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일군 3 (계 1:11)
11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이 시간에 “복음의 일군”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정치인이 마치 양심을 고백하듯 정치인의 자격요건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정치인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잘해야 하고 둘째, 돈을 물쓰듯이 쓸 줄 알아야 하고 셋째, 오늘의 적을 내일은 아주 친한 친구로 맞을 수 있어야 하고 넷째는 낯이 두꺼워야 된다고 했습니다. 모두 다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일군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 일군도 영광이 있어 서로 하려고 애를 쓰는데 죄 짓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직분이라면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고후3:7-9에서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복음의 일군인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메신저가 구비해야 할 사항들이 나타납니다.
7. 성경에 대한 시각이 열려야 합니다.
“네가 보는 것을” 요한이 주의 날에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란 (αποκαλυψις 아포칼뤼프시스)인데 아포(덮다, 가리다), 칼립시스(벗기다, 드러내다)는 의미로 그 의미는 ‘비밀을 나타내다. 베일을 벗기다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육의 눈으로만 보고 고전인 성경에서 현대인들이 취할 진리들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과학이나 법률이나 일반상식들을 취하려는 지극히 잘못된 시각입니다. 성경은 그런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을 말하려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계시이며, 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려면 성경에 대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성경에 여러 다양한 말씀이 있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1:1-2에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으로 말씀하신 것은 바로 구원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가지고 성경을 대합니다. 즉 신약으로 구약을 보는 것입니다. 구약이 뿌리나 나무라면 신약은 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안경으로 구약을 보면 그 의미가 보입니다. 성경해석이 난해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기 전에 큰 틀에서 그 답은 이미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이라는 것이요, 또한 그 복음의 어떤 구체적인 것에 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대 전제 하에 성경을 보면 성경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요한계시록도 신구약 성경의 눈으로 보면 열립니다.
엠메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성경에 대한 대화를 했으나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잡수시기 전에 축사하시고 저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며 그들의 눈을 열어주실 때 비로소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제자들도 성경을 보면서도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눅24:44-48에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눈을 열어주실 때 비로소 계시록이라는 복음의 메신저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성경에 대한 시각이 열릴 때 비로소 복음의 메신저가 될 수 있습니다.
8.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두루마리에 써서” 두루마리는 당시 성경을 기록하던 고급 양피지로서 두루마리는 성경을 의미하는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요한에게 본 것을 두루마리에 쓰라는 것은 네가 본 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계시록이 성경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우리가 복음의 일군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이 열립니다.
어떤 신자가 목사에게 와서 다 잘라지고 얼마 남지 않은 성경을 내놓으면서 "이것은 당신의 성경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는 "그것이 어찌 제 성경이라 하십니까?"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5년 동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목사님께서 여기는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곳마다 잘라내 버렸습니다." 그래서 뒤적거려 보니까 욥기 전도서 계시록 등 많은 곳이 잘라내어져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실재로 미국의 부흥사 무디에게 어느 목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님! 나는 4복음서 이외의 곳에서 설교하기를 단념했습니다. 나는 서간문의 전부, 거기에 구약의 전부를 방기했습니다. 다만 내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4복음서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는 얼마 가지 않아 그 복음서마저도 버리고 마침내 목사직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가 성경을 버린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하나님도 그를 버리신 것입니다.
계시록을 두루마리에 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록이 성경임을 알려주신 것이요, 두루마리에 쓰인 신구약 성경 역시 성경임을 전제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믿어야 성경이 열리고 진정한 복음증거자가 됩니다. 참고로 성경에 쓰인 작은 부분까지도 소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축자영감을 믿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리타분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축자영감을 믿어서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딤후3:16-1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9. 수신자에게 맞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11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주님은 요한에게 네가 보는 것을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2장과 3장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한 분 예수의 말씀이지만 그 내용이 각각 다릅니다. 살펴보면 그 교회의 처한 형편과 영적상태에 맞게 전달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로할 상황에서는 위로하셨고, 인정 및 칭찬할 상황에서는 칭찬하셨고, 책망해야 할 점은 책망하시고, 약속과 예언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삶을 지도해 주셨습니다. 허공을 치는 메시지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청중들에게 삶의 변화를 주려면 청중들의 피부에 와 닿는 설교여야 합니다. 필립 브룩스는 말하기를 “모든 설교자는 마땅히 설교자이기 전에 목사여야 한다.” 즉 성도들의 삶을 돌보고자 하는 인식을 가진 목사가 되지 않고는 진정한 설교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이어도 대상에 따라 메시지의 기본은 변함없지만 메시지의 양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변조해 아부해서는 안 됩니다.
10.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전해야 합니다.
11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주님은 “보내라.”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보내라는 것은 요한이 전달자임을 명시하심입니다.
여기서 의문 나는 것은 요한이 일곱 교회에 보낼 메시지가 계시록 2장과 3장에 국한 된 것인가 아니면 계시록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2-3장임은 분명하지만 계시록 전체를 배제할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전체 역시 일곱 교회에도 보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2장 3장은 수신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나머지 전체는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계시록을 완벽하게 해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기독교강요를 쓴 칼빈도 계시록은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의 전달자인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 해석서와 함께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한에게 보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계시록 원문 거기까지만 요한이 책임질 일이었습니다.
필자 역시 계시록 강해를 하면서 늘 아쉬운 것이 그것입니다. 좀 더 기본적으로 성경과 신학에 대해서 풍성한 지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더 잘 할 수 있을텐데,,, 그리고 구변과 문학적인 소질이 풍부하다면 더 정확히 잘 전달할 수가 있은텐테,,, 하는 아쉬움입니다. 이것을 외국어로 작성해서 퍼뜨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러나 제 사명은 힌트 제공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시록이 복음이라는 힌트만 해도 계시록 해석의 판도를 바꾸는 굉장한 것입니다. 나아가 신령한 면을 지도할 잘 갖추어진 영적 교과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지나치게는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차 훌륭한 학자들이 나타나 저의 미흡한 점은 버리고 제 자료에서 힌트를 얻어 더 완전하고 유익한 계시록 강해를 완성할 것을 믿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나머지는 후학에게 맡기고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 이 수준에서 전달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내라.” 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 것을 하면 무엇을 해도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거역하면 결말엔 무슨 문제가 생깁니다. 이처럼 설교를 준비한 후에 마음 깊은 중심에서 꺼리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미흡하다 생각되면 아무리 잘된 원고라도 다시한번 재고해 보면서 메시지를 완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 전도자처럼 값지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52:7-8에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했습니다. 여러분도 기도로서 도우시면 복음전도의 대열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할 수 있기 위하여 먼저 복음을 알고 체험하고 누릴 뿐 아니라 온전한 전도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약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자 예수님 (계 1:12-13) (0) | 2022.08.13 |
---|---|
주의 날 계 1:9-20 (0) | 2022.08.10 |
복음의 일군 2 (계 1:10) (0) | 2022.08.06 |
복음의 일군 1 (계 1:9) (0) | 2022.07.30 |
주님 오심의 3대 시제 (계 1:5-8) (0) | 2022.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