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지 않는 은혜 고후6:1-2, 창6:1-12
어느 예수 잘 믿는 집사님 가게에 신사 한 분이 찾아와서 차안에서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였다고 말하면서 돈을 십 만원만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꼭 갚아 드리겠으며 이자는 많이 처서 갚아 드리겠으니 빌려 달라는 것입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빌려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못한다고 말하자 신사는 자기가 끼고 있던 두툼한 금반지를 빼서 주면서 정 못 믿게거든 이 반지를 간직하고 있다가 약속한 날에 오지 않으면 이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처분해도 이유를 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금반지를 받고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날이 다 되어 가는데도 오지를 않습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가자 은근히 마음속에 그 사람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속으로 기뻐했다고 합니다. 열흘이 지나도 오지를 않자 처분하기로 결심하고 자기친구가 경영하는 금은방을 찾아가서 금반지를 내놓으면서 처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그 금반지를 살펴보고 쇠 덩어리에 금물을 입힌 가짜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가짜를 가지고 멸칠 동안 기뻐했으나 그것이 진짜가 아닌 것이 드러났을 때는 참으로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짜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짜 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가짜 은혜는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구별하지 않으면 속고 마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진 자들도 내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자기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열심을 내지만 주님 앞에 섯을 때 속은 것을 알고 탄식을 해도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헛되지 않는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헛되지 않는 은혜는,
1.은혜의 가치를 바로 알아 소중히 간직하는 은혜입니다.
신약 본문 고후6:1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했습니다. 여기 은혜(χαριs)는 대가 없이 받은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4:4-6에 보면 일한 자에게 품삯을 주면 은혜가 아니지만 일하지 않은 자에게 품삯을 주면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선물이라고도 합니다. (엡2:8). 행위로나 능력으로나 자격으로 볼 때 받을 수 없는 조건인데 무엇을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롬3:23-24).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속죄함은 받은 것,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 구원 받아 영원한 하늘 기업의 상속자자가 된 것, 성경을 깨달아 믿음을 가지게 된 것 등 모두 은혜입니다.
꼭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의 환경과 한 일과 능력에 비해 하나님의 섭리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는 거저 받은 것이기에 자칫 은혜를 하찮게 여기고 소홀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 가운데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십자가 희생과 크신 자비와 긍휼이 담겨 있는 너무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귀한 줄 알고 은혜 주신 하나님 중심으로 은혜를 사모하여 살 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부산에 보일러 기술자인 한 장로님이 방직 공장에서 보일러 고장이 나 고쳐 달라는 청원이 있었습니다. 월요일에 구두로 계약하면서 화요일에 50만 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장로님의 교회는 부흥 사경회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물어 보니 목사님이 강사님께 물어 보라고 해서 강사님께 물어 보니 "자기 집에 잔치 베풀어 놓고 주인이 없으면 무엇이 되겠느냐"고 해서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방직 회사에서는 나라에서 유능한 기술자가 가지 않으니까 대접이 소홀해서 그런 줄 알고 간사회를 열어 100만 원을 주기로 결정하고 목요일 날 전화를 했습니다. 금요일 날에 100만 원을 줄 테니 와서 고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이 사경회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본문 1절에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공허한 방법으로 받음으로 그것을 헛되게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공기를 주시는 것처럼 은혜의 기회도 동일하게 주십니다. 그러나 개인 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축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결단과 선택 그리고 끝까지 은혜의 그릇인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거절하여 은혜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은혜를 받았으나 그 은혜를 소홀히 여겨 은혜를 쏟아 버리고, 은혜 받지 않은 자처럼 살아간다면 그는 은혜를 헛되이 받은 자가 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영육을 더럽게 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잘 간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답게 유익한 열매를 맺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 중에서 노력과 수고를 하여 큰 업적을 이룩하였으나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지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여서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자기를 지키는 일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어렵고 때로는 힘든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은혜를 받고 자기를 지키지 못하여 넘어진 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삼손이 그랬습니다. *발람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가롯 유다가 그랬습니다. *데마가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은 성도는 나는 누구인가? 주님 앞에 나의 존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러면 은혜 받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왜 나는 그 일을 해야만 하는가? 스스로의 자문자답이 필요합니다.
또한 은혜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교사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므로 현혹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은혜 받은 성도가 진리의 복음을 떠나 거짓 믿음에 속아 다른 방향으로 열심을 내면 낼수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거슬리는 자가 됩니다. 그런 자들은 방향 없이 달려가는 자와 같으며, 허공을 치는 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고전 9:26). 은혜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그 뿌리를 내리며 진리를 사수하면서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미혹 된 자들은 은혜를 헛되이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은혜의 가치를 바로 알아 은혜를 소중히 여기며 은혜에 참예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세속을 거슬려 구별된 삶을 살게 하는 은혜입니다.
구약 본문 창6:8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고 했습니다. 노아의 시대는 심히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본문 창6:2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계보를 이은 아벨과 셋의 후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불신앙의 계보를 잇는 가인의 후손들과 연합하여 다 같이 타락하여 부패해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창6:5-6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셨는데 이처럼 노아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요, 사람의 마음이 악하여 하나님을 탄식케 하여 근심케 한 시대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악함과 세상의 죄악은 하나님을 그처럼 슬프게 했고 탄식케 했고 진노 하시게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과 사람을 처음 창조하신 때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좋아하셨다는 말씀이 창세기 1장에서 7번이나 나옵니다. (1:4,10,18,25,31).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죄악이란 이처럼 흉악한 것입니다. 노아 시대는 그러한 죄악이 세상에 차고 넘쳤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고 조건은 눈에 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내가 될 여인들의 인격이나 신앙 그리고 가정환경과 가정교육은 제쳐 두고 단순히 아름답고 매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들을 아내로 맞아 드렸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시해야 할 것은 겉보다는 내면세계가, 조건보다는 신앙이 우선 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만으로 결혼생활이 완성되거나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은 합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리고 살아가기에 필요한 조건들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나 인격은 제쳐놓고 돈 많은 사람이니까, 잘 생기고 예쁘니까, 높은 사람의 아들이니까, 재벌 집 딸이니까 하는 식으로 겉만 보고 결혼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선택에는 후회가 따르게 됩니다.
억만장자 그리스의 선박 왕 오나시스가 69세 때 무대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마리아 칼라스에게 반해서 그녀와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다가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8년이 되기 전에 주부로서 너무 모자라고 권태가 나서 그녀와 이혼하고, 그 후 고 케네디 대통령의 아내였던 재클린과 살면 얼마나 해복할까 생각하고 결혼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재클린과 결혼 한지 일주일도 안 되어 ‘내가 실수 했다.’ 생각하고 이혼하려 했지만 엄청난 위자료를 요구하니 이혼도 못했습니다.
재클린은 한 달에 24억 원이나 되는 돈을 펑펑 써대니 화가 나서 혈압이 올라갑니다. 그의 아들마저 비행기 사고로 죽었습니다. 끝까지 이혼에 합의 않던 재클린은 오나시스의 엄청난 유산을 거의 다 찾지 했습니다. 오나시스는 죽을 때 ‘나는 인생을 헛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쓰레기로 던지고 간다.’하며 가슴을 치며 후회 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악의 길로 달려가는 암흑한 때에도 노아와 그의 가족은 이러한 세속적인 악을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비결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하늘의 별같이 더욱 빛나게 되었고,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탄식케 하는 대상이 되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와 그의 가족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시대를 심판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기쁨이 되었던 의인 노아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세속을 거슬러 구별된 성결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믿음과 순종으로 준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입니다.
신약 본문 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 '은혜 받을 만한 때'와 '구원의 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어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의 종살이로 고난당할 때 모세를 통해 구원해 주신 것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처럼 택한 자들에게 은혜 주시어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다가 구원의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1:9에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 요20:31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 기업의 상속자가 됩니다. 본문 9절에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의인이란 전혀 죄가 없는 자라는 말이 아니라 타락하고 완악한 시대에서 그래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경건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해주셨다는 것으로, 신앙적인 측면에서 행위 완전한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 여긴바 된 의인(창15:6)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11:7)고 했습니다.
노아 당시 모든 사람들은 육신의 일에 몰두 하면서 아예 하나님을 인정 하지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 하면서 명하시는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9절하에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길을 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시면 나도 가고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면 나도 머물고, 하나님이 하신 것 나도 하므로 명하시는 말씀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홍수 이전에 비 온 기록도 없는데, 엄청 큰 배를 만들라 명하셨는데 순종했습니다. 14-16절에 방주는 크기가 길이가 300 규빗, 1 규빗은 45cm 정도니 135m, 넓이 50규빗 22.5m, 높이가 30규빗 13.5m로 대략 2만 톤 급으로, 세계 최초의 엄청난 크기의 배를 명령대로 순종하여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배를 믿음 없이 지을 수가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에게 미친 사람 취급당해도 방주를 만든 것은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그러한 일을 시행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입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구원에 이르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노아처럼 믿음으로 굳게 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비웃어도 소망의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세상이 악하고 더럽다고 우리까지 악하고 더러워질 수 없습니다. 세상은 속고 속여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하셨으니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 입어 구원에 이르게 될 줄 믿습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 중에 예비한 방주 안에서 그와 그 가족, 방주 안에 들어간 모든 생명이 구원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소돔 고모라 성이 멸망 중에서도 천사의 말을 듣고 피한 롯의 가족은 구원 받았습니다.(창19:) 여리고성 멸망 중에도 믿음으로 라합과 가족은 구원 받았습니다.(수6) 하나님께 은혜 입은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방주를 예비하라 멸망시킨다고 미리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은혜 입은 자 인내할 수 있습니다. 120년 동안 그 큰 배를 만들었던 것에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물 심판에서 구원을 얻었던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께서 제시 하신 유일한 방주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예비하였고 방주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구원의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믿는 자들에게 예비하신 구원 방주인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행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도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구원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구원 방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헛되지 않는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헛되지 않는 은혜는,
◒.은혜의 가치를 바로 알아 소중히 간직하는 은혜입니다.
◒.세속을 거슬려 구별된 삶을 살게 하는 은혜입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준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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