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직분 (아5장14-16)
요 약
예수님은 우리의 자랑이시오 참된 만족이시다. 먼저 자상하사 우리를 변함없이 섭리적 사랑으로 돌보시며, 전능하시고 강하사 우리에게 능력을 주사 이기게 하시고, 겸손하사 우리에게 아버지 뜻을 순종할 수 있게 하시며, 무흠하사 우리의 온전한 성화가 되어 주시며, 임재하사 언제든지 외롭지 않게 하시고, 가까이 하사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붙들어 주신다. 이 귀한 은혜를 아는 성도는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리지 않을 수 없다.
설 명
1. 배 경
⇒ 계속하여 성생활과 관련된 남편 자랑이다.
2. 적 용
(진단) 모든 면에서 구비된 부부이건만 참 만족이 없습니까?
(해결) 참 만족은 하나님께로 오니 은혜 생활하십시오.
3. 나의 만족이신 예수님
7) 돌보아 주시는 예수님
14절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 애무하는 남편의 자상한 손길을 암시한다.
8) 전능하시고 강하신 예수님
14절 하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듯 하구나”
: 남편의 강한 남근을 묘사한 은유이다.
9) 아버지 뜻을 순종하신 예수님
15절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 남편의 지속성에 대한 은유이다.
10)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15절 하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 남편의 상위체위에 대한 은유이다.
11) 임재하시는 예수님
16절 “입이 심히 다니”
: 오르가즘에 이끔에 관한 은유이다.
12) 끝까지 붙드시는 예수님
16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 마지막 뜨거운 키스와 포옹을 묘사한다.
아가 5:14-16
14 (술람미)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 하구나
15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16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원 문
14 וידי 야다우(그의 손은, 그의 팔은)
בהז ילילג 겔리레 자하브(금팔찌와 같도다) םיאלממ 메물라임(채워있는)
שׁישׁרתב 발타르쉬쉬(보석으로) ויעמ 메아우(그의 몸은)
ןשׁ תשׁע 에쉬트 쉔(상아 판과 같도다)
םיריפש תפלעמ 메울레페트 샆피림(사파이어로 덮여있는)
15 ויקושׁ 쇼카우(그의 다리는) שׁשׁ ידומע 암무데 쉐쉬(설화석과 같도다)
םידסימ 메유사딤(세운) זפ־ינדא־לע 알 아드네 파즈(금 받침 위에)
והארמ 마르에후(그의 외모는) ןונבלכ 칼레바논(레바논 같도다)
רוחב 바후르(선택된) םיזראכ 카라아짐(백향목 같이)
16 וכח ‘힠코(그의 입은, 그의 말은)
םיקתממ 맘타킴(심히 달도다) ולכו 웨쿨로(그리고 그의 모든 것이)
םידמחמ 마하마딤(사랑스럽도다) ידוד הז 제 도디(이는 내 사랑이요)
יער הזו 웨제 레이(내 친구로다)
םלשׁורי תונב 베노트 예루솰라임(예루살렘의 딸들아)
스 토 리
그 뿐 아니라
나의 남편은 늘 자상하고
부드러운 손길로서 나를 애무하며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힘의
남근의 움직임과
님의 아늑한 다리는
나를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그 후에도 다정스런
키스와 포옹으로서 나를 외롭게 버려 두지 않는단다.
그래서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애인이요 친한 친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강 해)
지난 시간에 술람미의 남편 자랑 6가지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서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즉 예수님은 나의 구주, 예수님은 나의 왕, 예수님은 나의 생명, 예수님은 선하시고 온유하심과 사랑과 친절로 대하여 주심, 그리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 속에는 죄 사함과 하나님 나라와 성령과 사랑과 온유와 말씀 등 여러 복된 요소가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나머지 6가지를 마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7. 섭리적인 사랑의 예수님으로 만족합니다.
14절에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했습니다.
여기 ‘황옥’은 (τοπαζιοξ 토파지온)으로 다양한 색조를 띠는 반투명 또는 투명한 분광체의 수정에서 발견되는 광물로 대단히 귀한 보석이며 제사장의 흉배에 붙여졌고(출28:17, 39:10) 두로 왕의 치장품이었으며(겔28:13) 천성의 아홉 번째의 기초석으로 쓰였던 보석으로(계21:20) 섬세하고 부드러운 색조의 보석입니다. 그러니까 자상하고 따스하며 돌보거나 만들어내는데 뛰어난 남편의 손길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 손길은 단지 재주 있는 손길이 아니라 부부생활에서 아내를 애무하는 자상한 손길입니다.
그런데 그 손길은 구체적으로 황금 노리개와 같은 부드럽게 만지며 애무하는 손길입니다. ‘황금 노리개’(בהז ילילג 겔리레 자하브)를 KJV는 ‘금가락지’(gold rings)로 NIV와 NEB는 ‘금 막대기’(rods of gold)로 번역되었는데, 황옥이 손에 대한 묘사라면(Keil and Delitzach, Redford) 황금 노리게는 팔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는 손과 팔을 이용하여 아내를 황금노리개 만지듯 애무함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남편이 손길을 통해 취하는 만족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애무는 아내를 위한 최선의 배려이기도 합니다. 탈무드에도 남자는 눈으로 범죄하기 쉽고 여자는 접촉으로 범죄하기 쉽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원하고 아내는 남편의 자상한 애무를 요구합니다. 이토록 배려하는 남편 솔로몬으로 인해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아내의 무관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부생활에서 아내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령한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섭리적인 손길을 상징합니다. 마치 ‘팔’이 권세의 상징이며(창49:24, 시77:15, 사51:9, 53:1) 황금 노리개가 통치자가 쥔 권세의 상징인 금홀(Golden Scepter)을 암시하듯(민24:17, 시45:6, 시125:3, 에5:2) 예수님의 섭리는 전능의 손길로서 아무도 막지 못할 강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섭리는 참으로 완전하고 섬세한 것이어서 한 사람 한 사람 머리털 하나 까지도 넓게는 천체에서 좁게는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영육 간에 온전히 그의 손길로 섭리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롬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안심하고 교훈을 깨달으며 만사를 감사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이러한 섭리의 주님을 섬기면서도 불안해하고 불만을 갖는 것은 믿음 부족입니다.
8. 예수님은 전능하시고 강하사 능력의 주 이십니다.
14절 하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 하구나” 했습니다.
여기 두 종류의 귀한 물질이 나오는데 하나는 부드럽고 다른 하나는 강한 재질입니다. 남편에게도 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남근입니다. 아로새긴 상아(ןש 쉔)는 길면서도 그 색깔과 재질의 부드러움과 무늬결의 곱습니다. 이 상아를 아로새긴 조각품에 비긴 것은 이스라엘 남자의 특징인 할례와 충분한 발기를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모양일지 상상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상아에 입혀진 ‘청옥’은 (ריפס 싸피르)로 사파이어 즉 남보석으로 모양은 일반적으로 투명 혹은 반투명의 푸른빛을 띤 것으로 가공이 어려울 만큼 그 강도가 몹시 강한 보석입니다. 이 표현은 일단 발기되면 억제하기 어려운 강한 정력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염려했던 남편의 문제는 사실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신령한 관점에서 전능하시고 강하신 우리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은 여기 상아가 희생을 의미하듯 십자가 희생과, 청옥이 강함이듯 모든 것을 다 이기신 부활로서 나타나셨습니다. 고전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능력은 홍해를 가른 것도 해를 멈추게 하심도 아니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으심이요 그 공로를 성령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어 변화를 받게 하심입니다(갈6:14). 그래서 성경에서 크다는 것은 물리적인 큼이 아니라 항상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죽으심과 부활이 적용됨을 봅니다. 그래서 옛사람은 십자가에 사라지고 새 인격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이 성령의 역사하심은 얼마나 강하든지 일단 나타나면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2-24) 하신 대로됩니다. 그래서 자동으로 이겨지는 놀라움을 경험합니다. 이 강하시고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이 있는데 어찌 참된 신자라면 참된 만족이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루신 복음의 말씀에 견고히 설 뿐 아니라 항상 성령 충만함에 거하도록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9.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신 주님 때문에 우리가 만족을 얻습니다.
15절에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했습니다.
여기 ‘정금’은 신성의 상징이요(출25:11, 17, 골2:9) 완전한 선과 존귀와 아름다움의 상징이며(유대인 주석가 C. D. Ginsburg) 변치 않는 믿음의 상징입니다(벧전1:7). 그런데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이란 그만큼 귀한 기둥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화반석 기둥이 이 정금 받침으로 인해 더욱 존귀해졌습니다. 화반석 기둥은 매끄럽게 잘 다듬은 기둥입니다. ‘화반석’(שׁשׁ 쉐쉐)은 여러 성경에서 ‘대리석’(NIV, NEB) 또는 ‘설화석고’(RSV)로 번역된 것으로 이 대리석은 곱고 아름다워 건축재료로 잘 쓰였으며(대상29:1, 에1:6) 이 돌은 당시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의 기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헤롯 성전도 대리석으로 꾸몄는데 그 무늬가 아름다워 다른 재료를 덧입히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을 솔로몬 왕국에 적용한다면 신정에 기초한 견고한 나라를 상징합니다. 부부생활에 적용한다면 일반적으로 남편의 대퇴부를 비롯한 다리의 활용을 은유적으로 묘사함처럼 보입니다. 이는 남편의 상위체위를 전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정금 받침은 기둥을 보장하는 것이요 다리는 행함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남편의 성의 쉽게 시들지 않는 지속성을 가리킵니다. 충분히 발기가 이루어졌다해도 지속성이 없으면 실패합니다. 남편의 조루증은 부부생활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남자가 아내의 협조 없이 상위체위에서 3분을 지속한다면 정상입니다. 이 수준이라면 아내의 협조가 있다면 10-20분 안팎까지 지속시켜 아내가 오르가즘에 도달하도록 연장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측면에서 이를 예수님에게 적용한다면 다리는 행함의 상징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함을 가리킵니다. 이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함은 마치 화반석의 아름답고 견고한 것처럼 온전히 순종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탄생도 그의 말씀도 그의 표적도 그의 죽으심도 모두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셨습니다. 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이 얼마나 아버지를 기쁘게 하셨는지 탄생 시에도 세례 시에도 변화 산에서도 운명하실 때에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징조와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행하신 주님 때문에 우리가 만족한 삶을 얻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 율법의 요구대로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짐이 곧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으로 살아짐에 늘 순종하십시오. 요8:12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셨고, 마11:28-30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할 것입니다.
10. 높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참 만족을 얻습니다.
15절 하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했습니다.
여기 ‘형상’(הארמ 마르에)은 ‘외모’(NIV, RSV, AV, KJV)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그의 ‘전체적인 모습’을 뜻합니다(그랜드종합주석, 강병도). 그러니까 부부생활의 묘사니까 이 묘사는 아내가 남편의 몸 전체를 보고 있는 상태 즉 남편의 상위체위를 시사합니다. 그런데 “레바논 같고” 라고 했습니다. ‘레바논’(ןונבל 레바논)은 ‘하얀 산’이란 뜻으로 해발 2,000m 이상인 높은 산으로 남편의 몸이 지금 자기의 위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에서 ‘백향목’(זרא 에레즈)이 구약에서 70회 이상 언급된 나무로 나무중의 나무이며(겔31:8) 식물계의 대표요(왕상4:33) 내구성이 강하고 굵고 곧으며 향기가 좋고 나무가 30m 이상으로 거대하며 가지가 수평으로 뻗어 그 아름다움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솔로몬의 수려한 육체미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향기가 나오면 이것을 부부생활에서 만족이나 쾌감을 가리킵니다. 이는 남편의 상위체위를 통한 술람미의 시각에 완전히 노출된 남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7장에 가면 아내인 술람미가 남편을 본 받아 상위체위를 갖습니다. 이 시각적인 쾌감은 남편이나 아내나 마찬가지로 마음의 성감대를 자극하기 충분합니다. 그러나 상위체위를 묘사함은 서로 다릅니다. 술람미는 남편을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다고 말합니다. 이는 남편의 레바논 산맥처럼 생긴 근육질의 육체미와 백향목과 같은 우람함을 뜻합니다. 특히 레바논은 술람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즉 술람미의 상위체위의 남편을 보는 시각은 애정과 아울러 믿음직한 안도감을 느낌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상위체위의 아내를 보는 시각은 종려나무와 같고 포도송이와 같이 신비롭고 풍요로우며 아기자기한 것입니다(아7:7-8).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술람미는 아직 아내의 상위체위를 모르고 있습니다. 남편의 상위체위는 정복감을 느낄 수 있는 반면 쉽게 끝내기 쉬운 체위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상위체위에 맡기지 말고 체위의 변동과 주도권을 늘 변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남편이고 볼 때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역시 술람미의 잘못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이 레바논의 백향목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영광을 암시합니다. 빌2:9-11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골3:1-3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의 주소는 하나님 우편에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에 서서 천상에 베풀어 놓으신 축복된 환경을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누리십시오. 그러니까 이제는 예수님 권세 내 권세, 예수 영광 내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 자랑 앞에 사단도 물러가고 맙니다.
11. 임재하시는 예수님으로 참 만족을 얻습니다.
16절에 “입이 심히 다니” 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입맞춤의 달콤함이나 입에서 나오는 교훈의 은혜로움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 역시 부부생활을 묘사함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입은 7:9에서 그러하듯 아내의 성기를 상징한 은유입니다. 그러니까 ‘입이 달다’는 뜻은 남편의 이러한 지식과 배려에 넘치는 테크닉으로 말미암아 오르가즘의 극치에 오르게 됨입니다. 이 극치를 위해서 그 동안 여러 가지 테크닉의 배려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도록 남편이 최선을 다했을 뿐 아내의 협조가 부족함으로 아직 만족할만한 지점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술람미의 무지로 인한 일관된 피동적인 자세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신체적인 리듬이 깨여 그 갈망을 감당하지 못해 남편을 찾고 찾지만 이미 남편은 도울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남편에게만 문제가 있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녀들의 질문을 통해 남편 자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동안 문제가 남편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술람미의 남편 묘사를 통해서 우리는 남편의 구체적인 테크닉을 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본문의 12단계의 과정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시 신령한 관점에서 보면 앞 대지에서 하늘까지 높게 되신 승천의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다면 여기서는 이제 성령 강림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한 온전한 임재하심을 가리킵니다. 이 임재 의식은 성도에게 지극한 만족을 줍니다. 요14:16-20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습니다. 이 임재의 행복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지고한 것입니다. 이는 입이 심히 달다 했듯이 단지 임재 만이 아니라 임재 의식까지를 가리킵니다. 이 때 누리는 성도의 만족은 큽니다. 그러므로 이 임재 의식이 영적 생활의 절정인 것입니다.
12.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견인의 은총으로 우리는 만족합니다.
16절에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했습니다.
이는 총체적이며 결론적인 평가로 사랑스럽지 않음이 없다는 자랑입니다. 그런데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란 정사를 끝내고 행복감을 묘사함입니다. 그리고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라는 것은 마친 후에도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마감의 키스와 포옹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생활의 시작은 나의 누이에서 시작하여 아내를 거쳐 친구에서 끝이 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생략함으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서로에게 상처만 안겨줍니다. 즉 누이의 과정은 조용히 인격적으로 대화하며 가까워지는 과정이라면 아내의 과정은 본론을 가리키고 친구는 키스와 포옹으로 견고히 붙들어 줌으로 마감함을 가리킵니다.
신령한 관점에서 이처럼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견인의 은총으로 붙드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요10:28-29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롬8:38-39에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은총이 있기에 가시라도 허락하셔서 주님의 은혜가 항상 족하도록 능력의 장막으로 늘 머물게 만드십니다. 이 만족한 은혜를 매일 같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편 자랑은 체험한 아내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체험한 성도들만이 예수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을 얼마나 자랑할 수 있습니까? 아직도 영적 생활의 깊은 체험이 없다면 안 됩니다. 우리 신랑 되신 주님과의 아름다운 깊은 영적인 체험이 있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혼의 만족을 누리시고 그 사랑을 온 세상에 자랑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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