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의 상품 3 (계 18:12-13)

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이 시간에도 “바벨론의 상품"이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바벨론 상품이란 사람들에게 어떤 강력한 의욕을 주어서 계속해서 세상에 머물러두려는 사탄의 고단수의 미혹을 가리킵니다. 미국의 무디가 집회를 마치고 휴게실로 와서 잠시 쉬고 있는데 30세 전후되는 한 청년이 무디에게 나타나 자신이 변화된 간증을 이렇게 들려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6년 전까지는 3인조 강도였는데 하루는 강도짓하기 시간도 이르고 하여 우연히 무디의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변화를 받았습니다. 참석한 그들은 처음에는 연설을 잘한다고만 생각하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설교가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세 사람 모두 그 날 그 시로 강도 그만 두고 예수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무디는 너무 반가워 "참으로 장한 일이오. 한데 두 친구는 어떻게 되었소?", 그러자 “예, 한 친구는 이집트에서 군대생활하면서도 신앙생활 잘하다가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친구는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사를 도우며 선교사업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도 신학을 하여 지금은 전도자의 길을 가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답니다.” 강도가 변한다고 이렇게 온전히 변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감동스러운 간증입니다.


이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세상 물 모두 뽑아내시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세상 물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바벨론 상품에서 발견합니다. 본문에 바벨론 상품으로 6가지 재료로 만든 각종 그릇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그릇이란 쓰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릇의 특징은 담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에 세속이 깊이 담기면 그것은 좀체 버리기 어렵고 잘못 쓰이게 됩니다. 사탄의 세속화작업이 이렇게 치밀하고 무섭습니다.


그럼 바벨론 상품은 무엇일까요?


9. 인간답게 살게 해준다는 상품입니다.


각종 향목과” 향목은 아프리카의 향기 좋고 색깔 좋은 시트러스 나무에서 나온 것으로 고급 문이나 식탁에 조각이나 무늬를 내는데 사용했는데 그 품질이 뛰어나서 향목으로 만든 그릇이나 기구들은 값비싼 사치품에 활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나무는 연약한 인성을 가리킵니다. 성막의 기구들을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금으로 싼 것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눅23:31에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셨을 때 푸른 나무는 청년을 가리켰습니다. 막8:24에도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이런 기록에서도 그런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향목은 보통 나무가 아닙니다. 대표적인 나무로는 백향목과 잣나무가 있습니다. 백향목과 잣나무는 무흠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예표합니다. 자세히 말하면 백향목은 그리스도의 부활, 잣나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은 향내 나는 향목과 같이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참하나님, 참인간, 참 예수님다우신 모습입니다. 그래서 고전11:26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상품에 이런 향목이 있다는 건 더 이상 누추하고 냄새 난 인간이 아닌 숭고한 인간으로 살게 해주겠다는 세상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피눈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가난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란 다름 아닌 밥 잘 먹고 좋은 집에서 좋은 의복 입고 윤택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노력하며 사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이방인의 기도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마6:31-32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아 주야로 일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일에 빠져서 믿음을 거부합니다. 그 결과 영혼의 문제에 관심할 시간도 없고 내세를 위해 준비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땅에 것만 추구하다가 그 생명 불러 가시면 그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습니까? 인간은 천하보다 더 귀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를 섬기며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매진하는 것이 진정 숭고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10. 존귀하게 만들어 준다는 상품입니다.


각종 상아 그릇이요” 상아는 코끼리의 앞니로 상품성이 좋아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가로 거래되고 있는 물품입니다. 상아는 결이 곱고 단단하여 세공에도 알맞아 부요와 권세와 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아는 연인의 아름다움에 비유되었고(아5:14, 7:4) 솔로몬의 옥좌와(왕상10:18) 궁전의 귀한 재료로(왕상22:39, 시45:8, 암3:15) 쓰인 사치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각종 상아 그릇은 왕궁에서 쓰일 만큼 귀한 그릇이었습니다.


그럼 바벨론 상품의 상아 그릇은 뭘까요? 상아는 크기에 비해 희생이 너무나 큰 산물입니다. 꼭 상아그릇에 담아 먹어야 좋은가요? 상아 그릇에 겨우 음식을 담아먹는 것 치고는 너무나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각종 상아 그릇이란 존귀한 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존귀한 자란 왕이나 거기에 버금가는 정치인을 말합니다. 에10:2-2에 “왕의 능력 있는 모든 행적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을 위해 가장 큰 희생을 치르는 더 높아지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정권을 잡거나 유지하거나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수십만 수백만까지도 인명을 살상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정권을 잡으면 또 누군가에 의해 도전을 받아 9족을 멸하는 위태롭고 보잘 것 없는 그 일을 위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룹니다. 서로 높아지겠다고 서로 더 가지겠다고 치루는 희생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서로 높아지겠다는 사람들만 있지 예수님처럼 섬기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막10:42-44에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속삭임에 속지 마세요. 하나님 나라는 섬김을 통해서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1:23-24에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경고하셨습니다.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칭찬과 자기자랑 다 내려놓으세요. 시기 질투도 필요 없습니다. 음흉한 공작은 더욱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관심 갖지 마세요. 정말 높아지려거든 반짝 노력이 아니라 일생 섬기는 삶을 사세요. 교회를 위해, 주민을 위해, 지역을 위해, 나라를 위해, 인류를 위해 일하세요. 그러면 드러내지 않아도 그 명성이 온 땅을 진동할 것입니다.

11. 특별한 사람 만들어준다는 상품입니다.


값진 나무와” 여기 바벨론 상품으로 계속하여 값진 나무 그릇을 소개합니다. 앞서 말했듯 일반적인 나무 그릇은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그런데 값지다 했으니 특별한 나무이지 일반적인 나무는 아닙니다. 당시 값진 나무는 단풍나무 백향목 삼나무 흑단나무 등으로 아프리카나 인도에서 수입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무가 인성의 상징이라면 여기 값진 나무는 특별한 인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라가 부강하려면 인재양성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양성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의 불세례를 주셔서 세상을 불사를 일군들을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특별하기를 원하는데 그 특별이라는 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인생의 함정입니다. 성공하려면 달라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공식이지만 그 이상의 공식을 모르는 말입니다. 요즘 세속사상이 얼마나 침투했든지 일부 신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왜 그렇게 꿈들이 그렇게 거대하고 특별한지 온 도시 온 나라 온 세상을 쥐락펴락할 정도입니다.


기도를 해도 오순절의 120명의 기도의 후원자를 주시고, 기드온 300명의 용사와 같은 동역자를 주시고, 솔로몬 같은 물질의 동역자를 주시고, 몇 만이 모이는 대교회,,, 믿음이 좋은 건지 꿈이 큰 것인지, 그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종이 여기 있나이다." 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종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꿈도 소망도 하나님께로서 나오고 은사도 능력도 하나님께로서 나오고, 앞날의 환경과 섭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성공이고 특별입니다.  모세가 위대한 것도, 다윗이 위대한 것도, 바울이 위대한 것도 다 하나님께서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 것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자는 모두 특별한 것이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는 모두가 특별한 것입니다.



미국의 저술가이자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권력의 이동(Power shift)'이라는 책에서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은 이렇게 흘러간다고 하면서 역사적으로 권력은 기운 센 사람이 이기는 완력에서 시작하여 경제력 기술력 그리고 도덕적 권세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 권세는 그것은 영적(靈的)인 권세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는 권세가 가장 큰 권세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신앙인이든 정치인이든 과학자든 경제인이든 하나님의 손에만 붙들린다면 어느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더 이상 세상이 말하는 특별함에 속지 말고 진정 특별하려면 그 특별함을 버리십시오. 그 대신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쓰임 받고 영감 받기를 기도하십시오. 그 교만이 꺾일 때까지 그는 하나님께 온전히는 쓰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도 세상을 사셨지만 기록된 말씀으로 그럴듯한 세상의 미혹을 분별하시고 거절하셨습니다. 이 순간에도 사탄은 인간답게 살자는 명목으로, 존귀하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특별한 사람 만들어준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공동체에 손해를 끼치고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게 이끌어가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세상적인 것을 빼내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으로 분별하여 우리 안의 세상적인 요소 다 걷어내고 성령 안에서 참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귀히 사용하시는 참된 인생의 성공자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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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없이 주신 선물인 이신칭의                     로마서 4장 1-12절

선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더욱 진가를 발합니다. 하지만, 다이어몬드와 같은 귀중한 선물을 받아도 그 가치를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에 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위대한 가치를 깨닫습니까? 그리고 그 가치를 인정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믿음의 정의에 대해 아브라함을 통해서 정의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이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대해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지적하면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먼저 의롭다 하심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믿음의 법이 실효성 있다는 점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아브라함(1-3)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려 듭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보고 의롭다 하십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랑의 문제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1-3)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통해 복음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든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고, 믿음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역사 위로 들어 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결과입니다. ‘의’는 약속이 잘 지켜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신실함’ 또는 ‘믿음’은 ‘그 약속을 잘 지키는 행동이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언약을 전제로 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신실한 표현으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구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바울이 전하고 싶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신실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는 자들, ‘의롭다’고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세우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신실하신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신실하심’, ‘예수님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복음이 아닙니다. 이미 1:18절에서 3:20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증거들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의인 아브라함과 노아 그리고 엘리야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바로 ‘예수님의 믿음’,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하니, 세 가지 질문이 제기 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믿음을 자랑할 수 있느냐?’입니다. 당연히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하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얻어낸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오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본문에서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부르는 근거 질문 제기(1)

사도 바울은 그 연장선상에서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반문합니다. 이 문장을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 된 것이 육신을 따른 것이었다고 우리가 말하리요?’로 번역한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바울은 4장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열방을 부르시는 방법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있었다는 점을 논증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이야기를 불러온 것입니다.

⑵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아브라함(2-3)

이제 바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의 ‘행위’ 혹은 ‘일’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강조입니다. 그는 유대인들도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행위나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그의 후손들에게도 유효할 만큼 행위에 있어서 매우 의로웠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신들은 믿음으로 위대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바로 알면, 유대인들도 복음에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만약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의 행위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3:30에서 바울은 이미 할례가 하나님 백성의 외적 표지가 아님을 천명하고, 다시 4:1에서 그 ‘육신의 표시’를 따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되었는지 질문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는 할례를 지칭하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의롭게 된 ‘방법’은 결정적으로 그가 의롭게 된 ‘때’에 달려 있습니다. 즉, 할례 받기 ‘이전’에 그가 보인 믿음을 통해 이미 의롭다 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선택되어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의지와도 어떤 ‘업적’이나 ‘일’과도 상관없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점에서 ‘은혜’입니다. 이제 바울은 독자들이 인정하거나 물을 수 있는 권위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는 창세기 15장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일반적인 은혜의 약속을 듣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창세기 15:6에 의하면,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4장 전체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이 모든 일들이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에 발생하였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5:6의 전후 문맥은 ‘의로움’이라는 단어의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의로움’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5:6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그 순간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시작된 순간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부름 받아 땅과 자손을 얻을 약속과 열방을 위한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소명을 받은 아브라함은 이미 같은 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세기 12:4), 벧엘 근처에서 장막을 치고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세기 12:8). (그리스도인들 중 상당수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거꾸로 읽습니다. 즉, 창 15:6의 믿음을 통해 의로움을 얻는 구원의 첫 관문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오히려 창 12장에서 아비 집을 떠나는 장면은 어려운 순종의 결단을 위한 말씀으로 사용합니다.) 그 증거로 3절에서는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을 근거로 들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의로움’이라는 단어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약속 안에 신실하게 머물러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하튼,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았다는 사실은, 로마서 3:28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 선포를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재확인한 것입니다. 이 내용에 전말은 아브라함은 아무리 기대려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로운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아브라함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사역에 대한 주인이 바로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 대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열방을 부르는 방법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방법과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구원에 대한 우월성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더 나가서 이 구원이 교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절대로 구원은 우월한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구원을 받은 것뿐입니다.

 

믿음을 통해 죄인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4-8)

사람들이 일하고 품삯을 받는다면 그것을 당연한 것이겠지만,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삯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선물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함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안정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죄 사함의 복을 선물해주십니다.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8)

사도 바울은 앞 절에서 인용한 말씀의 중요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절대로 사람의 행함에 근거하지 않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심과 선택하심으로 의롭게 여기신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⑴ 불경건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얻는 의로움(4-5)

사도 바울은 다윗의 경우를 들어 설명합니다. 선택받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이제 4절에서 상업적 비유 하나를 듭니다. 어떤 일꾼이 일을 하고 상급(개역개정에 ‘삯’이라 번역)을 받았다면, 그것은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보수를 받은 것이라는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4). 재미있는 것은, 4절에서 바울이 ‘미스토스(μισθος)’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창세기 15:1 칠십인역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과 자손이라는 상급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땅과 자손의 상급을 얻는 데 있어서 아브라함이 공헌을 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대가’ 혹은 ‘보수’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장차 받을 상급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고, 아브라함은 그것에 ‘믿음’으로 반응하였을 뿐입니다. 5절은 4절의 상업적 비유와 바울의 요점을 연결시킵니다. 아브라함도 ‘일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 또한 비유 속의 일하지 않는 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일방적인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는 방식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올바르게 반응하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문맥의 흐름을 볼 때, ‘경건하지 않은 자’란 표현을 통해 바울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의 요점은 이방인들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반응만을 보시고 의롭다 여기셨을 뿐, 할례와 율법 때문에 의롭다 여기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⑵ 죄사함을 받은 자의 복에 대한 다윗의 고백(6-8)

사도 바울은 6절 이하에서, 이 동일한 진리를 시편 32:1-2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언어들을 통해서 더 보편화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도 범죄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간음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단순하게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아무런 수고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떠한 사전 행동이나 공헌 없이 은혜와 선물로 죄인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들의 복에 대해서 이미 다윗은 노래했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신뢰이든, 신실함이든)을 (인간의) ‘일’에 포함시키지 않고, 하나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로마서 3:21-26에서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임한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한 바울은 4:1-8에서 오직 그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의로움의 지위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브라함 이야기와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재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던 것처럼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여기십니다. 구원에 대해 아무 자격이나 공로도 없는 당신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이방인이 받을 구원(9-12)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십니다. 유대인은 그들이 율법을 맡은 것을 자랑하며 유대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할례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9-12)

아브라함이 이방인처럼 무할례자 신분에 있었을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먼저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믿음의 징표로써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할례 자체가 아니라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⑴ 무할례시에 의롭다 함 받은 아브라함(9-10)

바울은 이미 3:30에서 할례가 하나님 백성의 외적 표지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로마서 2:25-29;3:29-30).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언약 백성의 표지가 오직 ‘믿음’임을 아브라함 이야기를 불러와서 본격적으로 논증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앞의 논의를 다시 정리한다(9). 아브라함도 할례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할례와 무할례가 아니라 믿음의 소유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⑵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11-12)

10-12절에서 바울은 이를 재미있는 논리로 설명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였습니다(10). 둘째, 할례의 표지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이미 받은 의로움을 인치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11). 셋째,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가 보여준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믿음과 의로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12). 이상의 논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나,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의 원래 문맥이나 구약성경 전체의 문맥 속에서 비추어 볼 때, 의문점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의롭다 인정받은 것은 분명하나,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 그 시간적 순서들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자손의 자격으로 할례를 반드시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 자손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를 통해 놀랍게 성취되고 완성되었다는 해석의 출발점에서 갈라디아서 3:16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브라함 자손은 그리스도 한 사람뿐입니다. 로마서 3:21-26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자손의 소명을 한 몸에 짊어지고 그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통해 그 소명을 성취하셨다. 아브라함 자손의 이야기는 결국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이 아브라함 자손입니다. 이 사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여겨진다는 점을 시사합니다(11). 결국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12).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중요하지, 믿을 때의 환경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현재 당신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그 표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혹시 할례와 같이 외적인 종교적 의식이나 행위를 구원받은 백성의 표시로 삼고 나타내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느 정도 억울한 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한 만큼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만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한 것이 없는데, 자격이 없는데 먼저 다가와 모든 것을 준비하여 상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활 신앙의 유익(1125-26)

 

성경본문요한복음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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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과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은총이 여러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셔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담대함과 확신과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신학자들이 주장한 바만약 예수님께서 주후 29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면 2015년에 우리는 1986번째의 부활절을 기리며 찬양하는 것이 됩니다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예수께서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고백을 합니다이 때 사흘 만에라는 표현은 72시간 만에’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생각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그 이유는 사실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셔서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으로 따져 볼 때 72시간이 아닌 36-40시간 정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 점에서 라틴어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에서는 72 시간을 말하지 않고 사흘 째 되는 날(tertia)이라고 했고영어 사도신경에서도 셋째 날(on the third day)에 부활하심을 고백합니다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이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이 모든 문제를 종식시킨다고 생각합니다그들은 "죽으면 그만이다"고 생각하며 자기 마음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종 죄를 짓습니다그들의 삶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 15:32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며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 나는 부활을 믿지 않지만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신실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하며 자신의 부활 역시 믿습니다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의 죽으심에 머물러 슬퍼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고백하며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을 믿고 찬양하는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1. 예수 부활의 역사성

성도 여러분 사실 사후(死後부활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죽은 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입니까그래서 예로부터 예수님의 부활도 다양한 이론으로 부인하려고 시도해왔습니다그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려는 다양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첫째기절설십자가의 극심한 고난에 기절한 예수님이 서늘한 무덤에 있다가 살아났다는 주장

둘째도난설죽은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가서 다른 데 숨겨두고 부활을 전파했다는 주장

셋째환상설제자들이 너무도 스승을 연모한 나머지 집단적으로 환상을 보았다는 주장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성경의 다양한 증언들로 인하여 철저하게 파괴될 뿐입니다그 일례로 예수의 제자가 아닌 사도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바를 확인해 보면 그 역사성은 충분히 증명된다고 믿습니다.

 

고전 15:3-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뿐만 아니라성경은 인간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부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전 주간에 병들어 죽은 나사로를 찾아 가셔서 실제로 죽은 그를 살려주시며 본문의 말씀하셨습니다.

요 11: 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은 예수께서 며칠 후 실제로 죽은 나사로의 부활이 발생했을 때 마르다가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고 받아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친히 강력하게 촉구하셨던 말씀입니다또한 사도 바울도 이 부활의 신앙을 변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아놀드 토인(Arnold Toynbee),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를 연구하고 또한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관한 기록 문헌들을 살피고 그 증거들을 고증하여 조사해 왔다그런데 인간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 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이 놀라운 부활을 믿는 성도에게는 어떤 유익이 주어지게 될까요?

 

2. 부활 신앙이 성도에게 주는 유익

하이델베르크 소요리 문답 제 45 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답을 합니다.

질문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얻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첫째그는 자신의 부활로 죽음을 극복하시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의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도록 합니다둘째이제 우리도 그의 능력으로 새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셋째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이 요리문답에서 세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과거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얻게 되는 의()를 이를 믿는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그 부활에 함께 참여시키는 유익이 있고,

 

또 현재적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점에서의 유익이 있으며미래적 차원에서 장차 예수와 함께 누릴 부활의 영광스러움을 소망하게 하는 유익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가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부활의 신앙이 주는 유익을 나누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첫 번째 유익예수님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이 누리게 되는 의로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죄의 권세인 죽음을 이기셨고그 죽음으로 인하여 얻으신 의로우심을 믿는 성도들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이는 과거에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발생한 예수의 부활 사건을 믿는 성도들의 영적 신분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 지를 규정하는 진리입니다즉 이는 부활 진리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영적 유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다 받으셔서 죄 없으신 분께서 죄인이 되시어 죄인 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충족시키셨습니다그래서 이를 믿는 자는 더 이상 정죄당하지 않고 의로운 자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부활 사건은 바로 죄인 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구원 사역이며 이를 믿는 성도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불의한 존재로부터 부활로 얻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도저히 묵과하실 수 없기에 그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셔야만 합니다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을 심판하여 영원히 죽게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이 난제를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심으로써 해결하셨습니다.

 

이 예수의 십자가 형벌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로 자신을 내어주셨다예수께서 정죄 받으셨습니다.

그는 실로 인간의 모든 죄를 몸소 담당하셨습니다즉 그 분께서는 세상 죄를 담당하신 어린 양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 두 번째 유익새로운 생명으로서 사는 자의 혜택

예수께서 처참한 십자가 형틀에서 죽자 그를 따르던 사도들은 실망하고 좌절하였습니다그들은 주님의 죽음으로 낙망하여 낙향하였습니다(눅 24).

그러나 예수 부활의 사실이 확인되자 그들은 용기를 갖게 되어 증언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특히 예수를 은 30개에 팔고 자책이 되어 자살한 가룟인 유다를 대신하여 제자를 보충할 때 그 자격요건을 보면 제자들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행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가룟유다 후계자로써 요구된 제자는 바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사명을 인식한 자였던 것입니다이는 모든 제자들이 인식하였던 것이며 우리 역시 이 부활의 증언자로 살아야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과연 예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게 될까요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하여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1) 영적 신분의 영광스러움부활을 고백하는 성도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자로 영광스러운 영적 신분을 획득한 자들이다.

엡 2:4-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2) 새 생명의 삶부활을 고백하는 성도는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 생명의 삶을 살게 된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3) 하늘을 향한 삶부활을 고백하는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고 사는 소망의 삶을 산다.

골 3:1-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4) 구별된 삶부활을 고백하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도 구별된 삶을 살아간다.

골 3:5-10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렇게 부활을 고백하는 성도의 삶은 현재의 삶 속에서 구별된 삶으로 이 죄된 세상 가운데서도 예수와 연합되어 변화된 영적 신분을 간직한 자로써 장차 완성될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사모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 속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생활이 아니라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하며 그 지식을 따라 살아가고자 힘쓰는 인생인 것입니다.

 

3) 세 번째 유익부활을 통하여 영생을 고백하는 삶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여기서 부활의 영광스러움이란 어떤 의미일까요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살기에 합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을 말합니다.

즉 육체적인 현재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그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살기에 합당한 형태로 변화된 영성체(靈聖體)로 변화될 것입니다이것이 부활 신앙이 갖게 될 비밀스러움입니다.

 

성도는 앞에서도 강조하였지만자신의 실제적인 부활을 고백하는 자가 됩니다지금 이 순간에 죽어도 다시 예수 안에서 살아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입니다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새롭게 영생을 누릴 것을 믿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밝히며 강력하게 권면했습니다.

*고전 15:20-22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스러운 말씀입니까그 영성체는 전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그 곳에서는 이 땅에서와 같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몸의 모습이 아니라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부활체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마 22:24-30).

 

사도 바울도 육의 몸이 있듯 또한 영의 몸도 있다(고전 15:44)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고전 15:51-53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부활의 진리는 놀랍게도 그저 성도를 천국에 보내기 위한 진리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작정하시고 시행해 오신 바 구원의 완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계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밝히 설명하며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 그 비밀을 밝히고 있습니다이 복음을 현재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반드시 알아야 만합니다.

고전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오늘날 교인들은 그저 교회에 나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위로받고 치유 받고 능력 받아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 즉 많은 돈과 높은 직위와 능력 있는 사람으로서의 소위 성공하는 삶을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그러나 이 부활의 진리는 그러한 신앙을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부활 신앙은 장차 변화될 영광스러운 부활체를 갖게 하여 완성될 그 신비스럽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러기에 신실한 성도는 예수와 함께 또 그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자신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 예수께서 장차 재림하시어 이루실 예수의 나라 배성이 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구별하셔서 예수께서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다시 환원하여 드림으로써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왕국이 회복되는 것이 성경 계시의 말씀입니다이것이 기독교가 계시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신실한 부활신앙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진정으로 고백하는 자들이 갖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러한 부활을 고백하여야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됩니다구약의 성도 모두가 이 신앙 안에서 살아왔으며 소망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구원이 개개인의 고백의 차원을 넘어 전 구속 역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완성되는 구원임을 강조하며 우리를 격려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히 11:39-40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또한 우리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장차 완성될 그 나라의 영광스러움을 사모하게 하고 모든 성도들이 함께 누릴 영광스러운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정말로 그 나라에 참여하는 것은 영광스럽고 보배롭습니다사도 요한은 그 나라의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 나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계 21:3-5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요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가징 기본적인 진리이며 성도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며 성도가 장차 누릴 영광스러운 부활체에 대한 보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유익은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와 함께 붙어있음으로써 맺게 것으로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누리시는 그러한 영광스러움으로 함께 나누게 되는 구원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누리게 되는 신비스럽고 거룩한 구원의 진리를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로써 이를 실제로 역사상 일어나게 하시고 그 진리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계시하심으로 예수와 함께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누리게 되는 구원을 가장 압축하여 보여주고 또한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부활의 진리 가운데 우리가 초대받았고 또한 그 부활을 누리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바라기는 이러한 부활신앙의 유익을 생각하여 예수와 연합된 부활을 확실하게 믿고 그 신앙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여 그 영광스러운 나라의 자리에 다 한 가지로 만나 뵙기를 소원합니다.

 

고전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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