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생명으로 사는 자 요3:1-13, 고후4:11-18
영국의 유명한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찰리 채플린이 하루는 많은 관객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탈리아의 유명한 가곡 아리아를 유명한 테너 가수인 카루소처럼 멋있게 불렀습니다. 그러자 한 손님이 "그렇게도 노래도 잘 부르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가수를 해도 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채플린은 ‘저는 노래를 못 부릅니다. 다만 카루소의 음성을 흉내 낸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남의 흉내를 잘 내는 채플린이 어느 날 휴가차 변장을 하고 남몰래 시골여행을 하던 중 마침 그곳에서는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채플린은 호기심이 생겨서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 대회에 출전하여 열심히 연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심사결과 채플린은 3등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채플린보다 더 진짜 채플린처럼 보이는 가짜 채플린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짜보다 가짜가 더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짜 그리스도인이 진짜 그리스도인보다도 더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 역시 참 신앙의 세계를 알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고, 바리새인 이였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말은 구별하여 따로 세운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특별히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을 따로 세워서 바리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에는 6000명 정도의 바리새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었지만 실상은 거듭나 참 생명으로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가짜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짜 신앙으로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런 가짜 신앙에 참 평안이나 소망이 있을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고민을 하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참 생명으로 사는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참 생명으로 사는 자는,
1.거듭남의 신비한 은혜를 통해 새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삽니다.
예수님은 복음서 본문 요3:3에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의 바리새인 이였지만 이 비밀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즉 니고데모는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거듭남의 비밀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수가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수가 있아옵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고 다시 대답하셨습니다. 즉 거듭남은 육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다시 거듭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원어로는 아노텐(anothen)입니다. ‘근본적으로,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You must be born again’이라 번역했는데, Born 은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Again 이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남은 육으로 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영으로 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하고 부패해진 마음, 망가진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나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과 영혼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 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죄로 망가진 마음은 옥토와 같이 변화를 받게 되고,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거듭난 은혜를 받게 되면 마음의 주인이 바뀌게 됩니다. 나의 마음을 누가 지배하고 있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도둑이 살고 있으면 도둑의 소굴이 되고, 비록 초라한 집이라도 왕이 계시면 왕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는 나보다 더 큰 자가 들어와야 합니다. 또한 나의 마음을 멸망의 길로 이끌고 가는 사탄보다도 더 크고 강한 자가 들어와야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면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시고 나의 주인이 됩니다. 그 때 맺는 열매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자리에서 같은 물을 먹어도 뱀이 먹으면 독이 나오고, 양이 먹으면 젖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같은 설교를 들어도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은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비방하고 대적하는 자가 되지만, 거듭난 사람은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자라며, 감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를 위해 충성하며,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됩니다.
노르웨이는 200년 전만해도 가장 가난하고, 자유가 없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문맹이었습니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고, 문맹이 없으며, 자유를 가장 많이 누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구 비례 당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나라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는 농장에서 일하던 스무 살 청년 한스 넬슨 허그(Hans Nielson Hauge)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성경을 건네주면서 “이것은 삶의 모든 분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네.” 청년은 그것을 실천에 옮겼고 거듭난 후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 일로 17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그로 인해 건강을 잃고 죽게 되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 사람에게 임한 거듭남이 개인을 넘어 한 나라를 변화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허그 부흥(Hauge Revival)’ 이라고 합니다. 이 거듭남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2.더욱 풍성한 생명에 이르기를 소망하며 삽니다.
서신서 본문 고후4:11-12에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했습니다.
거듭난 성도 안에 주님이 거하여 사십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닮고 예수를 위한 삶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하며 사는 성도에게는 주님의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10:10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썩어질 육의 생명이 아니라 ‘영적 참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소유한 사람에게 구원이 있고, 영생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 본문 고후4:7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사람은 새것을 좋아한다. 옷도 새것을 좋아하고 차도 새것을 좋아하고 집도 새것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세상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건은 세상에 속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낡아집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름다움과 젊음을 유지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 변하기 마련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요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6-1900)의 「도리안 그래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도리안 그레이는 평생을 외형적인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살면 행복할 것 같아 그렇게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의 소원대로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의 초상화가 대신 나이를 먹어갑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젊고 아름다운 용모를 유지하는 도리안 그래이를 부러워하고 칭송하지만 자기의 서재에서 추하게 늙어가는 자신의 초상을 혼자서 확인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그는 분을 삭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일그러지고 추하게 변한 자기의 초상을 칼로 찌르고 또 찌릅니다. 그랬더니, 초상은 변하여 그의 젊을 때의 미남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대신에 자신은 가슴에 칼을 꽂은 채 초상화의 죄에 찌들어 늙고 일그러지고 추한 모습으로 바뀌면서 죽어갑니다. 도리안 그래이는 겉 사람으로 영원히 아름답고 젊은 모습을 간직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겉 사람이 갈수록 낡아지고, 약해지고, 후패해지는 것을 막을 장사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 거듭나 새사람이 된 바울 사도는 본문 고후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 보배이신 주님을 모신 몸이 되면 그 삶이 귀하게 변화됩니다. 주님 때문에 사는 보람이 나타나게 됩니다. 거듭난 자라도 육의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월이 가면서 이마에 주름이 많이 생기게 되지만 그 주름은 존경받는 인생 계급장처럼 보입니다. 은혜 받고 웃는 그 주름진 얼굴이 숭고하고 아름답습니다. 쪼글 거리고 거칠어진 손을 보아도 주님을 본받아 산 삶을 통해 사랑으로 섬기신 주님의 손을 보듯 존경스럽습니다. 머리에 은빛으로 덮여지는 백발은 막을 수 없지만 그 백발은 하나님께서 씌우시는 영광의 면류관처럼 여겨집니다. 잠 20:29에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했습니다. 모세는 그의 나이 80살에도 자기 백성에 대한 소명을 받고 120세에 자기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아브라함도 75세에 하나님이 주신 부푼 약속의 꿈을 품고 고향을 떠나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었고, 복의 근원이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갈렙은 85세지만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담대하게 전쟁에 임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믿음으로 극복하고 노년에 새로운 가문과 복을 이루어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성도 안에 예수 생명으로 충만하면 육신의 젊음을 간직하는 대신에 그의 속은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성령 충만한 은혜와 감사와 헌신과 충성으로, 하늘 소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가지고 사는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한 주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장래의 소망을 바라보며 삽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된 이후 일생 주를 위해 일하면서 매도 많이 맞고, 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으면서 오랜 기간 감옥살이 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낙심하지 않은 것은 하늘에 쌓아둔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속에 은혜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떤 고난이 올지라도 낙심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장래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고후4:17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했습니다. 여기 환난을 ‘잠시 받는 것’이라, 그리고 ‘경한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세상에서 받는 고난이 너무 크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잠시 받는 고난은 하늘에서 받을 영원한 영광을 얻는 것에 비하면 짧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난은 하늘에서 받을 영광에 비하면 지극히 작고 가벼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8:17-18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고난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않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난 없이는 영광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고난이 온다 해도 그 고난이 비교할 수 없는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담대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세상의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돌아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패오 (σκοπεω)는 '주목하다' '소망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주목하고 소망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내세적인 것이었습니다. 육신적인 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지만 영적인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바울은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인정받는 데 있었습니다. 잠깐 있다가 썩어져 없어질 물질과 육체와 재능과 시간과 열정 등을 주와 복음을 위해 의의 도구로 사용할 때 상급과 면류관이 예비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담대한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남편을 병으로 잃고 외아들마저 교통사고로 잃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엄청난 빚까지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단 5분만이라도 하늘나라를 보여주십시오. 그리하면 제가 이 고통을 견디겠나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그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네게 하늘나라를 보여주면 너는 지상에서 단 일초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게 된다. 고통을 참고 견뎌라. 하늘나라는 반드시 있단다." 이것이 위로가 되어 그분은 소망 중에 그에게 임한 고통을 잘 견디었다고 합니다.
거듭난 하늘 백성이 되었다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현재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은 다만 잠시뿐이요 지나갈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8:24-25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히11:24-26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잠깐이면 지나가는 현재의 세상에 속한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상과 기업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고난을 피할 길이 없지만 그 고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장차 받을 하늘 기업과 상급과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참 생명으로 사는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참 생명으로 사는 자는,
◆.거듭남의 신비한 은혜를 통해 새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삽니다.
◆.더욱 풍성한 생명에 이르기를 소망하며 삽니다.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장래의 소망을 바라보며 삽니다. 아멘.
<2019. 4. 3. 호현낙선. http://cafe.daum.net/sungsansarang>
'신약 > 고린도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헛되지 않는 은혜 고후6:1-2 (0) | 2020.05.22 |
---|---|
약점을 강점으로 만드는 믿음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0) | 2019.08.23 |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고후5:15-21. 요15:1-12 (0) | 2018.08.03 |
새 시대의 새 믿음 (고후 3:1-18) (0) | 2018.01.06 |
존귀한 신앙인의 모습 고후4장7-15 시52:1-9, (0) | 2016.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