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에 거하는 자 요한일서 2: 1- 6
"1% 만 바뀌어도 인생이 달라진다"는 이민규씨의 글을 보면 , 미켈란젤로가 돌을 가지고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그의 조각품을 보며 감탄하면서 이렇게 반문했답니다. ‘돌덩어리를 가지고 어떻게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느냐?’ 라고 하자 미켈란젤로가 대답하기를, ‘내가 한 것이 있다면 단지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냈을 뿐입니다.고 했답니다.
미켈란젤로의 이 대답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겸손한 마음 가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또 하나는 원칙적으로 그가 만들려고 했던 작품의 형상은 이미 그 돌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름답다라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불필요한 부분들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도 담겨져 있는 줄 압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축복된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VIP다’ 라는 자존감이 넘치는 사람은 모든 삶의 부문에 있어서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것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살아 가면서 무척 힘들어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일쑤이고, 비교하면서 스스로 좌절하고 낙담하며 인생의 뒤안길을 헤메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장 귀중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좋았던 우리가 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서 멀어졌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 가운데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우리 안에 들어오거나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던 그 형상이 흐려지고 더러움으로 오염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아주 중요한 관계성 회복이 "주님과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일서 1장에서 "교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코이노니아라고 불리우는 이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케 하기 위해서 당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은혜는 결코 싸구려가 아닌 것입니다. 생명을 내어놓아야 가능한 은총의 교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과의 교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그리고 빛의 자녀로서 살아야할 우리의 교제를 이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가능케 한 은혜요, 사랑의 교제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교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회복 되었으며 십자가의 죽음은 곧 구약시대의 피의 제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의 제사가 가능한 것은 우리 모두가 죄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부정하면 두 가지 죄를 하나님 앞에 범하게 되는데, 첫째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게 되는 일입니다.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보혈의 피를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요 첫 걸음인 줄로 믿습니다.
1절 중반에 보면,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언자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말은 성경에서 성령이라는 의미로 종종 번역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옆에 있도록 부름받은 사람" 이라는 의미의 파라클레토스를 우리는 보혜사, 중보자라고 해석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지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고 의지할 때에 죄사함의 능력, 구원의 능력을 얻는 자임을 보좌 앞에서 대언해 주는 대언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도록 중보자의 역할을 성령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따른다고 그렇게 고백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사람, 예수의 제자, 곧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나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도요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이 문제를 "안다"라는 단어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분, 주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주님을 안다라고 하는 말을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반면에 4절을 보면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
주님을 안다라고 하는 이 중요한 부분을
첫 번째 설명하기를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한가, 아니하는가로 판단을 했습니다.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 계명, 그 말씀에 순종했는데, 어느 정도 순종하셨습니까? 죽기까지 순종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그 사랑의 수준은 생명을주시기까지.....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압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순종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안다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계명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교제에 핵심입니다. 그럼으로 4절에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아니한다라고 하면, 그것은 주님을 아는 일이 아니다. 주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하는 일이 참으로 피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상대방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우리는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아느냐? 내가 주님을 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야 한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행하고, 그 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을 때 주님을 안다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조금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두 번째로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9절- 11절을 보면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일 그것이 바로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라고 사도요한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좀 추상적으로 이야기 하지 말고, 좀 구체적으로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십시다. 가장 가까운 다른 사람은 아마도 아내요 남편일 거예요. 자식과 부모간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아내를 위해서, 그 남편을 위해서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말은 추상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도 인사말로 ‘형제님을 사랑합니다’. 뜨레스디아스 같은 데 가면 생전 얼굴도 못 보던 사람이 손을 잡으면서 ‘자매를 사랑합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굉장히 그게 싫어서 그것을 부담을 갖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이 나를 언제 봤다고 사랑한다고 하느냐’ 사실 맞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언제 알았다고 사랑이라는 심각한 단어를 함부로 쓰냐 그 말이예요. 그러나 그 사랑은 깊이가 있는 사랑하고는 조금 다른 인사성의 사랑이겠지요.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 이 말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그것을 실제적으로 적용 한 번 못하면서 늘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풍성함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착각합니다. 나는 사랑하고 있지. 나는 사랑하고 살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떻게 주님은 사도요한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었어요.
놀랍게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미워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하는 이 아이러니한 사실을 여러분들도 아시지요?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시면서도 머릿 속에 ‘나는 누구누구와는 상종하고 싶지 않아’ 이런 미움을 가지고 사랑의 주님,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게 얼마나 기적입니까? 어떻게 예수 안에 살면서 미움을 가지고, 미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에게도 주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하나이다 용서해 달라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까? 기적 아닙니까?
우리가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는 그런 일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로 알기 시작하면 내 안에 미움을 가지고, 주님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 못 된 것인지를 알게 되고, 우리의 가졌던 미움들이 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미움이 사라지면 그 곳에 사랑이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이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는거다. 미움은 성령이 주는 것이 아니예요. 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징이 아닙니다. 사단의 특징이요, 어두움의 특징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6절에 보면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찌니라’ 예수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주님 안에 행하는 것인데, 다름 아닌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두 가지 질문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첫째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들은 대답하셔야 합니다. 확신합니다. 긴가민가합니다. 아직 아닙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계명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답에서 확신이 되어진 분이 두 번째 질문을 들을 수 있어요. 주님을 안다고 확신할 때 그렇다면 그 분의 말씀을, 그 분의 계명을 실천하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사랑의 실천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작은 일상생활에서부터 성경이 말하잖아요. 너희들끼리도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제가 성도들간에 서로 사랑해 보라고 이야기 하면 거기도 다 이해관계가 있어요. 여러분들끼리 사랑을 표현해 보세요 그러면 거기도 자기의 성격과 성질이 나옵니다. 이왕이면 가까운 성도의 것 팔아주고, 이왕이면 가까운 성도들을 손 들어주고, 이왕이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힘을 좀 실어주세요. 그러면 자기의 이해관계가 있어요.
같은 성도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겠다고 말합니다. 언제나 판단 속에는 이해관계가 늘 끼어있어요. 그게 신앙보다, 그게 교회보다, 그게 성도보다 더 앞서 있어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가리켜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이예요. 혹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이해관계의 계산을 넘어서지 않는 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는 형제자매 일가친척이라고 하는 그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오늘 주님은 예수 안에 거하는 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 불가능한 게 아니구요. 그 사랑 그렇게 손해나는 거 아닙니다. 작지만 살 맛 나게 만들어 주고, 작지만 의욕을 북돋아주고, 작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해요. 이제 그 사랑의 이해관계를 잘라버리고, 그 사랑의 인간적인 한계를 우리가 극복해 가면서 진정한 성도로서 작은 사랑부터 실천해 가면서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평안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작은 것도 구체적으로 다가가면 실천하기 머뭇거렸던 우리였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 추상적인 개념이었고,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착각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내 이해관계가 앞서고, 내 인간적 관계가 앞섰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사랑하실 때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셨던 주님, 이제 그 주님의 사랑, 그 교제 안에 진정으로 거하기를 원하며 주님을 바로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귀한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새로운 결단의 발걸음 되게 하시고, 세상으로 나아가며 주의 뜻 이루어가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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