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 예수님 2 (계 1:14-15)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이 시간에도 “구원자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회학자들은 각 개인의 의상은 그 자체가 기호 언어이며 무언의 신호체계, 곧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 존재한다고 정의합니다. 말처럼 옷에서도 특유의 어휘와 음색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외모와 말, 행동 외에 그 사람의 성향이나 성격을 판단하는 좋은 단초를 의상에서 찾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1911~2004) 대통령은 뛰어난 연설과 함께 가장 세련된 옷맵시를 가진 미국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는데, 존 F 케네디가 젊고 진취적인 멋을 추구했다면 레이건은 원숙하고 노련한 이미지를 풍겼습니다. 그래서 강하고 풍족한 미국이라는 그의 보수주의 이념은 공식 석상에 즐겨 입었던 짙은 색상의 정장에 배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분야는 여성들에게 그 경향이 많은데 그 의상만으로도 어떤 메시지를 풍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패션을 통한 메시지의 원조는 계시록에 나오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의 날에 밧모 섬에서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은 단순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 하나 하나에 복음이 담겨 있어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시기에 합당한 구원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계속하여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4. 우리의 죄악과 생각까지도 성결케 하시는 모습이십니다.
14절에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했습니다.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머리도 희고 머리털도 흰 모습이었습니다. 양털과도 같고 눈과도 같이 흰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모습은 과연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요?
먼저 성경에서 백발의 의미부터 알아야 합니다. 잠16:31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백발은 의로움의 상징입니다. 의로움도 여러 가지입니다. 칭의적 의로움과 성화적 의로움이 있습니다. “의로운 길”이라 했으니 칭의적 의로움보다 성화적 의로움을 말합니다. 성결이라고도 표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머리털만 흰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 빛나는 흰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라 하지 않고 머리라고 했을까요? 얼굴과 머리는 의미가 다릅니다. 얼굴은 인격을 대표하고 감정이 표현되는 곳이라면 머리는 생각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내면의 생각까지도 의롭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았습니다. 양털과 눈은 성경에서 완전하고 변치 않는 의로움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사물입니다. 사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여기 양털도 희고 눈도 흽니다. 흔히 양털은 변하지 않고 눈은 녹으므로 적용이 다르다고 하지만 도리어 중복기법을 이용한 강조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눈은 고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사철 만년설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삶은 물론 생각까지도 성결한 온전하고 변치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성결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끌리는 옷을 입은 제사장의 모습으로 용서의 주님을 계시하셨다면 머리털과 머리의 모습으로 변화와 성결케 하시는 주님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면 머리털보다 더 많던 죄악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요일1:7에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우리의 셀 수 없는 단점들을 깨달을 수도 있지만 반면에 신기한 것은 그 단점들이 사라집니다. 빛의 하나님 앞에서 어두움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의식까지도 새롭게 만들어주십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입혀집니다. 그래서 골3:10에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성령께서 항상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생각으로 지켜 주시고 평강으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61:10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하였습니다.
주님을 멀리하면 죄악이 왕 노릇합니다. 그러나 가까이 하면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삶이 바뀝니다. 복음적인 생각, 복음적인 언어, 복음적인 기도, 복음적인 표정, 복음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해보다 더 밝은 은혜를 받았다면 해보다 더 밝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시켜 주시는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까지 영광의 면류관을 쓸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 얼마나 위대합니까?
5. 잠재한 죄악까지도 처리하시는 온전하신 모습이십니다.
다시 14절에 "그의 눈은 불꽃같고" 라 했습니다. 단10:6의 “그 눈이 횃불 같다”는 묘사와 비슷합니다. 눈이 불꽃 같음은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그 앞에서 어떤 거짓도 불의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렘17:10).
대하드라마 ‘왕건’에서 궁예가 관심법을 쓴다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만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은 공의로우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앞에서는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습니다. 민32:23에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그의 눈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기억도 하지 아니하신다 하셨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는데 왜 또 다시 이런 불꽃같은 눈으로 나타나셨을까요?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성도에게서 죄악의 잔재를 찾아내어 온전히 제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결의 은혜를 받았어도 어느 누가 자신을 하나님처럼 의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입증할 뿐입니다. 그래서 빌3:15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성경으로, 섭리적인 환경과 은사로서 우리의 처리할 부분을 깨닫게 하십니다. 호7:1에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했습니다. 즉 넘어짐과 실수를 통해서 자신의 약점을 깨닫게도 하십니다.
혹시 마음에 시험이 들었다면 영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일에 결코 쉼이 없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불꽃같은 눈동자로 숨어있는 우리의 약점을 깨닫게 하사 더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심으로 처리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6. 우리의 완악한 자아까지도 깨뜨리시는 연단의 모습이십니다.
15절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강력한 발을 가지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고대 전쟁문서나 부조에 승리한 왕이 패배한 왕을 머리로 밟는 그림이 있습니다. 고대 시대의 원수를 밟는 발은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성경에도 시110:1에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한 말씀도 그런 의미입니다. 주님은 원수 사탄을 밟으셨고 또 더 밟아야 할 것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자아입니다. 자행자지하며 태만하고 자만하고 교만한 자아입니다. 스스로 왕 노릇하려는 처리 받아야 할 우리의 자아입니다.
우리는 잘 훈련 받은 자와 같이 하나님 앞에 온유하고 순복하고 충성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라는 자아가 문제입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좋으련만 우리 인간 얼마나 완악한지 그래서 불같은 연단이 필요하고 강력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완악한 것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는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당시 금속 중에서 주석은 흔히 말하는 놋쇠인데 아주 강한 쇠입니다. 놋은 성전 뜰의 여러 기구들의 재료로서 죄악을 제하는 심판의 상징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발의 모습은 악을 짓밟아버리시는 심판주의 발입니다. 강한 발이니 아무도 항거할 수 없습니다. 변화되는 것만이 연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 자리를 월권하여 왕 노릇하려는 자아는 반드시 처리되어야 합니다. 풀무불에 단련한 모습은 바로 불같은 연단을 시사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예외가 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고후12:7에 바울도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찌르는 가시를 주셨습니다. 혹시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고 지르는 가시가 존재한다면 사람의 발로 인식하지 말고 주님의 발로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수장절은 성도의 구원의 완성을 기뻐하는 절기로서 천국 생활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수장절은 봄에 곡식을 추수했다고 오지 않고 가을에 포도를 추수해야 오는 절기입니다. 포도알갱이처럼 짓밟혀 깨뜨려지지 않고는 온전한 믿음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거부하지 말고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더욱 온전케 하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기까지 결코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주님을 이기려고 말고 순종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자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더욱 사랑하고 더욱 순복하여 우리의 생각까지도 잠재한 죄까지도 완악한 자아까지도 처리 받는 참 믿음의 사람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
'신약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자 예수님 3 (계 1:15-16) (0) | 2022.08.27 |
---|---|
구원의 찬송 요한계시록 19:1-6 (0) | 2022.08.27 |
구원자 예수님 (계 1:12-13) (0) | 2022.08.13 |
주의 날 계 1:9-20 (0) | 2022.08.10 |
복음의 일군 3 (계 1:11) (0) | 2022.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