선언에 자주 들어 보셨던 말씀 일 것이고, 그 다음 하나님은 생각은 우리 생각다 다르다8절 말씀도 무수히 많이 들어 있었던 말씀입니다. 이렇게 자주 접해 보았던 말씀들이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 이사야 55장입니다. 전체가 다 보석과 같은 말씀 덩어리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55장의 전체 내용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맥락을 먼저 짚어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 해의 방향을 잘 잡을 수 있습니다. 1절에, “나아오라, 오라, 와서 사라는 말씀이 있고, 2절에내게 듣고 들을 지어다”, 3절에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7절에여호와께로 돌아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 듣는 것,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나아가고, 듣고, 돌아가는 것, 이것이 이사야 55장에서 말씀 하시고자 하는 권면과 인도의 핵심 주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핵심 주제의 근거가 무엇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근거가 7절 중간에 나오는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7절 마지막에 나오는 그가 너그럽게 용서 하시리라이 두 마디의 말씀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해서 2022년 신앙생활을 새롭게 결단하셔야 합니다. 방향과 목표는 하나님께 두시면서 직진으로만 나아가시고, 들으시고, 돌아가는 것에 맞추어 모든 노력과 수고를 다해야 합니다.

 

긍휼과 용서의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엎드리면 반드시 긍휼하심의 은혜가 부어지고, 용서하심의 회복이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2022년에 단 한 마디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만 기억하시고, 늘 삶 속에서 재생 시키십시오. 그러면 기회가 생기고 길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불쌍히 여겨주심)만을 간절히 간구하시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께로부터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복된 2022년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러한 이사야 55장의 주제내용, 근거들을 압축하고 압축해 낸 구절이 6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아멘. 또 그냥 읽기만 해도 은혜가 넘칩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한 해동안 크게 역사하실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기대가 됩니다. 말씀에서처럼 지금 2022년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절호의 기회입니다.

 

신앙생활은 상승곡선, 하락곡선을 그리면서 항상 요동을 칩니다. 불같이 뜨거운 열정이 있는 최고점에 도달했다가도, 어느 순간 냉랭하고 무미 건조한 최저점으로 금방내려 옵니다. 그래서 신앙은 롤러코스터와 같다는 말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지금 시점은 어떻습니까? 소망으로 대림절을 지내게 하시고, 복음의 기쁜 소식으로 우리들을 찾아오신 성탄절을 지났기 때문에, 지금이야 말로 신앙의 상승곡선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시간입니다.

 

신년예배를 드리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지금이야 말로 너희들이 나를 만날 만한 때이니 내게로 나아오라, / 지금이야 말로 내가 너희에게 가장 가까이 있을 때이니 내게 와서 들으라, / 지금이야 말로 내가 너희들에게 긍휼을 베풀 때이니 내게 죄와 불순종을 고백하고 용서함의 자비를 구하라아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아멘, 아멘입니다.

 

지금 아니면 기회는 멀어지고, 지금 아니면 1년이 그냥 흘러 갈 것이고, 지금 아니면 신앙은 하락 곡선으로 직행할 겁니다.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됩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 여기에서 결단하고, 새롭게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선포 합니다. 아멘으로 크게 응답하시는 분에게 성령의 능력이 곧바로 역사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긍휼을 근거로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 모두는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다 들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한 해를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이제 이사야 55장의 각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서 만날 만한 때, 가까이 계시는 때를 지금 당장 붙잡지 않으면 안 되는 중차대한 이유들을 알아보겠습니다.

 

 

1. 돈 문제, 먹는 문제 고민은 그만, 영혼의 양식만을 구하자!

 

우리가 가장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문제가 뭡니까? 돈 문제가 가장 클 겁니다. 지출은 늘어나는데 수입은 고만고만하고, 줄여보자니 더 이상 줄여 볼만한 것도 없고, 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통장 잔고는 없고, 돈 문제만 생각하면 속상하고 답답하실 겁니다. 돈만 풍족하면 적어도 많은 부분들이 해결되고 한결 여유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돈이 만사가 아닙니다. 돈으로 다 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다 부자로 만드셨을 겁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집으로, 직장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부족한 돈 때문에 생기는 상황들 때문에 늘 속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처지와 형편,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들을 다 살펴보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돈 문제, 먹는 문제보다 더 시급하고,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 하는 것, 영혼의 양식을 배불리 먹는 것을 먼저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1~3절을 읽어 드립니다.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아멘.

 

하나님이 나아오라, 와서 사라라고 누군가를 초청 하고 계시는데, 그 초청의 주인공들은 영혼의 목마름을 겪고 있는 자들이며, 영혼의 양식이 아닌 육체의 양식을 돈을 주고 사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의 양식은 돈이 없어도, 값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공짜로 주시는 양식입니다.

 

그런데, 공짜로 주시는 영혼의 양식을 구하고 거저 가져갈 생각은 안하면서, 늘 배고프다, 늘 살 만 한 돈이 없다라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솔직하게 우리도 거의 다 여기에 속합니다.

 

밥 먹은 뒤 한 두 시간만 지나면 생리적으로 배가 슬슬 고파집니다. 한 끼만 안 먹으면 배고프니까 말시키지 말라고 신경질을 냅니다. 금식을 해 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하루 세끼를 꼬박 금식한 당일 저녁에는 미칠 듯한 배고픔으로 잠도 못잡니다. 저도 일주일 정도 금식 해보면 3일 동안은 정말 인간의 이성과 사고로 이겨낼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미치겠다는 표현만 기억됩니다. 3일 지나면 서서히 감각이 없어져서 일주일은 물만 먹어도 버틸 수 있습니다.

 

삼시 세끼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나약한 인간입니다. 동물적 감각으로 배고픔은 수시로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영혼이 있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영혼이 메마르고, 영혼이 배부르지 못하고, 영혼이 피폐해지면, 육체의 배고픔으로 인해 신경질 나고, 미칠 것 같은 그 느낌, 그 현상이 똑같이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영혼의 배고픔, 영혼의 양식에 굶주리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경험들을 얼마나 자주 느끼십니까? 하나님이 음식 때문에 배고파 미칠 것 같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우선이 아니라 네 영혼의 배고픔을 먼저 구해라 라고 하신다면,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냉정한 하나님이실까요?

 

하나님은 이미 일용할 양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이미 다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에게 항상 영혼의 양식을 항상 배불리 먹여주시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영혼이 배고픈 자들, 영혼이 목마른 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내게로 오라, 와서 사라”, 초청의 음성을 반복해서 들려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2022년에 하나님의 이 부르심의 초청에 반드시, 신속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의 양식을 얻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3절에서처럼,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듣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양식입니다. 나아가지 않으면, 들을 귀를 열지 않으면, 들리는 데로 아멘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결코 배부름을 얻지 못하고, 결코 만족함이 없는 불쌍한 인생길을 가게 됩니다.

 

귀를 열면, 나아가면, 들으면,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그리하면 영원한 약속인 구원의 은혜를 내려 주리라명확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한 해를 설계하면서, 모든 것 다 제쳐 놓고, 내 영혼의 목마름, 내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듣고, 들려주신 말씀대로만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2022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내 생각은 그만, 하나님의 생각만을 앞세우자!

 

4, 5절은 긍휼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면 다윗으로부터 이어지는 구원의 약속과 성취를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으로, 별도의 설명은 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구절입니다.

 

6~8절 까지의 말씀을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아멘.

 

8절과 9절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두 생각과 길에 대한 차이를 비교하면서 하늘과 땅 차이를 들어서 설명하십니다.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과 땅을 비유로 말씀 하셨지만 이것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 것이지, 신과 인간의 차이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창조주이시자 유일한 존재이며 홀로 전지전능 하신 분이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자꾸 실패하고 넘어지는 이유는 욕심과 교만 때문입니다. 곧 자기 생각대로 하 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에 꽉 찬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이 아무리 많이 선포되어도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자신의 사고와 지식수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 하 기 때문에 감동도 없고 은혜도 없는 겁니다. 또한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들이 최고인 듯 내세웁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알려주신 길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방식에 취해서 하는 말들입니다.

 

2022년 올 한해 우리가 살아가면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순간이 있을 겁니다. 그때 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8절의 말씀을 떠올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잠시 멈추시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며 하나님의 생각을 구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생각과 가장 올바른 길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내 생각, 내 고집, 내 자존심, 내 자랑, 내 이익, 내 목적.... 너무나도 많은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을 앞세우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라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길로만 나아가셔서 믿음이 성장하고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어가는 2022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기도하자! 계속 기도하자! 쉬지 말고 기도하자!

 

긍휼,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1월의 암송 구절인 6절을 다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아멘.

 

하나님은 예물을 드릴 때 즐겨 내는 자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예배드릴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때 기뻐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6절 말씀에서 찾으라, 부르라라는 동사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도의 행위를 하실 때에 최고의 열정으로, 최대의 전심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실패가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를 반대로 해석해 보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성공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것이 기도의 행위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시는 초청에 응답하여 순종한다는 의미가 먼저입니다. 순종이 먼저이고 기도가 나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께 잘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가까이 오라, 들어라라는 부르심의 응답은 2022년 한 해 동안 성령의 음성으로 계속해서 우리 심령에 들려 올 겁니다. 그 때마다 우리의 자세는, “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곧 갑니다.”라고 순종으로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가 아닐지라도 라고 대답을 마친 그 순간에는 반드시 기도를 하십시오. 단 몇마디라도 좋습니다. 기도하고, 계속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다보면, 요셉과 같이 범사에 형통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 하실 것입니다.

 

기도도 긍휼에 근거하여 기도 하십시오. 제가 예를 들어서 짧은 기도문 둘을 소개합니다. 이런 식의 짧은 기도문으로 기도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 무시하고 판단하는 불손한 언행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 제 마음속의 더럽고 불결한 생각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 솟아오르는 분노와 미워하는 마음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 또 돈 걱정, 또 한 숨 쉬는 것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 게으름 피우고 핑계만 대는 간사함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허황된 욕심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하나님! 건성으로,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가식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짧지만 진심을 담은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용서하심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의 영혼을 긍휼히 여겨 주시는, 나의 구원자, 나의 왕,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예수님에게 나를 밀착시키며 기도를 마무리 하는 방법은 제가 쓰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마무리 하면 조금이나마 더 진심으로 기도하려는 자세와 습관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가 멈추어도 육체는 살아가겠지만, 기도가 멈추면 영혼은 호흡중단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과 전혀 소통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30분 기도하시고/10분 동안 잠잠히 기다리시는, 40분간의 기도는 매일 매일 습관이 되도록 해 보십시오.

 

기도에는 무한한 기쁨과 감동과 평안이 있습니다. 기도에는 우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기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이 짜릿한 감동으로 느껴집니다. 여러분 모두가 긍휼을 구하는 기도의 속에 흠뻑 젖어 보시기를 간곡하게 권면을 드립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우리 하나님의 초청의 음성에 응답하셔서, 긍휼과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구하면서, 미지의 2022년을 향해서 소망으로, 믿음으로 힘차게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2022 신년에 저희들을 불러주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초청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겨 주셔서, 영혼의 갈급함을 해소하기 위해 항상 하나님만을 찾고, 나아가고, 듣고, 순종하며 믿음의 길, 승리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 40:1-11

 

 

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그런 소망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때로 너무 아파서, 힘들어서 위로를 받고 싶은데, 주위에 자기를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없어 긴 밤을 눈물로 보낼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말로 괜찮을거야한다고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빵이 주어지고, 병든 자에게는 치유가 이루어지고, 신용불량자에게는 빚을 갚거나 탕감을 받을 때 실제적인 위로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빵은 먹어도 다시 배가 고프며, 병은 고침받은 후에 또 다시 병들고, 돈은 있다가 없어집니다. 진정한 위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이사야 선지자는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활동하였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였습니다. 앗수르는 남 유다까지 공격하여 왔다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 185천명을 전멸시킴으로 앗수르 군대가 떠나가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남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마침내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남 유다 백성들은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바벨론에 사는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바벨론 강가에 와서 시온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습니다.(137) 저들의 유일한 희망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저들의 눈에 바벨론 제국은 여전히 강력하고, 자신들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 또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깨어진 가정 속에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청소년들은 사랑과 협동보다는 내신과 수능이라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갑니다. 젊은이들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채 좌절하고 있습니다. 장년들은 어떻습니까?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입니다. 같은 일을 하고도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밖에 받지 못합니다. 노인들은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외롭게 살아갑니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벌써 12년째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국민이 집단적인 우울증, 패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는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문재인 대통령도 실토했습니다.

 

이 모든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술과 도박과 게임과 향락에 빠져 세상의 근심을 다 잊어버리고 즐기면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그렇다고 위로가 됩니까? 상처가 치유되고 아픔이 사라집니까? 잠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지만 진정한 위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부터 해결해야 할 것인지 해답을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오늘 본문 1절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 것을 주목하여 보십시다. 비록 그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외면하거나 배반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바벨론의 포로생활 중에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합니다.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2) 노역의 때 곧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났다는 이 말씀보다 더 기쁘고 큰 위로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워낙 강대국이었기에 저들이 로마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절망스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시므온이라고 하는 노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위로자를 보게 될 것이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시므온은 즉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데려온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2:25-33) 그렇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good news 입니다.(2:10-11)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천사가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1:22-23)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복이요, 참된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상처받고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우리를 위로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오셔서 지금 이 곳에 함께 계십니다. (복음성가) 왜 나면 겪는 고난이냐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위로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본문 9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라.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전하라 하였습니다. 당신의 고난의 때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믿는 자마다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전체 역사를 통하여 한 번 걸리면 100% 죽게 되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그 병은 어떤 명의(名醫), 어떤 의술로도 정복하지 못하였으며 앞으로도 고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병의 이름은 죄()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3:23)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습니다.(3:10)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6:23) 따라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에서 살게 되며, 죽은 후에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받을 때 진정한 위로가 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을 닮기 원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닿도록 진정한 태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공허한 말이나 값싼 동정심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죄와 저주로 묶인 사람들의 결박을 풀어주고, 참된 위로를 줄 것입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이 세상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찾아오시겠다고 하십니다. 직접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도록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3)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이 예언은 예수님이 오실 당시 세례 요한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을 찾아 온 유대인들이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그러자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1:22-23) 대답하였습니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1)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란 곧 회개하는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심령에는 주님이 오시지 않습니다. 회개하면 지옥같은 삶 속에서도 천국의 삶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본문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오시도록 골짜기는 돋우어지고, 가로 막힌 산과 언덕은 낮아지고, 고르지 아니한 곳은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은 평지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골짜기처럼 깊은 상처가 있고, 산과 언덕과 같이 높은 교만과 자존심, 미움과 분노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고르지 않고 모난 성격과 험한 쓴뿌리가 있다면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 심령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죄의 습관을 뽑아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길을 평탄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세상 사람들도 주께 돌아오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바리새인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23:13) 우리의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고 상처를 준다면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릴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10)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시어 악한 영을 멸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11)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로 오시어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기만 하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된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으로는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와 실망을 줄 뿐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 내가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죄 용서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제 회개하고 내게로 돌아오라. 마음속에 뿌리내린 모든 죄를 뽑아버리고 주님이 오실 길을 평탄케 하라. 그리고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소리높여 외치라.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시편 7328절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은 전파하리이다" (아멘)

 

 

 

기갈한 심령에게 /55:1-9 한경직 목사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

 

옛날이나 오늘이나 물이 귀한 가나안 지방 거리에는 대대로 물장사하는 사람들이 물을 지고 다니면서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이와 비슷한말로 외친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기갈을 느끼는 모든 인류를 향해서 외친 말씀이올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먼저 여기 목마른 자들은 어떤 이들을 가리킨 것입니까? 둘째는, 여기 물이란 말이 있고 포도주란 말이 있고 젖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또한 셋째로, 돈 없이 값없이 와서 사 먹으라고 말씀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시는 가운데 한 가지씩 생각하시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먼저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목마른 자들을 불렀습니다.목마르다하는 말은 흔히 간절한 마음의 욕망 혹은 욕구를 가리켜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인간은 사교적 욕망이 있습니다. 대부분 고독을 싫어합니다.

 

친구를 사귀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주기를 원하고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혹 사랑에 목마르다고 하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은 지적 욕망이 있습니다. 무엇을 좀 더 알고자 하고 좀 더 배우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향학열 혹은 지적 기갈이라고 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술적 욕망이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을 좀 더 아름답게 하기를 원합니다. 말도 좀 더 아름답게, 글도 좀 더 아름답게 쓰기를 힘씁니다.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소리, 좋은 음악,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를 원합니다. 집을 지어도 좀 더 아름답게, 거리를 만들어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은 것을 우리가 예술적 기갈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깊은 심령 속에는 창조적 욕망이 있습니다. 새 것을 만들려는 간절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것을 찾아보려고 힘쓰고, 새 것을 만들어 보려고, 발명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욕망 혹은 연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좀 더 잘 살고, 좀 더 아름답고 좀 더 선하게 살며, 좀 더 문화적으로 살려고 하는 욕망 혹은 갈망이 그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은 모든 욕망이 인간에게 다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 인간은 여기에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가령 어떤 분이 좋은 집을 가졌고 좋은 가정을 이루고 좋은 사업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모든 것이 뜻대로 잘되어 나아갑니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마음속에 참된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녕 인간은 이런 욕망들 이외에 이름 모를 다른 욕망이 또 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할지라도 어딘가 빈 것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의 체험인 것입니다.

 

미국의 한 실업가가 간단히 간증도 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좋은 가정과 집과 사업과 좋은 차를 가져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을 만한 생활을 하였지마는 어딘가 모르게 자기 속 깊은 어느 곳에 빈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인간이 인간 된 소외입니다. 이것을 영적 기갈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42편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우리 인간의 심령 깊은 곳에는 이 여러 가지 세속적 욕망 이외에 이와 같은 깊은 영적 욕망, 영적 기갈이 잠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잠재라고 하는 말을 쓰는 까닭은 어떤 분은 이와 같은 기갈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시인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갈은 여러 가지 다른 변태적인 욕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른 욕망만 가득히 채우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알지 못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좀 더 육신에 관한 모든 향락을 탐구하거나, 육신의 온갖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충만히 채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만족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적 방면에 심혈을 기울여서 물질을 좀 더 축적하고, 좀 더 얻고, 어떤 분들은 세상의 지위나 권세의 방면에 머리를 좀 더 기울여서 좀 더 높은 자리, 좀 더 힘 있는 권세를 얻기를 힘씁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었다고 해서 거기서 만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좀 더 지적 방면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좀 더 나은 지식과 좀 더 나은 지혜를 탐구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많은 곳에 근심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교만만 많아져서, 전도서에 있는 말과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참된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파선한 수부가 바다 위에 표류하면서 심히 목이 마르니까 기갈을 멈추기 위해 짠 바닷물을 마십니다. 바닷물은 마실수록 기갈이 더 심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이 영적 욕구를 알지 못하고 이 기갈을 채우려고 다른 방면에서 구하면 구할수록 영적 기갈은 더욱 심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있는 체험을 보면, 하나님이시여,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돌아와 안정을 얻을 때까지 내 심령 속에는 안심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이 기갈 한 심령을 멈출 길이 없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자기를 위해서 지으신 까닭으로 우리 인간이란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아 그 품속에 돌아와서 그 영혼이 안기기 전까지는 그 심령의 깊은 속에 있는 답답한 마음, 갑갑한 마음, 즉 영적 기갈을 멈출 길이 없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오기 전에는 이 영적 기갈을 멈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인간이 인간 된 까닭입니다.

 

둘째로,물로 나오라혹은포도주를 사라」「젖을 사라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모든 영적 은혜를 통괄해서 이와 같은 상징으로 우리에게 깊은 영적 진리를 표현하여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을 읽어보면, 선지자가 이상(理想)한 가운데 보니 하나님의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생수가 흘러나오기를 시작합니다. 흘러내릴수록 그 생명의 강이 점점 커집니다. 내려 갈수록 더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마침내 그 강물 속에는 여러 가지 어족이 성합니다. 그 강 죄 우편에는 아름다운 나무로 무성하게 됩니다. 가 나무는 달마다 열두 종류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인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에스겔의 이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로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압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일찍이 부르짖으시기를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네게로 와서 마시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생명 샘이 되어 영생토록 솟아나리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영적 은혜를 물에 비교해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이 있는 곳이라야 어떤 형태의 생명이든지 생명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물은 새롭게 합니다. 물은 깨끗하게 합니다. 물은 새로운 힘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 심령에 미치는 영향은 물이 지구 위에 주는 것과 같은 영향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은 죽은 가운데서 살아서 생명을 얻습니다. 더럽던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깨끗하여 집니다. 연약하고 피로하였던 심령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여기 포도주란 말을 썼습니다.포도주를 사서 마시라.고 이것은 의미가 심장(深長)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실 때에 제일 먼저 가나 혼인 잔치에 참여하셔서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기독교는 포도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새로운 복음의 종교는 심령을 즐겁게 하려는, 인간에게 참된 만족, 참된 행복, 영에 배부른 것, 흡족한 은혜를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가장 행복 된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올시다. 오는 세상에서도 가장 축복을 받을 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올시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만족한 축복이라는 의미에서 포도주라고 하는 말로 상징을 삼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젖을 사라고 하는 말을 역시 사용했습니다.

젖이야말로 모든 음료 중에 가장 영양이 많은 음료입니다. 사실 한 가지 음료만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라 이 젖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기들이 젖만 먹고삽니다. 젖만 먹고 큽니다. 사실 어른들도 다른 음식 다 없어도 우유만 계속해서 먹고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이 젖 가운데는 우리 육체에 필요한 모든 영약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전분도 있고, 지방질도 있고, 단백질도 있고, 뼈와 이를 만드는 칼슘도 있고, 피를 맑게 하고 더 힘 있게 하는 여러 가지 광물질도 있고, 사람을 자라게 하는 비타민도 많은, 말하자면 이 한 가지 음료, 즉 젖 가운데는 우리 육신에 필요한 모든 영양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는 이 같은 복음 한 가지 밖에 없지마는, 이 복음 가운데는 우리 영적 영양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 가운데 인간의 가장 높은 지력을 만족시킬 만한 모든 아름다움이 여기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는 영적 생활에 필요한 영양소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목마른 자들은 물에 나와서 물을 마시고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시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리는 것은 여기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기는 사라고 하면서도 돈 없이 값없이 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돈 없는 자도 오라는 것입니다.

 

돈 없이 값없이 와서 젖과 포도주를 사서 마시라.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도 조금만 생각하면 과히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는 이 큰 축복은 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에 살 때에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살 줄 그렇게 압니다.

 

그러나 사실 깊이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특별히 살 수 없는 것은 이 신령한 축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은과 금이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사람의 지혜나 지식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그 지혜, 그 지식 얼마나 귀합니까? 말하자면 심리적 금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축복을 사지는 못합니다. 사실 이 축복은 세상의 어떤 높은 지위를 가지고도 살 수 없고, 아무리 권세가 많을지라도 그 권세를 가지고도 살수가 없습니다.

 

또 무슨 공덕, 선행, 우리의 행실을 착하게 하고, 우리가 무슨 좋은 사업을 많이 해서 이런 공덕과 선행을 가지고 이 축복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람 보기에 선해서 성자란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는 다 더러운 옷 밖에는 입을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선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을 다 했지만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선행으로나 사람의 공덕으로도 이 축복을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이가 있어서나는 지식이 있으니, 나는 돈이 있으니, 나는 이와 같은 선행이 있으니, 나는 공덕이 있으니, 내가 이 축복을 살 수 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이올시다.

 

값없이 사라는 말은 온전히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고, 내 무엇으로 조금도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깨닫고, 온전히 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겸손히 이 은혜를 그냥 받는 그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돈으로 어떤 값을 주고도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값없이 사라고 했는데 사실 그것도 뜻이 있습니다. 사실 이 은혜는 값이 없습니다. 사실 웬만한 것, 작은 것에는 값을 매길 수 있지만 아주 엄청난 것에 값을 매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울에 땅 한 평에 어떤 비싼 곳에는 七十만 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작은 땅값은 매길 수 있어요. 그러나 큰 것을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이 지구덩이 값 내본 사람이 있습니까? 저 태양 값이 얼마나 가는지, 그 값 내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늘 마시고 사는 이 공기를 어느 누구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여름마다 하나님께서 풍족히 주시는 이 비를 어디 누구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은 값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의 심령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는 십자가의 공로를 값 매길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평가할 수 있습니까? 값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 없이 값없이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올시다.

 

그러나 나는 목이 마릅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내 기갈 한 것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에게는 그냥 주십니다. 값없이 돈 없이 그저 신령한 이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 그러면 그냥 준다면서 또 왜 산다는 말을 썼습니까? 그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냥 주면 그냥 준다고 하지, 왜 산다고 하는 말을 썼습니까? 조금 생각해보면, 아마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산 것은 자기 것처럼 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그것은 내가 샀으니 내 것이야. 남이 그냥 준 것은 아니지.이것은 내 것이 꼭 되었는지 분명하지 못한 생각이 더러 들어 올 때도 있지만 내가 산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내가 샀으니 이것은 내 집이야. 이 밭도 내가 샀으니 내 것이지.하고 샀다고 하는 관념이 들어가는 데는 내 것이라고 하는 관념이 있습니다.

 

아마 그 뜻이 여기 포함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냥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지마는 실상은 하나님께서 알기를 원하는 것은네가 산 줄로 생각해라, 이것이 꼭 네 것으로 알아라.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은혜를 받는 사람은 내 것으로 압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여호와는 나의 방패(防牌)시오, 여호와는 나의 피란처(避亂處)시오, 여호와는 나의 산성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救主)시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시오, 하늘의 나라는 내 아버지의 집이오, 내 집입니다.

 

누구든지 온전히 자기의 영적 기갈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겸손히 이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아주 주어서 그 사람의 것으로 만듭니다. 내 구주가 됩니다. 내 하나님이 됩니다. 내 천당이 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빛이오, 나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축복을 다 받으셨습니까?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이와 같은 생명 강이 흐르는데 아직까지도 기갈 한 심령, 그대로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얼마나 가련합니까?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어떤 사람 하나라도 기갈 한 심령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없이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근심하며 걱정하며 염려하며 민방하고 답답한 가운데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왜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로 비극이 생기고, 여러 가지로 참혹한 뉴스가 나타나고, 매일 자살하는 사람이 몇 건이나 생기고, 여러 가지로 추악한 범죄가 일어납니까? 요컨대, 그 심령 속에 기갈이 있습니다.

 

이 기갈에 만족을 받지 못했습니다. 생명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생명수를 찾아서 원만한 생활, 만족한 생활, 흡족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늘 아침 한 분이라도 기갈 한 심령을 품고 나온 이가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 시간에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하나님이시여, 내 심령은 목마릅니다. 나는 아무 무슨 구할 공로가 없습니다. 그저 빈 손 들고 아버지 앞에 나왔으니 생명수로써 나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와 같은 심령 위에 새로운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기도하십시다.

내게 주신 위대한 사랑 이사야 43:1~7

 

여러분은 세상을 살기 힘들고 어려울 때 무엇으로 극복하시나요?

 

사람이 정말 살기 힘들고 어려울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면,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사랑 받고 있나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주님이 하신 말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뭘까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랑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으로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랑 속에서 태어납니다. 부모의 사랑 속에서 태어나고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자기가 사랑받지 못한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 속에서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나요? 가족입니까? 친구입니까?

 

여러분은 그들의 사랑에 만족합니까? 혹시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고 걱정 마세요.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크고 더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헤아리기 힘든 놀라운 사랑이고 풍성하기 그지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감동적인 희생이 있습니다. 누구의 사랑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그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사랑을 받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를 자세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믿어도 됩니다. 그 사랑은 참되고 그 사랑은 완전하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 고백입니다.

 

이사야 성경은 모두 66장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용적으로 전 후반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39장이고 후반부는 27장입니다. 참 신기하죠? 내용도 그렇습니다. 1장부터 39장까지 경고하시고 책망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구약적인 냄새가 농후합니다. 그러나 40장부터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돌아올 것을 말씀합니다. 신약적인 냄새가 풀풀 납니다. 그중에 40~43장까지는 마치 신약의 복음서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오늘 우리는 43장을 보고 있습니다. 43장은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내용입니다. 그 사랑을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을 살펴보면 여실히 들어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1. 창조주가 피조물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1절을 보세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왜 이렇게 부르실까요? 야곱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 전의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후 받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야곱인 우리도 사랑하시고 이스라엘인 우리도 사랑하십니다.

 

잘 살펴보면 내가라는 표현이 12라는 표현이 24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당신을 누구로 소개합니까? “나를 창조하신 여호와”, “나를 지으신 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분은 나를 창조하시고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나를 구속하였고 지명하여 불렀고 하나님 것이라고 소유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救贖(구속)은 수갑 채우는 拘束(구속)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값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구기에 창조되고 구속되는 그런 엄청난 사랑을 받습니까? 그럴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그게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저는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을 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이 야곱은 간사하고 욕심이 많고 좀 야비하기까지 합니다. 때로 비굴하기도 하고 때로 이기적입니다.

 

형을 피해 20년간 외삼촌 집에서 살다가 돌아옵니다. 그때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군사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모든 가족과 짐승, 수하들을 먼저 강 건너 가게하고 자기는 건너지 않습니다.

 

왜죠? 부인과 자식은 다 죽어도 자기는 살아남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와 씨름합니다. 그래서 그를 변화시킵니다. 그리고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바꾸어줍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이유는 그가 나를 창조하셨고 택하시고 지명하여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가를 지불하고 구속하였기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런데 정말 안 어울리는 사랑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인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것도 인간 쪽은 별로 사랑하는 것 같지 않는데 창조주가 일방적으로 사랑한다고 외치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사랑입니다.

 

 

 

2. 완벽한 보호자의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보호가 아주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세요.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물이고 불입니다. 그런데 이 물과 불은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입니다. 물 없이 며칠 버틸까요? 불이 없이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물이 없다... 난리 나죠? 불이 없다... 이것도 난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물과 불이 넘치면, 통제가 안 되면 그것처럼 인간에게 위험한 존재도 없습니다. 홍수 수해... 수많은 인명이 죽습니다. 화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재앙은 이 물과 불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적절하게 통제해야 합니다. 통제가 안 되면 재앙이고 심판입니다.

 

노아홍수, 물로 심판한 재앙입니다. 소돔 고모라, 불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마지막 심판도 불로 심판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런 위험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이 물처럼, 불처럼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인데 그때도 함께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재앙을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분의 사랑은 나와 늘 함께 하며 지켜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고 염려할 것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놀다가 엄마가 없다는 것을 알면 난리가 나죠? 왜요? 불안한 것입니다. 나를 지키고 돌보는 분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소리를 지르고 엄마를 찾습니다. 그때 소리만 들려도 불안이 사라집니다. “엄마 여기 있다이 소리만 들어도 모든 불안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는 소리를 듣고도 불안해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수없이 약속하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도 불안해합니다. 왜요?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에 안보이니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보호자는 우리와 함께함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보호해주시는 것일까요? 3절이 해답입니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여기 대저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토록 우리를 보호하려 하느냐?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값을 치렀고 우리를 구하려고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 보호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식을 왜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식을 내 자식으로 알기 때문이고 그 자식을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식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보다 더한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를 보배처럼 존귀하게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나를 대할 때 어떤 시각으로 대하느냐? 그게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있습니다. 4절을 보세요.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보이기에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암시하는 것은 실제로는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가 아니란 의미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대신 내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실제 역사적인 사건으로 성취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다른 백성들을 대신하게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는 이스라엘이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또 실제로는 하나님 앞에 죄악을 범한 백성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고 그들을 보배처럼 존귀하게 여기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조건이나 형편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기에 사랑하십니다. 그저 자격 없지만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못났어도 내 새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7절을 보세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가 누구라고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자입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지느냐?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겉보기와 다른 자 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 즉 하나님 백성, 하나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단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창조 목적이 분명한 자입니다. 왜 만드셨나?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그 목적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잘났고 복이 많아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받은 것이 많다는 것은 잘 먹고 잘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사명이 많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치 않으면 주신이가 어찌 하겠습니까? 한방에 거두어 가시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자은 것 하나에 손을 살짝만 대도 꼼짝 못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기에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주셨을 때 잘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지음 받은 목적, 맡겨주신 목적대로 살아야 하고 써야 합니다. 그래서 내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야 합니다. 아멘?

 

성도 여러분!

이런 사랑을 받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아무리 힘들게 하고 넘어트리려 해도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 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2) 회복의 약속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 회복의 은혜를 빼앗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회복을 믿으세요. 남편이 돌아오고 자녀들이 돌아올 것을 믿으세요. 다만 나는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려운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 사명이 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 사명이 뭔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방향도 방법도 정해지는 것입니다.

 

내 사명이 뭔가를 아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환경과 위치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도구가 되면 됩니다. 직장을 통해서, 그리고 주님이 주신 일터를 통해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재능을 주셨나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세요. 재물을 많이 주셨나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방법을 찾으세요. 그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엄청난 도구로 쓰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알고 살 때 우리는 달라집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 사랑을 받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우리는 분명 변화됩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그 이름을 믿는 자 사 9:6-7, 4:35-41

 

사람들은 이름 외에 그를 부르는 호나 다른 별명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름 외에 불리어지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정확하게 예언하면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이름 외에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는 5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기묘자는 히브리어로 "펠레"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성을 초월한 신기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기묘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탄생부터가 기묘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태어나신 인간이 아니라 성령님이 마리아에게 임하여 동정녀 마리아와 성령님 사이에서 태어난 기묘자이십니다. 물위로 걸으실 수 있는 기묘자이셨습니다. 52어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게 하신 기묘자였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매 잠잠해 지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기묘자 이십니다. 더욱 기묘한 것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기묘한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또 모사라고 했는데, 모사란 히브리어로 요에츠라고 하는데 이는 "유능한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유능한 상담자란 실력을 갖추고 있어 그에게 상담하러 온 사람의 문제를 다 해결시켜 줄 수 있어야 유능하고 좋은 상담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오든지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38년이나 중풍 병으로 고통당하던 사람이,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나 해결의 길이 없었던 12년이나 혈루 병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이, 장정들도 제어할 수 없는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도,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도 모사인신 주님을 만나 해결함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이름을 가진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기이하고 놀라운 은총이 따르게 되는데, 대강절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놀라운 그 이름을 믿는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놀라운 그 이름을 믿는 자는,

 

1.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도 허무하게 33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무리들은 그 일로 심히 낙심이 되고, 모든 기대와 소망이 주님의 죽으심을 보면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스스로 선택하신 일이었습니다. 주님을 죽이고자한 종교 지도자들 때문도 아니고, 그를 배신한 가룟 유다 때문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유대인들 때문도, 주님께 사형 언도를 내린 빌라도 때문도, 주님의 처형을 집행한 군인들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스스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선택 하셨습니다. 이 비밀을 주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은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아버지께서 받았노라"(10:17-18)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의 죽으심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나 세례 요한의 말대로 세상 죄를 지고 대속하기 위한 죽으심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온 인류의 죄를 씻는 죽음이 기묘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 예고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죽은 후 사흘 후에 다시 살 것도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곧 잊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 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부활은 사망을 이기신 승리요, 4천 년간 마귀가 휘두르는 사망권세를 빼앗아버린 기묘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 끝나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셔서 모든 믿는 자들이 주님처럼 부활할 것을 친히 가르쳐 주신 기묘한 사건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최고의 확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죽여서 무덤에 장사했으나 지상의 어떤 무덤도 그를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제 삼 일째 되던 날, 살아나리라고 예언하셨던 대로 무덤에서 걸어 나와 영원히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길이요 생명이심을 증명했습니다. 또 그의 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였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만은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흉내 낼 수 없는 기묘한 사건입니다. 해리 린멜 박사가 고관인 모스렘교도와 주고받은 말입니다. 해리 린멜 -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음을 믿는다.’ 모스렘 교도 - ‘우리도 그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 ‘창조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 - ‘우리도 그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 - ‘우리도 코란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 - ‘우리도 모하메드를 통해서 계시한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 ‘예수님을 믿는 자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다.’ 모슬렘교도 - ‘우리도 모하메드가 그 백성을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 - ‘우리는 그 선지자의 죽은 후에 관해서는 모른다.’ 옳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유일한 분입니다. *모하메드도, *공자도 *석가모니도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그 누구도 모두 그 무덤이 있으나 예수님의 무덤 앞에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고 한 천사의 말을 기억하게 됩니다.

 

부활의 주께서 제자들과 믿는 무리들을 만나 주심으로 그들의 잠자던 믿음이 다시 깨어나 확고한 신앙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살다가 하늘 소망을 가진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부활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환난 중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평강의 왕입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산 샬롬이라고 하는데, 이는 "평강을 더하여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더하여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1967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각국의 정신과 의사들이 모여서 "마음의 평화는 어디서 오나?"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첫 번째로 등장한 H. M. Rome 박사는 "마음속에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평화를 누릴 수 있다"라는 주제로 연설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등장한 H. W. Jan박사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희망을 가질 때 평화를 누릴 수 있다"라고 연설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나온 C. A. Segvin박사는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세미나의 결론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있어야 평화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데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는 것이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결국 평화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2:10-14).

 

신약 본문 막 4:39예수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 하라 고요 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자연도 복종하고, 귀신도 떠나가고, 질병도 떠나가고, 죄도 사 하시면 고, 죽은 자도 살아나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에 이사야는 그 분이 하시고자 하시면 못 하실 게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분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평안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처음 중국에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범선을 타고 바다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배가 그만 식인종이 사는 섬 해안에 멈추었고 뱃길을 바꿀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배는 물결에 밀러 섬 가까이 다가가고 모두들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선장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다가와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배 밑창으로 기도하기 위해 내려가기 전에 선장에게 좋습니다. 저는 기도하지요 그럼 당신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도록 돛을 올리시오그때 선장이 당황스런 얼굴로 아니 바람 한 점 없는데 돛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선원들의 웃음꺼리가 되기 싫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당신이 돛을 올리지 않는다면 나도 기도하지 않겠소! 라고 버티자 하는 수 없이 선장은 돛을 올렸고 선교사님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후에 선원들이 기도하는 허드슨 테일러 배 밑창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님, 아직도 바람을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그만 기도하시지요? 배가 이미 섬을 벗어났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구하되 준비된 자들에게 응답하십니다. 우리 모두 기묘하시고, 전능하신 주님이 주시는 참 평인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재림의 때에도 심판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 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분만이 아니라 언젠가는 다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구약에 1.217, 신약에 318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초림하신 주님은, 예언대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그 어떤 세력도 주님의 재림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알곡과 쭉정이를, 양과 염소를, 오른편에 설자와 왼편에 설자를 분명하게 구별하실 것입니다. 즉 천국과 지옥으로 갈 사람들을 구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믿고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재림 때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이 심판주가 되시니 뭐가 두렵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히브리어로 "아바 아드"라고 하는데 이는 "영생의 근본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영생의 근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코미디언 클러워는 자기가 아는 한 부인의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16명의 자녀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집에 불이 났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찾았는데 한 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겨우 찾아내고 보니 건축공사장을 시커멓게 칠하는 페인트가 들어 있는 통에 빠져 있었습니다. 꺼내고 보니 완전히 시커멓게 되었습니다. 겨우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말했습니다. "너를 씻기는 것보다 차라리 한 명 더 낳는 것이 쉽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만 아니라 속까지 죄로 물든 인간일지라도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존하시는 분이시기에 영생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그의 은총이요,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기묘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어려운 때에 늘 깨어 있는 담대한 신앙으로 무장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대강절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놀라운 그 이름을 믿는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놀라운 그 이름을 믿는 자는,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재림의 때에도 심판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멘.

 

심지가 견고한 신앙 사26:1-7,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신앙의 심지가 연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에 다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신앙생활을 그만두고, 기도하다 응답이 없으면 중단하고, 봉사도 형편 때문에, 사람 때문에 그만둡니다. 자신의 처한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흔들리며 신앙의 기복이 심합니다.

 

그런가 하면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상관없이 심지가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이 신앙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초에 심지가 없으면 양초는 쓸모가 없습니다. 또한 양초 밑에까지 심지가 있지 않다면 양초는 타다가 꺼질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하지 못하여 쉽게 뽑힌다면 양초는 수명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 양초의 심지가 중요한 것처럼 사람마다 그 속에 박혀 있는 신앙의 심지가 중요합니다.

 

구약 본문 3절 말씀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의 심지가 견고한 자는 이란 원어 예체르싸무크라는 말은 확고부동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세상의 어떠한 시련의 비바람이 불지라도, 어떠한 병마가 덮칠지라도, 오해와 상처를 받는다 할지라도 모든 상황에 개의치 않는 완전하게 변함이 없이 고정된 상태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린 딸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주께서 여러 면으로 여인을 시험했지만 그녀는 심지가 견고한 신안인의 모습으로 도중에 포기하거나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여 응답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심지가 견고한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심지가 견고한 신앙은,

 

 

 

1.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구약 본문 사20: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시로다.”했습니다. 여기의 반석추르인데 광야 가운데 있는 크고 견고한 바위를 가리킵니다. 광야에 있는 반석은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들짐승의 갑작스러운 공격에서 피할 수 있고, 뜨거운 태양열로부터 반석의 그늘아래 몸을 숨길 수 있으며, 노곤한 몸을 눕혀 쉴 수 있는 곳이 반석입니다. ‘하나님이 반석이시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은 신뢰하는 자들에게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요동치 않게 하는 쉼터요, 안식처이며,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반석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한 결 같이 도움과 보호가 되신다는 표현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영원한 반석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으로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징계를 받았습니다.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심지가 견고한 까닭에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 다니엘, 모세, 다윗, , 베드로, 바울, 스데반 같은 인물들은 환난과 박해 중에서도 심지가 견고한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믿음의 승리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민일보 창간 20주년 기획 칼럼으로 구호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이란 주제로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씨가 세계의 오지에서 땀과 눈물로 체험한 이야기들입니다.

 

한번은 에이즈가 창궐하고 가뭄이 극심한 아프리카 잠비아 지역을 지날 때였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벽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녀는 호기심에 들어가 보니 스무 살 전후의 청년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얼굴이며 목이며 양손에 부스럼이 가득한 것이 에이즈 말기 환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읽고 있던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집안의 벽마다 온통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는 예수 믿는 성실한 교사였는데 오토바이 사고로 수술을 받다가 수혈이 잘못되어 에이즈에 걸렸다고 합니다. “성경 어디를 읽고 있었어요?” 한비야가 물었습니다. “욥기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 알고 싶어섭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고통도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원망은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시지요. 지금은 솔직히 잘 몰라요. 하나님이 왜 에이즈에 걸리게 하셨는지?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고통 중에 있는 저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욥처럼 말입니다.” 한비야씨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시지요.’라는 청년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날 저녁 청년이 가졌던 감사의 마음을 생각하며 기도하였습니다.우리가 고통 가운데도 감사할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심지가 견고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장애물을 극복하는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는 나아가는 길에 어떠한 장애물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신약 본문 막 7:25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 딸을 고치실 수 있는 분으로 마음에 확신했고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때 조금도 의심 하는 마음을 같지 않고 지체함 없이 즉시 예수님께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을 만나 문제가 해결되기까지에는 많은 난관과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유대인들이 상종하기도 싫어하는 이방인이었고, 당시 사람들로부터 업수히여김을 받았던 여인이었으며, 귀신들린 딸을 둔 것이 예수님께로 나가는데 내적인 장애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내적인 장애를 극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 여인은 용기 있게 주님께 달려가 부르짖었습니다. 본문 마 15: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했습니다.

 

*다음의 장애물은 예수님의 무관심과 제자들의 방해였습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15: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했습니다. 여인은 갈급한 심령으로 부르짖는데 주님은 묵묵부답입니다. 무관심의 장애물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기도하는 바가 속히 응답 되지 않으면 답답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낙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멈추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억울한 일을 호소해도 무시하고 외면하는 재판관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끈질기게 매달려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딱한 여인의 호소를 들어달라고 주님께 부탁드린 것이 아니라, 소리 지르며 귀찮게 하는 여인을 돌려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그녀에게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엽은 여인을 개 취급 하며 냉정하게 그 여인의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7: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오직 예수님께 기대하고 믿음으로 나왔는데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너무 충격적이고, 모멸스러운 거절이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불쌍히 여겨줄 줄로 기대했는데 도리어 그 여인의 아픈 곳을 강하게 찔렀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대들고 따지면서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7:28) 사람의 마음의 생각까지 아시는 주님께서 이 여인의 마음을 아시고 일부러 모르는 것처럼 대 하시고, 모욕적인 언사까지 사용하시며 여인을 시험 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여인은 놀랍게도 겸손하게 자신을 개와 같은 비천한 자로 여기면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15:28에 보면 예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은 자신을 개털 장로라고 부른다 합니다. 그분은 장군, 장관 출신이었습니다. 자존심도 강할 뿐 아니라 대접만 받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교만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지 못했습니다. 개털로 만든 면류관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도 빼앗길까봐 얼른 집어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니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창피한지 벗어버리려고 하는데 벗겨지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잠을 깼다고 합니다. 그 후로 철저히 회개하고 겸손한 장로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장애물을 극복하는 심지가 견고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구원의 은총과 참 평안을 누리는 신앙입니다.

 

구약 본문 1절에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했습니다. 여기의 구원은 원어로 예슈아인데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벽외벽은 겹겹이 둘러싸 성은 대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은 심지가 견고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의 견고한 믿음의 결과로 주님의 칭찬을 받고, 응답을 받아 딸이 귀신 들려 고통 받는 데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또 구약 본문 3절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했습니다. 여기의 평강하고 평강하도록은 원어로 샬롬, 샬롬인데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마음의 상태을 의미합니다.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상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지배 안에 머물 때에 누리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심지가 견고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귀신들려 사람 구실을 못하고 있는데, 세상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있다 한들 마음에 평강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 앞에 나와 문제의 딸이 귀신에 사로잡혀 시달리다가 귀신이 떠나가고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평안하며 기쁘고 감격스럽겠습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다시 빼앗아 가는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평안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는 기쁨과 평안을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요 평강입니다.

 

인도의 날라마람 (Nallamalam)의 작은 교회에서 선교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저분한 옷을 입은 한 여인이 교회에 들어 왔습니다. 남루한 옷 냄새가 교인들에게 방해가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선교사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왜 이런 옷차림으로 예배에 참석하였습니까? 다른 옷은 없나요?” 여인이 대답합니다. “이 옷은 내가 가진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입니다.”

 

측은한 생각이 들은 선교사가 그렇게도 가난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여인이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많은 보석과 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권력자가 가로채어 가버렸습니다. 그는 예수를 버리면 돈과 보석을 다시 돌려준다고 말합니다.”

 

선교사가 그럼 그렇게 해서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여인이 대답합니다.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를 모시고 사는 것이 많은 재물을 가진 불신자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평안합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남루한 옷을 입어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극심한 가난 중에서도 마음에 평강이 충만했습니다.세상 조건 때문에 오는 평안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병이 들거나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게 되면 그 평안은 무너지고 말지만, 주님 주시는 참 평강을 소유한 자는 죽음 앞에서 더 큰 소망의 위로를 받으며 두려움 없이 참 평강 가운데 주께서 예비하신 나라에 들어가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심지가 견고한 신앙으로 구원의 은총과 참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심지가 견고한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신앙은,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장애물을 극복하는 신앙입니다.

 

.구원의 은총과 참 평안을 누리는 신앙입니다.아멘.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 43:1-7, 고후4:7-10

어느 마을에서 한 소년이 얼굴에 비지땀을 흘리면서 하루 종일 걸려 조각칼을 가지고 나무를 깎아서 정성스럽게 멋진 나무 조각 배를 만들었습니다. 소년은 기쁜 마음으로 자기가 만든 나무배를 가지고 동네 앞 개울가로 뛰어갔습니다. 개울에다가 자기가 만든 나무배를 띄웠습니다. 배는 개울물을 따라서 잘 떠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아차 하는 순간에 저만큼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허탈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 소년은 장터에 나가 이곳, 저곳 둘러보다 자기가 만들었던 나무배가 어느 상점의 진열대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상점 주인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배이니 돌려 달라고 요구 했습니다. 그때 주인은 그 배는 자기가 돈을 주고 가게에 사다 놓았기 때문에 그냥은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년이 아무리 애원을 해도 들어주지를 않자 잠시 생각한 후 집으로 뛰어가 책상 위에 있는 돼지저금통을 깨뜨려서 그 속에 있는 모든 동전을 자기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상점 주인에게로 달려왔습니다. 상점 주인은 그것을 보고 비록 돈은 조금 모자라지만 소년이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소년은 기뻐하며 자기가 만든 나무배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는 내 것이야. 너는 두 번이나 내 것이 된 거야. 첫째는 내가 너를 만들어서 내 것이고, 두 번째로는 내가 너를 돈을 주고 샀으니까 내 것이야. 이제는 절대로 너를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 너는 내 것이다. 첫째로 내가 너를 창조했기 때문에 너는 내 것이고, 두 번째로는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피로 값 주고 너를 샀기 때문에 너는 두 번이나 내 것이 되었다. 이제는 정녕 너와 함께하리라. 다시는 너를 놓치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은,

 

1.보배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입니다.

신약 본문 고후4:7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인생을 질그릇으로 비유했습니다. 질그릇이라는 것은 진흙으로 빚어진 하나의 값싼 그릇을 의미합니다. 자기 존재를 생각할 때 비천한 존재로 보는 의미에서 질그릇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죄짓고 타락한 존재요, 하나님을 반역한 존재요, 병들기 쉬운 존재요, 사소한 일에도 낙심하고 좌절하기 쉬운 존재요, 호흡이 멈추면 그만인 존재요, 부딪쳐 금이 가고, 상처가 나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이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담고 있기에 존귀한 존재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 분이요, 사망을 이기신 분이요, 죄에서 해방을 주시는 분이요, 영생의 소망을 주시는 분이요, 세상을 이기신 권세 있는 분이요, 평강의 왕이신 우리의 보배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5:12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보배이신 예수님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하든지 승리할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8-9절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으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토굴 속에서 은밀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황제 앞에 서서 최후의 심문을 받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포기하라 그대의 인격과 그대의 인간됨을 보아서 내가 너에게 용서하기를 원하노라할 때 그는 저는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나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황제는 이렇게 외칩니다. “저자를 극악무도한 죄인들의 감방 속에 처넣어라옆에서 그를 다스리고 있는 한 형제가 말합니다. “폐하여, 저 자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더 좋아하옵니다.” “왜 그러는가” “극악무도한 강도와 함께 감옥에 들어갈 때 그들을 전도해서 회개시켜 그리스도인 만드는 것을 하늘의 상을 받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 자를 굶겨라” “폐하여, 저자들은 굶기면 금식기도에 들어간다고 삼층천 신비한 환상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저들은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목을 쳐라” “폐하여, 저자들은 순교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목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목을 치면 스데반과 같이 된다고 말하고 목을 치면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열렸다고 웃으면서 찬송하면서 천당에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저들은 손댈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치면치는 대로 하늘의 상을 받는다고 기뻐하옵니다.”

그때 황제가 묻습니다. “어찌해서 그렇단 말이냐?” “폐하여, 우리가 볼 수 없는 보화를 저들은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 연약한 그릇 속에 보화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 보화가 뭐냐?”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 놀라운 일이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성도 속에는 이런 값진 보화를 가지고 있기에 무슨 일을 만나도 망하지 않고 승리하는 자가 됨을 믿고 존귀한 자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사람입니다.

구약 본문 사43:7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 나를 지명하여 불러내신 목적, 나를 하나님의 소유 삼으신 목적은 하늘에 속한 하늘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했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했으며, ‘먹든 마시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엡1:5-6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 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4절에도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 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 하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성도가 이처럼 찬송으로, 전도로, 선행으로, 위로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로,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로, 기도 하는 일로, 사랑의 섬김으로,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르는 고난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 때 하나님은 그를 더욱 사랑 하시고 보배처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를 눈동자처럼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부흥사 무디 목사의 유명한 찬송 인도자였던 생키가 여객선을 타고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신문에서 그의 사진을 자주 본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 분의 작곡인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여를 불러달라고 졸랐습니다.

생키가 그 찬송을 부르기를 마치자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생키 선생님, 남북전쟁 당시 북군으로 참전한 일이 있습니까?” “,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남군으로 참전했는데 당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북군의 파란 군복을 입고 있었고 그 날 밤이 만월이었는데 제 사정거리 안에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겨냥해 방아쇠를 막 당기려고 하는데 당신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밤에 부른 바로 그 찬송이었지요. 그런데 제 어머니께서 그 찬송을 자주 부르셨거든요.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자 저는 도저히 당신을 쏠 수가 없었습니다.”

생키는 너무 감격하여 자기 옛날의 적을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방패시라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니 그가 나를 도왔도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크게 기뻐하고 내가 내 노래로 그를 찬양 하나이다’(시편 28:7).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하늘 기업의 상속자들입니다. 주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구속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이 사랑 하시고 보배처럼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무슨 일을 하든지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존귀 하게 되고, 나의 언행심사를 통해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성도로 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하나님께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이웃으로부터, 국민들로부터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귀한 것은 창조주가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는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자야 말로 가장 복되고 행복한 자입니다. 아무리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자라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한 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귀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면 풍파 많은 세상에서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고, 보호를 받는 자가 됩니다. 본문 사43: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않을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했습니다. 5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한 후 애굽의 군사들의 추격을 받을 때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는 기적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라굴로 풍랑에 휘몰려 사경을 헤매었으나 하나님께서 바울과 276명을 모두 멜리데라는 섬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금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 하다가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으로 던져졌지만 머리카락 하나 타지도 않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은 살게 하셨습니다.(3:27).

남한에 간첩으로 내려 왔다가 전향한 김신조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본래 북한의 124군부대 소속의 특수요원이었습니다. 김신조와 그의 일당 수십 명이 순식간에 38선을 넘었습니다. 총알같이 내려와서 청와대를 급습해서 대통령을 암살하고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망상을 가지고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실패한 까닭은 서울 북방 20Km 정도 떨어진 퇴계원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거기서 나무꾼 형제를 만났습니다. 서로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김신조 일당은 그 나무꾼 형제를 죽이려고 했으나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안심시키려고 자기들은 군부대 요원으로서 특수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나무꾼 형제가 능청스럽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무들, 잘 오셨습니다. 배가 고파서 못살겠습니다. 어서 빨리 우리를 해방시켜 주세요." 그 소리를 듣고 김신조 일당은 "이 사람들이 우리를 환영해 주는구나. 우리 편이구나"고 생각을 하고서는 그 나무꾼 형제들에게 입당서약을 하게하고는 공산당에 입당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임무를 다 끝마치고 돌아올 때에 당신들을 영웅으로 추대할 테니까 어렵더라도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오.

그 즉시 나무꾼 형제가 내려가서 신고할 줄이야 저들이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저들은 국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최후까지 발악하다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살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행스럽게 김신조는 바위틈 사이에 숨어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바위틈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수훈련을 받은 정예부대 수십 명이 보잘것없는 나무꾼 두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 남한을 이겨낼 수가 있을 것인가?" 도저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손 들고 나와 자수해서 광명을 찾게 되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김신조는 그때 그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고 놀라웠습니다. 그 나무꾼 형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물어 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당신들은 그 극한 위기 상황 속에서 그렇게도 태연하게 우리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게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랬더니 나무꾼 형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나가는 성도인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극한 상황 속에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김신조가 감동을 하고, 그 길로 교회를 찾아가서 등록했습니다. 그 후 믿음 좋은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그 뒤에 신앙생활을 잘해서 집사가 되고 그 후로 지금은 목사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그를 보배처럼 존귀하게 여기시고 보호해 주심을 믿는 성도로 삽시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은,

 

.보배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사람입니다. 아멘.

 


주님 맞을 준비 사64:1-9, 13:1-13

 

어느 신학교에서 한 젊은이가 교수에게 찾아가 질문했습니다. "교수님, 사람이 죽기 얼마 전쯤이면 내세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야 몇 시간의 여유만 있어도 충분하겠지" 교수는 쉬운 듯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그거 참 좋군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자기 앞에 놓여 진 수십 년의 세월을 만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수실을 막 나가려 할 때 그 교수가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언제쯤 죽을 것인지 알고 있나?" "그거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젊은이는 마음 내키지 않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이에,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준비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모든 사람들은 자신도 언젠가는 죽게 되리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 죽게 될는지, 그 때와 그 시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그 기대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후의 일,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주님 맞을 준비는 그 기회를 잃기 전에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대림절 셋 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 맞을 준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모든 일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인생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나, 하나 준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준비가 너무 힘들어 고달파 하면서도 소망 중에 인내하며 준비합니다. 신앙생활도 준비가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헌금 할 때 준비해서 하라고 권면합니다. 예배도 준비된 예배가 되어야 주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평소 기도로 준비한 자는 갑자기 어려움이 닥쳐도 견고한 믿음으로 담대히 어려움을 극복하는 자가 됩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연단된 경건한 신앙은 어떤 유혹이나 어려움이 와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한 마을이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시냇물은 모두 말랐고 논바닥은 쩍쩍 균열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들은 여전히 잎이 푸르고 싱싱한데 시냇가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말라죽은 것입니다.

학자들은 산과 시냇가의 나무들을 연구한 결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산꼭대기의 나무들은 평소 수분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분을 얻기 위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가뭄에도 왕성한 생명력을 보였습니다. 평소 수분이 충분한 시냇가의 나무들은 땅의 겉 표면에 뿌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별 준비 없이 살게 되면 갑자기 환경이 좋아지거나, 유혹이 오고, 어려움이 닥칠 때 유혹에 넘어지고 결국은 영적 생명을 잃게 됩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깊이 기도하는 삶을 통해 주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 본문 사64:1-4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했습니다.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이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 어려운 형편에 처하여 있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불이 섶을 사름같이 깨끗하게 해결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사면초가의 어려움을 당할 때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홍해가 육지 같이 갈라지고, 기도의 손이 올라가면 아말렉같이 사나운 대적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춤을 추듯이 풍랑이 일어도 주님이 한번 잠잠하라고 하시면 일시에 잠잠해 지듯이 대적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자기끼리 싸워서 스스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모두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다시 만나 주시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120문도가 한 곳에 모여 함께 기도로 준비했습니다. 기도한 지, 열흘 째 되던 날에 성령님께서 그들이 모인 곳에 강림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억누르고 있던 좌절감, 외로움,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용기가 생겼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기쁨, 이 감격, 이 능력을 전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고, 나라가 살아났습니다. 영적 준비를 통해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도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2.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준비는 주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신약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종말의 때를 알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초림은 구원의 길을 예비하여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 오셨지만, 주님의 재림은 구원 받을 자들을 하늘 영광에 이르게 하시고, 형벌 받을 자들을 심판을 받아 영벌에 처하게 하시려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종말 때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미혹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막13:5-6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하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날 것인데 거짓된 사람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평소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주님을 바로 알고 믿고 따르는 믿음이 준비된 자들은 미혹하는 자들이 아무리 미혹하려 해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말씀처럼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알기에 주님이 부르시면 그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가지만, 다른 이가 부르면 거짓임을 바로 깨닫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있어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7-8절에서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하셨습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워지면 내전과 반란, 그리고 민족 간과 나라간의 전쟁,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무장한 성도는 그런 중에도 두려워 떠는 자가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가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 소망을 주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핍박을 끝까지 인내하며 견디라고 하십니다. 9-13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주님께서 기대한 대로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사도들과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리면서가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로마가 복음화 되기까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원형극장에서서, 감옥에서 피 흘려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어린이들도 끼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박해에서 돌아서지 않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초로 복음을 들고 들어온 토마스 선교사도 대동강에서 피 흘려 순교하였습니다. 길선주 목사,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등 많은 주의 종과 많은 평신도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전달된 복음은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전해준 것입니다. 이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고 무엇보다 주님 맞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주님은 준비된 자에게 약속한 복을 주십니다.

 

구약 본문 사64:1을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여호와여,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소서. 작은 나뭇가지가 불에 타고 물이 불에 끓듯이 산들이 주를 보면 두려워 떨 것입니다. 여호와여, 오셔서 주의 원수들에게 주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온 세상이 주 앞에서 떨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의 죄로 인해 등을 돌리신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실 것을 부르짖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능력의 불로 임하셔서 모든 원수들을 꺾으시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떨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이 소망이 없는 절망의 한 복판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오심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개인적인 일, 가정의 일, 교회의 일, 나라의 일로 인한 모든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과 위기와 절망의 먹구름을 걷어낼 수 있는 비결, 절망의 먹구름을 넘어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는 역전의 계기는 무엇일까요? 본문 5-7절에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위기와 절망에 빠진 민족을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죄를 성찰합니다. 죄 중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회개 하지 않는 민족을 위해 죄를 고백하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는 최고의 준비는 내 안에 있는 죄를 성찰하고, 우리나라 백성들이 지은 죄를 바로 보고 고백하며 철저히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 씻어 정결한 의의 예복을 예비해야 합니다.

 

성결한 신앙으로 살면서 서로 권고하고, 믿지 않는 불신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약속하신 은혜와 상급과 면류관을 예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귀찮아하며 준비 없이 신앙의 의무를 게을리 하게 되면 반드시 후회하는 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이미 늦어 기회가 다 지나가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한 소년이 자동차에 치였습니다. 운전사는 피 흘리는 소년을 놔둔 채 뺑소니쳤습니다.

다행히 뺑소니 차량번호를 본 사람이 있어서, 그가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그 차량번호를 추적하여 그 날로 범인을 검거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범인은 피해자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운전기사는 피해자가 자기 아들인 줄도 모르고 사고를 낸 후 뺑소니쳤던 것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마땅히 감당하여 준비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고 도망쳤다고 합시다. 그렇게 되면, 심판 날에 이르렀을 때에야 그런 도피가 나와 가족 그리고 민족을 멸망의 길로 이끌고 간 올무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늘 깨어 있는 신앙으로 잘 준비하여 주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대림절 셋 째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주님 맞을 준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모든 일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준비는 주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준비된 자에게 약속한 복을 주십니다. 아멘.

 



지렁이 같을지라도 사 41:14-16, 4:10-13

 

미국에서 청년 하나가 돈을 벌기 위해 보험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계약고를 올리는 만큼, 자기 능력 따라 돌아오는 몫이 있기에 큰 꿈을 안고 보험회사에 들어갔는데, 경제 불황이 닥치면서 어렵게 되자 결국은 회사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은 음악에 큰 자질이 있었습니다. 당장 할 일이 없어서 술집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인기를 얻게 되고, 돈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청년이 본래 믿음 생활을 하던 청년이었는데, 술집에 나가서 노래를 하다 보니, 손님 자리에 가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여자 손님들과 어울리다 보니 생활이 아주 난잡해졌습니다. 돈은 벌었지만 마음에 갈등이 자꾸 생기게 되었고, 그런 때마다 그 생각을 잊기 위해 또 술을 마시고, 이런 타락한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술이 약간 취해서 들어왔는데, 실컷 소리를 지르고 노래라도 부르면 속이 풀릴 것 같아서 피아노 앞에 앉아서 보니, 그 앞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 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쓴 시였습니다. “네가 돈 좀 번다고 해서 그렇게 살아도 되느냐? 돈 때문에 믿음 저버리고 그래도 좋으냐?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돈 번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이고, 승리한 것이냐?”

 

어머니가 아들의 타락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적어 놓은 글을 보는 순간, 아들의 가슴이 뜨거워져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통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사에 곡을 붙였는데, 그 노래가 찬송가 102장입니다. 그 후 그는 술집에 나가던 일을 그만 두었는데, 처음에는 생활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기독교 계통의 많은 집회에서 초청을 받습니다. 주신 재능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생활을 했더니 영적 축복은 물론이요, 수입은 오히려 갑절이나 많아졌습니다. 돈 버는 일 때문에, 세상의 명예나, 연락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믿음의 열정이 식어지고, 믿음을 저 버리게 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성도가 주님 안에 거하면 지렁이처럼 보잘 것 없는 자라도 주님 안에서 존귀한 자가 되고,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주님의 영광스런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지렁이 같을지라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 앞에서 지렁이 같은 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구약 본문 사41:14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인가, 어리석고, 무지한 존재인가, 또 얼마나 죄와 허물이 만은 존재인가를 깨닫고 느끼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 어린 시절 풍뎅이를 가지고 놀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풍뎅이를 잡아서 눕혀 놓으면 여섯 개의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아무리 애를 써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를 바로 세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날기는커녕 기어가지도 못하고 그냥 놔두면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길수도, 날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풍뎅이처럼 스스로 몸을 추수 릴 수가 없기도 하고, 또 마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되는 경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또 자기백성을 '지렁이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지렁이는 빈모강에 속하는 환형동물로서 진땅이나 물속에서 사는데 약하고 천하며, 무방비상태여서 공격만 당하고, 멸시받고 짓밟히며, 자기 몸을 길게 늘이고 있다가도 약간의 자극만 받아도 오그라드는 뼈가 없는 무골벌레입니다. 지렁이란 표현 당시에 무력하고 무가치하며,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지렁이처럼 보잘 것 없음을 아는 성도는 교만할 수가 없고, 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해쳐 나갈 수 있다고 자만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겸손히 주님을 의지 하는 자가 됩니다. 그 모습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있는 모습입니다.

 

신약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혈기 등등하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자였습니다. 가정 배경이나, 학문 배경이나, 그의 박식한 지식이나, 종교적 열심 등 모든 면에서 전도유망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난 이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된 것입니다.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모자란 자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주와 복음을 위해 많은 박해와 모진 고난을 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고, 여러 교회를 세우는 수고를 했지만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겸손히 주님만 높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며 자랑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지렁이처럼 보잘 것 없고,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평생 예수 잘 믿고, 안 넘어지면 좋고, 늘 충만하고 형통하면 좋지요. 그런데 사람은 원치 아니하는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기도 하고, 실수도하고, 범죄하고, 넘어지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늘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때로는 불평불만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 연약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약점이 있습니다. 결심하지만 결심대로 살지 못하고, 서원 하지만 서원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연약함을 바로 알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오직 주님 바라보고, 의지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믿음의 눈으로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구약 본문 14절에서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고 했습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 하시고, 심은 대로 상 주시고, 심판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지렁이처럼 연약하고, 무지하고, 비천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우시면 세상에 문제될 것도, 염려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는 자는 어떤 상황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욥은 불 시험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23:10)말하며 그의 믿음대로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깨닫고 난 뒤에 고백하기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3:17-18)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는 일마다 안 풀리고, 있어야 될 것이 없고, 가진 것 다 잃어버렸는데,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가는 길이 달라지고, 생활의 자세가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6장에 보면 엘리사가 있는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굶주려 죽게 될 심각한 상황 가운데서 엘리사의 사환은 두려워하면서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물을 때 엘리사는 태연자약하게 이렇게 말하고 그의 눈이 열리도록 기도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6-17)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엘리사에게는 사마리아 성을 에워싼 아람 군사들은 전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신약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다 억울하게 매 맞고, 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여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뻐하라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알았기 때문에 본문 빌4:12-13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산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생활 속에서 주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을 믿고 내 마음속에 확신되어지면 눈빛이 달라집니다. 걸음걸이가 달라집니다. 인생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믿고 사모하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이 붙잡아주시면 약해도 걱정할 것이 없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에게 필요하면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때를 따라 보호해주실 줄로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전능하신 주님 안에 거하여 주님을 나의 힘으로 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삶의 중심축을 우리자신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겨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렁이 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나에게서 소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를까요? 평소에 여건이 좋을 때는 잘 모릅니다. 어려움이 오고, 큰 환난이 닥칠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님 의지하고 고통 중에라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낙심하고 한탄하게 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난 중에도 찬송하게 되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게 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한숨을 쉬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구약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지렁이 같은 이스라엘을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계로 삼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들고 작은 산들을 겨 같게 만들어 그것들을 바람으로 흩어버리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산들'이란 이스라엘의 대적을 말하며, 그 대적들을 지렁이 같은 약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여지없이 파괴해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나 자신의 연약함을 보고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는 비록 지렁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더 이상 지렁이가 아닙니다. 정복당하던 삶을 정복자로 바꾸어 주십니다. 어려운 시절의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고 말씀하시는데, 무어가 두려울 것이 있으며,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약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 바울이 당한 거의 모든 일이 '잘된 일"로 판단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도 그는 걸핏하면 욕을 먹었습니다. 자주 체포당하고, 매로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어느 것 하나 '은혜'라고 느끼기에는 불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푸대접이 없고, 그런 고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생각했을 때, 다시 말해 사람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여 새롭게 생각하기를 시작했을 때 상황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로마에서 황제의 권세 아래 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거하여 사는 그의 생각에는 감옥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로마 황제의 권세 아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는 '주 안에' 있었습니다(10,13) 그러기에 그가 맞은 상황은 한 시도 편한 날이 없고, 죽음이 시시각각 뒤쫓아 오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여유가 만만하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믿음의 생각이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 있기 전에 그를 사랑하시고 영생의 축복을 반드시 주실 '주님 안에' 있다는 확신이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생각은 한결 같았습니다.

 

다니엘이 모함하는 자들로 인해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했던 일이나 그의 세 친구가 풀무 불 속에 들어갈 줄 알면서도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은 것은 모함 하는 자들이나 위세 당당한 바벨론 왕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왕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어있다는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진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로 노예로 팔려가고, 팔려간 집 여주인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 그를 지혜롭게 하셔서 꿈을 해몽하게 하시고, 애급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들의 눈을 피해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겁쟁이 기드온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담대한 용사가 되어서 고작 3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바다가의 모래와 같이 많은 미디안 사람들을 물리치는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지렁이처럼 연약한 존재였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면서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계처럼 변했던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 리빙스턴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학위 수여식이 있기 전에 리빙스턴은 학교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였습니다. 그는 더위와 싸워야 하였고 밤마다는 추위와 싸워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짐승들과 싸워야 하였습니다. 사실 그의 오른 팔은 사자의 공격으로 불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연설을 마치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으로 하여금 아프리카 생활을 이겨내도록 한 비결이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리빙스턴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는 말씀이 나를 굳세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친히 주님이 나를 굳세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나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셨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힘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당당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지렁이 같을지라도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지렁이 같은 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주님 안에 거하여 주님을 나의 힘으로 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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