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 일서 1: 5- 10
오늘 본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사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이미 선언되어진 말씀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이라"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빛이신줄로 믿습니다. 그 빛 되신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다시금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선언하심으로서, 빛 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빛으로 살아야 할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선언해 놓고나서 거기에 설명을 하나 붙였습니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5절 말씀입니다. 왜 이 말씀을 붙여 놓았느냐 하면, 당시 1세기 이단사상 중에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것은 선하고 귀한 것이고, 육적인 것은 악하고 죄악된 것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육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다 배척하고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을 이루거나 자녀를 낳는 것도 별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철저한 육체적 금욕을 강조한 나머지 홀로 산 속에 들어가서 수도를 하는 것을 더 권장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육체는 죄의 도구이기에 철저하게 자기몸을 쳐서 굴복시키는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에도 무릎으로 돌계단을 기어서 올라가다보니 무릎이 깨지고 피를 흐르지만 오히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있는 중세 시대의 성당 중에는 돌계단에 무릎을 깬 핏자국들이 남아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 몸입니다. 그 몸과 마음이 허락하신 영으로 더불어서 생명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몸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품을 우리가 학대하고, 우리가 미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이 영지주의자들은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에 대해서 정의하면서, 하나님은 빛이실 뿐만 아니라 어두움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일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거 엄청난 일이지요. 사도요한은 당시 성도들에게 분명히 신앙적인 정의를 내릴 필요를 느꼈습니다.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렇게 선포해 놓고, 분명하게 붙입니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생명이라. 그에게는 사망이 없어요. 계시록에서는 사망이 없고 눈물이 없는 곳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은 생명과 죽음을 가졌고, 인간에게는 빛과 어두움의 요소가 있지만, 하나님은 빛이실 뿐만 아니라 조금도 어두움을 가지고 계시지 않아요.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오신 줄 믿습니다. 오셔서 우리에게 화목을 원하셨고, 사귐을 원하셨어요. 그런데 이게 거저 됩니까? 세상말로 공짜로 되요? 안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사귐을 위해서, 화목을 위해서 결정을 내리신 것이 목숨을 버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우리와의 사귐은 다 값비싼 생명을 거신 사귐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사귐은 이렇게 소중한 거예요. 우리 성도가 성도를 사귄다고 하는 것, 예수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소중한 만큼 그만큼 우리의 수고와 땀이 있어야 합니다.
사귐 속에서는 힘이 있습니다. 사귐 속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사귀기를 원하셨는데 궁극적으로 주님은 당신의 생명, 당신의 목숨을 던져서 우리의 사귐이 있게 하신줄 믿습니다. 그 주님의 사귐, 생명을 다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알고 나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야합니다. 순교자가 생깁니다. 내 일생 주님과 평생토록 그 길을 가겠습니다.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능케 한 교제인 줄로 믿습니다. 교제를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했던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다가갈 수 없다고 하는 문제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때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는데, 살면서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교만과 우리의 고집 때문에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설 수 없는 죄악의 모습으로 녹이 슬어 버리는 거예요. 주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계곡이 너무 깊고도 큰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건너가게 하셨다 그 말이예요.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셨다 그 말이예요.
이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죄악이 만연한 병적인 특성이 가진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깨끗함을 얻고 우리가 주님의 자녀고 서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만일, 만일, 만일, 만일, 4번이나 우리에게 단서를 말씀하셨습니다. 2가지로, 2가지로 묶을 수 있어요. 하나는 무엇입니까? ‘만일 하나님과 우리가 사귐이 있다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서 우리가 세상에서 산다면 무슨 결과가 생기는 것입니까? 8절에선 바로 그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거짓말 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그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거짓말쟁이가 될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자백하면 7절 서로 사귐이 계속 될 뿐만 아니라, 9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실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영원한 사귐을 위해서, 구원의 사귐을 위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자백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귈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제일 먼저 주님을 만나서 은혜 받으면,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하잖아요. 그 말은 깨달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고,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은혜 받고 깨달은 첫 번째 징조,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그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아, 내가 죄인이었구나’ 그래서 그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고 자백할 때 우리는 주님과 영원토록 사귐이 있는 교통이 있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빛이신 줄로 믿습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 그 주님께서 우리와의 사귐을 위해서 생명을 거셨고, 그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제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빛으로 살기를 원하셨어요. 빛 되신 하나님, 빛 되신 주님, 그리고 빛으로 살기를 원하는 우리의 모습,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빛으로서의 삶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고, 빛으로써 살면서 이 땅에서 주님을 증거하시는 평안의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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